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의 신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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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나 전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면 우선은 놀라고, 무슨 일일까 궁금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막차인 경우에는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아가와 다이주의 소설 <막차의 신>은 마지막 전철이 갑자기 벌어진 인사사고로 인하여 정차하면서 벌어진 상황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 7편을 모았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의 지하철이나 전철역 대부분이 여닫히는 문으로 선로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닫이문이 없을 때는 승강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밀려 선로로 떨어졌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도 있고, 삶을 비관하여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에 몸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런 일이 적지 않았던가 봅니다.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만, 동경 출장길에 전철역에서 인사사고가 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하여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취객을 구했지만, 자신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던 한국인 청년 이수현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막차의 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는 어쩌면 막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구성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사사고로 정차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성추행사건을 둘러싸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납기를 맞추기 위하여 야근이 이어지면서 지쳐가는 팀원들을 쥐어짜기 위하여 24시간 휴가명령이 떨어지는데, 막차를 타고 퇴근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들어간 권투 체육관에서 만난 관장의 권유로 시범경기를 하게 됩니다. 상대선수로부터 아무리 맞아도 3분만 버티면 공이 울리고 쉴 수 있다는 권투 경기의 규칙을 관장으로부터 듣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경륜선수를 애인으로 둔 여성이 경기에 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애인과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별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인의 집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불이 나는 바람에 편지가 전해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녀는 이별을 없었던 일로 할지 궁금합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이발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었다는 전갈에 병원으로 달려가던 주인공이 전철이 멈추면서 조바심을 내게 되는데, 다행히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발소를 지키겠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가업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전철의 인사사고의 현장은 아니지만 부모의 불화와 어머니의 가출로 불안한 소년시절을 보낸 남자가 자신의 겪은 불행한 일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장을 하고 단막희극작가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입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학교 폭력의 희생양이 된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급생들이나 선생님은 그녀가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는 별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왕따 문제도 본인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이 여학생은 그림그리기에 빠져 왕따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하루는 공원에서 수채화를 그리다가 필요한 빨간색이 없음을 알고 손목을 그었던 것인데, 출혈이 심해져 병원으로 이송되는 상황이 됩니다. 주위에서는 왕따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가해자 남학생이 오히려 충격을 받아 학교에 나오지 않는 상황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인파에 밀려 선로에 떨어진 여성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뒤에 그 사람을 찾기 위하여 사고현장에 있는 매점에서 일을 시작한지 무려 25년 만에 생명의 은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은 한번쯤은 겪었거나 들어보았음 직합니다. 읽어가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 적지 않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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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 - 프랑코 바잘리아와 정신보건 혁명
존 풋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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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에 읽은 정유정작가님의 <내 심장을 쏴라; https://blog.naver.com/neuro412/221980392195>를 읽으면서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요양기관에서 행해지고 있는 진료의 질수준을 평가하는 업무 가운데는 정신요양기관에서 하는 내용이 4항목이나 됩니다. 따라서 정신요양기관에 입원가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다양한 문제에 관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업무를 하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을 읽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을 요양기관에 수용한 것은 그들로 인해 정상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격리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합니다.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을 때는 환자들을 폭력으로 진정시키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에 이르러 정신의학이 발전하면서 이들을 수용시설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다보니 더 황당해지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18세기에 이미 수용시설에 가둔 정신병 환자를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20세기, 그것도 후반에 들어서야 폐쇄병동을 개방하는 조치를 마련하는데 적지 않게 힘이 들었다니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신질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정상인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려다보니 민간 부문이 아닌 공공의료가 정신요양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공공기관의 경우 아무래도 획일적이고 변화에 무딘 경향이 있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구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신요양기관에서 구금과 압박 등 비인간적인 대우가 만연했던가 봅니다. 그런데 증상이 심한 정신병환자들을 폐쇄병동에 가두어두는 것이 치료효과가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문제제기가 되면서 폐쇄병동을 개방하는 정책이 수행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폐쇄병동을 개방하는 정책을 실현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은 프랑코 바잘리아라고 하는 정신의학과 의사로,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마을인 고리치아에 있는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책임자로 부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 고리치아의 보호소를 방문했을 때, “죽음의 냄새, 똥 냄새”를 맡았다고 합니다. 정말일까 싶겠습니다만, 제가 정신요양기관의 질평가를 수행하면서 방문했던 국내의 정신병원 한곳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의과대학에 다닐 때 주말마다 나가던 시설에서 그런 냄새에 익숙해있지 않았더라면 병실에서 튀어나갔을 것입니다.

