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단어, 욕망을 삼키다 - 어원과 상식을 관통하는 유쾌한 지식 읽기
노진서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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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상식을 관통하는 유쾌한 지식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노진서교수님의 <영단어, 욕망을 삼키다>를 받아들고 보니, 같은 부제를 달아 선보였던 <영단어 지식을 삼키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77175>의 후속편이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30개의 영어단어의 내력을 동서고금의 자료를 인용하여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문에 적은 저자의 기획의도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언어라는 숲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저나마 그 나름의 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아보는 것은 숨겨진 그들의 비밀을 찾아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입니다.” 누군가의 뒷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어에 숨겨진 뒷이야기 역시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작과는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제목을 고려하여 30개의 영어 단어를 두 개로 묶어 각각 ‘욕망,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심연’과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고’라는 작은 제목으로 구분한 것은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단어의 유래라 하면 그저 반쪽 정도의 분량이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단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인용하여 읽는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단어의 유래를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다양한 유럽 민족의 고어는 물론 라틴어, 그리스어 심지어는 히브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까지 거슬러 뿌리를 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학에 대한 내공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기획을 하다보면 하나의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따라 글 내용을 배치하는 편이 쉬울 터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그 틀을 따라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포로수용소의> 경계선, 혹은 마감시한을 의미하는 'deadline'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말꼬리를 풀어냅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특히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사후세계를 상정하였고, 사후세계와 관련된 미이라의 어원을 따져 들어가기도 합니다. 저 역시 다양한 고정칼럼을 쓰고 있으니 원고의 마감시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만, deadline은 어떤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을 의미하는 마감시한이라는 의미보다 사후세계로 넘어가는 문턱 즉 죽음과 관련되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1861년 남북전쟁 때 남부군이 운영하던 조지아주 앤더슨빌의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탈주를 막기 위하여 막사 주위에 경계선을 쳐놓고 그 선을 넘으면 무조건 사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을 deadline이라고 했다니, 특히 글을 써서 투고하는 사람들에게 deadline 상징하는 의미가 아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간혹 저자가 인용하는 내용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씨가 생기게 된 동기가 한 동네에 사는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왠지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씨는 한 집안 사람임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동명이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듯합니다. 또 다른 예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규정한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가 편력기사의 흉내를 내기 위하여 세상을 주유해보기를 권유했던 것에 응한 것이니 엄밀하게 말하면 주종관계라기 보다는 계약관계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짚자면, 절대적 주종관계의 전형으로 인용한 일본의 사무라이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리는 희생정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단결하는 동지애, 이런 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 놓치고 있는 그것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요(145쪽)”라는 설명은 시대착오적 인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금 거시기한 느낌이 든 곳이 두어 곳 있었다는 말씀이고요. 전체 내용은 흥미롭고 상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책읽기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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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미학 - 2016 의사수필동인 박달회 제43집
박달회 지음 / 지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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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래된 일입니다만, 전공분야의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사수(射手) 노릇을 해주셨던 선배님께서 수필가로 등단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필’하면 ‘청춘예찬’이나 ‘낙엽을 태우면서’와 같은 정말 가슴이 뛰는 그런 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수께서는 사진, 원예, 그림그리기 등 다양한 재주를 가졌던 분인데 더하여 그 다양함이 글쓰기를 더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의업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수필을 쓰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분들이 모여 동호회 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 동호회 가운데 의사 수필가 동호회 박달회가 2016년 문집으로 내신 <삶의 미학>을 우연히 얻어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43집에 이른 것이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1974년부터 매년 한권씩 문집을 내오셨다고 합니다. 1974년이면 제가 예과 2학년에 다닐 무렵이니, 꽤나 오래된 동호회인가 봅니다. 이번에 <삶의 미학>에 수필작품을 내신 회원이 모두 15분이라고 하는데, 살펴보니 다양한 연배이신 듯합니다. 그렇다면 수필이라고 하는 공통분모를 두고 노장이 교감을 나누고 계신 듯해서 참 보기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동호회장께서는 발간사를 통하여 ‘진료에 여념이 없으실 텐데 틈을 내시어 (…) 각박해지는 의료현장에서 몸소 겪으시고, 터득하시고, 가슴 속 깊이 묻어두셨던 사연들’을 적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이러저런 글을 꽤나 많이 쓰고는 있습니다만, 수필이라고 할 정도의 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늘 헛헛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부러울 따름입니다.


