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천 개의 연극 - 유럽 연극의 수도에서 삶을 뒤흔든 작품들을 만나다
박철호 지음 / 반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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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너무 강렬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이 잠시 연극판을 기웃거렸던 옛날 기억을 채어낸 낚시라도 되었던 모양입니다. 저자가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면서 관람한 연극에 대한 감상들을 정리하여 소개한 책입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본 유럽 무대예술을 제대로 소개하는 첫 번째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연출가이자 비평가인 박철호님은 MBA를 공부하러 간 뉴욕에서 언어를 익히려 신청한 연극수업이 계기가 되어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수업을 통하여 뒤늦게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날아가 파리, 베를린, 그리고 마드리드 등에서 연극과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술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자신의 예술세계를 세우기 위하여 다른 이들의 작품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다른 작품들을 많이 감상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배울 수 있는 장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저자와 비교하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연극에 관한 저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제가 대학 연극동아리에 참여하게 된 것도 예과2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그 즈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동아리가 신입생환영공연으로 준비하던 조해일작 <건강진단>의 연습실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워크숍 등을 거쳐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이해하고서는 장 아누이가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쓴 <안티고네>를 올리는 가을 대공연 준비에 참여하였습니다. 연극에 빠져있던 친구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이론을 입에 달고 지냈지만, 연기력은 논할 처지가 안되고 시작도 늦은 저는 스태프로 참여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니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연극공연이 많지 않을 때입니다. 그래도 극단에서 올리는 상업극에서 대학극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되는대로 관람하고 무엇이든 배워 우리 무대에서 활용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의과대학과 신학대학만으로 된 대학이고, 엄청난 분량의 수업에 치이는 학창생활이었지만, 다양한 동아리활동이 펼쳐지던 때입니다.

 

우리 대학의 연극동아리는 당시 종합대학교까지 포함해서 대학연극 3대 동아리에 든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셰익스피어, 몰리에르와 같은 극작가의 정통 희극작품들을 주로 올려 작품마다 장안의 대학생들 간에 화제를 모았습니다. 연기하는 단원의 경우 시쳇말로 아이돌처럼 많은 팬들이 있어 공연 때마다 몰려들곤 했습니다. 드라마센터에서 올린 작품의 경우는 몰려든 관객들로 인하여 유리창이 깨지는 불상사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저도 제작에 참여했던 <안티고네>의 경우도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여 나름대로의 표현방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유럽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10년 동안 1,000편이 넘는 작품을 관람하고 그 느낌을 빠짐없이 기록했다는데, 그 가운데 엄선한 16편의 연극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일작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소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합니다. 심지어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연습을 하면서 작품을 구성하여 작가가 따로 없는 아리안 무누슈킨연출의 <레 제페메르(하루살이 같은 삶들)>도 있습니다.

 

