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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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경우를 비유할 때, 흔히 물에 빠져봐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요즈음은 간혹 우리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 오래지도 않은 과거에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얻어낸 감격조차도 기억하는 세대가 이제는 시대의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일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렇기 때문인지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본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이 낯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그리스시대 처음 등장한 민주주의의 원형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피로 써온 민주주의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북미와 남미대륙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등장했다가 스러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부터 영국으로부터 싹튼 민주주의의 씨앗이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을 통하여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고,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가 전체주의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뒤쫓고 있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세상 그림과 조각, 시, 희곡, 소설, 과학 및 기술적 발명품을 죄다 한자리에 모은다 해도 민주주의만큼 인류의 창의력과 혁신적 사고가 빛나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삶을 허용하면서도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계속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다.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민주주의 없는 세상은 암울하다.(16쪽)”라고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형이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 아테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테네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민주주의는 시간적 공간적 공백을 두고 2000여년이 지난 16세기 알프스고원의 그라우뷘덴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나 알프스에서 운용되던 민주주의가 항상 논리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가 민주주의가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고 내세우는 까닭은 흡족하지 않은 점이 많은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살리고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보완하는 움직임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는 늘 공격당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권력을 남용하는 정부뿐 아니라 뿌리 깊은 기득권층과 부유한 기업 및 개인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어막(22쪽)”이라는 점입니다.하지만 민주주의를 오도(誤導)하는 것은 정부나 부를 쥔 쪽 만이 아니리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원형이 어떻게 다져졌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로마시대의 공화정이 성립되고 무너지는 과정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알프스 고원의 사례를 제외하고서 마케도니아가 아테네를 정복한 기원 323년부터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까지의 2100년 동안은 민주주의의 공백기간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도가 아니라 기존의 관습과 관행, 구조와 통념들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정치형태라는 점을 고려하여, 민주주의가 태동하기까지의 사회의 변천과정을 중세를 거쳐 근대 유럽사회의 정치형태의 격변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유럽제국들이 신대륙을 경영하면서 신대륙에서 민주주의가 싹터가는 과정,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통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과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식민지배국가의 시각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서술도 없지 않을 뿐 아니라 제3세계에서의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들에서의 민주주의가 성장해온 역사 자체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를 상세하게 다룬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잘 요약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민주주의가 태동한 유럽사회의 변천과정의 기술에 비하면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은 개략적 기술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국가에서는 중국에서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자리잡을까 하는 전망을 내놓은 것 이외에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기술이 생략되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서구식 민주주의가 가정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해온 과정은 반드시 포함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민주주의하면 평화적 정권 이양, 동의에 따른 통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선거, 보통선거권 등의 기본요소가 떠오른다고 적었습니다만,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이양에 있어서 적어도 여와 야가 각각 한차례씩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첫 번째 정권이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정권이양 과정에서 사회적 혼란이 있었던 것은 옥의 티라 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합니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역사만을 단순하게 요약하고 있다기 보다는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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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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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꽃피는 아가씨들’이란 부제의 의미가 후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은 전편의 끝 장면으로부터 2년을 건너 뛰어, 아마도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이라 추측되는 시점에 노르망디 해안가에 있는 발베크로 떠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편에서는 질베르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마음 졸이다가 어느 순간 질베르트의 이질적인 면모에서 생긴 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는데, 아무리 연모하는 마음이 식었다고는 하지만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습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그 이유를 기억의 일반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회상이라는 것도 기억의 일반적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기억의 일반적 법칙 자체가 습관의 보다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습관은 만사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망각했던 바로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가장 잘 생각나게 한다. (…) 우리의 눈물이 고갈되어 버린 듯할 때도 역시 울게 하는 것,....(8쪽)” 헤어진 여인을 잊으려 애를 쓰다가도 같이 즐겨 듣던 음악이 들려오면 불현 듯 눈물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경험을 한번쯤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독특한 것은 사랑을 정리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만나거나 아니면 술, 운동, 도박?