열다섯 분의 회원들께서 쓰신 서른한 편의 수필을 담은 <삶의 미학>의 표제는 산부인과를 하시는 홍순기원장님의 글 제목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지난해 개봉한 프랑스 영화 <안젤리크>와 천상병 시인님의 시 <귀천>, 그리고 제주를 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인용하여 동심의 어린 시절로부터 젊음의 열정을 거쳐 죽음을 관조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의 사변을 담담하게 풀어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문집의 표제작으로 선정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의 미학’이라는 제목을 참 좋아하기 때문인지 한 번 더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서른한 편의 글을 음미하다보면 수필이라는 장르가 참 다양한 대상을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려하게 흘러가는 글이 있는가 하면 투박한 듯하여 오히려 일상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긴 글도 있습니다. 비슷한 연배이신데도 어떤 분들은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시는 내용을 담으셨는가 하면, 젊은이에 버금가는 듯한 삶의 단편을 담아내신 글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박종훈교수님의 <짝퉁시계>처럼 남에게 알리기가 쉽지 않은 경험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용감함도 배울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일상을 담은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에 빠져있던 ‘걷기’를 주제로 한 글을 쓰느라 며칠을 끙끙대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감에 쫓겨 제대로 다듬지도 못해 인쇄된 글을 읽으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던 것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소설보다도 수필에 더 눈이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긴장하게 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수필의 경우에는 길지 않으면서도 글에 빠져들다 보면 작가의 생각이 절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삶의 미학>처럼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는 수필집의 경우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 대한 앎을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좋은 점입니다.


<삶의 미학>이 수필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욕심을 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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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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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기욤 뮈소의 팬인 덕분에 그의 작품을 얻어 읽게 됩니다. <브루클린의 소녀>의 범죄 스릴러물이라서 감상을 적는데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아들 테오를 혼자 키우며 살아가는 베스트셀러 작가 라파엘과 소아과 의사 안나는 3주 후 결혼식을 앞두고 앙티브의 코트다쥐르 바닷가 펜션으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시작만 본다면 몇 건의 납치와 끔찍한 살인이 복잡하게 얽히는 범죄 스릴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라파엘이 안나에게 감추고 있는 과거가 있느냐고 묻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한다면서 연인의 과거를 묻는 사람치고 그런 과거가 있는 연인을 끝까지 사랑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날 감추었던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 것 같기도 하니,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브루클린의 소녀>를 읽다보면 잘나가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전 작품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던 기욤 뮈소가 자신이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졌나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더 있습니다. 몇 사람의 작중 인물의 독백을 삽입하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아마도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만, 반면 상황들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흩어진 조각들을 맞추려는 읽는 이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선호하는 설정 몇 가지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미국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띕니다. 그리고 의사가 등장한다는 점인데, 아마도 다양한 의학적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실제로는 클레어 칼라일이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이름을 차용한 안나가 앓고 있는 프리드라이히 운동실조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야기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여러 건의 살인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거나, 주인공이 저지른 것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특히 살인의 증거를 손에 넣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권력을 쥔 사람과 증거를 맞교환하고 마는 것은, 그저 해피앤딩을 위한 장치라고 하기에는 뭔가 찝찝함이 남는 것 같습니다. 아니 권선징악의 결말을 기대했을 독자의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었을까요? 특히 마지막 순간의 반전은 읽는 이의 의표를 찌르는데 성공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뭔지 억지스러운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헤밍웨이가 했다는 ‘파리는 언제든 가볼 가치가 있다. 당신이 그 도시에 제공한 것 이상으로 뭔가를 보상받게 될 테니까’와 같이 상황에 맞는 유명한 사람의 명언이 삽입되어 있는데, 책을 모두 읽고 보면 이 또한 앞서 말씀드린 마지막 반전을 준비하기 위한 맛소금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한 마지막 반전의 순간에 나오는 이런 대목은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세상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지. 부모가 되면 훨씬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무한히 약한 존재가 되기도 해. 자식을 잃은 슬픔과 좌절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거야. 평생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고통이 주어지니까” 그런 고통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 부분의 전제도 솔직히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은 아주 기뻤던 것 같습니다만, 돌아보면 평생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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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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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차 광우병파동으로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촛불의 의미를 새겨본 적이 있습니다. 촛불은 바람에 취약하기 때문에 거리로 가져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재료입니다. 그리고 촛불은 고요함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침묵한 가운데 홀로 밝혀져야 촛불의 존재가 더 커지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촛불은 그 미학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촛불을 거리로 끌고나가 들불로 만들어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 듯합니다.


