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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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열리는 스포츠 제전이 3일 뒤 런던에서 그 화려한 막을 열릴 예정입니다. 스포츠와 눈물을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운에 눈물을 흘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승리를 맞는 순간 그 감동에 혹은 그동안 인내해온 고통에 대한 상념이 교차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선수도 그렇지만 그 선수를 지켜보는 관중이나 시청자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과학자는 거울세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기 내내 선수와 함께 한 긴장이 감동으로 연결되면 절로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 영화, 연극과 같이 스토리가 있는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독자가 혹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감정이 이입되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점차 고조되면서 울컥하는 순간에 이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 경우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과 그 분들의 눈물과 인연이 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사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5742>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분들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림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에세이라서 아마도 눈물과 인연이 있는 그림에 관한 소회를 담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조이한교수님의 <그림, 눈물을 닦다>입니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림읽기 치유하는 삶읽기’라는 부제가 달린 것을 보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미술을 통해서도 치유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고달픔에 상처 난 마음을 감추고 ‘난 괜찮아’하는 최면으로 버티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다는 출판사의 주장이고 보면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등 감정의 풀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 아니라 ‘그림감상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 역시 엘킨스 교수의 <그림과 눈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를 처음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만났던 <해바라기> 앞에서 저자는 바로 자신을 만난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204쪽)”

하기야 제가 보기에도 굵은 해바라기 줄기에 축 늘어져 있는 꽃과 말라붙은 이파리는 마치 신산한 삶에 굴복하고 목을 매단 채 늘어져버린 주검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이 그림이 저자에게 준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을 읽으면 마치 눈물에 관한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전방위적 예술작품을 이끌어다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그녀의 관심이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사실들을 인용하고 있어 저자는 역시 ‘미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엔소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사진작가 질리언 웨어링의 사진작품 <나는 절망적이다>의 소개에 이어 ‘감정노동’에 대하여 설명하면 자본주의의 키치적 비유를 끌어온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서비스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직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무관련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놀고 있다면 이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해설하면서 때로는 설명에 앞서 각자의 견해를 듣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작품설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각자가 느낀대로 감상하기 마련이므로 정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술평론가 역시 일반인보다는 차원이 다를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의 경우, “사진에는 마치 조금 전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배게와 흐트러진 시트가 찍혀 있다.(107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잔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엘킨스교수가<그림과 눈물>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우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그림에서도 진한 슬픔이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슬픔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추상미술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물음을 로스코가 들었더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작 로스코는 자신을 사실주의적 화가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필립 라메트의 작품 <사물들의 자살>을 놓고 자살을 논하면서 우리 사회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논리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前) 대통령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 붙인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만 하는, 그렇게 누군가 하나 죽을 때까지 서로를 쳐야만 하는 비극, 이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움을 계속 한다.(150쪽)”라는 설명에 작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6017>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도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두 남자가 들고 휘두르는 막대기의 모양새로 보아 서로에게 치명상을 주기에는 가냘프게 보인다는 느낌이라서 그렇습니다.

 

정리해보면, 고달픈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술은 분명 가능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길을 안내하는 분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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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솔루션 -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
아론 라자르 지음, 윤창현 옮김, 김호,정재승 감수 / 지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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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서는 가급적이면 의료와 관련이 있는 책을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읽고 다른 곳에서 리뷰를 공개한 책은 피한다는 소소한 원칙도 있습니다. 사실 이 코너를 통해서 꼭 소개하였으면 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호교수님과 정재승교수님이 같이 쓰신 <쿨하게 사과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47514>인데, 이미 다른 곳에 리뷰를 소개한 바 있어 아쉽습니다.

 

<쿨하게 사과하라>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과’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사과는 패자의 변명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이젠 진정한 사과는 “패자의 변명이 아닌 리더의 가장 쿨하고 현명한 전략”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는 이유였습니다.