과 같은 전혀 다른 힘을 빌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별한 무엇없이 마음고생을 다한 다음에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또 다른 사랑을 구하는 모습은 당시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의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발베크로 떠날 무렵 갑작스런 사정으로 어머니가 동행하지 못하게 되자 불안해진다거나, 발베크에 체류하면서 사귀게 된 생 루에게 할머니의 관심이 옮겨가는 듯하자 투정을 부리는 대목이 나오게 됩니다. “할머니가 내 방을 나가 버리자마자, 파리에서 집을 떠나는 순간에 괴로워했듯이, 나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46쪽)”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진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나 할머니의 애정을 붙들려는 주인공의 정신상태가 집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발베크로 향하는 노정에서 그리고 발베크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만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 기를 쓰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언제 그랬나 싶게 또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옮기는 주인공의 행동은 집착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 아닐 수 없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을 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능력입니다. 스치듯 지나친 여성도 마치 대면한 듯 그려내는 능력은 대단하다 싶습니다. “빌파리지 부인의 마차가 빨리 달린다. 이쪽으로 오는 계집애의 얼굴을 볼 틈이 있을까 말까 하게. 그렇지만-인간의 아름다움은 사물의 그것과는 달리, 의식과 의지를 가진 독특한 생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계집애의 개성....(103쪽)” 이하로 한 문장이지만 장문으로 글로 그녀에 대한 느낌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주인공의 관심은 스쳐지난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마차를 세우고 뒤쫓는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제하는 여성이 드물었다는 점은 주인공의 병적인 관심의 소산에 불과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이라는 부제는 발베크에서 만난 프티 부르주아 계층의 젊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산책을 하는 가운데 조우했던 이 여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해 애태우다가, 언젠가 스완이 말했던 화가 엘스티르의 화실을 찾아가면서 관계를 맺게 되는 실마리를 풀어내게 됩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곳곳에서 엮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엘스티르는 한때 베르뒤렝네 사교모임에서 비슈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사람이고 무명시절의 오데트, 즉 크레시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새로운 관계를 내비치고 있어 다음에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기억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논리도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내가 가장 나중에 본 얼굴이, 어째서 나에게 상기되는 유일한 얼굴이 아니었나 하면, 어떤 사람에 관한 우리의 회상에서, 지성이, 우리의 일상의 관심사와 가까운 실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젖혀 버리기 때문이다. (…) 나의 첫인상은 모조리 멀리 멀리 가 버려, 나날이 그 모습이 변형되어 가는데, 그것에 대항하는 힘을 기억 속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424쪽)”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고사를 치루는 요령이라고 할 조언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문제가 나오면, (…) 흥분해 보리지 않고, 먼저 다른 종이에 내 초안을 차근차근 적어 놓지, 첫줄에 문제의 요지, 주제의 서술, 다음에 전개해 나갈 본문의 개요, 끝으로 감상, 문제, 결론. 이렇게 전체의 개요을 적어 두면 논지의 방향을 알게 되지.(375쪽)”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조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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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베로에스 지음, 김재범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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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코너를 통하여 과학, 비과학 그리고 사이비과학의 경계를 논하는 책을 자주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주의자들의 시각을 소개하다가 과학철학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서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처럼 과학의 영역을 논하는 경우, 경계설정을 위하여 칼 포퍼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반증가능성을 인용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물론 피글리우치교수는 포퍼교수가 제시한 반증가능성으로 사이비과학과 과학을 가를 수 있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포퍼교수의 해법이 복잡다단한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과학철학을 통하여 비판적 사고를 키워가는 것은 사이비 과학자, 언론 또는 정치가, 심지어는 과학자들의 교언에 속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라는 피글리우치교수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최근에 칼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소개하였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1부 ‘추측’편은 과학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포퍼의 논증을 담은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2부 ‘논박’편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 10편을 담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 포퍼교수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카르납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로 ‘논박’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하면 젊었을 적 친구들과 주고받던 농담이 떠오릅니다. 화제가 지나치게 격이 떨어진다 싶으면 ‘이야기가 너무 형이하학적인 것 아니냐? 허리이상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이 난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논하려 드는 제가 마치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는 ‘형이상학’을 “철학적 기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형이상학은 논리학·인식론·미학·윤리학 등 철학의 다른 연구분야와 상호작용한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으로,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즉 형상의 존재와 성격이다.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인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과 정신의 대상인 관념들을 구별한 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추상과 실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 둘 다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더 실재적인지를 해명하려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는 귀납적 접근방식과 과학을 형이상학과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 의미분석을 통하여 형이상학을 ‘제거’ 내지는 ‘전복’시키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루돌프 카르납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은 정합적 연역을 바탕으로 선험적 논증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데, 엄격한 시험과정을 통하여 입증이 가능한 과학의 영역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으나,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철학자는 때로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며 난센스한 사이비 명제로 되어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포퍼교수는 “무의미성의 증명은, 경험과학을 만족시키는 언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무모순적인 언어에 관해서도 타당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세워 형이상학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포퍼교수의 사이비과학은 입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영역과는 달리 거짓이나 입증되지 않는 논리를 적용하는 영역이라고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퍼교수의 <추측과 논박>을 읽고서 우연히 김재범교수님의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분들에 의하여 해제가 나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아랍철학자가 해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독일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중역한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차라리 번역하신 김재범교수님이 해제하신 <형이상학>을 읽어보는 편이 이해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멸망 후, 오랜 침체기가 있었던 유럽과는 달리 그리스학문을 받아들여 계승발전시킨 아랍철학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라비아 이름이 이븐 루시드(Ibn Rushd; Ibn Roshd)인 아베로에스는 아비세나와 더불어 최고의 아랍 철학자로 꼽히는데, 아비세나처럼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관하여 많은 주석서를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짧은 해설서입니다. 