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 아고라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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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나 피하고자하나 피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다만 죽음을 어떻게 맞는가는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그리다>는 그런 선택에 도움을 줄만한 책읽기였습니다.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처럼, 16세기말에 죽은 몽테뉴로부터 20세기 말에 죽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이르기까지 사상가와 문호 23명이 죽음을 맞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저자는 평소 ‘작가들의 마지막 말과 글을 모은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자료에서 발췌한 인용문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흐름이 끊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도 그러한 인용문들이 전하는 작가들의 최후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실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저 작가들이 남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과 글 중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살펴보고,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작가들의 모습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려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몽테뉴는 ‘죽음은 우주 질서의 일부이자 삶을 이루는 한부분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바라지도 말라(29쪽)’는 말을 남겼습니다. 몽테뉴는 평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을 뿐 아니라 그의 수상록에서도 죽음에 관한 내용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마무리하지 못한 그의 수상록을 조만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스칼 역시 죽음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팡세> 역시 죽음에 대한 글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파스칼은 얼떨결에 당하는 죽음보다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고 싶었나 봅니다. 생트 뵈브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파스칼은 아주 슬퍼 보였지만, 그래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죽어갔다. 죽음을 맞는 순간, 그는 갑작스럽게 힘이 빠지는 듯 보였지만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팡세>의 마지막 몇 장과 비슷한 구성이 있다(58쪽)’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주관적인 묘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얼마 후에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알 수 없는 건 피할 수없는 죽음의 정체다(65쪽)’라고 한 것을 보면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그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자주 만났던 세비네부인의 경우 ‘난 죽는 게 너무 두려워, 그래서 삶을 더 증오하지. 살면서 고통을 겪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니까(77쪽)’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발자크의 죽음을 전하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대문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들을 저자가 어떤 시각에서 다루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기작가들은 유명인들을 단정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미화해서 후대에 선보인다. 하지만 나는 유명인들의 결점, 실패, 비밀, 분노, 범죄, 악행, 우스운 짓, 수치스런 행동에 더 관심이 있다. 그게 더 글 쓰는데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138쪽)’ 사실 선정적인 내용에 독자들이 더 관심을 가진다는 속설에서 저자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었나 봅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23명의 대문호들에 대하여 흔히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때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 저자 덕분이겠지요.

대부분의 인사들이 자연사를 맞았습니다만, 부인과 함께 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경우 자살한 경우입니다. ‘표절된 죽음’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처럼 그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트 포겔의 죽음을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그리다>를 쓴 작가 스스로 고백한 짓궂은 면모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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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김영사 모던&클래식
존 스타인벡 지음, 안정효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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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오클라호마에서 콜로라도로 이어지는 주간도로를 달렸던 기억을 떠올려가면서 <분노의 포도; http://blog.joins.com/yang412/=13270230>를 읽던 기억이 있습니다. 황량하기 만했던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조드의 가족에게 희망은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읽었던 <찰리와 함께 한 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3260454>에서는 작가가 미국과 미국인에 대하여 품고 있는 사랑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억들이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을 읽게 만들었던가 봅니다.

이 책에서는 번역을 맡으신 안정효교수님이 ‘존 스타인벡과 아메리카 다소간 개인적인 시각으로 살펴본 작가론’이라는 제목으로 쓴 꽤나 긴 해제를 덤으로 읽을 수 있기도 합니다. 안정효교수님은 이 책에서 생태의식과 자연숭배 성향을 실감하게 된다고 하였고, 그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으며, 아메리카의 역사를 얼마나 자랑으로 삼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스타인벡은 역설적으로 ‘이 책은 수치심을 초월한 개인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라고 머리말을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제목 하나하나에서도 옮긴이가 말한 조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저자는 E Pluribus Unum(여럿에서 하나)라는 미국의 표어를 제목으로 하여 미국이라는 나라가 온갖 종족과 인종이 모여 이루어진 나라임을 되새깁니다. 또한 400여년에 걸친 고된 노동과, 피흘림과, 외로움과, 공포가 이 땅을 창조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인디언은 그들을 말살시키려는 우리의 노골적인 의도를 이겨냈다(103쪽)’라고 적은 부분은 그들을 미국인의 하나로 인식하지 않은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남기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모순과 꿈’에서는 미국인들이 ‘불안정하고, 불만으로 가득차고,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편견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청교도적이지만 사적으로는 방탕자인 국민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117쪽)’라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숭고한 인간에 대한 막연한 열망을 여전히 꿈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인들은 ’예외 없이 정치적이거나 종교적, 관료적인 권력이 지속되면 두려움과 증오를 느낀다(136쪽)‘라고 적었습니다.

왕조시대에서도 민란의 형태로 이러한 두려움이 표출되기도 하였습니다만, 최근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도 권력이 교체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 사회로도 전이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전이가 아니고 모든 사회에 내재된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옮긴이가 짚었습니다만, ‘아메리카인과 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 땅으로 이주한 ‘초기 사람들은 이 땅을 마치 그들이 증오하기라도 하듯이, 일시적으로만 차지하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쫓겨날 처지인 듯 약탈했다(227-228쪽)’라고 비판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조상이 한 행동을 그래도 되풀이해서, 확실한 현재의 이득을 얻으려고 미래로부터 도둑질을 한다(28쪽)’라고 비난합니다.

