공개 사과의 기술 -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과는 무엇이 다른가
에드윈 L. 바티스텔라 지음, 김상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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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과’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보면, 달콤할 것이라는 느낌과 쓸 것 같다는 느낌이 차례로 떠오릅니다. 우선은 달콤하거나 때로는 새콤한 사과를 먹고 싶다는 생각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통스럽게 고민했던 순간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느낌이 쓴 사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 공통적일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1949년에 제작된 서부영화 <황색 리본을 한 여자>에 출연한 영화배우 존 웨인이 ‘이봐, 절대 사과하지 마. 그건 약하다는 표시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 주인공 브리틀스 대위를 연기한데서 ‘존 웨인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변해서 이제 진정한 사과는 “패자의 변명이 아닌 리더의 가장 쿨하고 현명한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사과가 왜 현명한 전략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꽤 오래 전에 아론 아자르가 쓴 <사과 솔루션; http://blog.joins.com/yang412/12867010>을 [북소리]에서 소개하면서 다룬 바 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사과’란 “일방, 즉 가해한 측이 자기 잘못이나 그가 얻게 된 원성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를 본 상대에게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함으로써 양측 당사자들이 조우하는 것”(48쪽)이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하지만 사과에 사용되는 단어와 상황에 따라서는 동정이나 유감의 뜻으로 변질되거나 오히려 사과의 의미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라는 제 생각을 적었습니다. 사과의 뜻을 제대로 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드윈 바티스텔라교수의 <공개 사과의 기술>은 이런 고민을 더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는 미국 오리건 주 애쉴랜드에 있는 서던오리건대학의 인문학부에서 언어의 형태적 현저성, 태도, 구문론 등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입니다. 사과편지 쓰는 것을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사과의 뜻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사과에 사용되는 언어, 철학, 사회학 등을 검토하여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사과의 바탕에 깔려 있는 원칙을 이해함으로써 사과를 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자가 서문에 요약한 이 책의 얼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의 말미에는 서너개의 대표적 사례를 정리하여 책 읽는 이가 논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모두 36개의 사례들은 사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장에서는 사과의 절차와 사과에 사용된 언어를 소개하고, 5~6장에서는 고백과 변명에 초점을 맞추며, 7~8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사과와 국제적 사과를 다루었습니다. 9~10장은 사과의 동기와 대중문화에 나타난 사과를 논합니다.


저자는 우선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빈 고프먼이 <공생적 관계>에 적은 ‘우리는 사과할 때 자신을 둘로 분리한 뒤 과거의 자신을 던져버린다’라는 사과의 이론을 인용합니다. 고프먼은 “사과는 비난받아 마땅한 자신과, 한 발 물러서서 비난하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자신, 다시 말해 정상적인 관계로 복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신으로 분리하는 행위를 나타낸다(22쪽)”라고 사과를 요약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분명 자신이기는 하나 과거의 자신이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자신과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새로운 자신은 과거의 자신과 달리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자랑스럽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과를 하는 데는 외적인 이유와 내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는 아론 아자르의 설명과 부합됩니다. 내적인 이유는 피해를 당한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자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며, 자기 이미지에 값하지 못한 실수가 수치스럽다는 것이며, 외적인 이유는 잘못을 바로 잡고 자신의 평판을 복구할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기 보다는 설명을 통하여 부득이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과보다는 해명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해명과 사과는 언어를 통하여 잘못의 의미를 바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데 반하여 해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사과를 한다는 의미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사과가 이루어지려면 사과하는 사람보다는 사과를 받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상대와 교감이 잘 된 경우에는 수위가 낮은 사과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상대의 의중과 겉도는 사과는 넘치는 수위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가해자가 인정하거나 잘못한 내용을 적시하고 피해가 발생했음을 이해하는 ‘적시’의 단계와 가해자가 잘못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보완적’ 단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과에 대한 피해자의 응답 역시 수락하거나, 거부하거나, 재논의를 하는 등의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과하는 구체적 방법, 즉 사과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룬 부분을 읽으면서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옮긴이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영미권에서 사과에 보통 쓰이는 말로는 “sorry(미안합니다)”, “regret(유감입니다)”, “I was wrong(내 잘못입니다)”, “forgive me(용서해주세요)”, “excuse me(실례합니다)”, “pardon(미안합니다)” 등이 있고, “I apologize(나는 사과합니다)”를 가장 공식적인 말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I apologize”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사과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지만, 다른 표현들은 사과의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암시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sorry”는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regret”은 정신 상태를 알려주는 능동사, “I was wrong”은 도덕적 혹은 사실관계의 오류를 인정하는 말이며, “forgive me”는 정중한 지시로 표현된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I apologize(나는 사과합니다)”의 경우도 완벽한 모양새를 갖추려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로’라는 직접 목적어와 간접 목적어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진심으로’와 같은 부사를 사용하거나 ‘~를 하고 싶습니다’와 같은 어구를 더해서 사과의 의미를 보완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설은 사과를 적절하게 하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1. 