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세계사 - 5000년 인류사를 단숨에 파악하는 여섯 번의 공간혁명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오근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대중의 관심이라는 것이 끈기가 없는 탓인지 쉽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위 ‘먹방’이라고 하는 방송계의 추세는 꽤나 오래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을 대체할만한 소재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방타령으로 [북소리]를 시작하는 이유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역사도 시각에 따라서 전혀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야자키 마사카츠의 <공간의 세계사>는 ‘공간’을 주제어로 5,000년 인류사의 변곡점을 찾아냈습니다. 즉 공간의 변화가 인류의 삶을 바꾸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사 교사를 역임하면서 20년 넘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집필과 편집에 참여한 저자의 경력을 보면 역사를 깊이 연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등학생 대상의 세계사를 다루다보니 그의 전작,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등처럼 세계역사의 변화를 쉽게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서문에는 세계사를 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그 첫 단추는 ‘세계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면 그 분기점은 어디가 될까?’라는 질문입니다. 저자는 15세기 대항해시대가 바로 그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2세기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세계지도와 157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지도출판업자 오레텔리우스가 제작한 <세계의 무대>를 근거로 내놓았습니다. 지도 제작자가 이해하던 당시 세계의 범위가 담겨있는데, 프톨레마이우스의 지도를 ‘육지의 세계지도’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와 흡사한 오르텔리우스의 지도는 ‘바다의 세계지도’로 비유했습니다. ‘바다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항해시대에 세계를 누빈 탐험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20세기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육지와 바다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세계사는 육지 나라에 대한 바다 나라의 투쟁, 바다 나라에 대한 육지 나라의 투쟁을 기록한 역사다’라는 관점으로 <육지와 바다>를 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과연 육지나라 독일이 바다 나라 영국을 상대로 잘 싸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고, 결론은 ‘바다 나라 영국이 우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일본이 우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슈미츠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했다는 결과에 매몰되어 역사해석에 있어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의 주제어가 되는 ‘공간혁명’은 슈미트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큰 시대의 시작에는 늘 큰 토지의 취득이 있다”라고 전제하고, “먼저 공간 규모가 크게 변화하고 이어서 그에 걸맞은 공간질서의 형성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공간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사의 전환은 공간의 변화와 결부되어 있고, 그것이 광범위하고 핵심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사카츠는 슈미츠의 공간혁명의 개념을 세계사의 구성개념으로 응용하여 여섯 번의 세계사적 공간혁명으로 7개의 세계사 공간을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건조 지대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농업공간 형성(약 5,000년 전), 두 번째, 말을 이용하는 유목민들이 이끈 큰 강 유역과 초원․황무지․사막의 공간적 통합에 의한 여러 지역세계 형성(약 2,500년 전), 세 번째, 이슬람 제국에서 시작되는 기마유목민과 상인에 의한 유라시아 규모의 공간 통합(약 1,400년 전), 네 번째, 대항해시대 이후 대양이 대륙을 잇는 대공간의 성장과 자본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근대체제의 형성(약 500년 전), 다섯 번째,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철도와 증기선에 의한 지구공간의 통합(약 200년 전), 여섯 번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 규모의 전자공간 형성(약 20년전) 등입니다. 각각의 혁명에는 유발요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말이, 네 번째는 항해가, 다섯 번째는 자본이 그리고 여섯 번째는 전자가 공간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견강부회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나름대로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체적으로 ‘혁명’이라는 개념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진대 첫 번째 혁명 거대한 농업공간의 형성이 단 기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것과 굳이 건조지대라는 지역적 제약을 두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로 꼽는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유역의 인더스 문명, 그리고 중국 황하유역의 황하문명 등은 기원전 4,000부터 ~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성립하였습니다. 거리상 가까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더스문명이나 황허문명은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4대 고대문명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조건도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 온화하고 강수량도 많았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 따라서 큰 강 유역이라는 공간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지형적 요인에 따라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이룬 것으로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혁명은 기원 전후로 걸쳐 일어난 것으로 4대문명이 일어난 공간을 중심으로 세력이 확장되거나 통합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시기의 주인공들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마우리아왕조의 찬드라 굽타, 진의 시황제를 들었습니다. 물론 이 무렵 공간의 확산과 통합에 말이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페니키아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지중해를 통하여 이베리아반도를 지나 대서양으로 진출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미 인류의 활동영역은 육지를 떠나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혁명을 주도한 세력을 기마민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배라는 이동수단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혁명을 통하여 성립한 공간들은 상호 교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혁명은 7~14세기 아랍인, 튀르크인, 몽골인에 의하여 유라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이 탄생하던 시기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랍인들이 살던 아라비아반도나 튀르크인들이 살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사막기후로, 몽골인들이 살던 몽골고원 역시 건조지대로 극한의 땅에서 생활하는 유목부족들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품은 강한 의욕이 일련의 공간혁명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지나 이베리아반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반도, 동쪽으로는 인도 접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 등에 이르는 이슬람의 강역이 극한의 땅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제국의 중심은 시리아 혹은 바그다드 등으로 극한의 기후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튀르크인 역시 중국의 북부 초원지역에 살면서 중원을 침략하던 것을 중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북부지역에 살던 흉노족이나 돌궐족을 서쪽으로 밀어낸 결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몽공인들은 중국의 지배세력이 약해져 분열되었던 시기에 세력을 키워 중원을 장악하였고 유럽의 접경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강역을 실지 경영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고 분할 지배했던 것입니다.