정유정작가님의 <내 심장을 쏴라>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정신요양기관이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만, 얼마 전에 정신요양기관에서 환자가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을 보면 환자의 인권이 침해를 받는 그런 상황이 근절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정신과 폐쇄병동을 개방하는 조치는 정치적 상황과 많이 맞물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도한 집단 내에서도 불협화음이 나오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환자를 사회로 복귀시키는데 관심을 쏟다보니 환자가 퇴원해서 중대한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상황이 생기는 바람에 사회적 호응을 얻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불특정한 사람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런 사건이 생기면 꼭 정신과 병력을 언급하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신과 병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는 심각한 수준의 개인정보로 간주하여 공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요양기관을 방문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거나 숨기려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을 일찍 발견하고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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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17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직도 중세나 근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처음처럼 2020-07-28 20: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래도 많은 진보가 있었지요...
 
늙어감에 대하여 - 유한성의 철학
오도 마르크바르트 지음, 조창오 옮김 / 그린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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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우아하게 늙어가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래서인지 나이 듦, 늙어감 등에 관한 책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오도 마르크바르트의 <늙어감에 대하여>도 그래서 골랐던 것인데, 읽어가면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건너뛴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특히 인간의 오류 가능성, 우연성, 유한성에 대한 깊이 있는 저작을 발표해왔다고 합니다.

현대에 들어 특히 과학적-기술적 문명의 발전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저자는 의학, 기술, 경제 영역에서의 문화적 성과를 부정적인 것으로 유죄판단하기보다는 축복이라고 찬미하는 철학자라고 합니다. 우려할 바는 있으나 발전으로 인해 누리는 생활을 편리함을 폄하할 것까지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늙어감에 대하여>에서는 ‘유한성의 철학’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처럼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잊고 사는 우리를 일깨우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죽음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85세 생일에 맞추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을 것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베츠는 ‘도대체 왜 생일이 축하되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생일축하는 사실상 죽음과 연관이 있는데, 언젠가 죽을 그날을 피해 왔다는 것을 상정하여 축하하는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죽음을 맞더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이라는 진실을 감추기 위하여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1. 우연을 인정하고, 2. 시민성 거부를 수용하지 않으며, 3. 시가니 유한하다는 것, 4. 그렇다고 해서 우울할 이유는 없으니 ‘그래야만 해’보다는 ‘그렇지’하는 입장을 견지할 것, 5.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시기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늙음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단순히 삶의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에 우아하게 늙어가기를 목표로 삼은 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책읽기였던 셈입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젊어서 세웠던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지나온 날들을 정리하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아하게 늙어가는 일인 듯합니다.