연극은 같은 대본을 가지고도 연출자의 해석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는 종합예술입니다. 그리고 같은 팀의 공연이라도 매회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배우가 같은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를 하는 요즈음 시스템에서라면 당연히 배우에 따라 등장인물의 표현이 차이가 나고, 심지어는 같은 배우가 연기하더라도 매회 마다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작품 곰브로비치의 <이본, 부르군트의 세자빈>을 읽은 느낌을 소개합니다. ‘이토록 흉측한 신데렐라’라는 표제를 달아 놓은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스토리입니다. 흉측하고 못생긴 이본이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왕자의 손에 이끌려 왕궁으로 들어가지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미움을 받고 결국은 왕자마저 등을 돌리고 말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자가 이 작품을 맨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 같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베를린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다.(19쪽)”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베를린에서 처음 본 연극이라는 이유로 맨 처음 등장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16편의 연극이 모두 나름대로의 맛을 가지고 있으니 소개하는 순서가 작품의 우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첫 번째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든 첫 작품을 읽은 소감은 불쌍한 이본의 삶을 연출가가 어떻게 표현하더라는 것보다는 <베를린, 천개의 연극>이라는 책을 쓴 작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요? 김철리단장께서 ‘단기 베를리너이자 이방인으로서의 저자의 일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 베를린 사람들의 삶과 사회가 베를린의 현대 연극 무대가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고 추천의 글을 쓰신 이유가 실감됩니다. 먼저 연극을 감상하던 날의 작가의 일상으로부터 공연장으로 들어가 연극을 감상하기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작가와 함께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극단들이 제공했다는 좋은 질의 공연사진들을 곁들여, 작품과 등장인물을 소화한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같이 엮어서 베를리너 앙상블의 객석에 앉아 작가와 같이 한편의 연극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덧붙이는 이야기에서 소개하는 이야기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글재주가 뛰어나지 못한지라 하루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편하게 풀어보았다.(11쪽)”고 지나치게 겸양을 떤 저자의 글솜씨에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작품을 다 읽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낀 저자의 글솜씨는 ‘바로 짧게 끊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짧게 끊어 쓴 글은 읽는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연극을 공부하러 간 곳이 “왜 베를린이었는가?”도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베를린에는 약 50개의 극장이 있는데, 베를린연극의 특징은 레퍼토리극장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베를리너앙상블, 도이체스테아터, 폴크스뷔네, 샤우뷔네 같은 유명한 레퍼토리극장이 베를린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도이체스테아터의 200편, 베를리너앙상블의 80편을 포함에서 4개의 레퍼토리극장에서 올리는 연극은 2년 동안 매일 다른 연극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베를린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정말 섹시하다”라고 한 것처럼 베를린을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라고 부를 만 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책에 빠져든 또 다른 이유는 저자가 소개하는 16편의 연극들 가운데 <고도를 기다리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파우스트> 그리고 <한여름밤의 꿈> 등, 4편은 비록 국내에서지만 이미 관람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두어도 한판의 바둑’이라는 바둑해설자가 흔히 하는 말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연극이란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연출가가 해석하는 작품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니 한판의 바둑과의 비유가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설이 길어지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오이디푸스의 테베왕국은 오이디푸스가 성을 떠난 뒤, 두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잔을 벌이고 결국 동생 에테오클레스가 차지하게 됩니다. 자신이 차지할 왕위를 빼앗긴 폴리네이케스는 외부의 세력을 빌어 테베를 공격하다가 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고 오이디푸스의 동생 클레온이 테베의 왕이 됩니다. 클레온은 테베를 배신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벌판에 버려두고 누구든지 이를 매장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립니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사랑하는 오빠의 시신이 벌판에서 썩어가는 것에 분노하고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여 클레온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클레온은 아들 하이몬의 약혼자이기도 한 안티고네를 처형해야 하는 운명이 괴롭지만 국가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결국은 안티고네를 처형하게 되고, 하이몬 역시 안타고네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하이몬의 어머니 에루리디케 역시 자살을 하고 마는 비극으로 극이 마무리됩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쓴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독일 제3제국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는데,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정의로운 일을 감행한 뒤 마침내 죽음을 택한 안티고네와,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고도 자신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전후 독일의 나치 군인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108쪽)”이라고 작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문학을 보면 신의 뜻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신화에서 만나는 그리스의 신들이 항상 정의로운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들이 신의 뜻을 빌어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외세를 빌어 고국을 공격한 오빠를 묻어주어야 한다는 인륜을 내세운 안티고네의 무모함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은 아닐까요? 세월이 가면 클레온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새롭게 해석한 안티고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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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3-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4599
 

 

언젠가 명동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서점인 명동서점이 문을 닫았더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명동에서 누군가 만날 약속을 했는데 시간이 남았을 때 새로 나온 책도 구경하고,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책을 손에 넣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아내와 인연이 엮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새로 나온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릇처럼 서점에 들르곤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야 신문,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을 통하여 얼마든지 새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서점보다는 인터넷이 편리하다는 생각이 굳어진 탓에 서점에 나가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한 대형화된 서점들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동네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힘들어진 탓에 하나 둘 문을 닫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아직도 동네서점이 두어 곳 남아 있습니다만, 참고서의 판매에 의존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지난 달에 학회참석차 동경에 갔을 적에 거리에서 새롭게 느낀 점은 조그만 서점들이 참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점에 따라서는 DVD나 성인용 만화를 주로 파는 곳도 있었습니다만, 학술서적을 파는 조그만 가게에서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 보이는 가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새 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기몰이를 하는 책들에 대한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가지 인터넷에서는 책 내용의 일부라도 직접 읽어보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서가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살피다가 눈길이 가는 책을 뽑아서 목차와 머리말을 읽고 다음에는 본문을 조금 읽다보면 흥미가 일어 책을 사게 되는 아날로그적인 추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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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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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 수상하였고,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로알드 달을 처음 만났다니 저의 편협한 책고르기 탓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와인을 만든 농장과 년도를 맞추는 이야기를 담은 표제작 ‘맛’을 포함하여 로알드 달의 대표적 단편소설 열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고 하는데, 책을 읽은 다음 떠올린 느낌은 최근에 읽은 칼럼니스트 김상득님의 <슈슈>가 떠올랐습니다. 소설을 읽고 그의 칼럼이 생각났다는게 꽤나 생뚱맞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칼럼집의 리뷰를 적으면서 칼럼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등장하는 결정적 한방, 즉 글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 줄의 ‘극적인 반전’을 쓰기 위하여 필자는 아마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생각을 쥐어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입니다.