네 번째 혁명, 대항해시대가 촉발된 원인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대항해시대는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이 문을 열고 스페인이 뒤를 이었습니다. 두 나라가 대서양으로 나간 것은 중동에 자리한 오스만제국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베네치아공화국을 파트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무역에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동방항로를 개척하였고 덤으로 브라질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스페인은 동인도제도와 라틴아메리카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룬 것입니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차지할 수 없었다면 유럽이 유라시아대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어떻거나 대항해시대에 유럽제국이 이룩한 세계사적 공간통합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가끔은 작가의 시각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사 속의 한국과 일본의 위치에 관한 언급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자료선택에 있어 중립적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한 것이나, 고구려가 낙랑군을 313년에 축출한 뒤로 한반도에 백제, 신라 등 국가형성의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은 야마토 왕조가 탄생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성립한 고구려가 100만 대군을 동원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16세기 동아시아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 접촉한 과정도 소략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콜럼버스의 대서양 개척이 지팡구, 즉 일본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섬을 포함한 지역을 서인도제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또한 남북 아메리카대륙의 문명은 아예 세계사 공간에서 제켜두었다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사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데 그마저도 유럽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최근의 고고학적, 역사학적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유럽 중심이 아닌 원주민 시각의 해석으로 세계사의 공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하여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다섯 번째,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것도 유럽사회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는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철도와 증기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의 운송수단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도 유럽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송수단에 의한 공간의 통합이 유라시아-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전지구적 공간으로 확대된 것도 당연히 유럽이 중심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사회는 축적된 인적, 물적 자산을 탕진하면서 통합된 공간을 지배할 능력을 미국과 소련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지구적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다양한 공간으로 쪼개지면서 공간들 간에 무수한 충돌이 일어났던 것도 빠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혁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 규모의 전자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전자공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이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자공간의 활용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참여하고 있으니 전자공간 역시 지구적 공간처럼 ‘함께 또 같이’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공간이 성립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임에도 이 부분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포함하는 20세기의 세계사를 포함시킨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전자공간에 대한 개념형성이 논의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으로 참여한 군국주의 일본의 오판이었다는 정도로 요약합니다.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6.25동란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1950년에는 무력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노린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공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368쪽)”고 적고 이 전쟁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코의 진자 세트 - 전3권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동유럽여행의 일정에는 오스트리아의 멜크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멜크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인솔자는 올 초에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가 처녀작 <장미의 이름>에 대한 기획을 이곳에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푸코의 진자>를 꼭 읽어보길 권하였던 것입니다.