진술은 화자의 과거 행동을 언급하고, 2. 화자는 그것이 피해를 끼쳤음을 인정하며, 3. 그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4. 그 언어 행동은 화자와 청자가 공유한 언어에서 사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이를 명제적 행동, 준비 조건, 신실성 조건, 필수 조건이라고도 합니다.)(82쪽)


저자는 신실한 사과만 다룬 것이 아니라 자기변호, 즉 변명에 관해서도 언급합니다. 새뮤얼 존슨은 1775년에 펴낸 영어사전에서 apologize라는 동사를 ‘특정인이나 사물을 편들어 호소하다’라고 정의하고, 명사는 ‘변호보다 변명’에 무게를 두었다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수사학자 B.L. 웨어와 윌 린쿠겔이 소개한 부인(denial), 생색내기(bolstering), 차별화(differentiation), 초월(transcendence) 등 자기변호의 네 가지 전략을 인용하고, 이를 각각 ‘나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 ‘나는 더 높은 소명의식이 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베노이트는 이 전략을 부인(denial), 회피(evasion), 축소(reduction), 시정(correction), 굴욕(mortification)의 다섯 가지 수사적 대응으로 세분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정치인들의 행동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들이 무언가 잘못한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행보는 잘못과 그에 대한 사과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뒷날까지도 입초시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사건, 클린턴대통령의 성추문사건 등 대표적 사례에 대한 분석도 있습니다만, 국가 차원의 사과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 미국 정부는 모든 일본계 주민을 미국 국적 불문하고 ‘전시 재배치 기구’에 신고토록 하였고, 모두 11만 7천명의 일본계 미국인과 일본인들이 10개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고 합니다. 억류상황이 끝난 뒤 43년이나 지난 1988년에서야 미국 의회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며 조지 부시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도 억류자들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례처럼 물려받은 죄에 대한 사과의 책임이 계승자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하여 사회 비평가 카밀 파글리아처럼 “사과란 원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시각이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책임과 죄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고프만처럼 죄를 저지른 사람과 사과하는 사람을 분리한다는 개념을 적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임자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서 계승자들은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는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전후 행보도 인용하였습니다. 종전 후 전범처리과정에서 일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도조 등 일부 군국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정리하였고, 도조는 일본군이 자행한 잔혹행위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그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주변 국가들에 끼친 잘못이 정리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994~1996년 집권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시절에서야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극복하고 ‘사과’라는 단어가 삭제된 채 깊은 반성의 염을 표현한다는 수준에서 사과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하였습니다. 저자는 무라야마 총리가 개인적 발언을 통하여 ‘진심 어린 사과’라고 표현한 것을 ‘독일 역사성 가장 어둡고 끔찍한 장’이라는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묘사와 같이 사과를 분명하게 설명하거나 암시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관련하여 무라야마의 발언을 무효화하려는 움직임은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 저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옮긴이는 후기를 통하여 대한 항공의 ‘땅콩 회항’사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군이 배후에서 주도한 위안부동원과 관련하여 일본의 아베정부와 쫓기듯 협상에 조인했다거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둘러싼 ‘정부 책임’문제에서 과거지사로서 현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고 있다는 등 현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 이외에 사항들이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박유하 지음,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 201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981091)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여전히 현직에 남아 있고, 지금은 정권 말기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사과하는 옳은 방식 하나를 처방하기보다 사과가 어떻게 기능하고 어떻게 성공하며, 어떻게 실패하는지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묘사가 처방에 선행해야 하는 것은 사과의 처방에서 수단의 성격보다 진실성을 앞세우는 것이 고매할 수는 있지만, 그 처방이 현실이나 유용성 가운데 어느 하나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책을 읽은 뒤 느끼는 점은 저자의 핵심 관심사는 사과의 언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사과의 언어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말을 사과의 용어로 사용하였을 때의 제반 문제점을 정리한 연구가 나와야 할 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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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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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로 처음 만난 프리모 레비를 <주기율표>로 다시 만났습니다. 