 

<맛>에 실린 열편의 단편은 모두 이야기의 결말이 극적인 반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상득님의 칼럼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김상득님의 칼럼은 웃음을 담고 있는 반면, 달의 단편은 대부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와인이 생산된 년도와 농장을 맞추는 내기가 진행되는 단편 <맛>의 결말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그리 권장할만한 인간의 한 부류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맛>에서 소믈리에를 빰친다는 미식가 리처드 프랏은 마이크 스코필드가 내놓은 와인을 만든 농장의 이름을 맞추는 내기에 마이크의 딸과의 결혼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내기를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선의를 가진 사람을 속이는 짓을 업으로 삼는 인간의 부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런 점은 첫 작품 <목사의 기쁨>에서도 읽히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거꾸로 선량한 사람을 속이려는 자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피해를 입게 될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진실을 밝혀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더라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하늘로 가는 길>, <피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경우는 등장인물이 뚜렷한 이유없이 간계에 의하여 죽음을 맞고 죽인 자는 마치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처럼 마무리되고 있어 사법당국이 이토록 허술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여자에게 기회의 땅이다”라고 시작하는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의 결말은 또 다른 끔찍한 사건을 읽을 수 있었는데, 정말 미국이 여자에게 기회의 땅인지 궁금합니다. “미국은 여자에게 기회의 땅이다. 이미 여자들이 국부의 85퍼센트 정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전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혼은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가 되었다. 처리하기도 간단하고 쉽게 잊을 수 있다. 야망이 큰 여자들은 원하는 만큼 자주 그 일을 되풀이하여 수입을 천문학적 숫자로 부풀릴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역시 만족스러운 보답을 안겨주기 때문에, 어떤 여자들은 이 방법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185쪽)” 정말 미국 남자들은 여자들의 봉일까요? 여기 등장하는 닥터 빅스비처럼 외도를 하는 남편은 별로 없을까요?

 