에코의 서지목록에서 <푸코의 진자>를 처음 발견하였을 때는 먼저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와 관련이 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배경이 선뜻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푸코의 진자’는 1851년 프랑스 물리학자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Jean Bernard LAon Foucault)가 지구의 자전현상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푸코는 67m의 강철줄로 매달린 28㎏의 철구를 판테온의 돔에 걸고 기구를 이용하여 계속 진동시켰더니, 진자의 진동면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여 36시간에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북극에서는 진자의 진동면이 24시간에 일주를 하지만, 적도에서는 회전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진자>는 서구사회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전설의 기사단 혹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결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내용만 1123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인데다가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무대 역시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대륙까지 망라하고 있어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가늠하는 일조차도 버거운데, 작가의 방대한 인문, 철학적 앎이 작품 곳곳에 펼쳐져 있어 쉽게 몰입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동사양의 고전은 물론 각종 기호학적, 수학적 표식들, 히브리어와 라틴어는 물론 각종 유럽어 들까지 늘어놓는 바람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헷갈리는 바람에 뒤돌아가야 했는데, “에코 … 푸코 … 사이코”라고 했다는 출판팀의 하소연이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3인방, 카소봉, 벨보, 디오탈레비 등이 밀라노의 출판사 사장 가라몬드씨와 출판기획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푸코의 진자>에서 시작된 작가의 글쓰기 비결을 엿볼 수 있었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3인방 가운데 카소봉의 모습이 에코와 중첩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3인방 모두가 에코의 분신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에코의 분신인 카소봉은 좋은 문헌목록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푸코의 진자 2권 406쪽) 이 방법은 관련 문헌을 수집하여 진위를 가리고 그 내용을 잘 정리하여 색인목록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실제 책을 기획하는 작업의 사례로 성전기사단에 관한 책을 만드는 작업을 소개하였습니다.


“만일에 말이죠. <악마 연구가들>의 작품에서 추출한 몇 가지 아이디어, 가령, 선전 기사단은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거나, 『연금술 대전』은 1460년 피렌체 도착했다는 등등의 아이디어에, <분명한 사실은……>, <……임을 입증한다>, 이런 연결 어구를 입력시키면요? 뭔가 눈에 번쩍 띄는 게 나오는 게 아닐까요? 뭐가 나오면, 공백은 적당하게 메우고, 반복된 부분은 예언이라 명명한다면 적어도, 일찍이 출판된 적이 없는 미증유의 마술사 한 장(章)은 되지 않겠느냐고요.(푸코의 진자 2권 406쪽)” 아마도 <푸코의 진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나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카소봉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 리아는 자료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능력이 카소봉 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기사단에 관한 책을 쓰는 계기가 된 쪽지를 잘못 해석한데서 오는 오류를 바로 잡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의 중심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아 역학에 대한 궁금증을 일게 합니다. 리아의 의해서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흔들리면서 자칫 ‘똥그랑 땡’(모든 이야기가 일장춘몽이었음을 나타내는 저만의 표현입니다.)으로 끝날 이야기가 벨보의 엉뚱한 짓 때문에 파리 공예박물관에서 성전기사단이 소집되는 것으로 상황을 다시 반전시킨 것이야말로 작가적 역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전 기사단이 현존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허구의 집단이라는 것인지 여전히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푸코의 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지에 관련된 책 말고도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책도 함께 가져갑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되고, 여행을 통하여 얻은 느낌과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을 발견하는 경우 여행기를 적을 때 도움이 되어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지난 9월 동유럽여행길에 가져간 책인데,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할 짬을 만드느라 글쓰기가 늦어졌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년전에 그의 데뷔작 <순례자; http://blog.joins.com/yang412/13056408>를 북소리에 소개하면서 만난 바 있습니다. 스페인을 다녀와서 <연금술사: http://blog.joins.com/yang412/13536943>를 만나기도 했지만,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194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그는 록 음악 작곡가로서 브라질 음악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스트, 록스타, 극작가,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 등 다양한 이력을 거쳤는데, 1986년 돌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순례 이후 첫 작품 <순례자>를 썼고, 이듬해 <연금술사>를 발표하여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가 삶을 통하여 직접 겪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여행을 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적은 것으로, 이 가운데 전 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글 ‘방앗간 집에서의 하루’을 피레네에서 쓴 것처럼 글 역시 다양한 곳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40세가 되어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 책의 프롤로그를 보면 그는 이미 열다섯에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조사에 착수하였고, 작가라는 존재에 대하여 여덟 가지의 정의를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라는 제법 심각한 것도 있지만,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네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웃긴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 101꼭지의 글을 모았습니다. 제목처럼 생각이 그저 흐르는 대로 맡기라는 의미였는지 특별하게 정해진 바가 없이 글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글을 쓴 순서라거나, 주제에 따라 나누었다거나, 하다못해 자모순으로 나눈다는 규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서가 없으니 처음부터 읽어도 좋지만,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주제로 나뉘었다고 해도 모든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101 개나 되는 글에 대한 느낌을 모두 적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눈에 띄어 무언가 한 마디를 남기고 싶은 경우만 짚어볼까 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느낌이 있는 대목에는 표시를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백에 느낌을 적기도 했습니다만, 다시 읽을 때 여백에 적힌 느낌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이 버릇을 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귀퉁이를 접었다가 나중에 따로 독후감을 쓰기도 했는데, 왠지 책이 아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를 잘라 만든 띠지를 끼워 넣기도 했는데, 십여 년 전부터는 다시 떼어 쓸 수 있는 견출지를 붙이곤 합니다. 물론 독후감을 쓴 다음에는 다시 떼어내 재활용을 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첫 번째 견출지를 붙인 글은 세 꼭지나 할애한 마누엘에 관한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은 마누엘이 바쁘게 사는 이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누엘은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자, 책임감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마누엘에게 천사는 이렇게 일렀다고 합니다. “하루에 십오 분만이라도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과 자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나? (…) 노동은 축복이라네. 그곳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러나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저주야.(73-76쪽)” 저자는 일에 대한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그런 마누엘이 퇴직을 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일 이외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누엘은 서글퍼집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회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누엘에게 천사는 “자네는 인생에서 무엇을 일구었나? 꿈꾸던 인생을 살았나?(79쪽)”라고 묻습니다. 마누엘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럴까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닐까요?