 

두 분은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사과에 대해 신경과학에서부터 경영학까지, 의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까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결과를 살피고, 이 이론들을 적용하여 국내외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과 사과사례들을 분석해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개선방향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들 가운데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만,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의료과오로 인한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사과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는 의료과오관련 분쟁이 있을 경우 사과를 하게 되면 수세에 몰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들은 “사과는 비용이 많이 드는 비즈니스의 ‘자살골’이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아서 의료과오분쟁을 쉽게 해결하는 방안이 진솔한 사과를 먼저 하는 것이라는 제안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즉 ‘진실말하기와 쏘리웍스’가 의료소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하지만 저자들의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사과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수련과정을 마치고 병원의 신임스태프로 임용이 되신 선생님들을 위하여 마련된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임상에서 환자를 진료하는데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네 명의 강사 가운데 변호사로 일하시는 분이 담당하신 ‘의료사고로부터 배우는 분쟁예방법’이란 제목의 강좌가 특히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변호사님은 근무하시는 병원에서 실재로 발생했던 사건을 인용하면서, 사건발생의 원인, 경과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나쁜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단계별 주의사항 등을 족집게과외 하듯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초기대응이 중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을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우선 구두로 그리고 문서로 정리하여 상급자와 관련 부서에 관련 사실을 알려 상황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료기록부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더 중요한 점은 환자 측에서 진료기록을 복사해간 후에는 가필이나 정정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자측과 대화를 하거나 관계자와 협의를 하는 경우에 단일 창구를 통하여 진행하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불필요한 대화를 자제하고 과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 않도록 단속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아론 라자르교수의 <사과 솔루션>은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이라는 부제처럼 사과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종합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의 의미와 가치, 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에서 중요한 요소, 성공하는 사과의 조건과 절차, 사과의 동기와 회피 및 지연의 이유, 사과 조건에 대한 협상, 사과와 용서의 관계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앞서 설명한 의료과오분쟁과 관련된 사과처럼 특별한 요소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사과에 관한 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독자는 각자의 사정에 맞게 이해하여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과’란 “일방, 즉 가해한 측이 자기 잘 못이나 그가 얻게 된 원성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를 본 상대에게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함으로써 양측 당사자들이 조우하는 것”(48쪽)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사과에 사용되는 단어와 상황에 따라서는 동정이나 유감의 뜻으로 변질되거나 오히려 사과의 의미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과의 과정 역시 사정에 따라 제각각일 수밖에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1) 잘못에 대한 인정, 2) 해명, 3) 후회, 수치심, 겸허함, 진심 등을 포함한 다양한 태도와 행동거지, 그리고 4) 보상으로 구성되는 경향이라고 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각 부분의 중요성이나 필요성까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사과의 뜻이 피해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려면 피해당사자가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욕구들이 전체가 아니더라도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 손상된 자존심과 명예 회복, 2)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 3) 피해자는 잘못 없다는 확인, 4) 미래의 안전에 대한 확신, 5) 가해자의 심적 고통을 목격, 6) 손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 7) 상처를 표현할 의미있는 대화 등입니다.

 

진솔한 사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경우에 따라서는 실망스럽고, 거슬리며, 모욕적이고, 또 때로는 헛웃음에 나오게 만드는 사과에 머물고 마는 것이지요. 1) 애매한 인정, 2) 수동적 표현, 3) 조건부 설정, 4) 피해를 의심, 5) 잘못을 축소, 6) 교만한 태도, 7) 잘못된 대상에게 사과, 8) 엉뚱한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126쪽)에 이런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사과 솔루션>에서 저자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잘된 사과 혹은 잘못된 사과의 사례를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앞서 말씀드린 잘못된 사과 가운데 조건설정에 해당하는 닉슨대통령의 사임연설에 포함된 사과부분과 고칠 점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 판단을 낳게 한 일련의 사건에 있어서 행해졌을지 모르는 어떠한 피해에 대해서도 깊이 후회합니다. 만일 제 판단이 일부 잘못됐다면, 그리고 일부는 잘못됐지만, 그것은 당시 제가 국익에 최대한 부합한다는 믿음으로써 행한 일이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132쪽)” 읽으면서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만, 한마디로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목입니다. 만일 저자라면 “제 잘못된 판단으로 결국 국가에 해를 끼친 점을 깊이 후회합니다. 제 행동이 최대한 국익을 고려한 것이었다고 당시에는 믿었지만,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133쪽)”라고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교해보시면 더 간략하면서도 같은 핵심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연결해야 듣는 이의 마음에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한번쯤 진솔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게 되면 대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분도 사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 저질렀던 잘못을 당시에는 분위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과에 마음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었다는 후회와 함께 언젠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외할머님께서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실 때 집안일을 돌보아주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다는 외할머님의 불평이 나오면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루는 늦은 오후까지 식사를 하시지 못했다는 외할머님의 말씀에 화가 치밀어 따지다가 그 여성의 뺨을 때리게 되었고, 경찰서까지 불려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님께서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혈관성 치매의 초기증세를 보이셨을 가능성이 있는데 40년 전에는 전혀 모르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졸지에 모욕을 주고 폭력까지 행사하였으니 생사람을 잡은 셈입니다. 치매를 공부하고서야 잘 못을 깨달았으니, 그 분께 늘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상황에 몰려 했던 사과를 거절당한 경우도 있어 무언가 목적이 있어도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고 후회하고 있기도 합니다. 당연히 진급을 했어야 하는 기회에 주임교수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어 실패하고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는 바람에 10년 가까이 전임강사로 지내다가 조교수 승진과 함께 퇴직을 하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퇴직한다고 하니 그때서야 교실이 벌컥 뒤집어졌는데 어쩌면 놀란 척 하고 말리는 분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교실을 떠나고서 6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산하병원에서 같이 일했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는데, 교실의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주임교수님을 찾아뵙고 무릎을 꿇고 사과를 드린 다음 선처를 부탁드렸는데 과장님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미루었고 결국은 과장님으로부터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사과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때 진급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지 않아 결국은 퇴직에 이르게 된 것을 사과받았어야 옳다는 생각입니다. 한분은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퇴임하시고 해서 이제는 책임질 분도 없고, 그 분들도 아마 잊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피해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뒷끝이 좀 있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풀지 못하는 사과와 관련된 사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사과에 관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론 라자르 교수의 <사과 솔루션>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료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프레임으로서의 사과를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고 한다면 더그 워체식 등이 쓴 <쏘리 웍스>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쏘리 웍스란 용어는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의료를 행함에 있어 예상치 못한 결과가 생겼을 때 진실 말하기, 공감의 표현, 적절한 사과와 보상 등을 함으로써 무의미한 소송으로 인한 의료진과 환자 가족들의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쏘리 웍스라고 한답니다.