특히 ‘시민성 거부의 거부’라는 소제목은 ‘1945년에 대한 한 철학자의 비평’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되던 5월 8일에 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날 저자는 소련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미군의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자신이 겪어온 과정에 대한 기억과 반성을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1940년 4월부터 1945년 3월 초반까지 아돌프-히틀러-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1937년 시작된 이 학교는 처음에는 10개로 시작하여 12개의 시설이 있었고, 2,500~3,000명의 학생이 졸업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나이에 따른 히틀러 소년단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시민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나치-이상론자를 위한 혁명적 교육이 이루어져졌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에 대하여 저자는 “전체주의적인 이상론자는 소위 더 상위의 것을 위해 ‘강인함’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반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중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 그의 개별성, 그의 시민적 감수성, 그의 인간성과 도덕 모두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36쪽)”라고 적었습니다. 시민성을 거부한 나치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전후 서독에서 활동한 적지 않은 명망가들이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시민성 거부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내세운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마르크바르트와 서문을 썼던 베츠의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담의 중간에 나오는 ‘늙은 저는 더 이상 특별히 희망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미래에 열려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나에겐 더 이상 남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진 미래에 자신의 기대를 맞출 때 늙은이의 영리함이 드러나게 됩니다.(103쪽)“라는 부분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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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힐리 고전 시의 이해 - 케냐, 탄자니아 해안 도서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학술총서 6
권명식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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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에 다녀온 아프리카 여행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어 읽게 된 책입니다. 스와힐리어가 아프리카 동부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을 아프리카 여행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여행기를 쓰면서 공부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책읽기입니다. 아프리카에는 2,090 종류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와힐리어는 다는 아프리카 언어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역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와힐리문명은 아프리카 동쪽 코뿔소의 뿔처럼 튀어나온 소말리아 남부 모가디슈에서 마다가스카르섬이 보이는 모잠비크에 이르는 아프리카대륙의 동부에 자리 잡았다. 스와힐리어가 나이저-콩고어족에 속하는 반투어인데, 이는 기원전 3,000년부터 서기 400년 무렵에 이르기까지 카메룬과 케냐를 잇는 선을 따라 반투인들의 이주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동부지역은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를 통하여 아라비아반도, 인도, 말레이반도에 이르기까지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와힐리어는 반투어와 아랍어가 혼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스와힐리문명에서의 시작(詩作) 활동은 정신적 고양, 수신과 교육 즉 진리 추구의 일환, 형식미의 즐거움과 의미의 모호성을 보이는 언어유희 등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다양한 형식을 갖는 시의 구조는 음절수와 각운에 묘미가 있다고 합니다. 동일한 수의 음절이 반복되면서 리듬을 만들어내고, 소절의 맨 끝이 같은 음으로 끝나면서 역시 동일한 반복의 운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스와힐리의 고전시는 가장 오래된 시인으로 구전되는 후모 리용고(Liyongo Fumo, 1150-1204)를 비롯하여 포르투갈인의 내습과 지배와 아랍세력의 반격을 거칩니다. 이 시기에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찬양이 이루어지는데, 사이드 아이다루시(Siyid Aidarusi b. Athumani)의 하음지야(Hamziya), 무웽고 빈 아투마니(Mwengo bin Athumani)의 탐부카(Tambuka), 아부 바카리(Abu Bakari)의 ‘파티마’와 ‘카티리푸(Utendi wa Katirifu) 등이 있습니다.

17세기 무렵이 파테를 중심으로 스와힐리 고전 문학의 황금기라고 합니다. 사이드 압달라 빈 나시르(Saiyd Abdallah b. Nasir)의 영혼의 각성 등 파테의 부와 영화를 바탕으로 지상의 영화가 무상하고 덧없음을 노래한 철학적 시들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Hurimiza zitu zote / watazikwa watu wote(모든 것에 종말이 있나니, / 모든 사람이 땅 아래 묻히리라.)’라는 표현도 있다고 합니다.