유대인 화학자 프리모 데비는 등단작품인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반파시스트 유격대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전쟁말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야 했던 나치의 사정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가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은 다른 이들의 경우보다는 덜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기율표는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외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고등학교시절 화학선생님께서는 20번까지는 외워야된다시면서 외우는 요령을 알려주셨습니다. 헤헤, 리베, 비씨노프, 네나마갈시프 크라크 케이블(H, Le, Li, Be, B, C, N, O, F, Ne, Na, Mg, Al, Si, P, S, Cl, Ar, K, Ca)이었습니다. 리베는 독일어로 ‘사랑한다’였고, 클라크 케이블은 당대 유명 배우였죠.


프로모 레비는 화학자답게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를 주제로 쓴 에세이를 <주기율표>에 담았습니다. 주기율표라고는 했지만, 아르곤에서 시작하여 탄소로 끝나는 것을 보면 주기율표의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마지막 탄소편의 모두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볼테르가 잔다르크를 찬양한 시 「오를레앙의 처녀」의 첫구절에서 따온 ‘내 목소리는 약하고 심지어 약간은 세속적이기까지 합니다.’를 인용하여 이 책이 자서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의미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사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서전이 맞을 것 같다고 해야 하겠으나, 중간에 삽입된 납과 수은을 주제로 한 두 편의 에세이는 자전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선조들이 이탈리아의 토리노 인근에 있는 피에몬테에 정착하는 과정을 적고, 이어서 수소편에서는 화학실험에 관심에 관심이 많았던 10대 무렵 친구 형의 실험실에서 수소를 만들었다가 폭발사고를 내는 일화를 적었습니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당시의 파시스트정권이 주도하는 유대인 차별정책으로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스트정권이 몰락한 다음에 진주한 나치에 대항하여 유격대활동을 하다가 배신자의 고발로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고생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요약하고, 원소와 관련한 일화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현란하지는 않으나 현학적 비유가 잘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산에 매혹되었던 젊은 시절의 어느 겨울에 친구와 함께 M의 이빨이라고 하는 산에 가게 되었는데, 얼어붙은 산에서 밤을 지내고 내려온 저자는 그 날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곰고기 맛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그것을 더 많이 먹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삶이 내게 선사한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긴 해도 그 고기 맛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고기 맛이란 강인함과 자유의 맛, 실수도 할 수 있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맛이다.(74-75쪽)”


이런 표현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은 총천연색영화였고, 그 나머지는 흑백이었다.(293쪽)” 어쩌면 가장 활동적이어야 할 시기에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은 그의 삶을 굴곡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난 세달 전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지만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으로 보고 겪었던 많은 일들이 불처럼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222쪽)” 죽음의 수용소에서 스러져간 사람들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도 68세가 되던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도 가끔은 살아온 날들을 제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읽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의 기록, 그러니까 저자의 말대로 작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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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고 싶은 남자 - 말 못 한 상처와 숨겨둔 본심에 관한 심리학
선안남 지음 / 시공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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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도 묘한 흐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책 읽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흐름도 있겠습니다만, 출판계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합니다. 금년 여름에는 특히 남성의 정체성이 주목을 끌고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도 같은 맥락의 책을 이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드린 일본의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4197730>에선 은퇴 이후의 남성과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 주에 소개드린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우리나라에서의 남성의 심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상담심리사로 활동하시는 선안남님이 상담현장에서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냈습니다. 