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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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을 완독했습니다. 책의 두께와 가격 때문에 서대에서 들었다 놓기를 몇 해 동안 반복했던 것인데 아내의 부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UCLA대학의 재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각 대륙에서의 진행되어온 다양한 인종의 흥망사를 ‘총, 균, 쇠’로 요약한 식량과 가축의 확보, 집단거주화 과정에서 발전한 병원균, 그리고 언어를 비롯한 과학적 발전 등을 종합한 우열의 차이가 존망의 차이로 이어졌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75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가운데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과학으로서의 인류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된 에필로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에필로그에 담은 그의 결론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만, 핵심논지는 충분히 논리적이어서 수긍할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유인원류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이래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의 발전해온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생물학적 차이보다는 환경적 요소의 차이가 집단의 흥망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적 요소들도 무수히 많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차이를 4가지 정도로 요약한다면, 각 대륙에 서식하고 있던 야생동식물 가운데 가축화하거나 작물화가 가능하였는가 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검토되고 있습니다. 즉, 채집경제보다는 식량을 생산하여 잉여식량의 축적이 가능한 사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잉여식량을 확보한 집단보다는 식량이 부족한 집단이 잉여식량을 가진 집단을 공격하여 식량을 탈취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역사적 증거는 멀리가지 않더라도 한반도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사례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잉여식량을 확보한 집단에서는 잉여식량을 제공받으며 집단의 사회적 발전을 위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 예를 들면 정치가, 발명가, 학자, 예술가 등등이 많아지게 되고, 이들의 노력은 집단의 문화적 파워가 될 뿐 아니라 토기, 석기에서 철기문명으로 이행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무기체제의 발전으로 이어져 비교 열세에 있는 집단을 복속시키거나 심지어는 멸망에 이르도록 하였다 하겠습니다.

 

인류사적으로 가축화와 작물화가 가능한 동식물의 부존이 대륙간에 차이가 있었던 이면에는 가축화 혹은 작물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해당 대륙에 거주하는 집단이 포획대상의 멸종을 고려하지 않고 남획한 것도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인근으로부터 자원을 들여올 수도 있었을 것인데, 각 대륙의 특성을 보면, 유라시아대륙은 동서축을 중심으로 이동이 쉬운 구조인 반면, 아프리카나 남북 아메리카의 경우는 남북축을 중심으로 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문명의 확산속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물의 경우 같은 위도 상에서는 물의 공급 이외의 일조량이나 기온 등의 요소들이 유사하기 때문에 큰 노력없이 농사법이 확산될 수 있겠으나, 남북축으로는 일조량을 비롯한 기후요인으로 작물자체의 적응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한계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각 대륙 사이에 존재하는 바다라는 제한요소가 작물이나 가축의 확산을 저지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는 기술을 확보한 집단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대륙의 면적과 전체 인구의 규모와 이들의 통합 여부가 결정적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나머지 대륙과는 달리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지역은 지역의 통합이 일찍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집단 사이의 갈등과 경쟁이 사라지면서 집단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 중세 이후의 대륙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는 요인이 되었다는 논리는 지금까지의 대륙간의 문명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근세에 유럽사회가 다른 대륙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병원균을 확산시키는 효과에 편승하여 해당지역의 거주하는 집단이 크게 피해를 입는 사례가 많았음을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흐름에 병원균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향후 인류사적 흐름에 병원균이 기여할 수 있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와 문자의 보유 유무가 집단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집단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지식산물들이 기록으로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집단의 문명적 힘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외래의 언어 혹은 문자를 습득하기 위하여 힘을 쏟아야 하는 만큼의 투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지적산물이 전승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떻든, 고고학, 인류학, 분자생물학, 언어학 등 다양한 영역의 방대한 연구성과를 아울러 분석하고 큰 흐름을 도출해낸 저자의 통찰에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내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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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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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민음사와 조선일보가 같이 진행한 북콘서트 덕분이었습니다(http://blog.aladin.co.kr/761535117/5707234). 오래 전 읽으면서 ‘어렵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던지, 이야기 내용이 가물거리기에 다시 읽고서 북콘서트에 참석했어야 하는데, 미국 출장 때문에 겨우 시간만 맞출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진행을 한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300명이 넘는 청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2시간여 동안 유연하고 매끄럽게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게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에 북콘서트를 통하여 두 분으로부터 들은 설명이 녹아들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은 좋은데, 오롯이 나만의 생각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이 혼재된 리뷰가 될 것 같습니다.

