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몽테뉴 수상록을 모두 읽었습니다. 직장이 있던 원주나 유성에 머물 때 주로 읽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무려 6년반 정도 걸린 듯합니다. 오랫동안 읽기를 쉬다보니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한 것도 몇 차례입니다.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맛>을 읽고 쓴 독후감은 라포르시안에 연재하던 양기화의 북소리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아내가 고른 양기화의 BOOK소리; https://blog.naver.com/neuro412/222248887265>에도 담았습니다.


<몽테뉴 수상록, Les Essais>는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의 참사를 그만둔 1570년 집필을 시작하여 10년이 된 1580년에 전2권으로 출간하였고, 이후 수정과 가필을 거쳐 1588년에 전3권으로 증보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가필과 수정을 더하였고, 그가 죽은 뒤 1595년에 신판이 나왔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똑같은 결과에 도달한다라는 주제로 시작하여 슬픔, 협상, 나태, 거짓말쟁이, 공포심, 상상력 등 모두 107개의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등 다양한 옛 자료에서 고른 경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가히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450년 가까운 옛날에 쓴 책이지만, 오늘날 읽어도 와 닿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몽테뉴 수상록>을 바탕으로 한 2차 저작물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복잡한 현대의 생활에서도 몽테뉴가 제안하는 삶의 윤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미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앙투안 콩파뇽은 <몽테뉴 수상록>에서 고른 40개의 주제에 관하여 <몽테뉴 수상록>을 재해석한 글을 <인생의 맛>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인생의 맛>에서는 몽테뉴가 신장결석을 앓았고, 이를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의사나 의술을 불신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몽테뉴 수상록>을 읽어보면 신장결석이 아니라 담석증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담석증도 신장결석만큼이나 통증이 대단한 병입니다. <몽테뉴 수상록>에는 의술과 의학에 관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술의 속임수(기만)’, ‘의술은 필요 없는 것등으로 제목을 적은 것은 보면 몽테뉴가 의사와 의술을 얼마나 믿지 못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실 450년 전의 프랑스 의학의 수준은 요즈음의 의학 수준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을 터이니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몽테뉴가 요즘 세상을 살았더라면 의학이나 의술에 대하여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저도 몽테뉴씨에게 의술에 대한 변명을 적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요즈음 우리 법조계에서 화재가 되고 있는 기억력과 거짓말에 관한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기억력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자인합니다. 그러면서 기억력이 약한 대신 다른 소질이 강화되더라고 했습니다. 말이 짧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기억력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될 생각을 아예 말라고 합니다. ‘거짓을 말한다거짓말 한다의 차이도 설명합니다. ‘거짓을 말한다라는 의미는 그릇된 일을 말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거짓말 한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바와 반대되는 일을 말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실 거짓말은 저주받을 악덕이다. 우리는 오로지 언약을 지킴으로써만 사람이 되며 서로 믿고 살아갈 수 있다. 거짓말의 가중함과 그 무서운 결과를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범죄보다도 이런 짓을 마땅히 화형에 처해야 할 일이다.” 거짓말의 중대함은 죽음으로 배상해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려면 차라리 침묵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의 딜레마 - 국가는 정당한가
홍일립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즈음처럼 국가의 정체성에 관하여 고민을 해본 적이 있던가 싶습니다. 국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 있는 걸까?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국가는 필요할까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국가의 딜레마>는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쓴 홍일립박사는 사회사상·정치경제학·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예술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라고 간략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이 정도 소개만으로는 책이 지향하는 바를 파악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저자는 저보다 조금 늦은 1976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세대였습니다. 저자는 학생운동가로 시작하여 용접공, 기업가, 정치인을 거쳐 지금은 은퇴하여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젊었을 적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선대위의 기획실장을 맡아 대선을 치렀고, 당선 후에는 정치판을 떠나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구원을 지냈다는 것을 보면, 진정한 노사모였던 것 같습니다. 전작 <인간 본성의 역사>가 나온 뒤에 나온 서울신문의 기사를 보면, “정치판에서 인간의 탐욕을 봤어요. 공인의 책무나 책임 윤리에 대한 성찰 없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치가 전도된 우리 사회의 실상을 느꼈어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정치판을 떠난 이유일 듯합니다.


제가 앞서 적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은 저자의 서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국가는 정당한 조직인가?”하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국가의 비천한기원”, “국가라는 괴물”, “반국가주의자들”, “민주주의는 희망의 언어인가?”, “국민의 국가의 주인인가?”, “국가의 딜레마의 순서로 국가의 정체성을 정리해나갔습니다.