원전을 독일어로 번역한 막스 호르텐은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추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베로에스의 형이상학을 설명하고,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 실체의 본성을 논하는 부분, 있는 것의 고유한 성질을 논하는 부분, 천구운동과 같은 첫 번째 원인의 원리를 논하는 부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은 모든 원인들에 대하여 형상학적인 원인의 앎을 주며, 더 나아가 목적원인에 관한 앎도 준다.”고 하였는데, 요약하면,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근원적 목적은 단지 자연학문들의 앎에 관하여 앎의, 말하자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의 가장 높은 원인에 관한 앎의 완성을 위하여 아직 남아있는 모든 것의 앎을 매개해야만 하는 것에 있다.(41쪽)”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개별 학문들의 원리를 올바르게 세우고 개별 학문들에 들어 있는 오류를 제거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니, 앞서 논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처럼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운 느낌이 남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성과 보편적 개념을 파악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발전한 과학 등의 학문적 영역에서 밝혀낸 것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있으나 사유의 틀이 동일한 것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수태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 씨앗이 자궁에 떨어져 월경의 피와 만나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며, 월경의 피에 포함되어 있는 살을 만드는 요소의 작용이 이어진다는 설명은 현대적 개념의 발생학의 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논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립자를 설명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기술로서의 의학에 관하여 “의학이 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이와 같은 병을 멀리하기 위해서만 병을 안다). 그렇지만 의학은 건강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안다.(188쪽)”라고 적고 있어 대립하는 존재의 정의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문학의 영역에서도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바와는 동떨어진 부분도 있으나, “기초요소들의 연합과 섞여짐으로부터 활동적인 본질형상이,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의 본질형상이, 나아가 또한 인간의 본질형상이 생긴다.(340쪽)”는 설명은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본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첫 번째 원인 원리와 정신은 바로 진화론의 묘체를 설명하고 있음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지금처럼 적절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듯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아베로에스는 형이상학에 관한 조망에서 밝힌 것처럼 학문들은 크게는 둘로 즉, 신학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및 그 학문의 길잡이로서 논리학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 학문에는 변증법, 소피스트 그리고 형이상학과 같은 보편적 학문들과 변화하는 있음을 다루는 자연학(과학의 영역이라고 보입니다)과 양을 다루는 수학과 같은 개별적 학문들이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본서를 통하여 형이상학의 자연학화를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형이상학은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이것들이 우연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형이상학은 마지막 원인에 이르기까지 원인의 사슬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신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세계를 탐구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신의 세계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의 모든 포괄적인 대상들 안에서, 즉 있는 것 자체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탐구한다(21쪽)”고 하였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형이상학을 비과학의 영역으로 몰아넣으려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르납의 주장은 경계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잘 못이 있다는 칼 포퍼교수의 주장이 형이상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타당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어렵지만 나름대로의 책읽기 성과가 있었다는 위로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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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716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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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블로그 친구분께서 “교과서진화론 개정 추진위원회”의 압력으로 우리나라의 일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이 삭제된다는 뉴스와 함께 이와 같은 소식이 저명한 과학잡지 네이처에까지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한국이 창조주의자의 요구에 굴복하였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창피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490274). 창조론에서 발전한 지적설계론을 교과과정에 넣기 위하여 부단히도 노력해온 미국사회에서도 진화론과 견줄 정도의 위치마저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지적설계론자들이 입김이 우리사회에서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사진을 교과서에서 삭제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창조론의 입지는 축소되기 시작하였는데, 분자유전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그 부피를 더하면서 대안으로 내세웠던 창조과학마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지적설계론으로 변화를 모색하였지만, 이 역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하여 회의주의자들은 비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우리네 삶과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되면서 과학으로 포장한 비과학이 세인들의 눈과 귀를 가리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하여 태동한 회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표적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의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를 비롯하여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 등을 읽으면서 회의주의적 사고를 키워야 할 필요에 공감해오던 터였습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제목이 주는 묘한 뉘앙스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만, 저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회의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이한 것은 회의주의자들 가운데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 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왕에 나온 회의주의관련 서적들의 번역에서 사용한 용어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등의 용어는 사이비과학과 거의 과학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왕에 소개된 회의주의적 관점의 서적들은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의 논리적 배경을 소개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는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사례를 먼저 소개하고 그와 같은 이론들이 우리 사회에서 발을 붙이게 되는 이유를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미디어의 역할이나, 대중지식인들이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이론을 활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점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왕의 