 

환자가 사망하거나 상태가 나빠지게 되는 경우 흔히 의료진의 잘못 때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이유는 환자의 질병에 관련하여 곁들여 일어나는 다른 질병, 즉 합병증이 생기는 경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준비된 행위가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이르거나 혹은 잘못된 계획의 결과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의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잘못된 치료계획의 결과로 나쁜 상황에 이르게 되는 의료과오와 합병증과는 분명 차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정이 제대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의료과오에 의하여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 쏘리 웍스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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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815
 
칼 포퍼 인문 예술 총서 11
브라이언 매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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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으로부터 소개 받기 전까지만 해도 칼 포퍼교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분들의 성명 정도를 익히고 있는 것만도 다행아니냐는 변명으로 가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늦었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공부해나갈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의 철학을 담은 다양한 책들 가운데 겁도 없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7865>, 그리고 <추측과 논박;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을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과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아는데까지 이해하겠다는 각오로 정말 머리카락을 뽑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칼 포퍼를 처음 소개하신 지인을 만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건네 받았습니다. 바로 영국의 중견철학자 브라이언 매기가 쓴 <칼 포퍼>입니다.(중견철학자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 책을 번역 소개할 당시에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30년생이니 원로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그의 과학철학과 사회철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만큼 이 책은 칼 포퍼의 삶과 철학을 요약하고 있어 포퍼교수에게 헌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점이 있는지 포퍼교수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구미 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뜨거운 아이콘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9333>에서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포퍼교수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을 읽으면서 포퍼교수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평가가 양분되고 있다는 소개에 공감하였습니다. 실제로 포퍼교수님의 책을 읽게 되면 매기교수가 소개하는 포퍼교수에 대한 찬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과학자들 가운데 “과학철학에 대한 포퍼의 저술들을 읽고 명상하여, 그것을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기초로 채택하시요”라고 한 존 에클즈라던가, “과학의 방법 이외의 것은 과학에 없으며 포퍼가 말한 것 이외의 다른 과학의 방법은 없다.”고 한 허만 본디 경의 예를 보면 과학계와 철학계에서 포퍼교수의 위치를 짐작케 합니다.