국가라는 집단형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그렇게 생겨난 국가가 특히 다른 국가와의 충돌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내세웠던 국가주의라는 개념의 정체, 그리고 국가라는 사회적 형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도 소개합니다. 소련의 사회주의체계가 붕괴된 이후에 자연스럽게 대세로 자리 잡은 민주주의가 과연 정답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민주주의의 본질, 특히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수천년이 흐르는 동안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상적인 형태의 정치체계가 되었어야 할 민주주의는 여전히 허점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국민이 과연 국가의 주인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누구나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도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내세웁니다. 하지만 권력을 쥔 자가 보기에 국민은 선동에 휩쓸리는 군중에 불과하고 권력의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달콤한 언사로 국민들을 호도하여 권력을 쥔 자들 역시 과거의 독재자들의 행태를 닮아가는, 아니 더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북쪽에 세워진 국가는 일인독재체제이고, 남쪽의 역대 정권은 자유국가의 형틀을 갖추었지만, 이상한 나라라고 단칼에 정리하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은 무능과 부패, 이어서는 철권통치를 휘두른 독재자로, 이어들어선 군사정권의 대통령은 임기 뒤에 감옥으로, 그 뒤로도 권력형 부패와 국기 문란으로 두 명의 대통령이 수감되는 등, 건국 이래 최고 권력자는 민주주의의 옹호자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삶을 정상적으로 마무리 짓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였습니다. 현 정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쯤 현 정권에 대한 생각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저자는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책을 읽는 이가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안토니오 G. 이투르베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우한폐렴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아서 벌서 2년째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나이입니다.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라 더욱 아쉽기만 합니다.


년 전에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오시비엥침(우리에게는 아우슈비츠라는 독일식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을 찾았을 때, 나치의 만행이 너무 끔찍해서 몸서리가 처질 지경이었습니다. 유대인을 비롯하여 집시, 공산주의자 등, 나치가 혐오하던 사람들을 처형하던 장소였습니다. 오시비엥침의 참혹한 상황을 고발한 책자들은 적지 않게 읽어보았습니다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오시비엥침에 비밀리에 운영되던 작은 도서관이 있었고, 나이 어린 사서가 무겁기만 한 책임을 맡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31구역에는 작은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 운영하고 있는 수용소에 대한 국제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나치가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을 인정한 학교였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안토니오 이트루베는 책의 역사를 기록한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31구역 학교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는 것을 읽고는 내막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이 불가피했다는데, 31구역 학교의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은 8권의 책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6명의 선생님들을 통하여 자칫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정신적 지주를 지탱해왔다는 것입니다.


소장하고 있는 책의 규모로 보면 분명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 맞을 것 같습니다. 책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정도 규모의 책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렇게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돌려 읽느냐가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제 경우도 읽은 책을 같이 일하는 분들과 공유하는 작은 도서관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소장도서가 500여권에 이르렀습니다만, 종국에는 회사에서 징발당하는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도서관을 다시 열 기회를 노리고 있답니다.


물론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행태를 보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31구역의 책임자나 작은 도서관의 사서를 맡은 어린 소녀의 대단한 용기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서 덕분에 책읽기와 관련된 좋은 글귀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의 첫 장을 펼친다는 건 휴가지로 가는 열차에 올라다는 것과 다름없다.(126)”는 대목이나, “책에는 페이지마다 저자의 지혜가 담겨 있어요. 책은 그 기억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97)”는 대목도 좋습니다.


작가는 처음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작은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정리한 수필을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소설로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도서관 사서 디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섞어 넣어 수용소의 실상을 같이 소개합니다. <안네의 일기>를 남긴 안네 프랑크도 등장하는데, 전쟁 말기에 디타는 아우슈비츠를 떠나 몇몇 수용소를 전전하는 가운데 베르겔벨젠에서 안네와 함께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수용소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심지어는 담배와 같은 기호품까지 필요한 것들이 은밀하게 유통되었던 모양입니다. 수용소에 필요한 물자의 공급선에는 아마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독일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의 귀재라는 유대인들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한폐렴이 세계로 확산된 지 벌써 1년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밀폐, 밀집, 밀접3() 환경,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곳과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게 모여서 1m 이내의 밀접한 접촉을 하는 것을 통하여 확산된다고 알려지면서 대중영화관도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실공간에서의 만남이 제약을 받으면서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이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영화 역시 대중영화관이 지고, 누리망을 통하여 신작을 소개하는 추세가 빠르게 확산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제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라서....) 넷플릭스는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매체라고 합니다.