2008년 광우병파동 때 촛불집회는 수입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인간광우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비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진원지였던 유럽에서도 광우병은 소멸된 질환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8년 당시 촛불집회를 이끌던 사람들도 이미 광우병 혹은 인간광우병이 과학적으로 통제된 질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실을 호도하였고, 국민들의 불안감을 부풀려 촛불을 들불로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민의를 보여주는 정도에 머물고 나머지는 정해진 절차에 맡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담으려다 보니 서두가 장황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소개하려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2008년에 촛불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읽었던 <촛불의 미학>을 쓴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이며 시인입니다. 그는 특히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는 과학사연구를 통하여 데카르트적 인식론과 비뉴턴적 역학 개념 등을 도출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객관적 과학 이론의 인식론적 방해물로 개입하는 인간의 꿈과 상상력의 존재, 그 무한 깊이의 힘과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것들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문학 작품을 두루 읽어가면서 그것들에 관하여 정신분석학적으로 음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물·불·공기·흙의 4원소에 대한 독자적인 ‘물질 상상력’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신비평 분야의 대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소개합니다.


바슐라르가 만년에 쓴 <공간의 시학>을 번역한 곽광수교수는 김현교수와 함께 <바슐라르 연구>를 저술할 만큼 바슐라르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앞에는 ‘바슐라르와 상징론사’라는 제목으로 바슐라르에 대한 옮긴이의 글을 실었습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평단은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전기적 비평사조가 물러나면서 정신분석적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테마비평 등 다양한 경향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은 테마비평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기적 비평과 테마비평의 차이점을 곽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자가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입장인 반면, 후자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비결정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7쪽)” 따라서 바슐라르의 입장은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한 정신분석적 비평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과 대립적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공기와 꿈>과 함께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데, <공간의 시학>에서는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공간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은 자체의 해석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총체적인 상징체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몽상과 추억의 뒤섞임의 복잡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데 반하여, 몽상의 현상학은 기억과 상상의 복합체를 풀어서 분간할 수 있다(106쪽)’라는 부분입니다.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시적 이미지를 시인이 삶에서 경험한 특정 요소를 이끌어다 설명하게 됩니다. 인과성(因果性)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으로, “작가의 생에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9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는 과정을 보면 작가의 생애에 대한 앎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결정론의 이론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적 이미지를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과 그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어낸 독자의 상상력은 반드시 일치할 이유가 없는 독자적(獨自的)인 것이라고 바슐라르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적 이미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관념론적 상상력 이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어떻게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가를 밝히는 사원소론(四元素論)이고, 둘째는 상상력의 그 독자적인 작용 자체를 밝히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상상력의 궁극성을 밝히는 원형론입니다.(10쪽)” 물론 이 셋은 전체로서의 상상 현상을 각각의 측면에서 조망하여 전체를 구성토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의 시학>의 머리말에서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의 근본적 과제를 천착하던 자신이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취해야 할 기본입장을 설명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지식은 물론 지금까지의 철학적 연구습관까지도 버렸다고 말입니다. ‘오직 시적 이미지를 읽는 순간에 이미지에 현전(現前), 현전해야 할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현전(現前)은 1.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다 2. 