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도시 이야기 - 상 - 베네치아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시오노 나나미 지음, 정도영 옮김 / 한길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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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다녀온 발칸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베네치아였습니다. 오래 전에 이탈리아의 스트레사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 베네치아가 아닌 밀라노를 선택해서 구경하면서 베네치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을 채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그동안 베네치아에 대한 공부를 적지 않게 해왔던 것 같습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존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 http://blog.joins.com/yang412/13712775>도 있었고, 패트리샤 포르티니 브라운의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http://blog.joins.com/yang412/13812136>도 있었습니다. 건축 혹은 예술사적 시각으로 베네치아를 들여다본 책들을 읽다보니 베네치아 사회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기에 안성맞춤한 책읽기입니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오노 나나미가 가쿠슈인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그리스 로마 시대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의 역사를 천착하기 시작해서, 1968년에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中央公論」지에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1권씩 발표한 <로마인 이야기> 15권이 대표작입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작가인 만큼 그녀의 작품들은 교양서와 소설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또한 평가가 엇갈리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사료를 취사선택하였다거나, 사료가 없는 부분은 별다른 언급 없이 창작으로 채웠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인 면이 강조되는 역사서가 책읽는 이의 흥미를 떨어뜨려 접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고 또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역사상 벌어진 일들에 대한 왜곡은 없으며, 지나치게 자세하지도 않고 생략되지도 않은 적절한 상황 묘사가 바로 그녀의 작품만이 가지는 힘이라고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대표작 <로마인 이야기>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녀가 쓴 <주홍빛 베네치아; http://blog.joins.com/yang412/13813357>가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읽도록 유혹했던 것 같습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베네치아공화국이 터를 잡을 때부터 공식적으로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요약하였습니다. 베네치아공화국은 공식적으로는 초대 국가원수(doge)를 선출한 697년부터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항복한 1797년까지 무려 1100년을 이었던 최장수 국가입니다. 베네치아공화국과 견줄만한 나라로는 395년 – 1453년까지 1088년을 이은 비잔틴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新羅)가 기원전 57년 ~ 935년까지 992년을 이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천년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역사책의 주인공은 대체적으로 왕과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건사고를 나열하는 경우가 많아 대체적으로 딱딱할 수밖에 없어 금세 읽기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상권이 522쪽, 하권 이 579쪽으로 베네치아의 역사에 버금가는 쪽수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기가 싫을 정도로 빠져들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작가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지금의 자리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베네치아의 탄생으로부터 동방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면서 전성기를 누리던 베니스의 모습 그리고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놓치고 몰락해가는 베네치아의 모습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략에 굴복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열다섯 개의 주제를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 상업, 문화예술, 여성문제 이르기까지 책읽는 이의 흥미를 끌어낼만한 것들입니다.


연대기에 의하면 베네치아 사람들이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침략을 피해서 지금의 장소보다 육지에 가까운 소택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서기 452년입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쯤 뒤에 롬바르드족이 침입하여 파도바로부터 이스트라반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연안을 파괴하자 이들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지금의 장소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개펄 위에 나무를 박아 넣어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습니다. 요즘 간척사업을 하듯이 개펄을 모두 메운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방어를 위하여 개펄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살렸으니 그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운하 위에 다리를 만들어 도시를 효율적으로 오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50개가 넘는 섬, 180개에 가까운 운하와 410개나 되는 다리로 이루어진 베네치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베네치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3요소, 국민, 강역, 주권 가운데 두 가지, 국민과 강역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을 밖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식민지를 개척하여 영토를 넓히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10만 내외의 베네치아 사람들로는 얻은 식민지를 제대로 다스리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외부에서 조달하고, 그러한 상업활동의 근간이 되는 부를 무역을 통하여 얻었던 것입니다. 