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트림 머니 - 전 세계 부를 쥐고 흔드는 위험한 괴물
사트야지트 다스 지음, 이진원 옮김 / 알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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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 따르면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더할 수 없이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유럽발 경제위기로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라서 주목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사태를 만든 당사국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발 경제위기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의 지나친 복지정책이 국민들의 눈높이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다 자초한 측면을 꼬집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발 금융위기가 있기 전에도 세계는 2007년 시작된 미국발 프라임모기지 부실파동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아 극단적인 처방으로 겨우 회생국면을 맞고 있는 상황이라서 위기감이 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다 싶었던 서브프라임사업이란 “불행한 개인들에게 제공되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낮은 이자의 모기지 대출을 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안게 만든 은행과 모기지 브로커들의 기만적이고 냉소적인 영업관행의 동의어가 바로 서브 프라임(7쪽)”이라고 세계적인 금융 파생상품과 리스크관리 분야의 전문가 사트야지트 다스는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익스트림 머니>는 바로 2008년 세계를 뒤흔들었던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파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골장터에 나가보면 속칭 야바우라고 하는 돈놓고 돈먹는 게임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사위를 숨긴 종지를 맞추면 건 돈의 몇배를 되받는 게임인데 한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주사위 종지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주머니에 든 돈을 모두 털린 다음에서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투자이건 주식투자이건 간에 형태만 달랐지 위험을 안고 하는 머니게임은 현대판 야바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탓에 섯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전설적인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의 말을 읽다보니 더욱 새가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속이는 방법은 항상 똑같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투기가 결코 변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기가 주는 매력은 똑 같다. 탐욕, 허세 그리고 게으름이 그것이다.(35쪽)”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길거리로 나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모기지 브로커의 유혹에 이끌려 평생 소원인 집장만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꿈을 꾸었고, 다만 운이 나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믿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이 한계를 능력이상으로 부풀리지 않는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익스트림 머니>라고 정한 이유를 서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 번영, 부 면에서 새로운 인공적 지위를 창조하는, 돈을 수단으로 하는 놀랍고도 위험한 게임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며 일하고 있다. 나는 이런 돈을 ‘익스트림 스포츠’에 빗대어 ‘익스트림 머니’라고 부른다. 과거에 평범한 것들의 가치 평가와 교환을 위해 사용되던 돈이 이제는 돈을 버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39쪽)”.이런 제목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담은 우리말 제목이 있을까 싶습니다.

 

크게 4개로 나뉜 글 가운데 ‘제1부 신뢰’에서는 유통을 매개하는 돈이 생겨난게 된 배경으로부터 돈이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2부 시장근본주의’에서는 시장을 움직이는 이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고, ‘제3부 연금술’에서는 과거 하찮은 쇠붙이를 이용하여 금을 만들어내려는 연금술에 비유하여 파생상품 등과 같이 돈없이 돈을 만들어내는 금융상품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이런 금융상품이 결국은 세계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과정을 ‘제4부 금융위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필요한 부분만 추려내는 절차탁마가 돋보일 뿐 아니라 영화, 연극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하고 있는 비유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은 오히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고나 할까요?

 

앞서 유럽발 글로벌경제위기를 인용했습니다만, 레이건 미국대통령의 복지국가에 대한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아기와 같다. 한쪽 끝에서는 식욕이 넘쳐나지만 반대쪽 끝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소화관이다. 복지의 목적은 가능한 한 존재 자체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195쪽)” 짧은 인용문이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브프라임모기지 사건에서부터 유럽발 경제위기에 이르기까지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수준에 걸맞는 정책운용이 중요하고 필요하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나누어 가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처음 인용했던 백척간두란 말은 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현전신; 백척간두에서 걸어나가면 시방세계가 바로 온 몸이다)이란, 중국 선종의 장사경잠(長沙景岑)의 계송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지난 일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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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2 -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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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의 추측편을 담은 <추측과 논박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에 이은 논박편을 담은 <추측과 논박2>입니다. 추측은 과학철학의 제문제에 대한 포퍼의 견해를 담은 10편의 글을 담고 있으며, 논박은 다른 사람의 이론에 대한 포퍼의 비판적 견해를 담은 10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글들은 독립되어 있지만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좋습니다만, 몇 개의 주제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과 형이상학과의 관계, 심신과 언어의 관계, 사회과학, 여론, 유토피아, 역사주의 그리고 휴머니즘 등입니다.

