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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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폴란드의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본 나치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만, 마이애미에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볼 때와, 예루살렘에서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셈(Yad Vashem)을 참관할 때의 느낌이 같지않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각을 이루며 사는 모습이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하게 걸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읽으면서도 다양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보인 유대인들의 다양한 모습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16세의 나이에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엘리에저 “엘리” 위젤(Eliezer “Elie” Wiesel)의 교육철학에 관한 내용입니다.


엘리 위젤은 종전 후에 프랑스의 고아원에 보내졌고, 1948년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프랑스 신문 <라르슈>의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로부터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글로 써볼 것을 권유를 받고 <밤>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써서 주목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955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1963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를 토대로 폭력과, 억압, 인종차별 등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겪을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치에 부역한 유대인은 부역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나치로부터 끔찍한 탄압을 받은 사람들은 기억조차 되살리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 위젤은 폭력적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증언해서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지 않고 침묵의 심연에 관련된 사실들을 감추어두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엘리 위젤의 제자, 아리엘 버거의 저작입니다. 15살 때 엘리 위젤을 만났던 아리엘 버거는 전통 유대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예술가적 기질이 있어 전통에 매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입장의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을 빚던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에리 위젤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대 시절에는 위젤의 학생으로, 30대에는 위젤의 조교로, 대학원을 마치고도 위젤과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25년동안 이어진 만남과 5년 동안의 강의 필기, 같이 강의를 듣던 학생들과의 면담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젤의 교육철학, 방법론, 유대경전의 새로운 해석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위젤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저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해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고백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단원별 제목이 기억-다름-믿음과 불신-광기와 반항-행동주의-말고 글을 넘어서-목격자로 이어지는 것은 유대인들이 살아온 나날들에서 얻는 삶의 의문부호에 대하여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위젤교수는 유대교의 다양한 교리서를 비롯하여 근현대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을 교재로 하여 수업에 참여하는 다양한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모두어 스스로 결론을 맺도록 하는 수업방식을 채택하는데,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젤교수는) 이 세상을 광기로부터 구해내려면 교육이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으로 타락을 이겨내도록 해주는 숨겨진 요소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이 요소는 결국 지식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것이고, 그 지식이 쌓여 증오가 아닌 공감과 동정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젤교수가 찾아낸 숨겨진 요소는 바로 기억이었다고 합니다(37-38쪽). ‘망각은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지만 기억은 우리를 구원합니다.(50쪽)’라는 말이 유대교 경건파 사이에 전해온다고 합니다. ‘목격자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우리 모두 목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65쪽)’라고 저자는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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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인간 - 인공지능이 인간을 낳는 시대, '인간다움'에 대한 19가지 질문
이미솔.신현주 지음, 이성환 감수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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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로 인정받던 이세돌 기사가 인공지능 기사 알파고의 대결에서 1승4패로 무너진 지도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중계 등의 사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통상적인 전문기사간의 대결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덤은 중국방식으로 7집반으로 하고, 대국시간은 각자 2시간에 초읽기는 1분 3회로 하였습니다. 한국기원에 주관하는 도전기는 흑과 백이 각각 5시간입니다. 방송중계가 걸린 세계대회의 경우는 3시간을 각각 사용합니다. 일본의 경우 각각 6~8시간을 사용하는데, 기성(棋聖), 명인(名人), 혼인보(本人坊) 등의 3대 기전의 경우는 이틀에 걸쳐 대국이 이루어집니다. 대국시간을 제한 없이 사용하던 근대 바둑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각각 40시간을 사용하던 것에 비하여 대폭 줄인 시간이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여전히 긴 편입니다.

전문기사의 경우도 장고 뒤에 악수가 나오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경우의 수를 최대한 검토한 끝에 착수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알파고의 경우는 입력된 자료의 검색에 별 시간이 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써도 달라질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관하여 시시콜콜 따져 본 것은 책으로 나온 EBS MEDIA의 다큐프라임 <4차 인간>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인간이 함께 공존하고 성찰하며 살아갈 방식을 같이 고민해보자는 기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4차 인간이라는 제목을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산업혁명은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하던 농경산업이 도시를 중심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를 사용하는 기계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기계혁명이라고 말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일어난 제2차 산업 혁명은 철강, 석유 및 전기 분야와 같은 신규 산업을 확장하는데 전력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였으며, 전기혁명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시작된 제3차 산업 혁명은 디지털혁명이라고 할 만큼 아날로그 방식의 전자와 기계 장치들이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장치로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최근 언급되고 있는 제4차 산업 혁명은 로봇 공학, 인공 지능, 나노 기술, 양자 프로그래밍, 생명 공학, IoT, 3D 인쇄 및 자율주행 차량 등에 적용되는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인공지능 혁명이라고 합니다.