앞서도 출판의 흐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작가의 저서 목록을 보아도 그런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여성을 다루었다가 이제 남성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이 모두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이 개별 사례를 통하여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미분적 접근방식을 취한다면 사회학은 개별 사례들을 모아서 거시적으로 분석하는 적분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특정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하여 새롭게 드러나는 현상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남성 심리학을 다루고 있지만, 특히 중년 이후의 남성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의 장년들이 갈 곳을 찾고 있다’라고 본 미나시타 기류와는 달리 <혼자 있고 싶은 남자>의 저자는 ‘한국의 남자들은 혼자 있고 싶다’라는 명제를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남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다움‘의 압력에 시달리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방법을 터득하고 억압 본능을 갈고 닦게 된다(7쪽)”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저자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특정한 성격의 남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전제가 타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이와 같은 압력을 받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미에 보편성의 그물망에 묶이지 못하는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있다는 점을 서술하기는 했지만,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남녀 간의 성차에 주목하고 과거와 현대의 남성상을 병렬적으로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남성상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인식의 틀과 차이를 허물로 각자의 경험 밑에 깔린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물꼬를 트고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과거 한국의 남성상을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기에는 과거 한국의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앎이 많지 않아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과거 한국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눌려 살았다고 정리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구조, 특히 관직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뉘었던 사회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엄하신 왕께서도 내명부의 일에는 일체 간여할 수 없었던 것이 법도였던 것처럼 사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남녀가 평등한 사회의 전형으로 삼는 서양에서의 여성의 입지는 오히려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우리나라보다 못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남성을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 ‘허세 부르는 소년’, ‘가장은 영웅이고 싶다’, ‘아버지의 그림자’ 등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성들을 여성적 시각에서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의 핵심은 ‘침묵’입니다. 남편 혹은 남자친구와 소통이 안된다는 불만을 들고 오는 여성 상담자로부터 듣는 이야기로부터 일반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 일까지도 미주알고주알 아내에게 털어놓는 저의 경우가 일반적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상담을 받으러 갈 일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남성의 아내나 여자 친구 가운데에도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므로, 남성의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 않을 여성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남성의 침묵을 아동기에 경험한 분리 불안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정하여 심리학적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다고 단정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정상인 사람을 환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걸’이니 ‘거대한 엄마’ 등의 수사가 과연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여성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상황들로 인하여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 강남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단편적인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부풀렸던 것이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입니다. “특히 삶이 더 힘들어지고 기댈 데가 없어진데다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강력한 가부장제로 회귀하고자 하고 여성 혐오주의를 키우기도 한다.(43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가부장제를 향유한 남성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국 남편들을 모두 마마보이로 모는 듯한 대목도 있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하던 미국사회에서도 요즈음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전히 독립을 꿈꾸고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나 관계는 중요합니다. 가족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어찌 보면 부부의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관계를 부모-자식 간의 관계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갓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부부의 중심으로 돌아가던 가정도 자식이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부모-자식 관계가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부모의 관계보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말입니다. 결혼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가족 관계의 가지가 더 확대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나르시스와 에코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시각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로 한 여성이 내세운 이유를 보면 남자친구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관계 속에서 착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보이고, 에코이스트는 에코이스트들은 자기 주관이 없어 상대의 욕구에 끌려 다니기 쉽다(123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나르키소스가 들으면 아주 섭섭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가 자기중심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착취적 특성은 나르키소스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시키는 말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단지 눈이 높았던 것이기에 에코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나르키소스의 눈이 낮아서 모든 에코들의 소망을 들어주었더라면 이번에는 나르키소스가 바람둥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문제는 에코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 말도 있는 것처럼 상대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목을 맬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만을 사랑해줄 진정한 인연은 따로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례에 나온 여성의 경우에도 남자친구가 아니다 싶으면 일찍 이별을 결심하면 될 일입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개저씨’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책에 쓰는 어휘를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입니다. “보통 사회적으로 민감성이 강한 여성일수록 자기 목표를 행해 가는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많다.