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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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읽기에 <프라하의 묘지> 하나를 더합니다. 에코는 이 작품에서 ‘거짓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잘못된 편견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비판도 일었다.’라는 평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이 있습니다. 유럽의 반유대인 정서를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이 세계지배를 획책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1921년 런던 타임스에 의하여 허위임이 밝혀졌음에도 나치의 유대인 박해의 근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에코는 시모니니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반유대인 정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산되었는지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시모니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존인물이라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시모니니가 가상의 인물이니 그가 실존인물과 주고받은 관계 역시 허구라고 하겠지만,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옮긴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듯 책의 말미에서 읽는 이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아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연표를 제시하면서 책읽기에 참조하기를 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로 인하여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구심같은 것이 새롭게 생겨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83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난 시모네 시모니니는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조부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과 예수회 그리고 프리메이슨을 증오하게 됩니다. 그는 남의 글씨체를 모방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아 그들의 주문에 따라 활동하게 됩니다. 문서를 위조하여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을 하는 만큼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간단하게 생각하는 괴물이 되어갑니다. 이러던 가운데 자신이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는 사건을 만나게 되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매일 정리하기 시작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프라하의 묘지>를 읽다보면 매일 글을 쓰다보면 책이 한권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행인이 있어 1897년 3월의 그 우중충한 아침나절에....’로 시작되는 첫 문장은 이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 앞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고백은 1897년 3월24일 시작하여 4월 19일까지 매일 적은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중단되었다가 1898년 11월 10일이 이어졌다가 12월 20일 기록을 마지막으로 합니다. 화자는 시모니니인데, 중간에 달라 피콜라신부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시모니니의 글을 반박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달라 피콜라신부는 결국 화자 시모니니의 제2의 인격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시온장로의 프로토콜>이 프라하의 게토에 있는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지난 동유럽여행에서 게토까지는 가보았지만, 공동묘지는 보지 못해서 실감을 더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찾아보니 <시온 의정서>라는 제목으로 두 종의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하나는 시온 의정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으로 시온 의정서의 내용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섬뜩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시온의정서의 허구를 파헤치는 비판서입니다. <푸코의 진자>에서도 성전기사단이 등장합니다만, <프라하의 묘지>에서도 프리메이슨과 성전기사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실체의 유무를 떠나 유럽 사람들이 이런 단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모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감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우리사회의 분위기도 이를 닮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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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 - 세계현대작가선 8
께이스 노오떠봄 / 문학세계사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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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감독 덕분에 많이 가까워진 네덜란드입니다만, 문학동네에서는 그전에 이미 네덜란드 작가 께이스 노오떠봄을 소개하였던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생소한 느낌의 기행소설이라는 장르의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으로 말입니다. 기행소설이라 함은 기행문의 일종이면서도 일관된 주제가 설정되어 있으며,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세련되게 조형화하여 주제를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작가 자시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노오떠봄은 사물에 대한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인상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그의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는 여행 중에 자주 묘지를 찾아가는데, 그곳을 거짓된 감상을 배제하고 인간들의 도난당한 삶들을 모아놓은 도서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계, 한 명의 여행자(1989)>에서 밝힌 그의 여행관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왜 여행을 하느냐고 자주 묻는다. 그럴 때면 아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지금, 왜 내가 여행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은, 내가 자의적인 한 사람으로, 비옷을 입고 고물자동차에 탄 채 이제는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들이 서 있는 폐허가 된 공장지대를 지나고 있는 것과 같다. 내 입장과는 무관한 것, 순간의 우연성, 장소의 임의성 바로 이런 것들이 여행의 이유다.”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은 일본, 페르시아, 감비아, 독일, 영국, 마데이라, 말레이시아 등의 여행기록을 담았습니다. 그는 현지의 신문 속에 나타나는 정치, 경제, 문화적 사건들을 인용하며, 예술과 건축에 대한 미학적 분석을 담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치적 현안을 역사적, 문화사적 시각에서 풍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첫 번째 여행기록인 ‘천황의 생일, 문물의 파토스와 다른 일본 체험’이라는 제목의 동경여행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그의 기행문은 이내 한 장의 사진을 끌어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열두어 살 때 보았던 사진인데, 손을 묶인 채 눈을 가린 호주 전쟁포로가 앉아있고, 그 뒤로 커다란 칼을 양손으로 쳐들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일본의 정원, 사찰, 꽃다발 등을 보면서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일본체류에 대하여 그는 “나는 일주일 내내 물 위를 걸어다녔다는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30쪽)”고 적었습니다. 특히 전에 보았던 공원에 있는 연못의 검푸르고 비단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물 위를 계속 글어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물의 밑바닥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투병하지 못했지만 내 몸을 지탱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물 위를 나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 문화가 외형적으로는 서구화된 듯하지만 이질적인 면이 있고, 특히 나라는 낯선 사람은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944년 사이판섬의 일본군 집단자살사건, 가미가제 조종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옥쇄함으로서 본토를 사수하자는 등의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원자폭탄의 사용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개진하기도 합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은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페르시아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비밀스러운 빛’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스파한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심이자 압바스왕조의 거점이라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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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 김영사 모던&클래식
로버트 노직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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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로버트 노직교수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북소리]에서 소개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우선 든 의문은 정말 소크라테스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하는 마지막 질문을 남겼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그 점에 관하여 따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가 구분한 스물여섯 가지의 주제가 가치 있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도 의문에 포함됩니다.