‘아메리카인과 세계’라는 글에서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모든 예술과 모든 문화와 모든 지식이 유럽에서 기원한다고는 믿지 않는다’라고 적어 미국인들이 이룩한 문화적 학문적 성과에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메리카인과 미래’에서는 미국이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으며 뿌리채 뽑아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할 심각한 질병에 대하여 논합니다. 저자의 이런 생각을 읽으면서 작금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역시 이와 같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스타인벡과 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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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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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으로 진단받은 엄마가 치료를 받는 과정을 함께 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기획한 편집장 윌 슈발브가 그 아들입니다. 그래서 ‘함께 한’을 제목에 넣었나 봅니다. 췌장암이라고 해서 모두 예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췌장암으로 진단을 받게 되면 오래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5년 생존율이 5-10%이고, 생존기간의 중앙값이 6개월 정도, 즉 진단이 내려지면 6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진단 시 병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췌장암도 부위에 따라서는 일찍 발견되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많이 진행이 되어서야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인 엄마의 경우는 진단을 받고 20개월 이상 생존하였는데, 평소의 생활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판사의 편집장을 지내는 아들처럼 저자의 엄마 역시 책읽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에 보기 힘든 북클럽을 만들었습니다. 엄마와 아들, 단 두 명이 함께하는 북클럽입니다. 같이 읽으면 좋을 책을 서로 골라주고, 엄마가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동안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엄마와 내가 각자의 여행에서 어디에 있든 간에, 여전히 우리는 책을 공유할 수 있고, 그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결코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되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49쪽)’ 사실 책읽기가 다양한 치유의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저자의 엄마는 대단한 분이기도 합니다. 난민, 특히 여성과 어린이에 관심이 많은데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즉각 실행에 옮기는 행동파이기도 합니다. 폭탄이 쏟아지는 다르푸르, 보스니아 등의 전쟁터에 뛰어들기를 불사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도, ‘우리는 그냥 지금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니(53쪽)’라고 담담하게 진단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런 그녀가 삶의 마지막까지 매달린 사업은 아프카니스탄에 도서관을 건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정도는 암을 억제해오던 항암화학요법이 제 역할을 못하는 단계에 오자 실험단계에 있는 치료까지도 거부하고 보존요법으로 제한하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비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암환자들이 적지 않는데도, 그녀는 이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로 삶의 마지막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북클럽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생소한 것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많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서도 제가 읽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책읽기가 편협한 것 아닌가 되돌아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두 사람은 신간도 읽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책읽기라는 것이 언제 읽었느냐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버니 시겔의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만든다> 등은 읽어본 책이라 위안이 되었습니다. “한 번 읽고 나서도 다시 읽고 싶을 만큼 근사한 책이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저 실없는 책을 집어드는 게 힘들더라구(211쪽)”라는 대목은 저의 책읽기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이 책의 작은 제목에 달려있는 책은 읽어보려고 생각합니다.

주치의 오라일리박사의 치료과정도 주목할만 합니다. 환자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으리라는 언급을 해주기보다는 환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들어주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치료를 처방하고, 가능한 좋은 시간이 많이 남이 있기를 바라는 환자를 위하여 효과와 부작용을 조율하면서 치료 일정을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대체적으로 환자의 상황 보다는 치료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 의사들이 참고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든 책읽기는 물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등을 많은 것을 생각해보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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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화가들 -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기행
금경숙 지음 / 뮤진트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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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플랑드르(Flandre)지방은 네덜란드어로는 플란데런(Vlaanderen)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에 따라서 영역이 바뀌어왔다고 합니다. 보통은 중세 시대 플랑드르백작이 다스리던 프랑스의 북부 노르파드칼레에 속하는 노르 주의 일부, 벨기에의 서부 저지대의 베스트플란데런 주와 오스트플란데런 주 그리고 네덜란드의 남서부 제일란트 주의 남방 일부를 포함하는 백작령을 말한다고 합니다.