섬이라고 하기보다는 바다에 떠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베네치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바다와 친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만들고 배를 부리는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고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승천일에 열리는 베네치아의 축제일에 국가원수는 리도항구로 나가 준비한 금반지를 바다에 떨어뜨리면서 “너와 결혼한다. 바다여. 영원히 내 것 이어라”하고 말할 정도로 베네치아에게 바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지중해를 장악한 비잔틴제국는 동방의 페르시아와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 바다를 대신해서 지켜줄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를 비롯하여 피사, 제노바 등이 지중해를 누비는 해양국가였는데, 비잔틴제국이 선택한 것은 베네치아였습니다. 베네치아제국의 자주성은 인정하되 비잔틴제국에 속하는 것으로 하며, 제국의 영내에서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로서 경쟁국가들보다 상업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강력한 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베네치아가 공화정의 정치체제를 갖추고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견제장치를 복잡하게 만든 것이 장수국가로 갈 수 있던 근원이었습니다. 국가원수와 6인의 원수보좌관, 6인 위원회, 10인 위원회, 원로원, 국회 등이 각자 맡은 일을 하게 되는데, 정치에 관한 업무는 귀족계급이 맡아하였습니다.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전문정치인이었고, 이들은 맡은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수업을 철저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나라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를 흘려가며 독립과 자유를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베네치아의 장수를 담보했던 정치체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은 제5장 ‘정치의 기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에 관한 내용은 앞서 말씀드렸던 역사에 대한 작가적 해석의 차이인지 아니면 창작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난공불락이던 이스탄불(이전에 콘스탄티누폴리스이던 시절을 포함해서)은 꼭 두 차례 외부세력에 의하여 함락된 바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에 함락되어 라틴제국이 성립된 경우이며, 두 번째는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제국의 침공으로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때입니다. 지난 해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침공을 베네치아가 주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바다 도시 이야기>를 보면 반드시 주도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4차 십자군은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3세의 주창으로 프랑스 제후들을 중심으로 결성을 하고 육로로 가는 것은 너무 멀고 위험하기 때문에 해로를 통하여 원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도 당시 여건으로 십자군의 병력과 병참을 수송할 수 있는 나라는 베네치아가 유일했기 때문에 십자군의 지휘부는 베네치아와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4,500명의 기사와 2만 명의 보병, 4,500마리의 말과 종자 마부 등 9천명을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선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베네치아의 원수가 지휘하는 전투승무원 6천명이 출전하는 조건으로 8만5천 마르크를 내기로 한 것입니다. 베네치아는 계약에 따라 필요한 함선들을 새로 건조하는 등 약속한 기일에 갤리선 50척, 범선 240척, 평저선 120척 등 480척을 준비했지만, 십자군을 이끌기로 한 상파뉴백작이 사망하면서 겨우 1만 내외의 병력만이 참여하였고 약속했던 수송비용도 2만5천 마르크밖에 지불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원정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운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에서 수정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헝가리왕국의 선동으로 베네치아에 반기를 든 자라(지금의 자다르입니다.)를 공략하는 것을 거들어준다면 계약을 즉시 이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라공략에 성공하였을 때, 비잔틴제국의 알렉시우스황자가 십자군을 찾아왔습니다. 십자군 원정비용과 그리스정교를 로마가톨릭교회 아래로 통합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콘스탄티누폴리스를 공격하고 황위를 찬탈한 동생을 제거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결국 비잔틴제국의 내분이 화를 불러들인 것이지, 베네치아가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트누폴리스 침공을 주도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십자군 입장에서도 원정경비문제도 있고 해서 찬성의 뜻을 나타냈고, 베네치아의 원수 엔리코 단돌로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친베네치아 성향이면 유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군 측이나 베네치아, 비잔틴제국의 알렉시우스황자, 심지어는 교황마저도 동서교회의 통합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이 맞아떨어지면서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침공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십자군의 공격은 황제 알렉시우스 3세가 도주하면서 종결되었고, 알렉시우스황자는 황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비잔틴군과 십자군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선제의 사위가 새로 즉위한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2차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성전이 전개되고 함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승리한 십자군은 당시 전쟁의 관례대로 3일에 걸친 약탈을 허락했고, 비잔틴제국 대신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비잔틴제국 측에서는 베네치아가 예술품들을 약탈해갔다고 생각하지만, 작가는 문화적 안목이 없던 프랑스군이나 플랑드르 군의 파괴를 면한 것도 베네치아 사람들의 예술품에 대한 안목이 한 몫을 했다고 해석합니다.