열편의 단편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지만, 대표작 <찰리와 초콜릿공장> 등으로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는 평판을 듣는 동화작가가 썼을까 싶을 정도로 통속적이고 어떻게 보면 잔인하다는 여운이 남아 리뷰를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고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성격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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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버린 천재음악가 정추
구해우.송홍근 지음 / 시대정신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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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이코프스키의 4세대 제자 정추를 아십니까? 챠이코스프키의 작품은 익히 알아도 그의 음악적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말씀드려 처음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남북으로 나뉘어 지낸 탓인지 특히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는 이상, 북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반도를 떠나는 분들은 국내에 머물고 계셨던 분들과 비교하여 대체적으로 뜨거운 조국사랑을 행동으로 직접 옮기는 적극적인 성향을 가지신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식자층에 속한다는 분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에 내세우는 비전에 매혹되었던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분위기는 해방후 북한에 사회주의국가가 들어선다고 해서 월북하여 새로운 세상만들기에 적극 참여하였지만, 북한에 들어선 정권의 실체에 실망을 금치 못하고 체제비판에 나섰거나 아니면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숙청되어 발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문제 전문가 구해우교수님과 송홍근기자님이 발굴하여 소개하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책 <북한이 버린 천재 음악가 정추>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이 버렸다는 음악가 정추는 남한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작가들이 전하는 정추는 광주에서 태어나 예술적 성향이 풍부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일찍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영화예술을 공부하였던 형님이 해방후 북한 정권의 요청으로 월북하게 되었는데, 평소 아끼던 동생 정추를 평양으로 불러 영화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북한 정권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면서 음악공부를 더 하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스크바의 챠이코스프키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졸업할 때 작곡한 작품이 심사교수들로부터 만점을 받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로 들어선 후르시쵸프에 의하여 벌어진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사회주의자 정추는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 독재정치를 펼치는 김일성을 배척하는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으로 소환될 위기에 몰린 정추를 당시 북한과 미묘한 관계에 있던 소련이 정추를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보내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카자흐스탄은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스탈린의 소개정책에 따라서 강제이주되어, 정착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추는 이곳에 정착하여 고려인 사이에 전해오는 전통민요를 채록하여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가슴속에 뜨겁게 자리잡고 있는 조국애를 담은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전념하여 소련 음악계가 인정하는 음악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추를 윤이상과 비교하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윤이상은 남한이 버린 음악가라고들 합니다. 경남 통영출신의 작곡가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남한에 돌아올 수 없게 된 다음 북한에 경도되었다고들 합니다만, 동백림사건에 적극 간여하였다면 그 전에 이미 스스로 남한을 버리고 북한을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현재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는 통영의 딸 신숙자씨와 그녀의 남편 오길남씨의 북한행 등 남한쪽 사람들을 포섭하여 북으로 보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정추는 1990년대 초에 구국전선을 만들어 북한의 민주화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윤이상을 변절자라고 잘라 말하면서, 카자흐스탕의 윤이상이라는 표현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도 윤이상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투쟁하는 민주투사로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북한 조직에 깊숙이 개입돼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북한 또한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어떻게 북한을 두둔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북한체제를 반대한 망명자이고 윤이상은 남한체제를 반대하고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입니다. 저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166쪽)”

 

