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진리다 -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진심
이동용 지음 / 이담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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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사람이 아름답다; https://blog.naver.com/neuro412/221200052374>을 쓴 이동용님의 신작 니체연구서입니다. 저자가 니체에 천착하는 이유는 머리말 처음에 ‘반복의 미학’이라고 저자가 규정한 니체철학의 속성에 빠져든 탓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너의 진리다>에서 저자는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진심’이라는 부제처럼 한때 바그너에게 애정을 바쳤던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따지고 있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만났던 것은 23살 때였고 38살이 되던 1882년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적 모티프를 많이 인용한 <파르지팔>을 발표하고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적 성향으로 기울면서 결별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별에 관하여 니체가 발표한 글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을 뿐, 니체와의 관계에 관하여 바그너가 발표한 글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교유를 맺는 동안 주고받은 편지도 많았음에도 바그너의 편지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프랑스 여류화가이자 시인 마리 로랑생은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던 남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바그너가 죽은 뒤에까지도 할 말이 많이 남았던 니체는 정말 바그너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자 역시 그런 무엇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만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사랑하지만 인연의 끈을 끊어야 한다. 사랑하지만 멀어져야 한다. 사랑하지만 등을 돌리고 가야 한다. 돌아보면 안 된다. 다시 사랑할까 두려워서다.” 그래서 저자는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다시 조명해보기로 한 것 같습니다. 비록 알려진 바그너의 심중은 없지만, 니체가 남겨놓은 글의 행간을 읽다보면 니체의 본심이 읽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시대적 고찰>의 네 번째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 니체의 저술가운데 바그너에 관한 것들을 분석하게 된 것입니다.

제1장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철학적 글쓰기’부터 제8장 ‘사랑해야 할 때’까지 여덟 개의 소제목으로 분석을 펼치고 있지만, 니체가 바그너를 만나 빠져들게 된 이유와 결별과 만남을 반복하게 된 이유, 결국 관계를 정리하게 된 이유에 이르기까지를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경외하게 된 것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신화를 주제로 선택하였고, 신들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신의 섭리에 따르지 않는 영웅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재에게는 신의 섭리란 준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곤경을 위해서만 섭리라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자기만족이고, 후에는 자기변명이다(47쪽)” 즉 당시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기존의 이성에 반대하여 새로운 이성을 구축하고, 기존의 도덕 너머에 있는 새로운 도덕을 추구한 니체의 생각과 잘 맞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혁명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바그너였지만, 니체의 마음에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것은 바그너가 변화무쌍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천재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일 수도 있습니다. 바그너에 빠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무엇이 콩깍지가 떨어지면서부터는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씩 커져갔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바그너가 추종자들에 둘러싸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에 빠지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맹신자들에 떠받들어지면서 바그너는 추종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바그너 후기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게 된 것도 한 몫을 했다고 합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보좌로 빌헬름1세는 독일을 통일하여 제국으로 발돋움하고 나폴레옹에게 당한 패배를 되갚아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바그너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적 성향으로 변하였던 것이 니체가 결별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니체는 바그너에 대한 사랑을 접는 과정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너의 진리다’라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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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물들다 -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안영민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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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초입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다녀왔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들의 관계에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 핍박을 받아온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인지 이스라엘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혹은 여행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물들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책읽기였습니다. 저자는 서른이 되던해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에서 1년 가까운 자원봉사활등을 한 것을 시작으로 민족, 국가, 종교, 권력이라는 경계를 넘어 지구별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평화의 가치를 누리며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는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민운동이 바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그리고 <경계를 넘어>였다고 합니다.