인구 10만 내외의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여왕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기독교국가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오스만제국과의 협정을 맺는 등 치밀한 외교전을 전개한 과정을 <바다 도시 이야기> 후반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이나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고 라틴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에스파냐왕국의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의 역할이 확립되면서 그동안 장악해온 지중해무역이 위축되는 것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본토를 차지해서 농업의 비중을 높이고 수공업을 발전시키는 등 대안을 준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변화하는 내부사정은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 과거처럼 명쾌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난 것입니다. 천년을 넘게 지나오면서 존립의 위기를 넘겨가며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던 베네치아도 근세 유럽사회의 격랑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을 포기함에 따라 도시가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지금도 그 옛날의 베네치아를 볼 수 있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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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 - 평생 가난할 운명에 놓인 청년들
후지타 다카노리 지음, 박성민 옮김 / 시공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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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생긴 사회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청년들이 겪고 있는 현상이 일본에서도 심각한 문제라고 합니다. 일본사회의 청년문제의 심각성을 분석한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를 읽고서 알게 된 것입니다.


저자인 후지타 다카노리(藤田孝典)는 NPO 법인 ‘핫플러스’의 대표이사이자 세이가쿠인대학에서 객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반反빈곤 네트워크 사이타마 대표, 블랙기업 대책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있고, 지역 내에서 생활 빈곤층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로 생활보호와 생활 곤궁자 지원에 대한 활동과 제언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회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춘 행동파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를 읽다보면 먼저 일본청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의외로 심각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우리나라 청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닮았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은 당사자인 청년들이 아니라 기성세대라는 점까지도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지금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일본청년들이 빠르게 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금세 사회현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면서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취직이 어렵던 시절의 청년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그 취업난이 일시적인 것을 넘어서 고착화되면서 평생 빈곤을 안고 살아야 하는 위기상황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강요된 빈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빈곤세대’로 정의하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수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장에서 저자는 먼저 몇 개의 구체적 사례를 통하여 빈곤의 늪에 빠져든 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가정이, 사회가 그들의 삶을 조금씩 옥조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바로 기성세대라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블랙기업, 심지어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허울을 앞세운 아르바이트자리까지도 청년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미래를 위한 공부가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학자금대출이 평생의 짐이 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4장에서는 독립해 살 곳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 부모의 그늘을 찾는 청년이 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일본의 사회복지정책이 빈곤청년의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앞으로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를 짚었습니다.