 

과학 영역에서 의학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하는 문제로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의술로서의 의학은 과학 영역이라 하기 어렵다는 것이 자연과학자들의 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듯 합니다만, 학문으로서의 의학은 방법론 등을 고려하였을 때 충분히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것이 의학을 전공하는 분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한 포퍼의 생각은 “의학은 기예(art)이고 기술이지만, 그것을 자연과학의 대표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잘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은 순수과학이라기보다는 응용과학이기 때문이다. 순수화학에 대해서 말하면, - 순수수학과는 다른 것으로서의 - 자연과학은 지식(scientia)이나 참된 앎(epitēmē)이 아니라는 데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연과학이 기술(technē)이기 때문이 아니라, 억축(doxa)의 영역에 속하기-그라시가 제대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신화오ㅘ 마찬가지로- 때문이다. 저 역시 의학은 순수과학이라기 보다는 응용과학의 범주에 두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여론’의 진실성이 화제가 되고 있는 탓인지 ‘여론과 자연주의자의 원칙’이란 제목의 글을 집중하여 읽었습니다. 포퍼는 “민심은 천심(vox populi vox dei)이라는 고전적인 신화가 있다”라고 전제하면서 민주의 소리 신화에는 몇 가지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정된 정보밖에 얻을 수 없으면서도 많은 서민 대중은 자실들의 정부보다도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고매한 뜻에 따른 영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거나 여론은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어 정부를, 심지어는 비민주적인 정부까지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어느 정도의 의혹의 마음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익명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여론은 무책임한 힘의 형태이므로 자유주의적인 견지에서는 특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여론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론은 강력한 자유주의적인 전통에 의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되지 않으면, 자유에 대한 위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론편의 첫 번째 글은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에 친구들끼리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 지성적이지 않다 싶으면 화제가 너무 형이하학이니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자 농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음사전에서 ‘형이상학’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형이상학’은 “①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思惟)나 직관(直觀)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의 제목에서 유래한다. ② 초경험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형이하 또는 경험적 대상의 학문인 자연 과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③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비변증법적 사고를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이컨 이래로 중요한 철학적 화두임에도 분명하게 정리된 개념은 아직 없으나, “과학은 그것의 관찰적 기초나 또는 귀납적인 방법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데 반해, 사이비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변적인 방법이나 또는 베이컨이 말했듯이 <마음의 기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24쪽)”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포퍼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의 사변적 방법이 과학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논의를 포함하여 보다 깊이 따져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정도로 줄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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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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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하여 칼 포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금을 통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검토하여 플라톤,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열린사회의 대척점에 있다고 보는 닫힌사회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1934년 발표한 <탐구의 논리>에서는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을 ‘반증가능성’을 기준으로 규정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현대 과학철학의 명제로 자리 잡게 된 반증가능성의 이론은 1963년 발간한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발전시켜 이 책은 그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예스24의 블로거 ‘루루의 책장’님은 이 책의 리뷰를 통하여 국내에 번역소개된 포퍼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 가운데 <추측과 논박>을 단연 압권으로 보았고, 포퍼의 대표저서로 한권만 꼽으라 한다면 이 책을 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우려하였습니다. 그 예로 황우석교수 사태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 정신만 잘 이해하고 있었어도, 검증을 하지 않고 병원에 드러눕는 것이나 사이언스지의 권위에 기대어 회피하는 것이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신앙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저 또한 황우석교수의 줄기세포조작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그 상황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북소리]에서 오래 전 소개드렸던 <시민의 과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5547>을 통해서 과학과 관련한 사건이 자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에 배태된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짚어본 바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 역시 ‘루루의 책장’님이 지적한 것처럼 포퍼가 정리한 과학적 시각에서 사태를 냉철하게 지켜보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감성에 휩쓸려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듯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온 과정을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과학 철학, 고대 철학, 칸트 철학과 자연과학, 변증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21편의 주요 논문과 강연문을 묶어 엮은 것입니다. 상권은 ‘추측’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 중심을 두었다고 한다면 하권은 ‘논박’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하겠습니다.