애나 로버트슨 브라운은 1893년에 쓴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What is worth while?>라는 제목의 책에서 “단 한 번의 삶이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Only one life to live! We all want to do our best with it.)”라고 서두를 떼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로버트 노직교수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로 돌아와 보았더니 이 책의 원제는 <The Examined Life>입니다. ‘성찰하는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은 아마도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서 출발한 저자의 사변(思辨)을 나타내기 위한 제목으로 보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정할 때, 비록 37쪽에 불과한 책이지만 애나 로버트슨 브라운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와 헷갈리게 할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해보았더라면 좋았겠습니다.


다시 ‘성찰하는 삶’으로 돌아가서 노직교수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삶에 대한 성찰은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고, 그럼으로써 당신을 완전히 구현한다. 다른 사람이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결론과 잘 어울리고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어떤지를 보지 않고서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11쪽)”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정도는 되어야 누군가의 삶에 대한 성찰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겠다’, 뭐 이런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기원전 469년 – 기원전 399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 무렵 아테네는 몰락 중으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진보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정신이 힘을 얻어 격돌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던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철학의 이론체계가 자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사실’에 관한 ‘명제’를 고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제자 카이레폰은 델포이 신전에 가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하고 아폴로 신에게 물었고, 신전의 무녀는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라는 신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스스로는 무지하다고 생각해오던 소크라테스였기에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참된 지혜를 아는 척했지만,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신전에 새겨진 ‘Gnothi Seauton(너를 알라)’을 외고 다녔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 때문에 ‘가장 현명한 아테네인’이라는 신탁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다음백과의 내용을 요약함)


플라톤 이후로 철학적 전통은 도덕적 행동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전제한 노직교수는 그러기 위하여 먼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해해야 하고, 그에 의거하여 도덕적 행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을 숙고하려는 시점에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내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라고 고백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어떤 입장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온전한 인간 존재만이 관심의 대상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2차적 묘사에 기초하여 광범위한 왜곡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저자는 “어떤 독자도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이 책에서 슬로건이나 표어를 끌어내 제시하지 말고, 어떤 학교도 여기에 담긴 내용에 대해 시험을 치지 말 것(406쪽)”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북소리]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인용하고, 요약하기로 하였습니다. 책이 되었건 글이 되었건 쓴 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읽는 이의 뜻에 따라 해석되거나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우려하였다면 글을 쓰거나 책을 내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작가소개가 늦었습니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교수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사상가로 손꼽히는 미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입니다.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원 시절 ‘소크라테스적 논변’으로 기존의 철학적 입장을 논파하여, 천재 철학자로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적 난제(Socratic Puzzles)>는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이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이론 등은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데,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이 주요한 출처입니다.