근대 유럽 화단에서 걸출한 화가들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서 활동했다고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플랑드르 화가들>에서 소개한 열두 명의 화가들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얀 판 에이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루벤스,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반 고흐, 페르낭 크노프, 제임스 엔소르, 피트 몬드리안, 르네 마그리트 등 열두 명의 화가들은 그림에 대하여 잘 모르는 저도 대부분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들은 15세기 초반에 프랑드르화풍의 새지평을 연 얀 판 에이크로부터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르네 마그리트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플랑드르 화가들>를 쓴 금경숙님은 2006년부터 네덜란드 남쪽의 작은 지방도시 루르몬트에 살며 네덜란드는 물론 벨기에 등을 돌아보면서 얻은 것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열 두명의 화가들의 작품활동은 물론 생애에 관한 이야기들을 그들이 생활했던 장소를 직접 찾아가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책읽기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맛깔스러운 단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얀 판 에이크가 활동했다는 마세이크를 마스 강이 크게 돌아가는 물동이 마을이라고 비유한 부분, 누구의 것인지 딱히 집어낼 수 어금지금한 그림들, 향수를 눅여주고 자아낸다는 표현, 성벽 아래를 물길이 굽이감고, 레스토랑 옆 조붓한 골목에 있었다는 등입니다. 예쁜 우리말을 제자리에 꼭 맞게 쓰고 있어서 놀라는 한편, 마음에 새겨두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도 다양하게 전개하는데, 책을 통해서 얻은 것으로 보이는 사실이나, 미술가들이 살았다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내용.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직접 소개하면서 작품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역시 처음 만나는 표현방식이었습니다만, 렘브란트의 경우는 작가의 설명이 아니라, 렘브란트, 그의 부인 사스키아, 그의 아들 티투스, 그의 후처 헨드리케 등이 교대로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맨 마지막에 마무리하는 부분을 저자의 목소리로 요약한 것입니다. 갑자기 바뀐 화자 때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얼마나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조금 모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는데, 하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이 네덜란드 건국의 아버지 빌럼 판 오라녀 공의 소유였는데,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맞서 일어났을 때, 스페인이 알바공을 보내 항쟁을 진압하였고, 이 때 오라녀공의 궁정에 있던 그림이 스페인의 펠리페2세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입니다. 프라도미술관에 걸려있는 소장품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처럼 약탈해온 것은 하나도 없고 스페인 왕가가 사들인 것이라는 데 기인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화가들의 흔적을 뒤쫓기 위한 여행이 잦았던 때문인지 여행에 대한 작가의 감정선이 아주 섬세한편입니다. “여행길에서는, 매일 움켜쥐고 살던 마음이 있던 자리를 더 강렬하고 더 압도적인 감각이 점령해버릴 때가 잦다. 그러도록 마음을 내어주는 의지가 아무 곳에서나 생겨나는 것은 아니고, 서서히 비집고 들어와 어느새 마음을 차지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브뤼허에서는 그런 여행자 모드로의 전환이 단박에 이루어졌다.(30쪽)” 정말 다양한 면에서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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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그 아름다운 거짓말
인도를 생각하는 예술인 모임 지음, 김은광 그림, 한북 사진 / 애플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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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다녀온 분들은 다시 가보고 싶다거나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최근에 시청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인도의 F4들이 출연하여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 인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인도는 여전히 연구의 대상입니다. 인도에 관한 책을 꾸준히 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문학, 연극, 음악,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예술인들 가운데 인도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인 ‘인도를 생각하는 예술인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 그 아름다운 거짓말>은 그 모임에서 활동하시는 열두 분이 각자의 인도에 대한 느낌을 다양한 형태의 글로 써낸 기행문입니다.

건축을 하시는 함성호시인님의 첫 번째 글 ‘달빛의 거리’에서부터 여행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인도를 여행하지 않았다’라고 운을 뗀 시인은 물론 인도의 몇몇 유명한 관광지를 가보았지만, 그곳은 그저 속초, 강릉, 해남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는 일’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인지 곁들인 사진에 인도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시인은 ‘만난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흘러다녔고 거기에서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도를 여행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제가 틀린 셈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의 멋있는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삶을 조명하려는 시도가 너무 현학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김경주시인님의 갠지스에 관한 짧은 글 역시 딱히나 갠지스나 쿠트브미나르 성전과 엮이지 않아도 나올 법한 느낌입니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라거나 ‘내 몸의 이역들은 울음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는 구절 등이 그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쿠쉬나가르를 찾은 차창룡시인님이 소개하신 부처의 생의 마지막 모습은 깨친 자의 이타행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쿠쉬나가르는 특별했나 봅니다. ‘쿠쉬나가르는 석가모니의 열반상 외에는 특별히 구경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느 곳과는 다른 기가 흐르고 있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그들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가하면 동행하신 부인과의 사소한 갈등에서는 인간적인 모습과 어쩌면 저도 여행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하지 않나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음악평론가 김진묵님의 ‘봄베이 탈출기’를 읽으면서 앞서 말씀드린 인도의 F4가 말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의 계획(No Plan is Best Plan)'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물론 30년 가까이 옛날이야기라서 현실감은 다소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만, 경유지 일본의 비자를 챙기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가 곤욕을 치렀다는데, 일본에 입국할 때 90일짜리 단기비자를 받을 수 있던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희령작가님의 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일인지 아니면 창작인지 모호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원한다고 해도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인도로 구도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부부가 인도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보면 위태롭게 보이는 것은 딱히 인도에 가지 않았어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 같습니다. 인도로 떠난 스케치여행에서 겪은 이야기를 속한 건축가 김은광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 책에 실은 스케치들이 이 분 작품인가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건축을 하시는 분이라서인지 스케치가 섬세하고 특히 건물의 특징이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부터미널 근처에도 인도박물관이 있습니다만, 연극연출을 하시는 최창근님의 글은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 인도를 여행하는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어떻든 열두 분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도를 이야기합니다. 읽기를 마치고 나서 딱히 무엇이 남았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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