저자가 우리나라에서 펼친 팔레스타인관련 시민운동이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고 있는 온갖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인데, 그런 활동에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집회도 하고, 관련 책자를 만들거나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생각보다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의 삶을 직접 보고 가까이서 느껴보기 위하여 한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에 물들다>는 저자가 2009년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겪었던 생생한 경험을 담았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이나 텔아비브 나 하이파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데이르 알 고쏜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칠면조를 키우는 일을 거들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사는 동안 겪은 일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로 받는 다양한 차별대우, 예를 들면,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단전이라거나, 검문검색이 극심하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인명살상과 같은 끔찍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자에게 원한 것은 ‘한국 사람들한테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꼭 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시오니즘 운동이 결실을 맺어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이에 반발한 아랍국가들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패퇴하여 이스라엘의 영토가 더 커진 것 등 이 지역의 현대사는 비교적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하여 팔레스타인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유대인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도 정리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어쩌면 그들의 역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이 녹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란 어느 한 편의 시각으로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중립적이어야 설득력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당국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고압적인 태도는 그들이 역사 속에서 당했던 것들을 거꾸로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옛 말에 시집살이도 해 본 사람이 더 심하게 시킨다고 하던가요? 특히 악연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 끊어줘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끊임없이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자가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경험했던 그곳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순박하고 인간적인 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만났던 팔레스타인 친구를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저자에게 당부를 드린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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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은 미술관 여행 - 세계 미술사의 숨은 보석, 영혼이 쉬어 가는 그곳을 걷다
원형준 지음, 류동현 사진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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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여행을 앞두고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 시절은 물론 그 이후의 도시국가들이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면서 쌓은 부를 바탕으로 건축, 조각, 미술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키워냈기 때문에 볼거리가 많은 여행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체여행이기 때문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구경할 기회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바티칸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브레라 미술관처럼 소장품의 규모가 크고 유명한 곳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 미술의 원형준기자님이 특히 이탈리아의 작은 미술관에 주목한 이유는 첫째 대형미술관에서는 인파에 떠밀려 다니다 보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기 마련이고, 걸려있는 작품이 너무 많아 무엇을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미술을 잘 모르는 저 같은 경우에는 그저 누구의 어떤 작품을 보았다라고 자랑하려는 속셈(?)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어도 도록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작은 미술관들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고즈넉한 정원을 거닐며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있던 곳에서 옮겨져 맥락을 잃어버리는 많은 미술품들과는 달리, 작품이 걸려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어 맥락이 살아 있는 생생한 감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건축과 연계하여 제작을 의뢰한 작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로마를 시작으로 피렌체, 베네치아, 파도바, 나폴리, 라벤나, 밀라노, 포사뇨, 볼로냐, 베르가모 등 이탈리아 10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30개의 작은 미술관을 소개합니다. 이들 미술관은 교회이거나 옛 이탈리아의 귀족가문의 소유였다가 공공기관에 이관하였거나 일반에 공개한 것들입니다. 다만 박물관의 규모에 비하여 소장 작품이 많은 탓인지 그림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 따로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당연히 예술품들의 사진을 풍부하게 곁들이고 있는데, 사진은 역시 월간미술의 류동현기자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전체로, 필요하면 부분을 강조해서 찍은 사진까지 볼 수 있어 실감을 더할 수 있습니다. 보르게세미술관에 있는 <플루토와 페르세포네>라는 조각 작품을 찍은 사진을 보면 대리석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느낌을 사진으로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프루토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원초적이고 광폭한 힘에 대한 저항을 이처럼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은 이전까지 없었다. 플루토의 긴장된 등 근육, 뭉친 무릎과 종아리 근육은 자연스럽고 강한 힘이 느껴진다. (…) 야수 같은 그의 손아귀에 잡힌 페르세포네의 허벅지와 허리는 마치 대리석이 아닌 것처럼 살이 움푹 들어갔다.(51쪽)” 그런데 그런 느낌을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사진에 담아냈다는 것입니다. 류동현기자님은 얼마 전에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http://blog.yes24.com/document/10039590>을 통해서 익숙해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중세 교회가 행한 짓(?)의 일면에 대하여 생각해봄직한 언급도 있습니다. “본래 성당에서는 사람들의 신심이 약해지고 타락하는 것 같으면 수도사를 파견해 심판론 등 ‘무서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수도사가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증명하거나 기적을 실현하면 대중은 공포에 떨며 회개하고 신앙심을 다잡았다.(158-9쪽)” 이는 물론 또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다른 도시들은 르네상스를 일찌감치 받아들였지만, 베네치아는 14세기에야 르네상스를 수용했다.(212쪽)”라는 부분입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서로 르네상스를 선도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라벤나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사원이 서로 규모만 다를 뿐 구조와 모자이크 장식이 비슷하다는 점도 기억할만 합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 소피아성당을 장식했던 모자이크를 회칠하여 뒤덮어버린 것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작은 미술관이라고 전했지만, 내용으로 보면 알차고 큰 미술관이라 해도 좋을 그런 미술관들을 소개받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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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