저자들은 알마티를 찾아 정추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정추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찾아보고 그가 살아온 격동의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요약하여 읽는 사람의 이해를 쉽게 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하여 정추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의 힘으로 정추의 절절한 조국사랑이 담긴 ‘조국’,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 ‘내조국’ 등이 서울과 평양의 무대에서 연주될 그날을 소망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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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직관 - 유행의 탄생에서 열강의 몰락까지 미래를 예측하는 힘
존 L. 캐스티 지음, 이현주 옮김, 황상민 해제 / 반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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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은 가상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임금의 사랑을 그리고 있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건의 물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관으로 관상감과 성수청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상감은 천문, 지리, 명과학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천문을 담당하는 관원들은 기후 관측과 책력제작을, 지리를 담당하는 관원들은 풍수지리학을 토대로 왕궁·왕릉 등의 터를 잡는 일을, 명과를 담당하는 관원들은 길흉화복을 점쳐 왕실의 합궁일이나 길일·태일을 정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수청은 조선 전기에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비는 굿을 담당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관상감이 성수청에서 할 일까지 넘나드는 것 아닌가 싶은 장면도 있었지만, 왕조에서 이러한 부서를 두었던 것은 결국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서양에서도 별점 혹은 유리구술점을 치는 점술가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미래의 일을 알고 싶은 것은 동양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점술가나 우리의 무속인에 대한 관심이 예전같지 못한 것은 아마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개인의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일은 어렵다 쳐도 한 나라, 혹은 사회의 미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하는 일이 가능할까 궁금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정밀한 값을 갖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값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의 원리도 정규분포곡선과 일반적인 통계값으로 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면, 사회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현상의 미래 역시 예측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존 캐스티 박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설립한 미래탐구학회 케노스 서클(Kenos circle)에서는 복잡성 과학을 적용해 기존의 통계적 방식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데, 캐스티 박사가 쓴 <대중의 직관>을 통하여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부록에서도 요약소개하고 있는 주가변동에 관한 엘리엇파동이론을 통하여 “어느 인구집단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앞으로 일어날 사회적 사건의 유형을 결정한다”는 것을 핵심이론으로 하는 로버트 프렉터의 사회경제학의 논리를 통해서 미래예측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프렉터가 제안한 사회적 인과성의 사회경제학적 가설은 “사회분위기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 사회분위기의 동향과 범위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행동을 포함한 사회적 행동의 특징을 결정짓는다. 달리 말하면, 분위기가 사건을 지배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사회분위기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리를 이루려는 인간의 충동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인데, 최근 우리 사회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국내외 사회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데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분위기는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특정 시기에 어떤 집단의 사회적 분위기가 긍정적이면 이는 그 집단이 미래를 낙관하며 고대한다는 의미이며, 반대로 사회적 분위기가 부정적인 경우 집단은 미래를 비관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 형태 사이에는 당연히 분위기가 전환되는 이행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긍정적 분위기와 부정적 분위기라고 하는 회색지대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분위기는 ‘상승하는 긍정적 분위기’, ‘최고조에 달한 긍정적인 분위기’, ‘쇠퇴하는 부정적 분위기’, ‘바닥을 친 부정적인 분위기’의 네 가지 단계가 파동처럼 순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학에서는 도미니크 모이지가 <감정의 지정학>에서 다룬 희망, 두려움, 수치라는 세 가지 사회적 분위기에서 단서를 얻어 상승분위기를 ‘희망’으로, 최고조의 분위기는 ‘오만’으로, 쇠퇴하는 분위기는 ‘두려움’으로 그리고 바닥을 친 분위기는 ‘절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자는 2001년 가을 일어난 엔론사의 파산을 비롯하여 과거의 대형 국제전쟁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지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1914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이라는 우연이론가의 주장에 대하여, 알자스 로렌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욕망, 유럽의 동맹체제, 발칸지역을 지배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야심, 심지어는 군수품 제조업자들과 국제은행가들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이미 전쟁의 위기가 차곡차곡 쌓아갔던 것이라고 설명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점에 주목한 것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도발이 남북한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저자는 지각의 판구조론으로 지진을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각을 나누고 있는 몇 개의 판이 서로 부딪히면서 생기는 지진을 관찰해보면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응력을 덜어주는 조그만 떨림마저도 중단되는 알파국면이라고 부르는 침묵의 시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충격이 수없이 발생하는 베타국면이 시작되고 마침내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판끼리의 부딪힘이 적절한 빈도로 일어나 응력이 해소되지 않고 쌓이다 보면 결국은 대형 지진이 일어나 쌓였던 응력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국가 간의 갈등 역시 유사한 면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6.25남침전쟁처럼 은밀한 가운데 전쟁준비를 진행해 오다가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해야 전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치국면을 긴장으로 몰고 가는 도발을 반복하면 반대편에서는 수비태세를 강화하여 대응력을 높이게 됨으로, 막상 전면전으로 발전하였을 때는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역사적 흐름을 고찰한 열강의 몰락의 예를 들어, 유행의 탄생으로부터 몰락까지 부침이 심한 영화, 음악, 스포츠, 패션과 같은 문화는 물론, 한 국가의 통치세력의 변화와 국가 간의 전쟁과 같은 국내외의 정치적 위기에서 경기의 순환과 같은 경제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분석해보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기도 찜찜할 수도 있는 사례는 어떤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착공하였다면 그 나라의 주식시장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라는 마천루지수입니다.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타워 건설, 대만의 타이페이101 건설, 두바이의 부르즈 두바이 건설을 전후하여 해당국가의 증시지수를 살펴보면 저자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될 롯데월드타워123가 2009년에 착공되어 2015년에 완공예정에 있다는 저자의 인용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공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대선의 향방에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정치동향은 주식시장의 회전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즉 투자자들은 후보의 성향에 따라서 시장이 상승할 것이라거나 하락할 것을 점칠 수 있다는 것인데, 정권의 정책방향이 주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꾸로 시장의 동향으로 정권의 향배를 판단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주식시장에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동향은 현직 대통령이나 여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할 가능성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한 인구집단이 미래를 낙관하는 긍정적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이 되는 경우 현직대통령이 유리하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처럼 대통령 단임제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료계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을 계기로 하여 가속되던 부정적 사회분위기가 참여정부 시절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의료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절망할 수밖에 없던 사회분위기가 다소 상승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는 판단이 들만도 한데, 사회나 정책당국에 대한 의료계의 대응은 변화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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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3-05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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