저자는 ‘죽음’이라는 화두로 시작한 이야기를 ‘어느 젊은 철학자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26개의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죽음’, ‘부모와 자식’, ‘창조’, ‘신의 본질, 믿음의 본질’, ‘일상의 신성함’, ‘성’, ‘사랑의 유대’, ‘감정’, ‘행복’, ‘초점’, ‘더 진실한 존재’, ‘무아’, ‘태도’, ‘가치와 의미’, ‘중요성과 무게’, ‘실재의 행렬’, ‘어둠과 빛’, ‘신학적 설명들’, ‘홀로코스트’, ‘깨달음’, ‘모든 것의 정당한 몫’, ‘철학자가 사랑하는 지혜’, ‘이상과 현실’, ‘지그재그 정치학’, ‘철학의 생명’, 그리고 ‘어느 철학자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각장의 주제는 독립적인 듯 보이지만, 내용을 보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의 장을 떼어서 따로 읽어도 충분히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본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논의함이 전혀 생뚱맞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기를 꺼리는지는 그가 이루지 못하고 남긴 것에, 그리고 일할 수 있는 여분의 능력에 좌우된다.(24쪽)’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노화는 일할 능력을 줄여 죽는 순간에 느끼는 후회의 양을 감소시킨다,’라고 설명합니다. 꿈꾸었던 것을 모두 이룬 다음에도 힘이 남아돌아간다면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삶은 불멸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멸을 꿈꾸는 사람은 특히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가 소멸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소멸은 음울하지만 불멸도 어두운 상상과 곧잘 어울린다.’라는 저자의 설명이 쉽게 와 닿는 것은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에서 잘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어지는 주제 ‘부모와 자식’에서 ‘죽음’ 이후의 삶의 의미를 조금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자식을 인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자식을 통하여 자신의 삶 혹은 정신을 후세에 전할 수 있다면 이는 다른 의미의 불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후손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부(富) 이외에도 정신적인 것도 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신성함’이라는 주제는 삶에 집중하고 주의하는 신실한 마음가짐을 논합니다. 먹고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을 신성하게 여길 때 우리는 세계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우리의 탐구, 대응, 관계, 창조활동을 무한히 받아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제 ‘성’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설명하고, 다음 주제 ‘사랑의 유대’로 발전시켜나갑니다. 사랑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안녕을 추구하는 심리적 행위입니다. 폐쇄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적 자아를 우리라는 개방적인 속성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낭만적인 우리를 이루고 나면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다는 심리가 생길 수 있지만, 각자는 상대방에게 독립적이고 당당한 개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이면서도 개인적 존재를 인정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열린 관계에서는 감정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데, 감정은 믿음, 평가 그리고 느낌이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홉 번째 주제는 ‘행복’입니다.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삶에서 ‘행복’이 중요하지만, 유일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삶의 서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얼마간의 행복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여러 개별 감정이 행복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어떤 것은 감정이라기보다 기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행복감정을 첫째, 어떤 것이 사실이어서 행복한 상태, 둘째, 지금의 삶이 좋다는 느낌, 셋째, 전체적 삶에 대한 만족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각각의 행복감정은 믿음, 긍정적 평가, 그리고 느낌이라는 3중 구조를 보이지만, 믿음과 평가의 대상이 각기 다르고, 느낌의 성격까지도 다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열한 번째 주제 ‘더 진실한 존재’에서는 어떻게 참된 자신을 만날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참된 자신이라 함은 행복이나 쾌락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인 상태를 이르는 실재(實在)를 말합니다. 실재는 가치, 미, 생생함, 초점, 통합을 포괄하는 보편적 개념인데, 다양한 차원의 많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재를 높이와 깊이의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우리의 삶이 이상과 이해와 깊은 감정을 갖추게 되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열두 번째 주제 ‘무아’에서는 실재를 구현하기 위한 다른 경로를 설명합니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자아를 버림으로써 실재를 얻게 된다는 역설적인 설명입니다. 열네 번째 주제 ‘가치와 의미’에서는 실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열일곱 번째 주제 ‘어둠과 빛’에서는 실재의 발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합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거나 비도덕적 방향을 가진 차원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부정적인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극과 고통이 상황을 완전히 압도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면 더 큰 실재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존중의 윤리, 대응성의 윤리, 배려의 윤리, 빛의 윤리라는 윤리의 네 층으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실재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차원이 등장하더라도 최소 훼손의 원칙으로 묶여 있는 존중과 대응성이라는 윤리의 두 층이 이를 제한하기 마련이고, 이어진 배려의 윤리는 보살핌과 관심으로부터 친절함, 더 깊은 자비, 사랑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실재의 차원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빛의 윤리는 실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스무 번째 주제인 ‘깨달음’은 역시 동양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만, 삶의 아픔과 고통을 줄여주는 경험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재의 최고 목표를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성찰하는 삶’에 대한 철학적 사변에 더하여 개개인들이 다양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정치원리를 설명한다거나 새로운 목표를 향해 이성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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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윌리엄 하블리첼 지음, 유영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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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장비가 발달함에 따라서 요즈음에는 의료현장에서도 많은 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조합하여 진단을 결정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이야기 혹은 환자를 진찰하여 얻는 정보에는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인데, 그렇다면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의학공부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알파고 의사를 만드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환자와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의사선생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의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입니다. 병마와 싸우면서 오래 남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지상의 모든 곳으로 행복을 옮겨가는 데 열중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상처투성이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결코 꿰맨 자국이 없었다.(7쪽)”라고 그는 말합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운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열세 개의 이야기들은 각각의 제목처럼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합니다. ‘인생에 귀를 기울이는 법’, ‘인생에서 베풀어야 할 것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마지막 시간’, ‘카르페 디엠’, ‘죽음은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다’ 등등 이제는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있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병아리 의사 티를 벗은 두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앞서도 요즈음 의사선생님들은 환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자는 “훌륭한 의사는 모두 경청하는 사람들이다(39쪽)”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의사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경청하는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 실려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울리는 바가 컸던 이야기는 ‘행복은 어떻게 옮겨가는가’였습니다. 저자가 병동진료팀 지도교수를 맡았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병동진료팀은 약대생, 의대생, 인턴, 레지던트들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의대4학년생인 앨런의 호출을 받고 응급실에 간 저자는 아들과 함께 도시를 지나다가 차에 문제가 생겼던 모자를 만나게 됩니다. 응급실 의사는 어머니가 폐렴이 의심되므로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앨런은 엑스선사진은 물론 검사결과 등이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라면서 저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를 진찰한 저자는 아들에게도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에 앨런을 불러 그녀를 입원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20달러를 주면서 아들에게 저녁을 사 먹이라고 지시합니다. 분명 입원까지 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앨런은 당황하지만 그래도 지도교수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회진시간에 앨런은 밤을 지새면서 의학과 의술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를 보았고, 지도교수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왜 입원시켰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입니다.