(142쪽)” 이는 부정적 의미의 속담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은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일 것입니다. 삼천포로 가는 길이 잘 닦여서 벌어지는 일이었다고 위안을 삼으면 좋았을 터이나 삼천포에 사시는 분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트집을 잡는 것으로 일관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성의 시각으로 읽다보니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트집잡기로 책읽기를 일관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성들의 현주소를 아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들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에 대한 언급은 부모나 자녀 모두가 꼭 알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부정적 인식은 대체적으로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직접 부딪혀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경우 의외로 쉽게 해결점을 찾더라는 것이 저자의 경험입니다. 따라서 희생자로 보이는 어머니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를 권유하였고,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불만을 자녀들에게 투사하는 일이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편 혹은 남자친구의 동호회 활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 쓰고 돈 쓰고 에너지 쓰고, 얻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남자들은 왜 그렇게 단체를 만드는데 집착할까요?(305쪽)”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와 같은 남자들의 행태를 ‘완장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여성들이 사적이며, 친밀한, 작은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 경향이 강한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학연, 지연, 취미를 망라한 조직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관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기 마련입니다. 유명 배우의 상징이기도 한 ‘의리’라는 관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남성들의 이런 특성은 은퇴 후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은퇴하게 되면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관계망이 무너지는 경향이 있어 ‘갈 곳이 없는 남자’가 되어 아내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심리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남성 혹은 여성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의 원천적 원인은 ‘고립’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소통의 부재가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인데, 소통을 단절시키는 원인은 아마도 쌍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는 노랫말처럼 타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도 그렇지만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역시 여성의 시각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심리상담을 통하여 경험한 사례들이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크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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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해부
로렌스 골드스톤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고래로 죽음의 원인은 아무래도 의사들의 지대한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특히 죽음의 원인을 캐는 것은 죽음을 막기 위한 치료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병리학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환자가 죽은 다음에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는 것을 부검이라고 하는데, 근대적 의미의 병리부검은 아라비아의 의사 아벤조아르(Avenzoar; 1091-1161)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이탈리아의사 안토니오 베니비에니(Antonio Benivienni; 1443-1502)가 죽음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해부를 시행하였다고 하며, 지오반니 모르가그니(Giovanni Morgagni; 1682-1771)가 가장 유명한 육안병리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엔나의 칼 로키탄스키(Carl Rokitansky; 1804-1878)는 생전에 2만건의 병리부검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죽음이 질병이 아닌 누군가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이제 관심은 의학의 범주를 넘어 사법의 범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무원록을, 그리고 영조 때 이를 증보한 증수무원록을 실제 수사에 적용할 정도로 법의학적 바탕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병리부검기법을 활용하여 법의부검을 발전시켰는데, 1807년 에딘버러대학의 앤드류 던컨이 처음 시도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해부>는 1889년 봄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낙태시술과 마약판매 등 암흑세계와 손잡은 의사들의 불법적인 행위로 벌어지는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의사들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 추리소설입니다. 요즈음 의사들의 윤리강령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동료의 불법을 의학의 발전에 기여할 재능을 꺽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묻어버리는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의 일부는 사실이지만, 전체의 맥락은 작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등장인물과 그 인물들이 남겨놓은 업적 가운데 많은 부분들이 사실입니다. 