1800년 들어 파테가 몰락하고 몸바사를 중심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몸바사(Mombasa)는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몸바사가 낳은 위대한 시인 세 명이 있는데, 1776년에 태어난 무야카 빈 하지 알 가싸니(Muyaka bin Hajji al-Ghassan)는 향수제조자라는 뜻으로 아압어의 attar(향수)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무야카는 영웅에 대한 찬양이나, 이슬람 종교형성 시기에 나타났던 이야기들의 신성화 및 신화화, 작가들이 몸담았던 사회의 포괄적인 사건들을 노래했던 이전시기의 시문학과는  달리 개인이 바라본 세계, 특 사적인 세계를 문학의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금기시했던 남녀상렬지사를 노래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의 정표를 보냈는데, 그것을 남에게 까발린 여인을 한탄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근세들어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한 스와힐리 사람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시들까지도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점은 원색적이고 원초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와힐리의 고전시를 처음 접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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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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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완전범죄가 가능할까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에 따라서 살인사건을 저지른다고 해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 마련인 듯합니다. 하물며 우발적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습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우발적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습하는 천재 수학교사의 활약(?)과 그것을 꿰뚫는 천재 물리학교수의 추리과정을 그려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서 수학한 친구이고 서로의 재능을 잘 아는 관계라면 더욱 미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불행한 사건은 잘못된 만남이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단초가 되는 사건은 첫 결혼에 실패한 야스코가 호스티스로 일하면서 딸을 키우다가 클럽에 드나들던 외제차 세일즈맨 도미가시의 유혹에 넘어가 재혼한 것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그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요? 도미가시의 헤픈 씀씀이는 회사돈을 유용한데서 비롯한 것이었고, 그런 사실을 오래 감출 수 없는 법이지요.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면서 도미가시의 본성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스코는 도미가시와 이혼하고 새 출발을 했지만, 도미가시가 찾아와 다시 합치자고 애걸하거나 협박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연은 신중하게,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야스코는 딸 미사토를 걸고 재결합을 협박하는 도미가시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보면 약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여자도 큰일을 저지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우발적이라고는 하지만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모녀에게 옆집에 사는 천재 수학교사 이시가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이시가미는 야스코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은 금세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경찰은 당연히 야스코와 주변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초동수사를 벌이게 되는데, 이시가미가 마련한 알리바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결국 경찰은 이시가미가 짜둔 알리바이를 뒤쫓으면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 등장하는 경찰은 구사나기입니다. 당연히 데이도 대학 물리학부의 유가와교수가 수사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알고 보니 세 사람은 데이도 대학 동문인데다가 동기이기도 합니다. 유가와와 이시가미는 자연계열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지만, 구사나기는 인문계열이라서 이시나기는 그를 모르고, 유가와는 동아리를 같이하면서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읽어가다 보면 이시가미가 설계한 알리바이 조작은 아주 치밀합니다. 경찰의 수사가 야스코에 집중되지만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 즉 딸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가 노래방까지 갔다는 그녀의 알리바이는 확실한 증거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재 이시가미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합니다. 도미가시와 헤어진 야스코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구도가 등장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이에 구도는 상처를 하고 혼자가 되었는데 야스코와 결혼을 생각하고 찾아왔던 것이고, 이시가미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생각 같으면 배신감이 치를 떨고 야스코의 범죄사실을 경찰에 알릴 법도 합니다만, 이시가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자수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야스코의 범행을 감추어보겠다는 지극한 사랑을 받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 부분이 이 사건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극적인 반전은 그 뒤에 있다고 할 것 같군요. 살신성인의 사랑은 무시되면 안되는 것이니까요.

유가와는 친구인 이시가미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건의 핵심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친구의 범행을 덮어주는 일은 없었던 셈입니다. 사실 우연히 내뱉은 한 마디가 결정적 실수(?)가 되기도 하는데, 이시나기의 완벽한 알리바이 설계도 구사나기에게 툭 던졌던 ‘선입견의 맹점을 찔러 수학 시험문제를 만든다’는 한 마디가 유가와 교수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뻔한 것 같던 이시나기의 알리바이 설계가 왜 견고하게 작동하여 경찰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인지는 마지막 반전 부분에 이르러서야 유가와교수에 의하여 설명되기 때문에 저 역시 구사나기처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시나기가 야스코의 범행을 덮으려했던 결정적 이유도 마지막에 밝혀집니다. 아무래도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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