 

‘프라하, 그리고 4인4색의 러브스토리’라는 부제가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1968년 1월 당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가 주도한 자유화운동으로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 8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5개 연합군의 침공으로 무너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날 북콘서트에서 두 사람은  “가볍게 읽으면 풍부한 텍스트를 정신없는 사각관계로만 납작하게 만들어내는 흔하디흔한 사랑놀음이 되지만, 제대로 읽으면 특수한 하나의 사랑 이야기로 사랑 전체의 진면목을 제대로 잡아내는 소설”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4사람의 주요 등장인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과 그들의 사념을 세밀화 그리듯 따라가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토마시와 테레자 두 사람의 관계가 메인이 되며, 사비나와 프란츠는 토마시와 테레자 사이에 끼어들어 상황을 복잡하게 이끌어가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랑을 다루는 통속드라마의 유행인 4각관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외과의사 토마시는 자신의 생활이 한 여인에 매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믿기 때문에 다양한 여성과 인연을 맺는 바람둥이인데, 어느날 과장을 대신하여 지방병원에 파견나갔을 적에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테레사와의 만남이 숙명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동진님은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서 다져진 관계일 뿐이라고 정리하면서 굳이 숙명이나 필연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말았는데, 제 경우는 사실 우연이란 한 번의 만남에 적용할 수 있는 단어일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두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의 우연이 겹친다는 것(사실은 신분상승을 노린 테레사가 주도한 우연이 몇 차례 있다고 본다면 숙명적인 관계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을 필연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화가인 사비나는 짧은 만남으로 끝나는 토마시의 일반적인 여성편력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독특한 관계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토마시와 테레사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배치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끔 정사를 나누기는 하지만 이는 어쩌면 일상적인 일일 뿐 두 사람 사이에 애절한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비나의 애정관 역시 토마시와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프란츠는 사랑을 논함에 있어 지나치게 평범하여 특징이 없는 인물로 정리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네 주인공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는 느낌은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신분상승을 꾀하면서도 토마시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는 테레사의 독점욕이 결과적으로는 토마시까지도 나락으로 끌어내려 죽음으로 이끌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카페의 여급으로 지내면서도 기회를 만들고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들고 다니는 테레사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시절의 상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잠들 때도 하다못해 발목이라도 꼭 붙들어야 하는 강박관념으로 발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토마시,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다 이해해.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도 알고 당신의 바람기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라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는 테레사와의 만남이 6번의 우연이 겹친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정한 테두리 안으로 테레사를 끌어들이게 되는데, 결국 소련군이 진주한 프라하를 탈출하여 스위스에 정착한 다음 그곳에서 만난 사비나와 토마시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을 못견딘 테레사가 프라하로 훌쩍 떠나자 결국 토마시도 뒤따르게 되는데, 베토벤의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의 모티프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Es muss sein!.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대바구니에 담겨 물에 띄워져 이집트 공주의 슬하에 들어감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는 모세의 경우처럼 테레사가 마치 대바구니에 담겨 자신에게 온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지금 인용한 베토벤의 4중주를 비롯하여 희랍비극 <외이푸스왕> 등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견고하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입양한 잡종개 카레닌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소품입니다. 테레사가 들고 다닌 <안나 카레리나>에서 차용하여 암컷이면서도 ‘카레닌’이란 남성이름으로 붙인 개는 두 사람의 비극적 사고를 앞두고 개에서는 노환이라 할 암에 걸려 안락사를 맞고 있는데, 키우던 개와의 이별이 마치 사람 사이의 이별만큼이나 애틋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테드 케라소티가 <떠돌이 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80779>에서 오마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간혹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네 사람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드려다 보는 입장에 있는 저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3자적 입장에서 등장인물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쿤데라는 ‘나’를 빌어 자신의 작품관의 핵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355쪽)”고 정리하면서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일반 작가들의 행태를 풍자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물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355쪽)” 그래서 쿤데라의 작품이 어렵다고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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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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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도 넘은 옛날에 읽은 책이라서 제목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사형을 선고받은 수형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교도관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에도 특별한 언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출방하여 사무실로 향하다가 평소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면 그때서야 형이 집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툴 가완디가 쓴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0272224>에서도 사형이 집행될 때 사망을 확인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의사들의 윤리를 논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숨을 거두는 일을 직접해야 하는 업무 담당자들의 정신적 압박은 대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죄질에 따라서는 엄한 벌을 주어야 다시 죄짓지 않도록 하는 예방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귀중한 것인데 인간이 그 생명을 거두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형제 폐지론자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법을 판단하는 일도 인간이 하는 일인지라 사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혹여 실수라도 있어 죄가 없는 사람을 사형시키게 되는 경우도 전혀 없으리란 법도 없을 터인지라 더욱이 형을 집행한 다음에 무죄가 밝혀지게 되는 경우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작 갈등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최근에 조직적인 범죄에 희생된 딸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강력반 형사의 집념을 그리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응분의 처벌을 피해나가는 경우에 피해자 입장에서는 과연 법정신이 제대로 살아있는 것인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고, 스스로가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개인적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례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은 일본의 사법체계와 교정행정의 틀 안에서 살인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인과관계를 교묘하게 엮어낸 추리소설입니다. 가석방된 사람들의 사회복귀를 지원해주는 보호사 부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사카키바라는 사건당시의 기억을 잃어 자신의 혐의를 제대로 반증하지 못하고 항소와 상고 끝에 형이 확정되고 이의신청과 재심을 요청하지만 번번히 기각되어 사형일자만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그의 변호를 맡은 스기우라 변호사는 신원을 밝히지 않는 독지가가 그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달라 의뢰를 받고 은퇴를 앞둔 교정관 난고 쇼지에게 이 사건을 맡기게 되고 난고는 평소 눈여겨 두었던 미키미 준이치를 조수로 기용하여 사카키바라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추적하게 됩니다.