핵심인물인 윌리엄 홀스테드는 국소마취제와 수술용 무균장갑을 개발하였고, 윌리엄 오슬러는 현대의학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추앙을 받는 소아과의사이면서 윌리엄 홀스테드가 죽을 때까지 약물중독 상태였음을 폭로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두 실존인물의 행적을 뒤쫓아 이야기줄거리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사실주의화가 토마스 에이킨스와 그의 작품들도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그림 <그로스 박사의 임상강의>는 청중들 앞에서 수술을 시연하는 외과의사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것으로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19세기 미국은 유럽에 비하면 진보적이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작가에 따르면 사건보다 불과 6년 전인 1883년까지만 해도 시체를 해부하는 일이 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체해부를 막는 운동을 전개하는 목사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애프라임 캐롤의 법의학적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개업하다가 필라델피아 대학병원에서 조수로 공부를 시작한 경력에 비하면 말입니다. 콜레라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는 비소중독을 꿰고 있고, 법의부검에 대한 조예도 뛰어나니 말입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묘지에서 등불에 의지한 부검에서 말입니다. 작가적 상상력이 지나쳤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외면하는 의료계의 고질적 관행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는 소득(?)입니다. 지혈겸자가 개발되어 있음에도 ‘번개 같은 손놀림’을 자랑하기 위하여 지혈겸자 사용을 외면하는 벌레이 같은 외과의사 말입니다. 수사기법의 구태의연함도 주목거리입니다. 사건을 풀어가면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졌으면서도 정작 범인은 엉뚱한 사람을 지목하는... 어쨌거나 흥미진진한 책읽기였습니다. 특히나 의료윤리에 관한 옛 의사들의 적절치 못한 선택까지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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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모든 하루 - 김창완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안부
김창완 지음 / 박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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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드라마에서 주로 만나고 있습니다만, 데뷔 무렵 김창완님이 활동하던 산울림의 노래들은 놀랍다는 느낌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 역시 그 무렵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년 전에는 <사일런트 머신, 길자>라는 제목의 소설까지 발표하여 작가의 영역까지 활동을 넓혀 다재함을 떨치고 있습니다.

<안녕, 나의 모든 하루>는 그런 그의 속마음을 담은 에세이집입니다. 김창완 작가는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 자신의 속마음과 주변의 것들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소중한 삶의 가치들에 대하여 적어왔는데, 그리하기가 16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그렇게 적은 에세이를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낸다고 하는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글 가운데 엄선한(?) 것들을 <안녕, 나의 모든 하루>에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 쌓여온 글들 가운데서 고른 만큼, 일단 계절적 요소는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을을 이야기하고서는 바로 꽃샘추위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사이의 글들을 건너뛰었거나, 아니면 성격이 비슷한 글들끼리 묶다보니 계절적 요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181개의 글이 ‘쓰러지는 방향으로 가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꽃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폭로하기 전에’, ‘나의 빛깔에서 너의 냄새가 난다’, ‘내가 구름이거나 바람이었을 때’, ‘가끔은 큰 소리로 울었으면 좋겠다’ 등 다섯 개의 제목 아래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목부터 깊이가 느껴지는 것처럼 글내용 역시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노랫말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무엇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앞을 가로질러가는 고양이의 우아한 자태로부터 사람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이끌어내고, 오늘 하루가 멋진 날이 될 거라고 믿는 경우입니다. 묘하게도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해서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고양기가 앞을 가로질러 갔다면 재수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작가님은 오늘 하루가 멋질 것이라고 초긍정적인 생각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첫 번째 글 역시 고양이를 화제로 하고 있어, 김작가님의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 이야기처럼 김작가님의 글은 간단하면서도 마치 대화하듯 읽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딱 한편만 빼고서 말입니다. 글쎄 민들레 홀씨를 붙들어다가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자고 시작한 글에서 갑자기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사는 건 구름 한 조각 생기는 것이고, 죽는 것은 구름 한 조각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요(56쪽)”이라고 드리대듯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산문집이라고 해서 산문만 담은 것은 아니고, 여러 편의 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기억 모자이크’라는 시를 옮겨두겠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얼굴은 /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게 맞아. / 부분부분 떠오르는 모습이 없는 건 아니지만 / 그것 모자이크 같은 거야. / 피카소 그림처럼 눈이 뒤통수에 붙어 있고 / 코가 귀 밑에 매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 시간은 기억을 자르는 칼이지. /어떤 기억, 어떤 모습이라도 잘려져 있다면 / 그건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야 // 내 기억이 맞는다면 / 이 봄날의 풍경도 가위질 당한 사진 같아야 돼 / 벌써 기간이 많이 흘렀으니까.(203쪽)”

책은 어디를 펼쳐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행운을 가늠하기 위하여 눈을 감고 책장을 펼쳐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에필로그에 해당될 것 같은 ‘노란 리본이 있습니다’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운이 나빴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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