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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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는 고인이 된 신경과의사 올리버 색스는 아주 오래전에 <깨어남>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깨어남>은 로버트 드 니로 와 역시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한 16권의 책을 썼고,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본 책은 <깨어남><오악사카 저널> 2권에 불과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색스를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을 이제야 읽게 되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인 그가 만났던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서 저로서는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제가 요즈음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 다루면 좋을 듯한 내용도 눈에 띄었습니다. 책읽기도 인연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글을 쓰는 작가(?)라서인지 들어가는 글의 모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을 쓸 때 가장 마지막에 결정해야 하는 것은 처음에 무엇을 쓸 것인가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래서 여러분이 읽게 될 기묘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체계를 잡고 책머리에 쓸 인용문 두 개를 정하고 나서 나는 내가 무엇을, 왜 했는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봐야만 했다.(9)”라고 이어갔습니다. 즉 책 원고의 마지막을 서문쓰기로 하였는데, 이게 참 어렵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여덟 번째 책도 전체의 틀을 잡고, 시간이 나는 대로 토막글 형식으로 본문을 써놓았습니다. 마무리단계에서는 토막글들을 제자리에 배치하는 작업을 마치면 저도 들어가는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모두 20명의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자의 말로는 8편의 글은 여러 매체에 이미 발표되었던 사례이고 12편을 새로 썼다고 합니다. 20편의 글들을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 등 신경계의 기능변화에 따라 4부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각 부의 시작부분에는 주제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상실에서는 “‘결손이라는 용어는 신경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 신경 기능의 장애나 불능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잉이라는 주제는 신경과 영역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정신과 영역에서는 관심대상이라고 합니다. “정신의학에서는 흥분성 장애나 생산적인 질환[상상력 과잉, 충동 과잉], 조등 등]을 질환으로 문제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경계를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개념과 비전은 지극히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당연히 좀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개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료현장에서 만났던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의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련의 신경심리학자였던 알렉산더 루리아는 글로 남기는 힘, 이것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보편적인 자질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자고 말았다. 우리는 이 힘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색스는 이점에 관하여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 절정을 이룬 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의 도래와 함께 쇠퇴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환자가 가진 의학적 문제가 왜 생겼는지, 진행과정도 설명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40년 이전에 경험한 사례들이라서 그 사이에 발전한 질병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을 듯합니다. 또한 뒷이야기라는 덧붙이는 글에서 환자에 대한 혹은 해당 질환에 대한 뒷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학술지나 다른 의사들과의 교신에서 비슷한 환자에 관한 이야기도 제공받았고, 혹은 기왕에 발표한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옮겨 적기도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사례들은 의료현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환자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진단을 제대로 하고 치료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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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딱 맞는 거 같아요 신경질환에 대한 아라비안나이트라니 처음처럼님 대단 !

처음처럼 2021-12-06 17: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죽음을 바라봅니다
김영희 지음 / 아름다운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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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백신이 개발완료되면서 수습이 낙관되던 우한폐렴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앞날을 예측하는 일은 커녕 눈앞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미리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우리나라야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벌써 2년 가까이 이어진 희망고문에 지쳐가는 백성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집단면역을 이룰 만큼 예방접종을 달성한 나라에서도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백신을 개발한 제약사만 엉뚱하게 배를 불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한폐렴에 걸려 죽고, 우한폐렴에 걸리지 않겠다고 예방접종을 받았는데 부작용으로 죽고, 지난 가을에는 생뚱맞게 독감백신 맞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만, 지금처럼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저의 오랜 화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바라봅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많이 읽어왔습니다만, 이 책은 색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자를 소개한 글에서는 삶을 신이 주신 선물로 여기면서, 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인생,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성찰과 접근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살고 있는, 평범한 철학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자는 죽음이 뭘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합니다. 일과를 마친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면, “죽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게 뭔지, 소멸이라는 것이 뭔지고민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 같습니다. ‘온몸이 얼어버릴 듯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온몸을 감까는 느낌은 너무 생소하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죽음의 공포, 영원한 소멸. 이걸 처음 느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느 감정보다 적나라하게 당신을 지배할 겁니다. 두려움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떨리게 될 겁니다.’ 제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인지 꼭 이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경지를 겪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자는 <죽음을 바라봅니다>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생각과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에서는 모두 13꼭지의 주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에서는 모두 18꼭지의 주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합니다. 좋은 접근방법인 듯합니다. 책을 모두 읽고서 든 생각으로는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소멸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에게 혹은 후손들에게 기억으로 남는다는 주제를 더했더라면 좋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종교와 철학의 논리로 죽음을 바라봅니다.