 

<13계단>은 다카노 다즈아키의 처녀작인데,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상이라고 할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주목받는 추리소설작가로 떠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형사사건의 현장과 수사과정은 물론 교정과정에 이르기까지 범죄에 관한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세할 뿐 아니라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입부에서 깔아놓은 다양한 소재들이 진행되는 상황에 잘 어우러지도록 하는 얼게가 신인답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제목으로 뽑은 <13계단>은 사카키바라가 겨우 기억해낸 사건현장에 있는 계단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기안서가 결제를 받아야 하는 과정 또한 13개나 된다는 실무적 의미를 중복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추리하게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고 더하여 생각지 못한 반전까지 양념으로 더해지면서 사형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신랄하게 파고 들고 있습니다. 사카키바라의 사형집행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진실의 언저리를 맴돌던 난고와 준이치는 수사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사소해 보이는 조언을 바탕으로 진실에 도달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는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같이 해서 마지막 대결을 벌리는 극적구성을 갖추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기 때문에 쉽게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밤을 새고서야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었으니 흡인력이 참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테르 스리렌부르그의 <살인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07323>를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살인이 일어나면 가족 누군가 복수를 해야 하고, 이 복수는 또 다른 살인을 부르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는데, 결국은 국가 등이 나서서 이를 중재하며 복수를 위한 살인을 금하면서 사회가 안정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약속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불만을 참아내지 못하고 실행에 옮기게 될 때 사회가 불안정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 같은 분위기가 재심으로 반전을 이루는 대목에서는 과거 우리 역사드라마에서 망나니가 참수를 집행하기 위하여 칼춤을 추는 장면에 멀리서 사자가 말을 달려 들이닥치면서 “어명이요~~~~!”라면서 형집행을 멈추라고 소리높여 외치는 장면이 연상되어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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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는 홍대 앞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열린 북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조선일보에서 기획하고 있는 명사들이 추천한 101권의 문학작품을 논하는 파워클래식에서 다룬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루는 북콘서트를 조선일보와 민음사가 같이 주관한 것입니다.