<우리는 빈곤세대입니다>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였거나, 심지어는 알면서도 외면해온 청년세대의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대로 ‘현대사회의 모든 청년들은 같은 비극’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들이 지금까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아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외면해온 젊은 세대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들 젊은 세대들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서 그들이 외면한다고 볼멘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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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필만 지음, 김훈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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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에 방문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는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이 겪은 끔찍한 참상을 보고 들으면서 인간이 이렇듯 잔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면서 들었던 의문은 독일정부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이곳까지 끌고 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해답을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이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에서 6년간 살아남은 경험을 기술한 작품으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대한 탁월한 수기문학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수행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검은 속셈을 감추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폴란드를 전격 점령한 독일군은 초기에만 해도 폴란드 국민 심지어는 유대인들에게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인데, 점차 게토를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고, 재산을 몰수하며, 공연히 트집을 잡아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하는 등 광기가 점점 그 도를 더해가는 양상을 보이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수용소로 끌어가기 전에 게토로 몰아넣은 것은 심리적으로 교란작전을 폈던 것이라고 합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게토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처분하도록 유도하면서 싼값에 그들이 자산을 매입하고, 이어서 수용소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거주지로 간다고 속임으로서 값비싼 물건들을 휴대토록 하여 수용소에 도착한 즉시 처형시키고 그들이 들고 온 값비싼 물건들을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를 보면 게토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참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긴장된 와중에서도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 우아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직접 통제하기도 했지만, 일부 유대인들을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지 않도록 하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 팔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합니다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도 실감할 수 있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불라디슬라브 스필만 스필만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바르샤바에서 숨어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좋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친구층이 두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대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바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등록 유대인을 숨겨주고 도와준 폴란드 사람들의 위대한 정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리고 특히 독일군 장교이면서도 숨어 지내는 스필만과 우연히 조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숨어살도록 조치를 해준 빌름 호젠펠트와 같은 깨어있는 독일인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젠펠트는 독일인이 게토에서 자행하고 있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절망을 이렇게 일기에 적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가운데 어찌 그런 인간 쓰레기들이 있을 수 있는지 거듭거듭 되묻지 않을 수 없다.(274쪽)”


<피아니스트>는 전쟁이 끝난 직후에 불라디슬라브 스필만이 자신의 겪은 일을 기록한 수기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지켜준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의 일기 초, 그리고 스필만의 부탁을 받은 볼프 비어만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영화로 옮겨 200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 피아니스트와 독일군 장교의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옮긴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지 못해 손가락은 뻣뻣하게 굳어 있고 손에는 새까만 때가 켜켜야 앉았고 손톱마저 길게 자란 유태인은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쇼팽의 야상곡 C#잔도를. 독일군 장교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귀 기울인다.(312쪽)” 그리고 ‘아름답다. 그 끔찍한 정황에서 이런 기적 같은 정경이 펼쳐진다는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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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직장인의 어깨를 다독인 51편의 시 배달
김기택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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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붙들려 꽃 지는 것도 몰랐다’라는 프롤로그의 제목에 그야말로 ‘심쿵’했습니다. 시인의 말대로 ‘일과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 몰랐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시가 있어 다른 세계로 향할 수 있었다는데, 저는 무엇이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다가 뒤늦게 책읽기와 글쓰기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는 내면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주거나 사물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게 해주거나 지리멸렬한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확 바꿔 보게 하거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즐거움으로 바꾸어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11쪽)’라고 했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느낀 감상에다가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나 체험적 시론, 삶에 대한 생각들을 덧붙여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라는 제목으로 산문집을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산문집은 시와 산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양수겹장이요 일석이조인 책읽기가 되는 셈입니다.