회의주의관련 서적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사례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클 셔머와 같은 경우는 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그리고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제가 최근에 읽은 칼 포퍼교수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던 반증가능성[자연학과 철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추측과 논박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포퍼의 개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은 과학의 본질이 복잡다단해진 현실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단기준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0611>를 인용하여 비판하면서 역사의 일반이론이 적절한 분석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다이아몬드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과학을 통한 검증가능한 예측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칼 포퍼교수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에서 그 논리적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특성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여 해설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를 충분히 개진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국 펜실베니아 도버시의 법정에서 맞붙은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자들 사이의 대회전에 대하여 양측을 대표하는 입장을 각각 소개하고 결국은 정경분리를 규정한 미국수정헌법을 지켜 지적설계론자의 패배를 결정한 존스판사의 결정문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글을 마무리한 점이라거나,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주장이 과장되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주장하는 편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무리 부분에 적은 특정영역에서 누가 전문가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정 영역에서 누군가를 전문가로 볼 수 있으려면 다음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그 사람은 비전문가보다 해당 영역에 관해 옳은 믿음을 더 많이(그리고 틀린 믿음을 더 적게) 지닌다. (2) 그 사람은 해당 영역에서 ‘상당한 양의 진리’를 알고 있다.(436쪽)” 일견해서는 똑 떨어지는 기준같아 보입니다만, 참으로 애매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것이 아닌 앨빈 골드먼이 제안하는 전문가 구분법 다섯 가지 역시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책읽기에 몰입이 어려웠던 점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산만하다 싶은 서술과 특히 본문 중에 작은 글씨로 적어 넣고 있는 주석이 오히려 책읽는 흐름을 방해한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의 주석이 그렇게 중요하였다면 본문에 녹여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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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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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느림>을 받아 들고는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4918 - 네 개의 연작이 나와 있습니다만, 첫 번째 작품에 가장 마음이 끌리는 편입니다.>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떠올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평면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면서 쿤데라가 <느림>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메신저가 다소 충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느림>에서 삶의 엑스터시를 얻는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쿤데라는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안동 한옥마을을 찾았을 적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고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그 옛날의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으로 가던 밀란쿠와 아내 베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만나고 오토바이 탑승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토막 현재의 시간에 매달려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나는 것이 없기 때문(8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작가는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전제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안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방앗간’하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면서 상상의 날개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바로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파리의 고성에 머물게 된 주인공은 2백년 전 작가 비바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연애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스무살이 된 한 귀족이 극장에서 만난 T부인(귀족의 애인인 백작부인의 친구)이 공연이 끝난 뒤 집에 바래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T부인은 정부인 후작대신 젊은 귀족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부인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관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마차의 흔들림에 미처 깨닫지 못한 접촉이 점차 느린 리듬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접촉을 알게 되고 이야기가 엮이게 된다는 전개입니다.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T부인의 남편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만 뚱한 남편은 두 사람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남은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 곳에서 정사를 나누게 되고 성의 밀실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계속하는데,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트릭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일은 없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정사에 이르는 과정을 저는 그저 건조하게 적었습니다만 주인공은 그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상상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본능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졌다.(41쪽)”고 적은 것을 보면, 이미 예정된 결과를 향하는 것이겠지만, 형식적으로는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처럼 남녀간의 사랑이 엑스터시에 이르는 과정이 지루해보일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나름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남녀의 사랑은 빠르지만, 건조한 듯 하다는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이 호텔에서는 지식인 베르크와 뱅상, 체코 학자 체호르집스키가 각자 자존심과 명예, 쾌락을 쟁취하기 위한 긴박한 힘겨루기가 벌어지는데, 뱅상과 쥘리, 그리고 베르크와 임마쿨라타 사이에 정사는 서로의 감정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대립되는 가운에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수영장가도 불사합니다. 이 정사를 체호르집스키가 지켜보는 것은 일부 현대인이 좋아하는 관음증의 일면을 시사하는 점이라 보입니다.

 

네 쌍의 남녀의 관계는 직설적이고 퇴폐적이며 단선적이기도 한데, 저자나 번역자 역시 걸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은 탓에 차마 옮겨 적기가 민망할 것 같은 것은 제가 구식인 탓일까요?

 

사족일 듯합니다만, 표지그림을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쿤데라 전집의 모든 작품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느림>의 표지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피레네 산맥 위의 성」이라고 하는데 매우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는 영화 <아바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03028>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에 떠 있는 바위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상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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