아주 가까운 장래 또는 지금, 3.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 4. 앞에 나타나 있음 등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보이는 바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의 철학이 있다면,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법열(法悅) 그 자체 가운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야하는 것(41쪽)’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적 이미지는 인과관계와는 반대로 민코프스키가 말한 ‘울림’이라는 것 가운데서 올바르게 가늠된다고 하였습니다.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지는 것이며, 이미지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민코프스키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그것의 울림을 체험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모두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장 ‘원의 형상학’이라는 제목에서 닫힌 공간에서 안과 밖의 의미를 수렴하고 있습니다. 집은 닫힌 공간의 안이며, 세계는 닫힌 공간의 밖이 될 것입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친근하면서도 내밀하고도 사적인 공간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방들과 그 방에 들어있는 서랍, 상자, 장롱 등의 사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조너선 D. 스펜서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 http://blog.joins.com/yang412/13778310>에서는 기억술 훈련으로 ‘궁전짓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틀에 해당하는 궁전을 짓고, 그 궁전 안의 방마다 특정사물과 연관시켜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 말입니다. 기억의 궁전에 들어서 사물을 만나는 순간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도록 훈련을 하면 많은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슐라르는 집의 이미지에서 기술심리학, 심층심리학, 정신분석 그리고 현상학 등을 통합한 심리적 통합의 원리를 도출해냅니다. 집은 내부공간의 내밀함의 가치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하기에 알맞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안에는 우리들의 추억들뿐 아니라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들도 ‘숙박되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무의식이 ‘숙박되어’있는 것은 우리들의 영혼의 거소(居所)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집들’을, ‘방들’을 회상하면서 자신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억의 궁전을 짓고 그 안에 머물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바슐라르의 내밀한 공간은 척추동물의 상징인 새들의 거소인 ‘새집’과 무척추동물의 상징인 조개의 거소의 ‘조개껍질’로 확장되면서 상상력의 활동범위에 대한 제한을 허물어버립니다.


내밀한 공간에 대한 설명을 마친 바슐라르는 닫힌 공간의 밖, 외부 공간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살펴봅니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시학에서의 큼과 작음의 변증법을 ‘세미(細微)’와 ‘무한’을 주제로 묘사합니다. 사실 닫힌 공간 밖의 외부공간의 영역은 무한할 수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의 영역의 세미함 역시 무한하다는 역설이 성립되므로 두 공간의 크고 작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편가름에 익숙해진 우리네 생각으로는 큼과 작음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그저 이미지 투사의 두 극으로 다루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집으로부터 시작된 이미지의 현상학을 닫힌 공간의 밖으로 확대시켰던 저자는 안과 밖의 변증법에서 수렴하여 이를 원의 현상학으로 정리합니다. 안과 밖의 변증법을 통하여 열린 상태와 닫힌 상태라는 개념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즉 마지막 장, ‘원의 현상학’에서 저자는 기하학적 원리에서 벗어나 둥긂의 내밀함이나 둥긂의 이미지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즉 ‘원의 현상학’을 통하여 바슐라르는 “메타포의 주지성(主知性)을 폭로하고 따라서 다시 한 번 순수한 상상력의 고유한 활동을 드러낼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슐라르가 개별 주제에 맞는 시적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다양한 시의 일부분이나 소설의 내용들이 많은 부분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슐라르의 설명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시작품의 경우는 전체 시를 읽고 음미해도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한 느낌이 남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평범해 보이는 이미지에 담긴 의미를 전하기 위하여 길게 부연설명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지라는 것이 정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릴케의 <서한선>에 나오는 ‘오 잠든 집의 불빛이여!’라는 시구(詩句)로부터 바슐라르는 밤 가운데 먼 지평선에 서 있는 오두막이 밝힌 등불의 이미지를 통하여 은신처의 응축된 내밀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구만으로는 이런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선한선>의 ‘내면일기초(內面日記抄)’에 나오는 릴케의 묘사를 인용합니다. 릴케와 두 동행인은 깊은 밤 가운데 ‘저 멀리 한 오두막집, 마지막의 오두막집, 들판과 늪들을 앞에 두고 지평선에 홀로 있는 오두막집의 불 밝혀진 창문을 발견한다.’ 외로워 보이는 불빛을 본 릴케는 ‘우리들은 고렇게 아무리 가까이 있었어도 소용없었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밤을 보는 고절된 세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120쪽)’ 이쯤 되어서야 책읽는 이는 ‘우리들은 고독에, 외로운 집의 시선에 최면당하는 것이다.’