넷플릭스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주력인 미국의 다중매체기업이라고 합니다. 넷플릭스라는 이름은 인터넷(net)과 영화(flicks)라는 단어를 합성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1998년 비디어 대여사업으로 영업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누리망을 통하여 TV연속방송극이나 영화를 제공하는 영업 위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201811일 출간된 폴란드 작가 블란카 리핀스카의 <365>은 일약 작가를 유명인 대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각국에서 번역 소개되면서 가장 잘 팔리는 소설이 되었고, Wprost는 작가 블란카 리핀스카를 2019년 폴란드 최고작가, 2020년 폴란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소설의 독후감을 정리할 때, 이야기의 줄거리를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만, 출판사에서 책을 소개하기 위하여 요약한 정도를 인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폴란드에서 호텔리어로 일하는 라우라는 남자친구 등 2쌍의 친구들과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휴식을 위한 여행이 악몽이 되고 만 것은 라우라가 마피아 가문의 젊은 수장 마시모의 눈에 띄어 납치된 것입니다. 과거 피습을 당해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빠졌을 때 꿈속에서 만난 이상형의 여성이 바로 라우라였다는 것입니다.


납치된 사람이 납치한 사람에 빠져 오히려 두둔하는 경향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라우라 역시 마시모의 치명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됩니다. <365>의 주요 흐름은 성애에 기반합니다. 라우라 역시 순수한 사랑보다는 성을 즐기는 개방적인 여성이고, 마시모 역시 자유분방한 성격이라서 두 사람은 성애를 매개로 납치라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성애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아무래도 비밀스럽게 만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365>의 작가는 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건 저녁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적으로 성에 대한 개방성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고, 사랑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폴란드 사회가 그렇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 소설이 번역 소개되고 영화로 만들어져 넷플릭스에서 제공되면서 전 세계 여성들의 호응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물론 도색소설이나 도색영화가 남성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도 편견인 듯합니다. 여성 역시 관심이 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 <365>이나 영화 <365>이 성에 대하여 개방적인 나라에서의 반응도 뜨거웠다는 것을 보면, 성애 이외에도 꿈도 꾸어보지 못한 상류사회에 진입한 라우라의 새로운 삶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닐까요?


조금 아쉬운 점은 우리의 주인공들이 시도 때도 없이 성애를 즐긴다는 점인데,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색다른 상황에서의 성애를 즐기는 듯한, 삼류여관에서 제공하는 맥락 없는 도색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애에 대한 묘사도 미묘하고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남는 것 같습니다. <365>, <오늘>, <또 다른 365> 3부작으로 구성된 소설의 전편을 독파했어야 하는데, <365>이 라우라가 피습되는 위기를 겨우 벗어난 상황에서 끝나는 바람에 아쉬웠습니다. 마치 일일연속극처럼 <오늘>이 빨리 번역 소개되어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영화를 보면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있겠습니다만, 영화와 소설은 즐기는 방법이 전혀 달라 제 경우는 소설을 읽는 재미가 더하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기독교가 주도한 유럽의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럽의 중세를 다시 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대학의 박승찬교수님이 쓴 <중세의 재발견>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서양의 중세가 암흑의 시대가 맞고, 동양의 각 지역은 개명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 째 이야기>을 읽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박홍규교수가 쓴 이 책은 고대 인문학을 재평가한 <인문학의 거짓말>의 후속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기왕의 중세사가 일반적으로 서양의 중세만 다루어져온 것과 달리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중세도 다루기는 했지만, 분량으로 보아 동양 문명들과 비슷한 정도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새롭게 주장한다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논리의 전개에 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큰 틀에서는 중세에 대한 정의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중세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4-6세기)이 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16세기)와 더불어 근세(1500-1800)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라고 규정합니다. 특히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라고도 합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9181392)에 해당한다고도 했습니다.


저자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것은 근세에 들어와 힘을 얻은 유럽이 유럽 이외의 세계를 침략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서양의 중세가 기독교의 지배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로 서양 중세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가 시작된 예수의 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뿐 아니라 중세와 근세의 경계를 모호하게 잡고 있기도 합니다. 무릇 이론을 세우려면 논리의 대상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가 거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중세가 무려 1천년이나 되는 장대한 세월이고, 논의의 대상인 인문학 역시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아우르는 영역이라고 보면 주로 유라시아의 중세를 한권에 몰아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하물며 논의의 대상이 인문학에서 예술과 건축에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다보니 논점이 흐려지고,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이론에 대한 지나친 저항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중세라는 특정한 시기를 개괄한 뒤에 인도, 이슬람, 서양, 중국, 한반도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해당 지역의 중세를 간략하게 살핀 뒤에 사상, 문학, 예술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합니다. 일종의 비교문화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중세라는 시기의 특성을 이야기하다보니 논점이 섞이는데다가 저자의 주장을 앞세우는 관계로 개별 지역의 중세적 특성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사에서의 중세를 삼국시대에서 고려까지로 본 저자는 조선이 오히려 중세보다 암흑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중세사를 논함에 있어 근대를 넘어 현대까지 끌어다 비유하는 것도 적절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심지어는 2019년에 시작한 코로나 대유행이 1980년대 이후 생긴 지구화 정책이 초래한 미증유의 대유행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길게 보면 16세기에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는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오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우한폐렴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하여 중국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었지만, 코로나 대유행의 흐름은 분명 중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