 

먼저 서론에 둔 글은 1960년 1월 영국 학술원의 연례 철학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학문의 성과로 축적되는 인간의 지식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어 이 책의 서론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서론에서 포퍼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고전적 합리주의로 정리되는 영국과 대륙 철학계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지식의 궁극적 근원에 관한 관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국철학계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을 관찰에 두고 있는 반면, 대륙학계는 그 근원을 명석 판명한 관념에 대한 지적 직관에 둔다고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경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합리주의자이며, 또한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고 정의하고 있는 포퍼는 이 글을 통하여 고전적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차이점이 그들 간의 유사점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과, 둘 다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적었습니다. 포퍼는 직설적이고 명료한 논증과 광범위한 논의대상으로부터 핵심을 추출하여 문제를 제기하여 비판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제기에 대한 반박에 대하여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반박하는 적극적인 학문의 자세를 보여 주목받아왔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식의 근원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으로부터 데카르트,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인식론의 전반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지식의 가장 좋은 근거-가장 믿을 만하고, 실수하지 않게 하고, 의심이 나는 경우에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최고 법정으로서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야만 하는 최선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숨이 찰 정도로 긴 질문 대신에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보는 이상적인 근거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 근원이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63쪽)

 

글 제목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대하여’를 해제하면서 지식은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무지의 근원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글머리에서 밝힌 포퍼는 “우리의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반면 우리의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무지의 주된 근원이기 때문이다.(70쪽)”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모든 지식은 인간적이라는 것, 즉 지식 속에는 우리의 오류, 편견, 몽상, 소망 등이 뒤엉켜 있으며, 우리가 비록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뿐임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도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추측’편은 첫 글 ‘과학: 추측과 논박’이라는 제목의 글에 이어 ‘철학적 문제들의 본성과 그 과학적 뿌리’,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이어지며, ‘칸트의 비판과 우주론’ 그리고 ‘과학과 형이상학의 지위에 관하여’ 등이 이어지고, 마지막 열 번째 글은 ‘진리,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라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지식의 근원을 논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에서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견해는, 본질주의, 구조주의 그리고 추측, 진리 그리고 실재라고 설명하는 불확실성입니다. 갈릴레오 철학을 구성하는 본질주의는 합리적인 의심을 뛰어넘어 사물의 본질적 성질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주의적 사고는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구조주의적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본질적 실재의 세계 가운데 관찰 가능한 현상의 세계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이렇게 인식한 현상의 세계를 기술적 언어 또는 기호적 표현의 세계를 통하여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는 본질이란 현상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본질의 일부에 불과하고 과학은 이러한 현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계산규칙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검증할 수는 없지만 엄격한 비판적 시험에 회부될 수 있는 추측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여 반증하는데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실재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세 번째 견해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는데 있어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돌아가라’는 제목은 처음에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전통은 가져다 쓸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싶어서 입입니다. 저 역시 자주 인용하는 내용입니다만, 전통적인 경험주의 인식론이나 전통적인 과학사 서술에서는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론으로 나아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이컨의 철학적 사유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포퍼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철학자들을 연구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다보면 대담하면서도 매혹적인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퍼가 예로 들고 있는 탈레스는 “지구는 배처럼 물 위에 떠 있으며, 지진이란 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지구가 흔들리는 것이다.(275쪽)”라고 했는데, 탈레스는 아마도 바다에 열려 있는 그리스가 지구의 본질이라고 보았을 것이며, 역시 지진이라는 현상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논리를 세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땅이나 바다가 모두 지구라는 천체 안에 있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탈레스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대륙이 지진을 동반하면서 이동하는 대륙이동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베이컨 철학에서 말하는 관찰은 “관찰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의 <참된 원천>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과학적 진술이 왜 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퍼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찬란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비판적 논의의 전통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정 학파에서 단순하게 스승의 교설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전통이 그리스 철학을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통하여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변화와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이 세워지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승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전에 학교에 몸담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최근에 <은교>라는 영화를 보고서 마음 한켠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그 무엇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은교>를 본 많은 분들은 노시인이 어린 은교를 통하여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었다는 점에서 노시인과 은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젊은 제자의 삼각관계에 시선이 더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은교가 노시인에게 미친 영향보다는 스승과 제자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하에 두고 오랫동안 수발을 들게 한 제자에게 문재(文才)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면 일찍 내보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선 편하다는 이유로 거두었다가 세경이랍시고 통속 소설 한편 써 던져준 스승을 보면서 제자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치명적 결말로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스승이 스승답지 못해서 잉태된 비극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과 그 가운데 고민하고 무너지는 스승의 모습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렸더라면 통속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가시지 않았을까요?