물론 4차 산업혁명기에 당면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하여 4차 인간이라고 규정했다는데 조금은 단순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기획에서 천착하려는 대상이 ‘인간’인데, 이야기를 과학, 인간다움, 그리고 관계를 화두로 하여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내용을 보면, PART 1 디지털 불멸과 먀, 그리고 기억, PART 2 알고리즘을 가진 뇌, PART 3 인간의 자유의지, PART 4 인간과 기계의 공존, PART 5 4차 산업혁명시대 인간과 기계의 미래 등입니다. 1~3까지는 주로 뇌과학의 발전에 초첨을 맞추고 있으며, 4~5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 설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뇌과학의 세부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어렵사리 섭외하여 관련 분야의 현황과 전망에 대하여 정리된 의견을 들었는데,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500살까지 살 것이며, 심지어는 불멸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인격을 비생물학적인 몸에 이식하는 것까지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상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뇌지도를 그려보려고 시도하는 연구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의 뇌를 구성하고 있는 신경세포가 무려 1천억개나 되고, 신경세포 하나 마다 1~10만개의 신경연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뇌를 얇게 저며서 처리한 뒤에 찍은 사진을 분석하여 3차원적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마다 다른 뇌지도를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경연접을 이루는 신경세포와 축삭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의 후반에서 다루고 있는 기계, 즉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기계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사람에 기계에 대한 감정이 생물에 대한 감정과 동일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자가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을 참고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크리스 콜럼버스감독의 1999년작 영화로 사람과 로봇 사이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를 잘 짚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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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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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근무하시는 분이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제목에서 보시는 것처럼 제가 요즘 힘든 상황이라고 여기신 듯, 힘을 내라는 의미로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위로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야생의 위로>는 박물학자. 설계자이자 창작자, 그리고 삽화가이기도 한 저자가 가깝게는 집안의 정원, 혹은 동네 어귀에 있는 숲, 가끔은 당일치기 여행을 통하여 자연을 관찰한 결과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정리한 결과물입니다. 저자가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일 년 동안 우리 집 주변을 거닐며 관찰한 자연물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에 곁들인 사진을 영국의 ‘노샘프턴셔 페르민 숲의 오솔길’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런던과 버밍엄을 연결하는 M1국도의 딱 중간에 있는 노샘프턴셔의 북동쪽 끝에 페르민 우즈 컨트리 공원 부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야생의 위로>을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저자가 25년 동안 앓고 있는 우울증의 변화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있어서, 필자가 맡게 된 우울증 치료에 대한 평가에 참고할 점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해서 멀리 영국까지 여행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노샘프턴셔의 야생에 관하여 공부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남부지역이긴 합니다만, 저자가 세심하게 그리고 설명해놓은 꽃, 나무, 새, 그리고 작은 동물들에 관하여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관점과 관련하여, 12개월에 걸친 집 주변 산책의 결과를 정리하는데 있어 저자는 왜 10월부터 시작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아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봄은 3~5월, 여름은 6~8월, 가을은 9~11월, 겨울은 12~2월로 나누고 있는데, 영국은 10월부터 가을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0월, 가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월의 겨울 동안 꽃과 식물이 주는 생동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는 저자의 고백을 읽고서 25년이나 앓아온 우울증에 대한 대비책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우울증의 치료에 야생을 산책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훌륭한 삽화가라고 소개해드렸습니다만,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그린 그림 등이 풍부하게 곁들여져 있는데, 영국과 우리나라의 식생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우리나라에도 있기하지만 드물어서 쉽게 볼 수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즉 배운 것을 비교해서 익힐 기회가 흔치 않다면 쉽게 잊을 수도 있겠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우울증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면서 ‘도저히 못 넘을 만큼 높이 솟은 봉우리가 온몸에서 생명력을 쭉 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어쩌면 계절이 순환하는 일은 자연의 섭리일터인데, 그런 변화까지도 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상병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병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투병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새에 관한 관찰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새들 가운데는 울음소리는 들리나 모습을 볼 수 없는 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망원경 같은 장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새들은 일단 모습 보다 울음소리를 먼저 듣는 경우가 많아서, 일단 새 울음소리를 녹음한 자료를 책에 첨부해주시면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는 저자의 자연묘사와 심리 묘사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많이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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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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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독서동아리에서 세 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첫해이니만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문학 분야의 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그 남자네 집>을 고른 분은 선생의 작품을 여럿 읽어왔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선생의 작품을 읽다보면 언젠가 읽은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드는 것은 해방 이후, 6.25동란을 지나는 신산한 시절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보다도 한 세대는 앞서 사신 분의 글이라서 지금은 잊혀져가는 우리말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참 좋습니다. 외래어를 섞어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써야 먹물 들어 보인다는 생각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겹고 예쁜 우리말을 맞게 사용하는 사람이 더 유식하다고 인정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우리말을 익히는 길은 옛 분들이 남긴 글을 많이 읽어, 생각에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저 역시 말을 하고, 글을 쓸 때도 외래어보다는 우리말을 찾는 노력을 강박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 동아리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느낀 점입니다만, 같은 책을 읽는 시선이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놓쳤던 부분을 짚어주는 분도 계시고, 미처 몰랐던 점에 대하여 보충설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전후세대인 만큼 전쟁의 참상은 그저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철이 든 뒤의 전후 사정은 조금 알 듯도 합니다. 그러니까 북한군 치하에 있던 서울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수복 후 재건이 진행되던 때의 사회적 분위기는 조금 알 듯도 합니다.