우울증에 빠져 살던 마누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코엘료는 헨리 드루먼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에 적은 “우리 삶의 정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리고 마누엘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의 마누엘은 죽는 순간 구원을 얻었다. 비록 삶의 의미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양했고,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했으니.(82쪽)” 그렇습니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면 거창해 보이는 삶의 의미까지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행길에 읽었으니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에 눈길이 갔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여행하기’라는 글은 제목까지도 독특한 것 같습니다. 코엘료는 철들기 전부터 최고의 배움은 여행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이순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늦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떻든 코엘료가 조언하는 다르게 여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박물관을 피한다, 2. 술집에 간다, 3. 마음을 열자, 4. 여행은 혼자서 가되,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와 간다, 5. 비교하지 말자, 6. 모두가 우리를 이해한다는 것을 이해하자, 7. 너무 많이 사지 말자, 8. 한 달 안에 전 세계를 다 보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9. 여행은 모험이다, 등입니다. 적고 보니 꽤 많습니다. 그리고 공감이 되는 점도 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든 코엘료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여행을 보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직’을 화두로 한 글은 고대 중국의 왕실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왕자비 간택령이 내려지자 궁에서 오래 일을 해온 여인의 딸도 나섰다는 것입니다. 간택이 될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오랫동안 사모해온 왕자님을 지근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왕자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택에 나선 처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왕자님의 준 씨앗으로 여섯 달 안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처녀가 왕자비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처녀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지만 화분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처녀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이지만 왕자님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궁궐로 갔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저마다 멋진 꽃이 자란 화분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지목한 사람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을 가져온 처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님이 나누어준 씨는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야 말로 ‘황후의 미덕, 바로 ’정직‘이라는 꽃을 피워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미래의 황후가 될 왕자비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정직‘이라는 생활태도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앎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도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터널이나 다리의 준공식 장면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글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준공식에는 발주처와 시공처 대표, 정치인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하객들과 함께 서서 준공테이프를 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코엘료는 겉으로 보이는 준공식의 장면에서 공사 중에 땀흘려 일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생색은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내지만, 그래도 자신만이라도 보이지 않는 얼굴, 명성도 영예도 쫓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그 얼굴들을 지켜보는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였던 아이다 미쓰오의 걸작 시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대목일 듯합니다. “(…) 꽃은 그저 한 송이 꽃일 뿐이나 / 혼신을 다해 제 소명을 다한다. / 외딴 골짜기에 핀 백합은 /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