 

글이 곁가지로 흘렀습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몸살을 앓는 우리사회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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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329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 뇌가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김재현 지음 / 컨텐츠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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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억을 공부하기 위하여 <왜 나쁜 기억은 자꾼 생각나는가>를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 글쓴이가 어떤 분인지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김재현선생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경력에 관한 정보는 구체적이지 않고 그저 “뇌를 공부하는 의사이자 비전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진료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뇌와 비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을 들려주고, 동기 부여를 하는 의사로 유명하다.”라고 되어 있는 탓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보통 부르는 직함으로 부르겠습니다. 뇌의 어느 영역을 공부하시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라는 제목이 제 눈길을 끌었는데, 기억의 만들어지고, 저장되고,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나쁜 기억이 특히 오래 가는지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뇌과학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크게 실망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책에 담긴 내용을 보면 저자가 기억에 관한 뇌과학연구를 직접하고 있다고 보이는 점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기억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흥미있게 읽을거리를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형식의 책은 특히 일본에서 대중을 위한 읽을거리로 나온 것들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후에 시내출장에 나선 길에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젊어서 부터의 내공 때문일까요? 제가 19살이 되었을 때, 저자처럼 이데올로기를 정의할 수 있었던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데올로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하고 생각으로 풀어가는 정신활동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의 세상 걱정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지요.(18쪽)”

 