<그 남자네 집>은 작가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젊은 시절과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의 신혼시절까지 첫사랑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요즈음에는 양 다리는 기본이고 여러 다리를 걸치는 것조차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들 합니다만, 정비석 선생님의 <자유부인>이 장안의 화제가 되어 지탄을 받던 시절에 새댁시절에 첫사랑을 만나고 다녔다고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에 목을 맨다는 속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기억의 심연에 잠들어있었다는 선생의 고백이 놀랍기도 합니다.


궁금한 것은 첫사랑이 아닌 분과 결혼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선생은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라고 말합니다.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101쪽)’는 것입니다. 체면을 따지면 첫사랑이 나아보이는 면이 있지만, 씀씀이는 부군이 나아보였더라는 것인데, 막상 결혼하고 속내를 알고 나서 후회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것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부군께서 처가 쪽을 본가만큼 챙겨주었다고 하니 나름 속이 깊은 분이었다는 생각에 그 선택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 싶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오래 살아봐야 느끼게 되는 점이라서 결론을 말하면 그 남자보다 내 남자가 낫더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인가요?


선생이 책머리에 적은 ‘그때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 진흙탕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이었고, 범속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었다.(5쪽)’라는 대목을 짚은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신혼초 시집살이를 할 무렵이던 50년대 초반 사시던 동네에 ‘현대문학사’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동네 구멍가게 같던 집은 물론 골목까지도 찬란해진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전후 삭막하던 시절임에도 문학이 살아있음을 천명한 셈이니, 현대문학사에 대한 지극한 헌사처럼 보이는 이 대목이 너무나도 당연해보인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이 어렵던 시절에도 문학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선조들의 뒷심 덕분에 오늘날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부흥을 일구어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생기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담금질을 하고 산고를 겪어야 무언가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요즈음 세상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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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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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 https://blog.naver.com/neuro412/221927219953>에서도 10대 소년들이 살인을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성이 여물지 못하고 혈기에 넘치는 나이라고는 하지만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을 다룬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일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욤 뮈소는 <사랑하기 때문에> 보다 더 나간 젊은 시절의 일탈을 <아가씨와 밤>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의 일탈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젊은이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어른들이 오히려 일탈을 부축이고 극한 상황으로 이끌어가는 바람에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끔찍한 범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사랑이라고 믿는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짝짓기 예능이 범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호감을 가지는 짝을 이어주었는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끝나면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가를 공개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묘하게도 서로 호감이 일치하는 쌍이 많이 나오는 경우도 있는 반면, 한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경우도 있고, 호감의 방향이 꼬리를 물고 비켜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아가씨와 밤>은 남프랑스 코트다쥐르의 앙티브라는 지역에 있는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의 학생들의 사랑이야기입니다. 물론 사랑이라 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은 물론 동성 간의 우정과 사랑을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동급생들 사이의 사랑도 있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불장난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뒤틀린 관계가 끔찍한 비극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1992년 겨울과 묻혔던 사건이 드러나면서 2차 사건이 일어나는 2017년 봄의 시점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엮여있습니다.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학생 빙카 로크웰과 철학을 가르치는 알렉시 선생님이 실종되는 사건이 1992년 겨울 발생합니다. 앙티브에서 사라진 뒤 파리에 있는 호텔에 묵은 것을 끝으로 두 사람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입니다.


누가, 왜,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성격 상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그 이유도 다양하다는 것 정도는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즐겨도 그만입니다만,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여있는지를 추측해가면서 읽는 재미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꼭 기욤 뮈소의 자전적 소설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작가가 어린 시절 살인사건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작가는 허구의 사건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영어 공부하는 시간에 ‘니스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해변에서 해맞이를 하겠다고 답했는데, 영어선생님이 ‘정말?’ 그랬던 이유를 이 책을 읽고서야 이해했습니다. 1992년 12월 19일 니스에는 8cm의 눈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던 때가 12월이었는데, 한겨울에 해변에서 해맞이를 하겠다고 했으니 선생님이 그렇게 물을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들렌 효과 덕분에 학창시절의 추억이 꼬리를 물고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229쪽)’는 대목을 읽으면서 작가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참 멋있게 인용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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