라는 바슐라르의 설명에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슐라르를 전공하신 옮긴이가 10여년 매달려 번역을 마치고는 머리를 내흔들었다고 한 것을 보면 번역도 어려운 만큼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의 의미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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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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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따르면 철학은 ‘존재, 지식, 가치, 이성, 인식 등의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대상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합니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영어 필로소피(philosophy)는 고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인간과 자연을 관조하는 지식, 즉 학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위키백과는 “앎, 즉 배움과 깨달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라서 지식과 지혜를 사랑하는 삶의 태도”라고 철학을 다시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이라는 선입견이 생긴 것은 철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만들어낸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대논쟁! 철학배틀>은 철학에 대한 선입견을 깨려는 시도라고 보았습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인간 삶의 본질을 밝히기 위하여 철학이 추구하는 화두는 가져오되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토론형식을 취하여 쟁점을 논하는 방식입니다. ‘토론’이라는 형식도 요즈음 뜨고 있는 배틀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주제와 관련이 있는 대표 철학자들을 배치하여 격돌하는 구도를 갖추어 흥미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모두 15개의 주제를 골라 15라운드로 구성하였는데, 아마도 과거의 권투의 세계챔피언 결정전 방식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3라운드를 뛰는 아마추어와 달리, 프로권투는 출전선수의 경력에 따라서 3분 4,6,8,10,12라운드로 경기가 치러집니다. 신인의 경우 4라운드를, 국내챔피언전은 10라운드를 지역 및 세계챔피언전은 12라운드경기입니다. 1982년 우리나라의 김득구선수가 경기 중에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챔피언전은 15라운드의 경기를 치렀습니다.


라운드마다, 즉 주제마다 출전선수와 숫자까지도 다르기 때문에 권투경기와 철학배틀이 직접 비교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떻든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게다가 격돌을 중재하는 심판으로 문답법을 창시한 소크라테스를 모셔서 토론을 유도하고, 토론을 중재하며, 토론을 마무리하는 방식입니다. 권투경기와 다른 점은 채점을 하여 승패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토론이 종료된 다음에 심판이 토론자의 주장을 요약정리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출전선수들의 사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흑백이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취향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출전선수들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라인을 비롯한 기원전 5세기 무렵의 그리스 철학자는 물론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공자와 맹자, 장자와 순자로 이어지는 일군의 고대 동양의 사상가들에 더하여 일본의 철학자와 인도의 간디를 끼워넣은 것은 저자의 배려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모두 37명의 출전선수집단을 구성하였는데, 주제에 따라서는 다수의 라운드를 뛰는 선수도 있습니다. 헤아려보니 칸트가 가장 많은 5라운드에 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니 동양철학자들은 모두 한 라운드만 출전하고 말아 끼워 넣기 차원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주제에 따라 대표적인 철학자를 배치한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첫 라운드의 ‘빈부격차는 어디까지 허용될까?’라든가 세 번째 라운드의 ‘소년범죄, 엄벌로 다스려야 할까?’ 등과 같이 현대에 들어 떠오르고 있는 철학적 화두로부터 ‘인간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계에 진리는 존재할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까?’ 등과 같이 해묵은 철학적 화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출전선수 역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현대적인 쟁점을 과거의 철학자라면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배려도 엿보입니다. 작가가 그만큼 신경을 쓴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점잖은 동양선수들과는 달리 서양선수들 가운데는 ‘선생이야말로 병적인 부분이 있군요’라고 깐족대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그 선수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한 배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헤겔이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철학이 제3제국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룬 다양한 문제들은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나 가치 판단의 철학적 논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수들이 주고받는 문답에 들어있는 핵심요소들에 대하여 각주로 설명을 달아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라운드의 말미에 소크라테스의 요약과 함께 저자 역시 한줄로 핵심을 요약해놓아 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점도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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