저자는 아주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과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학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흔히 뇌는 써야만 좋아진다고 말한다. 예컨대 꼭대기에 매달린 나뭇잎을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목이 길어진 기린처럼 용불용설이 뇌 계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31쪽)“ 동물의 진화를 설명하는 용불용설은 근거가 없어 더 이상 진화론의 하나로 인용되지 않는 흘러간 학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영화, 의학잡지 등 기억에 관한 일화를 다룬 다양한 자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책을 구입해서 통독했다.(176쪽)”고 하신 저자의 고백처럼 저 역시 기억을 주제로 하여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꾸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전체가 일정한 흐름을 통하여 연결된다기 보다는 개별 제목의 글들이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관하다고 보입니다. 기억의 형성에 관심 심도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기개발서의 한 종류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저자와의 공통점 하나입니다. 힘들고 지치거나, 혹은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위출될 때 저자는 ‘내가 전주 김재현이다’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제 경우는 스케일이 조금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양기화다’라고 주위분들에게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때 제 호언장담을 들었던 분들을 만나면 그때의 호기는 다 어디로 갔느냐는 말씀을 하시면 웃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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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 범우비평세계문학선 454-1
한스 카롯사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직전에 내신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를 읽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얻은 생각은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별호를 드린 것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눈으로 읽으면서도 마치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이곳저곳에 글을 쓰면서 선생님의 일상을 인용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내 생애의 밑줄’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읽던 페이지에는 반드시 표시가 될 만한 것을 끼워놓지, 접지 않을 뿐 아니라 읽다가 기억해두고 싶은 좋은 문장을 발견했다고 해도 밑줄이라는 걸 쳐본 적은, 절대로라도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수년 전 본격적으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에 밑줄을 치는 대신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해 두었다가 독후감을 쓸 때 그곳을 다시 챙겨 읽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백을 따라서 적어두곤 했습니다. 특히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에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넘쳐났던지 제법 여백을 채우는 메모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읽었던 책을 [북소리]에서 소개하려합니다. 바로 의사이면서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독일 문학계를 풍미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스 카로사 박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 ‘내 생애의 밑줄’ 덕분에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제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오랫동안 제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여러분들의 기억에 담아 두었던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떠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나이쯤 되는 분들에게 청춘시절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어냐고 물으면 상당히 많은 분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는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는 데미안이 남긴 구절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쳐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에서 만난 친구 데미안과 함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이 세밀하고 지적인 문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데미안>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습니다만, 저의 추억의 앨범에 더 진하게 남아있는 책은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입니다. 어쩌면 한스 카로사 박사가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부터 시작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 더욱 실감이 났고, 제 자신이 주인공에 투사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북소리]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갈 때 마다 책장을 뒤졌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어 새로 구입을 해야 했습니다. 70년대 초반에 이 책을 출간했던 범우사에서는 2004년 2월에 다시 출간한 것 같습니다. 어떻든 그때는 단숨에 읽어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나이가 든 탓인지 새로 읽는 책은 읽는 호흡이 꽤나 더뎠습니다.

 

책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1956)박사를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남부 바이에른 튈츠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사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뮌헨, 라이프치히, 부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0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개업을 하여 환자진료를 하면서 시, 수필, 소설 등을 발표하였는데, <유년시절>, <젊은이의 변모>, <의사 기온>, <젊은 의사의 수기>, <루마니아 일기>, <두 개의 세계>, <이탈리아 여행>등을 남겼고, 1931년에 고트프리트 켈러상을 193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녹여냈는데, 특히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은 “자신의 지나간 생애를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고향을 떠나 수줍고 순박스러운 젊은이로서 대도시 뮌헨에 도착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날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그와 스쳐 지나간 여러 여인들과의 사랑과 좌절을 그렸으며, 고명한 여러 교수님과 그들의 강의에서 얻은 새롭고 외경에 찬 학문의 세계, 그리고 그가 밤을 새워 읽었던 고전과 당대의 명저와 시인들의 사상, 거기서 얻은 정신적인 자양분이 이 젊은이의 영혼에 투영되어 마침내는 질서와 사랑이 평형을 이루는 좌표를 구해내게 되는 과정을 차원 높은 관조자의 입장으로 보여주고 있다.(6쪽)”고 번역을 하신 홍경호교수님은 적고 있습니다.

 

한스 카로사는 같은 시대에 활동한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다룬 것과는 달리 괴테의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 하찮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 세계가 지닌 영원한 법칙이나 신성을 찾아내고자 했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학창시절 여러 동아리를 기웃거리다가 졸업을 하고 말았습니다만, 당시에도 문학, 음악, 그림,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동아리활동을 통하여 의학 이외의 영역에서도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 카로사 박사는 이미 저명한 시인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시재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학에 관심이 많은 동무들과 어울리며 재능을 꽃 피워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업인 의학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독일대학은 입학은 쉽지만 졸업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구두시험을 통과하기 위하여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고백도 숨기지 않습니다.