 

이날은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같이 진행을 하셨는데, 마치 사전에 큐시트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두 분은 두 번째 만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타고난 이야기꾼들인 것 같습니다. 300석은 넘어 보이는 객석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시작시간에 겨우 맞추었던 탓에 맨 뒷좌석에 엉덩이를 겨우 얹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 늦은 분은 계단에 그냥 앉으실 수밖에 없었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바탕으로 한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의 영화가 1989년에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두 분이 각각 선정한 영화장면을 소개하기도 하고 작품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낭독하기도 하고 작품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뽑아서 정리해주셨기 때문에 읽을 때 미쳐 깨닫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오래 전에 읽기는 했습니다만, 그때만 해도 참 지루하다 싶었는데, 이날 북콘서트를 앞두고 새로 읽으면서는 그전과 다른 느낌이 오던 참이었습니다. 출장 때문에 다 읽지 못하고 북콘서트에 참석한 것이 아쉽지만,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2시간이 넘게 진행된 콘서트가 끝나고 보니 밤이 깊어 식당들도 문을 닫는 분위기라서 겨우 자리잡은 식당에서 삼겹을 구어가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나름대로의 느낌을 주고받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리뷰를 먼저 적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콘서트에서 얻어들은 내용이 섞일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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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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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소리]에서는 철학분야의 책을 많이 소개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저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딱딱해지는 리뷰를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동병상련이셨으면 하는 얼토당토 않은 작은 소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전혀 다른 방향의 책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분야 역시 제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를 위한 리뷰라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신과를 전공하신 박종호선생님께서 발로(?) 쓰신 아르헨티나 탱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탱고’하니 역시 정열의 춤 아르헨티나 탱고가 퍼뜩 생각납니다. 저와 같이 근무하시는 동료위원님께서 읽으시면 분명  ‘땅고’라고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추는 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탱고라고 하고 있으니 음악이나 사교춤으로서의 탱고는 ‘탱고’로 본고향 아르헨티나 탱고는 ‘땅고’라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탱고하면 일본의 국민배우 아쿠쇼 코지가 주연한 1996년작 <쉘 위 댄스>, 혹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장미꽃을 입에 물고 탱고를 추는 장면이 강렬하게 남는 1994년작 <트루 라이즈>가 먼저 생각납니다. 장님퇴역장교로 나오는 알파치노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가브리엘 던이 CF음악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Por Una Cabeza에 맞춰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인상적인 1992년작 <여인의 향기>도 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인의 향기>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춤추는 장면을 보면 가브리엘 던의 등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모습에서 땅고는 역시 어려운 춤이구나 싶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사교춤으로 탱고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시던 교수님들께서 해외연수 나가시기 전에 춤을 배워보자 하셨던 모양인데 1년차 전공의였던 저도 따라오라 명을 받은 것입니다. 어느 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남산 아래 회현동 어디쯤에 있는 호젓한 집 거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2주일동안 은밀하게(?) 사사받았습니다. 하지만 임상실습을 제대로, 충분하게 하지 않은 탓에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꾸준히 했더라면 2년 전 유럽학회에서 열린 선상파티에서 솜씨를 제대로 보일 수 있었을텐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춤 다음으로 탱고하면 당연히 음악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박종호선생님께서는 ‘라쿰파르시타’를 우리도 잘 아는 탱고곡이라 소개해주셨습니다만, 저는 토종 탱고음악이 먼저 생각납니다. 요즘에도 노래방에 가면 가끔 부르곤 하는 <서울야곡>은 현인선생님 곡도 좋지만, 전영씨 노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2절 가사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보신각 근처에 다니던 학교가 있었던 것하며, 전하지 못하고 찢어버린 편지에 대한 추억 등이 아직도 노래를 잊지 못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사설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클래식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선생님께서 탱고음악에 관심을 가지신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탱고의 아련한 멜로디와 독특한 리듬은 들을 때마다 늘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다.(15쪽)”라는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했던 2008년에 우리나라에 탱고에 관한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사실은 2007년에 탱고 아카데미의 배수경대표가 쓴 <탱고>라는 책이 나와 있었습니다.)을 알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러 2주간의 일정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여류소설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탱고에 대하여 느낀 점을 녹여낸 소설이 일본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면서 탱고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냈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자는 탱고가 태어나게 된 배경에서부터 발전해 내려온 발자취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잘 알려진 탱고 바와 클럽을 중심으로 탱고공연을 직접 보면서 탱고와 탱고음악을 느끼고 그 느낌을 탱고의 역사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생생한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기회가 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탱고음악에 비중을 더 주고 있는 것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반면 탱고는 출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탱고를 출줄 모른다고 고백하면서도 탱고를 춤출 수 없다고 해서 탱고를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탱고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갈수록 그것은 춤이 아니고 음악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어(詩語)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굳이 춤이 없다고 하더라도 탱고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 장르이며 또한 문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라는 뜻이 된다.(15쪽)”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탱고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하는 예술”이라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탱고가 19세기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피끓는 젊은 남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춤추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음악보다 노래보다 춤이 먼저일 것 같고, 아무래도 탱고의 춤사위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탱고의 춤사위는 그들의 몸부림이며, 탱고의 음악은 그들의 절규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면 탱고는 영혼을 위로한다. 그래서 탱고는 슬프다. 섹스가 육체의 위안이라면, 탱고는 영혼의 섹스다.(37쪽)”