2010년 시인은 일 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 집배원으로 임명받아 동영상그래픽과 음악이 어우러진 멋진 시를 직접 낭독하여 전송하는 역할을 했고, 그때 선정했던 시와 시인의 생각들을 이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계절의 변화가 담긴 시들을 고르게 되었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시는 시인이 「봄, 가벼움의 본능이 깨어나다」라고 제목을 붙인 산문의 주제가 되는 봄의 새로운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황인숙 시인의 「봄」으로 시작합니다. 겨우내 이어진 추위에 움츠러들지 말고 ‘이불 박차고 두꺼운 옷 벗고 새 공기를 마시면서 뛰어보라고 권유하기에 십상인 시를 고른 것입니다. 송재학 시인의 「사물 A와 B」를 읽다보면 시인이 고른 시들이 나름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듯 형식조차도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모내기를 막 끝낸 들의 풍경을 그린 이덕규 시인의 「논두렁」에서는 벌써 추수를 마쳐 얻은 쌀로 밥지을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밥맛은 살맛이다」라는 산문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큰 주발에 소복하게 올라오도록 담은 고봉밥을 떠올렸습니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고봉밥은 힘든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이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시인은 시골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시골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흥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 심심함, 매 맞기, 벌서기 따위로 채워져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유년의 기억이 창작의 보물창고라는 작가들과는 달리 시인의 창고는 허름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불분명한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엉뚱하게 변형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화분을 들리고 벌을 세운다’로 시작되는 유홍준 시인의 「가족사진」에서 아동폭력의 심각함을 지적하는 글 「폭력의 기억을 놀이로 만들기」를 읽으면서 두 아들이 어렷을 적에 상처가 되었을 일을 떠올렸습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마음에 새긴다지만 매를 든 사람은 일상이기 때문에 마음에 남겨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깨우쳐 사과하고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면 풀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시는 몸속에 숨어 있는 기억이나 감정, 감각 본능 등을 흔들어서 깨우고 활동시킬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삶과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게 만들고 한숨 쉬거나 웃게 만든다고 합니다. 시인처럼 갑자기 새로운 시가 쓰고 싶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시인처럼 세상을 다시 보는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와 산문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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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 콜럼버스 이후 정복과 저항의 아메리카 원주민 500년사
로널드 라이트 지음, 안병국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싸우는 영화를 보다가 기병대가 인디언을 물리치면 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저 기병대가 주인공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땅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던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의 주인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이주민의 역사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살고 있던 땅을 순순히 내준 것처럼 포장된 역사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한데서 나온 말이니 ‘인디언’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저는 ‘인디언’이란 말이 딱 질색이에요. (…) ‘인디언’은 백인들의 상상의 산물일 따름입니다.”라고 한 캐나다 오지브와족 출신 여류작가 리노아 카식-토비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가 다양해서 여러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데 ‘인디언’이라는 단어 하나로 싸잡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부르던 간에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고학자들이나 유전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15,000~30,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원주민들은 자신의 조상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명사적으로도 이들이 태곳적부터 이곳에서 살아왔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카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의 아메리카문명은 그저 유럽문명의 아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리는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시각에서 본 근현대사를 정리합니다. 특히 콜럼버스 이후 유럽 이주민의 침략에 맞선 아메리카 원주민이 어떻게 저항을 해왔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저항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를 쓴 로널드 라이트는 영국 태생의 역사가, 고고학자, 문명비평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캐나다 캘거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였고, 평생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역사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재야 사학자인 셈인가요? 그는 특히 서구 문명의 한계를 성찰하여, 서구 문명 중심의 해석을 경계해왔습니다.


저자는 남북 아메리카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문명 가운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다섯 문명을 골라, 유럽 이주민들의 침략기,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기,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힘을 받고 있는 부활의 움직임을 각각 설명합니다. 그 다섯 문명으로는 메소아메리카의 아스테카와 마야, 남아메리카의 잉카,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와 이로쿼이입니다. 사실 이들 이외에도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칠레의 마푸체족, 브라질의 야노마미족,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과 블랙풋족, 니카라과의 미스키토족 등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에 유럽 이주민이 침략해온 시기를 다룬 ‘침략’에만 ‘발견’이라는 제목의 프롤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1492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이 된 사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본디 있던 것을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만-이 있기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북극의 툰드라 지역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저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부터 남아메리카 남단의 케이프 혼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다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수렵 유목 사회도 있었고, 농경 정착 사회도 있었으며, 커다란 도시를 이룬 도시 문명사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자그마치 1억 명으로 전체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콜럼버스 출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몰살을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침략자들의 학살과 탄압,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원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홀홀단신으로 건너온 이주민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취하거나, 급감한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끌어들인 아프리카계 사람들까지 가세하여 원주민의 혈통을 희석시킨 것도 순수 원주민의 인구를 격감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의 혈통은 끈질기게 이어져, 안데스지역에는 잉카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1,200만 명이 살고 있고, 메소아메리카에도 마야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600만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테말라 같은 경우는 마야 원주민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마야 공화국이 성립되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또 1980년 페루에서는 좌익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벌인바 있으며, 1990년 캐나다에서는 모호크족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미국에도 캐나다에도 넘긴 적이 없는 우리의 주권을 내놓으라!’