 

포퍼교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세웠던 전통대로 비판을 통해서 지식이 진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새로운 논문을 통하거나 혹은 자신의 저서를 개정하는 과정에 추가하여 발표함으로써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는 없어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태두라 할 플라톤과 근대 철학의 혁명아 칼 마르크스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의 경우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반증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반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반증할 수 있는 예측이 도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종자들이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매기교수의 <칼 포퍼>는 그의 삶과 철학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반증가능성’의 핵심 내용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흄의 귀납적 접근에 의한 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논리적 의미에서 경험적인 일반화는 비록 검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반증할 수는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과학적 법칙은 증명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험될 수는 있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을 반박하려는 체계적 노력에 의해서 시험될 수 있다(29쪽)”는 것이 포퍼교수의 철학의 묘체라 하겠습니다.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에 한걸음씩 다가설 수 있다는 포퍼교수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크라체스 이전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들도 드러내 보여 주지 않았다 태초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찾고 또 찾아 사물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우리는 알 수 있다.(35쪽)”

 

사족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닫힌 용기 안에서는 물이 100℃에 끓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30쪽)”이란 매기교수의 설명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은 번역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닫혀있는 계에서 물에 가온을 하게 되면 압력이 올라가면서 대기압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물은 100℃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시작한다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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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 미술비평은 어떻게 거장 화가들을 능욕했는가?
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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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음악과 미술분야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할 수준이라서 안타깝습니다. 물론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음악과 미술분야에도 전문가 수준으로 활약하시는 분들이 많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라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박물관 혹은 미술관은 꼭 찾아서 감상하는 것은 나도 그곳에 가보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체면치레용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는 평론을 읽게 되면 당연히 ‘그렇구나!’ '아하!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구나‘하고 감탄하게 되니 귀가 얇은 것이라기 보다는 눈아 얇다고 해야 되나요?

 

그런 저의 편견을 깨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입니다. 예술이라고는 번역하였지만, 미술평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판의 정도가 상궤를 넘어 충격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뷰의 제목을 ‘평론을 난도질하다’라고 적게 되었습니다.

 

“능수능란한 글 솜씨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무장한 일부 평론가들의-특히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일부 평론가들의-지나친 정치의식 또는 정치적 의도가 예술 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내버리고 마치 자기네들이 주체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김태호교수님은 추천사에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학구적인 예술사의 본질이 어떤 식으로 점차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연구,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정신분석 등) 학계의 여러 가지 급진적 문화정치의 볼모로 붙잡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명의 거장 화가들과 그들의 걸작들이 오늘날 몇몇 예술비평가와 철학자들에 의해서 터무니없이 재해석되고 진보적 이념의 환상에 끼워 맞추어지는 역겨운 모습이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제초 여지없이 폭로된다.”고 출판사는 요약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는 왜 예술사를 가르치고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답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술에 대해 배우기 위함은 물론이고, 예술이 전개된 문화적 배경에 대해 배우는 것, 예술의 발전에 대해 배우는 것, 그리고 역사의 진행에 따라 예술가들이 어떻게 ‘문제들을 풀어갔는가’에 대해서 배우기 위함이다.(26쪽)” 그런데 “그 예술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입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 대해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책(57쪽)”이라고 저자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여지가 많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의적 해석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특히 대가의 작품을 제멋대로 찟고 발기는 행태는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평론을 평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평론을 평하는 수준을 넘어서 난도질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는 말씀을 숨길 수 없습니다.

 