김재식 지음, 김혜림 그림 / 쌤앤파커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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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통하여 사랑을 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공유해온 저자는 사랑이 서툴거나, 사랑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응원을 담은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을 출간한 데 이어 속편이라할 <단 하루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를 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사랑이 무어냐고, 사랑할 때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는데, 결론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바다가 파도를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찰나에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파도를 쉼 없이 만드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일과 닮았다(5쪽)’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사랑하는 동안 생길 수 있는 일, 그렇게 맺은 사랑을 버려야 하는 순간, 그리고 이별 뒤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우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많은 시를 써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되도록이면, 사랑의 시는 쓰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철학연구가 이동용님은 “너무 자기 얘기만 쏟아놓거나 그것이 시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시를 읽는 독자는 이런 말로 항변할 것이다. ‘너만 아픈가?’라고 말이다.(이동용 지음. 나는 너의 진리다 322쪽)

누군가의 고민에 조언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의 문제는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생각해야 할 상대가 두 사람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릴케는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자기를 연마할 수 있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116꼭지나 되는 글들은 대부분 산문시의 형식이나 가끔은 산문 형식도 있습니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있는 탓인지 첫사랑을 품은 젊은이의 달뜬 심정을 담은 글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떠나간 사랑의 아픈 기억 때문에 새로 만난 인연을 사랑으로 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글이 더 많아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내려놓아야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말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싹을 틔우기도 전에 이별을 예감하는 셈인가요? 뒤늦게 놓지 못하는 나 때문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해하는 것을 보면 릴케가 이야기한 ‘사랑을 하면서 혼자가 되는 법’을 익히지 못한 탓일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사랑의 아픈 기억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주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지 못해 사랑을 시작해보지도 못한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다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을 해야 다음도 있다는 저자의 말이 백번 옳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어려운 것이라는 말도 그렇구요. ‘사랑은 상대를 넘어트려 얻는 게 아니다’라고 적은 구절에서는 요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미투’운동과 관련하여 위험한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저만의 오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슬픔의 무게」라는 글은 전문을 옮겨두겠습니다. 저의 관심사인 ‘눈물’의 의미를 새겨보기 위해서입니다. “구름이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 비가 내리듯 / 슬픔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 눈물이 흐른다고 한다. //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 억지로 참지 말고 / 충분히 울어버리는 것이 좋다. // 눈에 보이는 눈물 방울은 / 한없이 작아 보일지라도 / 그것에 실린 슬픔의 무게는 /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 흐르는 눈물을 멈추어 / 눈에 담아두지 마라.(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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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기억의 현상학 - 안치운 연극론
안치운 지음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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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평론가 안치운교수가 쓴 <연극, 기억의 현상학>을 읽어보기로 한 것은 제가 붙들고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인 ‘기억’과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했던 ‘연극’이라는 주제가 사이좋게 제목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주제를 어떻게 연결해냈는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받아 서문을 열었더니 ‘나이가 환갑을 맞이할 때쯤이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책을 꼭 내고 싶었다’라고 글을 시작하고 있어 마음 한 구석에 ‘쿵’하는 울림이 생겼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을 오래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환갑이 아니라 ‘일을 놓고 시간이 나면’입니다. 아무래도 일을 하다보면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갑이 지난 지 꽤 됐지만, 아직 시작도 못하는 것은 하고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다가 이러저런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미 출간된 책들에 들어가지 않고 서랍에 누운 채 오늘을 기다린 논문들을 담았다’라는 구절이 나오면서 책읽기에 상당한 공력을 들여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이 책은 저자의 이름을 붙여 ‘안치운 연극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상당한 수준의 연극 이론서이기도 해서, 아마추어로 연극 맛을 조금 본 제 수준으로는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연극을 삶의 일부로 해온 과정을 정리한 서문 역시 논문에 가까운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긴 서문에 담긴 저자의 논지 가운데 배운 점도 많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현대연극은 서양 연극의 기원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양 현대 연극에 많은 부분 기울고 있다(40쪽)’고 적고 그 이유로 유치진과 같은 친일연극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연극 가운데 어떤 것이 현대연극으로 발전했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서술되지 않고 있어 헷갈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연극에 관심을 둘 무렵 전통 마당극이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그런 움직임이 스러지게 된 것이 서양연극을 전공하신 분들 때문이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자 역시 우리의 현대연극을 대상으로 평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의문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친일연극론에 관한 책을 써보려 하신다니 기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에 연극을 비롯한 예술의 몫은 점점 작아지고, 연극의 몫도 마찬가지로 축소되고 있다.(45쪽)’는 부분도 좀 더 생각을 해볼 부분입니다. 제가 연극에 관심을 두었을 무렵의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공연장은 물론 검열(?) 등 표현의 영역까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연은 관객의 관심 속에 커가는 것 아닐까요? 특히 요즈음 같이 팬덤이라는 문화적 현상이 있는 시기라면 관객과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이유가 꼭 연극과 자본주의와의 관계만이 되어야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긴 서문 다음에는 모두 열두 편의 논문이 ‘연극의 기억: 멀리서인 듯이’와 ‘기억의 연극: 저주받은 몫’이라는 제목 아래 나뉘어져 있습니다. 열두 편의 논문 가운데는 기억이 주제가 되는 것은 3편에 불과합니다. 연극과 기억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는 저자의 상념은 기억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부분입니다. “연극에 나타난 기억에 관한 연구는, 서구 고전 희곡부터 현대 희곡에 이르기까지 ① 비극에서 기억과 망각의 문제, ② 기억하는 고통의 문제, ③ 기억의 공간, ④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거억의 거리와 차이, ⑤ 망각할 수 있는 권리와 기억해야 하는 의무 사이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133쪽)”

저자는 기억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불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는 기억은 왜곡되고, 변화하는 오류투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연극이 기억의 저장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만든 대본으로 공연을 올려도 매회 마다 출연 배우는 물론, 스태프, 심지어 관객의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연극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연극과 기억의 관계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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