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통하지 않은 듯합니다. 첫 번째 주제인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다에서는 죽음으로 신체와 영혼까지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있는지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서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지극히 온당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내세와 윤회를 교리로 삼는 종교의 존재까지도 부정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특권입니다.’라는 주제도 근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그들만이 아는 죽음의 장소로 이동한다거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슬픈 눈으로 운다는 것, 혹은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는 등의 모습을 보면 동물도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일부의 설명이 전체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으며, 종교를 부인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도 맥락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죽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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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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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입니다. 우한폐렴이 아니었더라면 금년 가을쯤에는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조만간 가볼 생각으로 고른 책읽기였습니다. 특히 노마드의 시작, 방랑자들의 성소라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노마드의 기원이며, 유목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수가 이끈ㄴ 철학적으로 여행했다는 문구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57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이야기의 맥락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명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다른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옮긴이의 설명을 읽으면서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앞부분은 작가가 러시아계인 아카디의 도움을 받아 내륙의 오지들을 돌아보면서 오스트렐리아의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을 만나, 그들이 노래를 통하여 땅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종의 노래지도라고 할 송라인(Song line)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토지를 갖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 사유재산으로서 조상의 노래 한 자락과 그 노래가 지나가는 땅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노래 구절은 토지에 대한 권리증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남에게 빌려줄 수도 있었고, 빌릴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팔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애버리지니들에게 영토란 선들혹은 이어진 길들이 서로 엮인 그물망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백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것은 애버리지니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살아온 송라인을 잠식해 들어온 백인들에게 밀려 지금은 오지로 밀려났습니다. 저자가 만나는 애버리지니들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의 고유한 삶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오스트레일리아는 1901년 시작하여 1978년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여 철회할 때까지 백인들의 이민만을 인정한 백호주의를 지켜왔습니다.


전반부에 작가가 애버리지니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작가가 사람들과의 만남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진정한 애버리지니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애버리지니들의 삶과 철학에 대하여는 주로 러시아계인 아카디로부터 들어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영국 출신인 작가는 20대 무렵까지 유명한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근대회화부문의 전문가로 일하면서 잘나갔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단에서 유목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후에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유목생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았다는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모아온 유목생활과 관련된 자료들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성서, 신화, , 철학, 고고학, 동물행동학 등 다방면의 자료들입니다. 그동안의 성찰을 통하여 작가는 인간이 떠도는/이주하는 삶의 본능을 타고난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와서 애버리지니들의 송라인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유목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곳에서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오가면서 겪는 일과 작가의 모아둔 자료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서 읽는 호흡이 참 부담스러웠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끝을 분명하게 매조지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즉 다음 쪽에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완의 소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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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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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2016년작 영화 <아가씨>2018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비평가협회상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 작품으로 제37회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받은 김태리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열심히 보았던 기억은 있습니다.


마침 읽게 된 영국 작가 새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소설이라고 해서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1860년대 영국의 런던의 래트 거리와 런던에서 40떨어진 브라이어를 무대로 전개되는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소설이라고 했습니다. 런던의 래트 거리는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브라이어에 사는 젊은 아가씨 모드를 꼬여내는 결혼사기극을 준비합니다. 핑거스미스란 도둑을 의미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속어라고 합니다. 삼촌의 집필을 도와주는 세상물정 모르는 모드가 젠틀먼이라고 부르는 사기꾼 리버스에 홀려서 사랑의 도피행을 하도록 수가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의 초반에는 래트 거리에 사는 하층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이어서 브라이어에서는 부자 삼촌과 함께 사는 아가씨를 모시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부자들의 삶을 그려냅니다. 빅토리아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영국 사람들이 사는 모습, 그 속에 숨어있는 민낯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무려 832쪽에 이르는 만큼 이야기의 구조가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변주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반전이 거듭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기꾼들이 사전에 모의한대로 진행이 되어 모드 아가씨와 리버스는 사랑의 브라이어의 성을 빠져나가 사랑의 도피행에 오르고, 근처의 교회에서 결혼식까지 올리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모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장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을 두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은 불과 얼마 전까지 아니면 지금도 어느 정신병원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환자 개인의 인권을 짓밟고, 형식적인 치료로 정신과적 문제는 전혀 개선될 것 같지 않은, 그저 정신질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전근대적 정신의료의 전형을 보는 듯했습니다.