저자의 감시망에 걸린 평론은 쿠르베, 마크 로스코, 사전트,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고갱 그리고 반 고호에 이르고 있으니 그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쿠르베일까 궁금했는데, 쿠르베의 작품을 평한 존즈 홉킨즈 대학교 마이클 프리드교수는 전방위적인 해석의 왜곡과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이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쿠르베의 작품이 선두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최근에 연재를 마친 칼럼에서 다른 분의 글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따져들어가는 형식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자 역시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어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리드교수는 (…) ‘쿠르베가 연극적인 것을 패배시키기 위해 취해야만 했던 방법들은, 그가 생산했던 예술이 흔히 구조적으로 여성적인었다는 것을 표했다.’고 주장한다.”라고 인용하면서 ‘구조적으로 여성적인 예술’이 도대체 뭐고,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남성적인 예술’은 또 뭐란 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에 대한 저자의 거칠고 날선 비판은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끌어올리는데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읽다보니 참 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사전트의 작품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을 주목할 많한 그림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저자가 이 그림이 바로 보스턴미술관에 걸려있다는 친절한 소개까지 곁들였는데, 불과 몇 주일 전에 방문했던 보스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사뭇 가물가물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이 책을 읽었더라면 사진도 찍고 더 자세히 살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The Rape of the Masters'라는 상식 밖의 제목을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라는 거침없는 제목으로 옮긴 옮긴이의 기발함도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미술 평론 역시 회의주의적 시각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도판을 책 한가운데 모아 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림을 왜곡해서 해설하고 있는 부분에 넣어 쉽게 그림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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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페우스의 영역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수현 옮김 / 펄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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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일본을 여행하면서 색다르다 느끼는 점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잠시 짬이 날 때 꺼내드는 간편한 크기의 책입니다. 페이퍼백이라고 부르는 이런 종류의 책은 대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주제를 주로 다루는 편이지요. 과거 우리도 문고판이라고 하는 작은 크기의 책이 유행을 탄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의 책이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되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 곁을 떠나 사라지고 말았더라구요. 그 이후로 우리 책은 다시 커져서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읽는데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을 수용한 브랜드 <펄프>가 런칭되었습니다. 다루는 영역도 가벼운 장르소설을 주로 다룰 것이라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벼운 읽을거리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고급사양의 종이를 피하고 있어 책값이 비싸지 않은 것도 긍정적인 면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 나온 책 가운데 일본 작가 가이도 다케루선생의 <모르페우스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모르페우스(Morpheus)는 잠의 신인 힙노스(Hypnos, 혹은 솜누스, Somnus))의 아들로서 잠든자로 하여금 온갖 사람의 모습을 꿈꾸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가이도 다케루선생은 외과와 병리학을 공부하고 임상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얻는 영감을 바탕으로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자를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모르페우스의 영역> 역시 인공동면 기술을 둘러싸고 이를 필요로 하는 환자와 의사, 그리고 관료들의 팽팽한 대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고가의 신의료기술인 인공동면기술에 너도나도 매달리게 되면 의료비 등 공적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예상한 관료들의 치밀한 저지대책에 맞서는 역할을 동면자를 돌보는 간병인 역으로 나오는 료코의 독특한 발상의 전환에 극적 반전을 이루어내는 작가의 깔끔한 솜씨에 반하게 됩니다.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완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먼 훗날 의학이 발전하여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일종의 시간여행방법으로 인간냉동법이 개발되었고 이 방법을 적용하여 스스로를 냉동시킨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냉동법이 풀어야 할 문제는 해동(解凍)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체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물이 냉동과정에서 결정을 이루기 때문에 이 결정이 세포 혹은 세포에 있는 미세기관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는 점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동물실험을 통하여 검증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는 해보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인공동면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동면이라고 하면 개구리나 뱀 같은 냉혈동물이 먹이를 구하기 어렵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잠에 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물론 곰과 같은 온혈동물도 동면을 취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해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개발(?)한 인공동면 장비는 인간을 가사상태에 이르게 하여 양수와 흡사한 메듐(medium을 이르는 일본어로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되는 매체를 이르는 단어로 보여 그 조성은 비밀에 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에 잠기도록 하고 하루에 조금씩 온도를 낮추어 4도에 이르도록 하고 동면에서 깨어날 때 역시 하루에 조금씩 온도를 높이고 상온에 이르게 되는 날 메듐을 제거한 다음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소생하도록 하는 신의료기술(?)입니다.

 

5살 때 발병한 망막아세포종으로 한쪽 눈을 잃은 사사키 아스씨는 4년 뒤 다른 쪽 눈에 종양이 재발하여 눈을 잃을 상황이 되자 마침 개발된 인공동면기술을 적용하여 5년간 잠들기로 하였는데, 당시 망막아세포종 치료제가 개발 중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스씨가 인공동면술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암환자를 비롯한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지자 건강보험재정의 파탄을 우려한 후생노동성 관료들은 관련법안 만들면서 아스씨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순간 누구도 인공동면기술을 적용받을 수 없도록 제한을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게임이론의 제왕이라고 하는 MIT의 소네자키 신이치로 교수가 ‘동면 8원칙’을 제안하게 됩니다.

 

인공동면에 든 환자의 경우를 읽다보니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생각납니다. 중국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굴속에는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하도 살기 좋아 잠시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그 잠시 동안에 바깥세상에서는 많은 세월이 지나서 변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잠든 사이에 흘러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 작품의 핵심 줄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은 없는 법이지요. 스텔스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신이치로 교수가 제안한 동면 8원칙에도 틈새가 있었고, 인공동면을 영구히 차단하려는 후생노동성 관료들의 치밀한 계획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허점을 료코가 찾아내게 됩니다.

 

바로 인공수면 중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억소실 소프트웨어인 리버스 히퍼캠퍼스(hippocampus는 해마라고 번역하고 뇌에서 기억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가 핵심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리버스 히퍼캠퍼스는 “역행성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기억을 지우기만 하면 부자연스러운 공간이 남는다. 어떤 시기의 기억이 통째로 빠져버리면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잃는다.(157쪽)”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조작으로 지우고 넣을 수 있다는 발상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IT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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