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진 메아리가 되고 있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미국 정착민들은 물론 세계인들까지도 모른 척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흰 얼굴의 신(神)’이라는 개념 역시 허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주민들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유카탄 원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케찰코아틀 신화입니다. 아즈텍사람들은 풍요와 평화의 신으로 알려진 케찰코아틀신이 전쟁의 신의 음모로 쫓겨나고 말았지만 언젠가는 하얀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즈텍사람들은 코르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온 케찰코아틀로 착각하였기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래 읽은 원주민 시각에서 쓴 자료들을 읽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천성적으로 외부에서 온 손님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손님이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아즈텍과 마야에 대한 스페인의 침략과정에 관하여 원주민들이 남긴 기록들이 최근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겔 레온-포르티야가 쓴 <정복당한 자의 시선; http://blog.joins.com/yang412/14018447> 같은 번역서도 있고, 정혜주교수가 쓴 <마야원주민의 전쟁과 평화; http://blog.joins.com/yang412/13747676> 처럼 우리나라의 라틴아메리카 전문가가 쓴 책도 있습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로 몰려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압바스왕조에 무너진 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가 756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세우고 이베리아반도를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흩어져 있던 스페인 왕국들은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여왕의 가톨릭연합군이 그라나다의 나스르왕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국토회복을 위하여 매진했던 것입니다. 국토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군사들을 토사구팽을 할 수 없었으니 새로운 목표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마침 콜럼버스가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성공을 거두었고, 전후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던 것입니다. 침략과정에서 다른 종교, 문화를 포용하는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사람들은 아메리카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노예로 부려 부를 축적했으며, 오랜 세월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을 말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메소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성으로 침략자의 손길을 피한 일부 유적들이 살아남아 지금 우리를 맞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침입해올 당시에도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원주민들이 침략자를 궤멸시켰을 때 마침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하는 등, 행운의 여신은 침략자의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전염병 때문에 전력이 무너진 원주민들은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입니다. 일설에는 천연두 환자가 사용하던 물건을 생물학무기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숫자가 급감하자 아프리카 원주민을 끌고 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록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의 저항을 상세하게 정리해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침략은 라틴아메리카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이주민들을 따듯하게 맞아 정착을 지원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이주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면서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몰아냈던 것입니다. 원주민들 모르게 법을 만들고 이주를 강요하는가 하면 협상을 통하여 어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막무가내로 원주민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기면 다시 그 땅을 차지하는 수법을 썼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주민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원주민들 집단 사이의 이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의견이 통일되지 않도록 하는 이간책이 통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들의 반란이 꾸준하게 이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진압되곤 하였습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백인 정착민의 주도로 근대국가를 수립하였지만, 원주민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베니토 파블로 후아레스 가르시아 (Benito Pablo Juárez García, 1806년 3월 21일 ~ 1872년 7월 18일)가 1857년부터 1872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는 멕시코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교회와 토지귀족이 독점하고 있는 독점경제를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국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시도하다가 교회와 지주의 반발로 내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유카탄반도의 마야는 반란에 성공하여 자유국을 이루어 20세기까지 존립하였습니다. 과테말라에서도 정부군과 원주민 세력 사이에 오랜 기간 내전(1963~1996)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족은 일부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였지만, 일부는 그레이트스모키 산맥에 그대로 잔류하여 ‘동부 체로키 보호구역’을 만들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서부 체로키족 역시 자치정부를 재건하고 대추장을 선출하였다고 합니다. 북동부에 거주하는 이로쿼이 연방의 모호크족은 1972년 전사단을 결성하고 영토를 빼앗으려는 캐나다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마야인들의 달력에 따르면 이민족의 지배는 예정된 것이었으며, 운명의 바퀴가 열세 번을 꽉 채우면 끝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이 유카탄반도를 지배한 기간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했다고 합니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원주민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은 원주민들의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들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서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다섯 부족들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저항하고 부활하는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오히려 부족별로 침략과 저항과 부활을 이어서 설명했더라면 읽기에 조금 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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