반전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전에 독자들에게 알려진 음모와는 다른 새로운 음모가 기획되었다는 것인데, 새로운 음모를 기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분이 몽땅 바뀌는, 그러니까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새로운 음모 속에는 또 다른 사연이 숨어있고, 그런 정황을 알게 된 음모의 희생양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발버둥이 시작되고 그런 시도가 무산되는 등, 음모의 기획자들의 뜻대로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반전에 새로운 반전이 생긴 셈입니다. 그리고 끝났더라면 주인공을 바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상황을 다시 꼬아서 새롭게 전개시키게 됩니다. 정신병원에 갇혔던 주인공이 탈출에 성공하고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었던 범인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매사는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요. 결국 음모를 꾸민 장본인들이 살해되거나 처형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레즈비언 취향을 살리게 된다는 결말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모드의 삼촌을 비롯하여 브라이어의 저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요즘 말로 19금 이야기책을 만들어 은밀하게 유통시키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도 특이했습니다.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성에 관한 관심은 은밀하면서도 뿌리가 깊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가 늘어지는 느낌이라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빠르게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중언부언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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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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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쩌면 큰 아이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빠져든 이유가 궁금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천공의 벌>676쪽이나 되지만 가벼운 종이를 썼는지 무게감이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쉽게 읽기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일본 사람들의 직업관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에 관한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한 우물만 판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분사형으로 적은 이유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 같아서입니다. 어떻든 무언가 일을 정하면 일생을 걸고 한 우물만 파듯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천공의 벌>을 보면 한 우물만 파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고민이 읽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자위대로부터 수주한 새로운 헬리콥터를 시운전하는 날 헬리콥터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 유하라 가즈아키와 야마시타는 각각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시운전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두 사람이 시운전을 준비하는 사이에 두 아이는 격납고에 스며들고 시운전 예정인 헬리콥터에 탑승해보는데, 기업비밀이라고 할 신형헬리콥터의 보안이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야마시타의 아들이 헬기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하라의 아들은 헬기에서 내리는데, 그리고는 헬기가 혼자서 시동을 걸과 격납고를 빠져나가 이륙하고 어디론가 이동합니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 원격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자동운전체계가 완성되었나 봅니다. 그렇게 이동한 헬리콥터는 후쿠이현에 있는 신양이라는 중수로 발전소의 상공에 이르러 정지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드러납니다. 전국의 원자력발전소를 폐기하지 않으면 신양 원자력발전소에 헬리콥터를 떨어트려 충동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자칫 단순해질 이야기를 헬기에 어린 아이를 탑승스켜 긴박한 상황을 만들면서, 이 사건이 인류애 차원에서 저질러졌음을-하지만 원자로 폭발이 발전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지구인 모두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이중적인 구조이기는 합니다-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합니다. 이야기 초반에는 떨어질 헬기에 타고 있는 야마시타 게이타를 어떻게 구출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자위대 구난대의 초인적인 기술과 의지가 결국은 아이를 구출해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어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범인을 쫓는 경찰과 범인이 요구한 사항의 처리방법을 둘러싸고 전문가와 행정가들 사이에 의사결정 과정이 다루어집니다. 한편 원자로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발전소 책임자들과 원자로를 건설한 건설사가 협력하여 대응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이 엄청 많아서 이야기의 흐름을 뒤쫓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고 경찰이나 탐정 혹은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물론 범인의 실체와 사건을 통제하는 장소에 접근한 사람은 후쿠이현 경찰 무로부시와 세키네였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역할은 아니고,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 사건과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감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뒤쫓다가 이룬 성과인 것입니다. 사건현장은 지극히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일구어낸 헬리콥터와 원자력발전소인데, 사건을 뒤쫓는 경찰을 여전히 발로 뛰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두 명인데 한 사람은 현장을 지키면서 사건을 주도해가지만, 또 다른 한 명은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여전히 분명치가 않습니다. 다만 범인으로부터 온 마지막 전언, ‘침묵하는 군중이 원자로라는 존재를 잊게 해서는 안된다. 그 존재를 모른 척하게 해서도 안된다. 자신들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구절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작가는 일본의 원전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보다는 안전하지만 원전의 위험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는데 방점을 찍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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