 

탱고곡 <외로움>의 가사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방에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그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지만....”이라고 쓴 것처럼, 탱고곡은 대체적으로 사랑, 특히 실연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그 실패한 사랑을 오히려 풍자적이고 냉소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실연으로 절망하지 않고 관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탱고곡의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탱고음악에도 전해진 것 같습니다. 젊어서 즐겨 듣던 전영씨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방실이씨의 <서울탱고>에서는 더 완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모두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다 잊으시구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한 김소월님의 시 <진달래꽃>에서 처럼, 우리나라의 탱고곡의 분위기는 우리네 정서와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춤으로서 탱고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느낌도 담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탱고바나 탱고클럽에서 직업 무용수들이 공연으로서의 추는 탱고를 감상하고 느낀 점을 적고 있을 뿐, 춤을 추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무도장, 밀롱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점을 아쉬워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즐기시는 분들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이 땅에서 땅고를 배우고 땅고를 가르치는 라우님께서 땅고의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석달간 머물면서 촌각을 아껴 땅고를 배웠던 경험을 고스란히 풀어놓으신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를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땅고에 관한 책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위원님은 “왜 땅고를 추느냐”는 땅고 선생님의 질문에 “땅고를 시작한 것은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취미로 아니면 그냥 여가선용으로 재미있는 삶을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배우면 배울수록 땅고는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고를 추기 위하여 상대를 안는 것 “즉 ‘안기’란 남녀가 가슴을 붙이고 안는 자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땅고의 에너지를 교류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안기’가 단순히 육체적 접촉이 아닌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더 큰 영감을 파트너에게 줄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탱고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는 이방인의 눈물과 한이 서린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2% 부족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박종호선생님은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필로그에서 “탱고 추는 남녀를 유심히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나 여자는 거의 한 발이며 그녀의 몸은 내내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 인생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람은 혼자 살기 힘들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서 인생의 탱고를 춘다면, 두 사람 둥 한 사람은 다리 하나를 들 수 있다.(428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탱고는 두 개의 심장과 세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라고 들어서 일까요? 하지만 저의 동료는 “탱고는 그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이 되어 남녀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의지하여 추는 춤”이라고 정의하고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서로의 한과 혼과 희노애락이 철저히 가슴과 머리에 합일이 되지 않으면 출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른 차이일까요?

 

배수경대표의 <탱고>에서 탱고의 역사, 탱고가 대중화되고 세계화되는 과정, 탱고의 구성요소 그리고 탱고가 춤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라우님의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에서는 밀롱가를 중심으로 아르헨티나 땅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춤으로서의 땅고에 대한 이해에 더하여 음악으로서의 탱고에 관한 이야기들과 더하여 보는 탱고를 즐기는 길을 안내하는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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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03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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