저 역시 얼추 30개국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도시를 가보았기 때문인지 ‘죽은 후의 세계일주’라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과 의문이 같이 들었습니다. 코엘료 역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만큼 “우리의 몸을 세계 도처에 뿌려두면 어떨까. 만약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낯익은 무언가를 찾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독특한 장례절차를 치른 미국여성의 이야기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오리건주 메드퍼드에서 보낸 미국 여성은 정년퇴직을 하면 세계를 돌아보는 꿈을 키우며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뇌졸중에 폐기종까지 겹쳐 꿈을 이룰 수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로 가는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자신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화장한 뒤 유골을 241개의 작은 주머니에 넣어 미국 50개주와 전 세계 19개국의 우체국장 앞으로 보냈습니다. 고인의 뜻을 밝히고 유골을 고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동봉하였습니다. 그녀의 유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청을 정중하게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생명부지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형식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아메리카 어느 고아원의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고인을 위해 기도를 드린 뒤 정원에 유골을 뿌렸고, 고인을 고아원 아이들의 위한 수호천사로 모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아들은 다섯 개 대륙, 모든 인종과 모든 문화권으로부터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해준 사람들의 사진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인은 평생의 소원대로 자신의 몸의 일부일망정 항상 꿈꿔온 곳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코엘료는 이 이야기에서 고인이 독특한 꿈을 가진 것도 대단하지만, 아직도 우리 인간들의 영혼에 존경과 사랑과 관용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생각에서 희망을 부풀리게 만든다고 적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코엘료의 열린 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이르게 된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를 지적하는 ‘근거 없는 믿음’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1. 마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 2. 육식은 깨달음을 멀리하게 한다, 3. 신의 본질은 희생이다, 4. 신에게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가톨릭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코엘료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행동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
브라이언 스티븐슨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교도관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의 현장을 보면 사형제도를 존속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형집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체포된 경우가 아니라면 사형수의 범죄사실이 얼마나 완벽하게 입증된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결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이 쓴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록 미국의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만, 사형제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기회였습니다.


스티븐슨은 뉴욕 대학 로스쿨 교수이자, 비영리 법률 사무소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의 상임 이사입니다. 1959년 델라웨어 주 밀턴에서 태어난 스티븐슨은 1983년 하버드 로스쿨 재학시절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남부 재소자 변호 위원회(SPDC)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형수를 만난 뒤 형사 사법 제도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애틀란타로 가는 비행기에서 SPDC의 책임자 스티브 브라이트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후 SPDC에서 변호사업무를 시작하였고, 4년 뒤인 1989년 앨라배마 주에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를 열었습니다. 빈곤층, 흑인, 청소년,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무료 변호를 한 것입니다. “브라이언, 사형이란 <돈 없는 사람이 받는 처벌>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사형수를 도울 수 없어요”라는 브라이트의 말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의 첫 번째 저서입니다. 백인 여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된 흑인 월터 맥밀리언의 사건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례를 덧붙였습니다. 엄마를 폭행하는 동거남을 쏘아 죽인 14살 소년이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른 사건이나,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던 상이군인이 짝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는 일념으로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그녀의 조카가 죽는 사고로 역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 등이 더해졌습니다. 월터 사건은 남부지역 특유의 인종차별적 인식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사법제도의 맹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물론 스티븐슨이 의뢰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사형을 면하게 하거나 종신형을 감형받을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제도의 틀을 넘지 못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사례들도 인용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듭니다.


월터 맥밀리언을 변호하면서 스티빈슨은 ‘가난하고 결백한 사람보다 부유하고 유죄인 사람을 대우하기만 하는 형사사법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 즉 “자비란 희망에 기초해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해질 때 의롭다는 사실”을 월터로부터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Just Mercy"라고 정했을 것입니다. 자비는 누군가에게 힘을 불어넣고,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주며, 누군가를 변화시킨다고 저자는 믿습니다.


월터 맥밀리언 사건을 소개하는 첫 장의 제목은 ‘앵무새 죽이기’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앵무새 죽이기>로 유명한 여성 작가 하퍼 리의 고향 앨라배마 먼로빌은 이 사건의 주인공 월터 맥라이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먼로빌은 1960년대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던 <앵무새 죽이기>를 지역홍보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무고한 죄목으로 기소된 흑인남성을 용감하게 변호하는 백인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와 그의 딸 스카웃이 남부 특유의 인종적, 사법적 현실에 맞서는 모습에 많은 미국인들이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런 먼로빌에서 역시 무고한 월터 맥밀리언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1980년대의 후반입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앞세우고 있지만, 먼로빌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던가 봅니다.