 

구술시험하니 저도 역시 옛날 추억 한 자락을 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초의학 과목 가운데 제일 어려운 공부는 바로 병리학이었습니다. 재시험에 걸리게 되면 주임교수님 앞에서 보는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진급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술시험이라는 것이 교수님께서 재시험대상자의 숫자만큼 문제를 적은 쪽지를 담은 잠자리채에서 하나 꺼내서 답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낙제가 결정된대서 지옥에라도 들어가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한 문제로 한 젊은이의 1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는 문제도 주임교수님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선배님들의 공포스러운 체험담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2개 학기에 병리학을 공부하는동안 각각 두 번씩 치른 육안, 현미경 그리고 필기시험을 모두 한번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재시험 대상자를 고르는 시험에서는 운좋게 통과할 수 있어 끔찍한 구술시험을 치루기 위하여 주임교수님을 독대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피를 말렸던 병리학과 무슨 인연이 끈질겼던지 결국은 병리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전에 털어놓았던 해부학시험 이야기에 이어서 병리학까지도 공부가 시원치 못해서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학창생활을 [북소리]를 통해서 고백하게 되는 것도 팔자소관인 듯합니다.

 

청춘시절 사랑을 빼놓으면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로사박사 역시 ‘만남’이라는 제목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처녀와의 기이한 만남을 적고 있습니다. 친척 자매를 방문한 자리가 어색하게 파한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일을 쓴 여인과의 우연하게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요즘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만남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반점이 있는 그 베일 속에서 내게 눈길을 보낸 그 여인은 아름다운 시체, 해부학 강의 첫 시간 이후로 그 감지 못하던 눈이 도저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 여성의 얼굴과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80쪽)” 사실 한밤중에 호젓한 길에서 마주친 여인이 해부학실습실에서 만나는 여성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거의 혼비백산 도망치고 말았을 것 같은데 박사는 지나치게 담담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숙명인 것만 같았던 그녀와의 만남도 결국은 이별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는데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우리네 속설이 독일에서도 통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이 작품 가운데 제 기억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바로 ‘도보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된 마지막 글입니다. 요즘에도 걸어서 국토순례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고난을 즐기려는 목적보다는 자연을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걸어서 여행을 한 것이니 부럽기만 합니다.

 

지난 해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흔히 외국여행을 가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유명한 관광상품을 구경하고 역시 교통편을 이용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식이 됩니다. 이런 여행을 하다보면 그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경험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렇게 늘어진 여행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전거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에 펼쳐진 자연을 직접 보고 느끼고,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도 생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의 여행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카로사박사는 한술 더 떠서 방학을 이용해서 도보여행을 다녀왔는데, 당시 혜성같이 등단한 여류시인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도나우강을 따라서 걸어가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의 일상에 동참하고서 느낀 바를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사는 인심이 지금과 달랐던 때문인지 길을 가는 사람들을 집에 들여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선조 역시 사랑채에 과객을 쉬게 하거나 사정이 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건넌방 혹은 헛간을 치워서라도 잠자리를 마련하고 거친 음식일지라도 대접했다 하니 양의 동서를 떠나 사람사는 것이 비슷한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좋은 풍습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어 아쉽다 하겠습니다.

 

카로사박사가 도보여행에 적고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여행길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을 소개해드리면, “얼마 후에는 보다 섬세하고 색채가 예리한 식물세계가 전개되기 시작해서 눈길을 끌었다. 감자밭은 빛나는 리라색으로 꽃이 만발했고 톱니풀은 도나우 강 하류에서 보듯 엷은 갈색이 아니라 아름다운 홍색이었고 귀뚜라미풀꽃도 푸른 색깔이 더 짙었다. 바위틈에 자란 가시 있는 관목도 백적색의 입술 모양의 꽃잎을 피웠다.(211쪽)” 저도 도보여행을 꿈꾸고는 있습니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자신이 없는 탓인지 실행에 옮기는 일이 더디기만 합니다.

 

글을 옮기신 홍경호교수님은 카로사박사야말로 독일 문학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던 ‘전통의 수호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신비, 티 없이 순수한 젊은이의 미적 발전은 비뚤어질 수 있는 젊음을 바로 세우고 생에 대한 따듯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정신적인 불모로, 허약해져 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양식이 되리라 믿는다.(8쪽)”라는 말씀으로 옮기는 수고가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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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1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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