환자 진료에서 의학적 지식을 성공적으로 펼치는 것만으론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저자는 앨런이 깨달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앨런은 그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환자를 둘러싼 제반 환경을 제대로 파악해야 완전한 의료행위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 역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을 시작할 무렵 섬기는 삶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경험이 환자진료에 임하는 그의 철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후배들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의사들은 자신이 환자를 치유시킨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환자의 질병은 자연이 치유하는 것이고 의사는 곁에서 조금 도와주는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이 치유하는 동안 환자들을 즐겁게 하라’는 좌우명을 가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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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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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그렇지만, 직업적 특성 때문에 죽음에는 아주 익숙한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냉정하게 뒤쫓은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입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보통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21세기 초 어느날 뉴저지 턴파이크 가까운 있는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시작합니다. 장례식에는 고인의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두 번째 부인과 딸, 형과 형수, 그리고 그의 간호사를 비롯한 지인들입니다. 장례의식은 딸 낸시의 주제로 진행이 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좌우명처럼 하던 말을 아버지에게 돌려줍니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13쪽)” 그의 형 하위가 동생의 삶을 기억해냅니다. 비범한 듯 평범한... 이들의 장례식도 우리네와 많이 비슷합니다. 아니 우리네 장례식이 닮아가는 것인가? 하관을 하면 직계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흙을 뿌리고 고인과 작별을 하는...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대식 장례절차에서는 평토작업까지도 고인의 가족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대개 뒷마무리를 하는 전문가들이 맡아 하는 일입니다만.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에브리맨’ 이라는 이름의 보석상을 운영하는 유대계 아버지와 온화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결혼식에 예물이 있어야 한다면서 외상으로 해주기도 하는 마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모험을 싫어한 그는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때려치우고 광고회사에 취직하게 되는데, 덕분에 주변에 여자들이 꼬이고, 그 또한 여자 꼬시는 일에 적극적입니다. 이런 그의 성품이 세 번에 이르는 결혼을 망가뜨리고 후회하는 결과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과 그 사이에서 난 딸 낸시와는 가까이 지내면서 왕래하지만, 첫 부인 사이의 아들과는 데면데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작별을 할 때도 ‘편히 주무세요, 아버지’라고 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부드러움, 애통함, 사랑, 상실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병원신세를 자주 졌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탈장수술을 받기 위해서 입원한 것이었는데, 옆 침상의 어린이가 죽는 것을 보면서 병원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심혈관이 좁아서 스텐트를 넣거나, 경동맥이 좁아서 역시 스텐트를 넣는 등 병원신세를 지지만 그때마다 큰 문제없이 수술을 마칩니다. 물론 마지막 입원에서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적 병원에서 죽음을 느낀 이래로, 젊어서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았던 모양입니다. 두 번째 부인과 해변 데이트를 할 때도... “유일하게 불안한 순간은 밤에, 해변을 따라 함께 걸을 때 찾아왔다. 힘차게 쿵쿵거리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바다와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피비는(둘째 부인) 환희에 젖었지만 그는 겁을 먹었다. 바로 몇 미터 밖에서 천둥소리를 내는 바다-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뭍 밑의 검디검은 악몽-와 만나면 망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아늑하고, 환하고, 가구가 별로 없는 집으로 달아나고 싶었다.(37쪽)” 사실 한 밤중에 썰물이 빠져나간 긴 모래사장을 걸어 바닷가로 내려가다 물가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갑자기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그 속에 휩쓸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거칠 것이 없는 그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거나 남을 배려하는 모습은 전혀 없는 독불장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녀와 부인, 그리고 형님까지 참석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목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가 불행하게도 자신의 가정은 화목하게 가꾸지 못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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