1986년 11월 1일 늦은 아침, 열여덟의 백인 여대생 론다 모리슨이 먼로빌의 한 세탁소 바닥에서 세발의 총알을 맞고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월터는 자기 집 앞마당에서 종일 ‘피시 프라이’라는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많은 동네 사람들도 월터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가 모리슨 살인사건의 혐의를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수사관이 무모할 정도의 사건 끼워 맞추기를 시도한 까닭입니다. 물론 월터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있습니다. 우연히 만난 백인 여성 캐런 켈리의 유혹에 빠졌던 것입니다. 월터와 켈리의 밀애는 가족들에게 알려졌고, 월터는 켈리 부부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증인으로 소환되어 ‘친구’사이였음을 시인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구체적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먼로빌의 백인주민들로부터 월터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앨라배마주는 21세기까지도 <이인종 간 결혼 금지법>이 존속될 정도로 보수적인 곳입니다.


문제는 켈리가 마약에 손을 댔고, 새로 사귄 랠프 마이어스라는 백인 남자는 마약 중독을 넘어 심각한 범죄자였던 것입니다. 켈리와 마이어스는 살인사건에 휘말렸고, 수사과정에서 마이어스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수사관들이 모리슨사건 때문에 몰리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마이어스는 월터와 켈리가 모리슨 사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고, 수사관들의 주도로 사건을 짜 맞추기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월터의 국선변호인은 월터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재판부에 제시하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판부 역시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법제도의 독특한 구조의 하나인 배심원이 무작위 추첨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미국의 남부지역의 강력사건에서 소수민족이 관련된 강력사건의 배심원들은 대부분 백인들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지역주민 비례로 구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월터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월터는 사형수가 되어 형집행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인데, 마침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앨라배마주가 얼마나 보수적인가 하는 것은 스티븐슨이 월터의 변호사로 선임되자마자, 담당판사로부터 이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설교조의 훈계를 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사무실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를 받기도 합니다. 반면 흑인사회에서는 ‘자네는 정의를 위하여 북을 치고 있네’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검사측이 확보한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사형이 선고된 월터 사건의 항소과정에서 검사측이 내세웠던 증인이 증언을 번복하였음에도 항소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였습니다. 검사의 직권남용, 인종차별적인 배심원단 선정, 부적절한 재판지 변경, 심지어는 배심원단이 종신형 평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이를 번복하여 사형을 판결한 점까지도 모두 적법하였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월터의 무죄를 입증할 자료를 꾸준하게 모아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최초의 위증으로 월터를 함정에 빠트린 마이어스의 번복증언과 켈리의 증언도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판결을 앞두고 CBS의 인기 프로그램 「60분」에서 월터의 사건을 심층취재하여 보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지 월터는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판결을 앞두고 최후변론에서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억울하게 기소된 이 남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짓을 이유로 사형수 수감 건물에 보내기는 너무 쉬웠습니다. 반면 그의 결백을 입증하고 다시 자유를 찾아 주기까지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앨라배마 주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하며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 있습니다.(339쪽)” 그렇습니다. 충분하지 않는 증거를 토대로 유죄라고 판단하기는 쉽지만, 한번 내린 판결을 뒤집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판단도 신중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충분한 사유가 있다면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월터의 사회복귀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지역사회의 반감을 극복하는 문제와 생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월터는 감옥에서 나온 초반에는 활기를 보였지만, 점차 위축되어 갔고, 종국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강인한 인내심과 잘못된 결정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을 보여준 월터의 의연한 모습은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뿐더러 이런 이들을 도와주는 스티븐슨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충격적인 장면은 사형수를 전기의자에 앉혀 처형하는 장면의 묘사입니다. 1,900볼트의 전기 충격을 30초간 가하는 동안 전극을 부착한 부위에서 화염이 일고 불꽃이 튀었으며 살과 옷이 타면서 내는 강렬한 악취가 증인실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의사가 수인을 검사했을 때 아직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전기충격을 반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변호인은 주지사와 통화를 하고 있던 교도소장에게 형집행을 더 이상 진행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되었습니다. 잠시 뒤 다시 30초간의 전기충격이 가해졌고 그때서야 수인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실 도축장에서도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경우는 더욱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번에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충분한 강도의 충격을 가할 것이며, 한 번의 시도에 죽음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다시 시도를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드렸던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 http://blog.joins.com/yang412/12510155>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 의사가 입회하여 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는 일은 분명 생각해볼 일입니다. 필자의 경우, 전공 때문에 주검을 대할 기회도 많았고, 노환이나 질병으로 죽음을 맞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자살이나 사형의 집행과 같이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시키는 끔찍한 순간을 지켜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자리라면 사양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저지르는 강력범죄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신질환을 빌미로 처벌을 빠져나가려는 질 나쁜 범죄자와 진짜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환자를 제대로 구별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의학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적 양심에 따라 판단을 하여 사법적 판단이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 역시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에서 논의된 바가 있습니다.


사형수 월터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면서 저자는 미국 사회가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는 경향이 여전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범죄자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분노가 낳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형제도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죽일 자격이 있는가?(471쪽)’라고 묻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중해의 여행자, 트루바두르 지중해지역원 번역 시리즈 8
조세프 앙글라드 지음, 장니나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중해 여행’이라는 요즘 뜨는 용어와는 달리 트루바두르라는 이름은 생소하기만합니다. 그 생소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트루바두르(Troubadour)는 11-12세기에 흥성한 남프랑스의 오크어 음유시인이다. 좀더 늦게 흥성하는 북프랑스의 트루베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트루바두르들은 갖은 형식의 세속가곡으로 궁정연애를 노래했는데, 개중에는 planh (탄식), sirventès (풍자시), pastourelle (전원시), tenson (논쟁시), canso (칸소), 등이 있다.”고 합니다.


푸아티에 백작 기욤 다키텐으로부터 시작되어 14세기 최후의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기욤 드 마쇼로 끝을 맺는 트루바두르 시는 전개하던 시기(1090-1140년), 황금의 전성기(1140-1250년), 그리고 쇠퇴기(1250-1292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일대기가 남아 있는 트루바두르는 111명으로 전체 트루바두르의 4분의 1 수준이라고 합니다.


<지중해 여행자, 투르바두르>는 낭시대학이 1907-8년 겨울학기에 개설한 강의의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트루바두르들, 그들의 삶, 그들의 작품, 그들이 끼친 영향>이 원제입니다. 교재인 만큼 대중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중세 남프랑스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남프랑스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 라틴어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트루바두르 시를 노래한 언어적 특성으로부터 사회적, 예술적 특징 등에 대하여 기술하며, 몇 가지 대표적 시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트루바두르의 신분은 귀족으로부터, 성직자, 하층계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는데, 여류시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노스트라다무스는 제앙 드 노트르담(jehan de Motredame)이라는 트루바두르라고 합니다. 그는 상상력과 환상을 암시하며 정확한 사건들을 혼합하면서 트루바두르들의 전설적인 삶을 창조하였는데, 사람들이 신화에 불과한 속임수를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아름다운 기만과 문학적 농담 그리고 허풍이었다는 것입니다.


트루바두르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적이었는데,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가 봅니다. 가사만을 우리말로 옮기다보니 산문형식이 되어 원래의 느낌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프랑스 샹송과는 다른 장르인 샹송이라는 형식의 트루바두르 시의 예를 들어보면, “초록 수목과 잎이 보이고 꽃들은 과수원에서 활짝 피었네. 밤꾀꼬리는 높고 맑은 소리를 만들어 멋진 노래를 지저귀네. 새 소리를 듣는 나는 행복하고 꽃을 바라보아 기쁘네. 만족스러운 나, 나의 귀부인도 그러하네.(107쪽)”


노랫말에서 보는 것처럼 귀부인에게 바친 노래였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트루바두르와 귀부인과 사이에 연분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신분상에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는 주군의 부인과 염문을 뿌려 죽음을 맞거나 쫓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트루바두르는 결혼한 기혼여성에게만 찬미와 경외감을 바쳤다고 합니다. 찬미와 경외감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데, 사랑이 성숙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참을성이 필수적인 덕목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결혼한 기혼여성이 상대였기 때문에 연애에 있어 신중함은 반드시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신중함은 저 멀리 달아나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에두르는 듯해서 성에 차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직설적인 것이 때로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한번쯤은 에두르는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