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을 소개한 글을 여러 번 읽게 되었습니다. 박종호 선생님의 책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7325>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르헤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제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기억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보르헤스의 작품,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단편집 <픽션들>에 실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어진다고 하던가요? 마침 민음사가 주관하는 민음아카데미에서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의 송병선교수를 초청하여 “보르헤스, 문학으로 읽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의와 출장 등이 겹치는 바람에 처음부터 참석하지는 못해서 아쉬웠습니다만, 드디어 26일 저녁에 출판문화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강좌에 참석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의외로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송교수님의 재미있는 말씀에 빠져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송병선교수님은 강좌의 주요 텍스트가 되는 <픽션들>은 물론, 저도 읽은 적이 있는 <거미여인의 키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15661> 등 다수의 중남미 문학작품을 번역 소개하신 분입니다. 이날은 두 개의 단편집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과 ‘기교들’을 묶은 <픽션들>을 텍스트로 하여 강의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문과 8개의 단편으로 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에서는 동명의 단편을 골랐고, 서문과 10개의 단편으로 된 ‘기교들’에서는 ‘죽음과 나침반’을 골라 설명하였습니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픽션들>의 리뷰를 통해서 소개하겠습니다만, 두 작품의 공통점은 미로(迷路)가 작품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미로에 착안하게 되니 아주 오래 전에 빠졌던 중국무협소설 생각이 났습니다. 미로를 의미하는 기관을 설치해서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이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중국에서 미로가 발전했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이미 정교한 미로에 사람을 가둔다는 이야기와 미로깨기비법이 소개되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민음 아카데미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2시간씩 모두 4주 동안 진행이 되는 강좌를 격월간으로 열고 있다고 합니다. 금년 5월에는 헤밍웨이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9월에는 소설가 장석주 선생님이 국내작품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근대의 탄생과 경성의 작가들’이 그리고 11월에는 비평가 이현우교수님이 진행하는 ‘로쟈의 애매한 사랑이야기’가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제가 되는 작품 혹은 작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참석해서 문학의 세계에서 시야를 넓혀나가는 기회로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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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죽음 문화 - 인도에서 몽골까지
이옥순 외 지음 / 소나무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제게 있어 오랜 과제입니다. 아마도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일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죽음의 형태, 예를 들면, 자살, 사고, 병사 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품위있는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 등등...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을 결국은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데 이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서구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만, 아시아인들의 생각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평래교수님을 비롯한 여섯 분이 인도, 티베트, 몽골, 중국과 중국의 소수민족들, 그리고 한국인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를 조사하여 정리한 <아시아의 죽음문화>를 읽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나라들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불교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인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집필을 담당한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 분들이라서 죽음에 관한 문화적 배경을 정리하는데 적합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분들의 기획의도를 옮겨봅니다.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그 원리에 따라 살다 간 성인과 성자, 죽음과 주검의 현장에서 죽어야 할 존재로서 인간의 숙명을 숙명으로 체험한 사람,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살려고 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여 ‘사는 것’에만 눈길을 주는 우리의 본 모습을 확인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이 책을 내게 되었다.(10쪽)”

 

흰두교와 불교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는 인도 그리고 티베트불교 정신으로 사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확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희망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몽고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도 이례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이 넓고 소수민족 대부분 한족들과 섞이지 않고 그들의 전통습속을 유지하고 살고 있어서인지 죽음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고구려유민들이 중국의 남쪽으로 이주한 역사기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하니족, 이족, 묘족 등 중국의 남쪽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은 죽음을 맞게 되면 조상들이 시원한 곳으로 혼령이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화장을 한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한족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는 유학의 오랜 전통 때문에 삶은 즐거운 것이요, 죽음은 슬픈 것이라서 현세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학의 영향을 받은 경우에는 수련을 통하여 자연에 합일하는 경지, 즉 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도가의 경우는 죽지만 죽지 않은 지경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후세계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 종교라고 분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도학을 도교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하겠으나, 유학을 유교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윤회사상을 믿는다는 종교에서는 지구상의 전체 인류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해온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문을 오랫동안 풀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흰두교신학자들은 신이 새로운 영혼을 계속적으로 만든다고 가정한다고 하면서도 신이 ‘왜 그러는지’ 속시원하게 답을 주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23쪽) 그 점에 대하여 저자는 지구상에 지난 수십년 간 수많은 동식물이 사라졌는데 혹시 멸종한 동식물이 인류라는 종으로 진화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윤회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환생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최고의 환생이며 생전에 쌓은 업보에 따라서 다음 생에는 축생 혹은 미물로도 환생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보면 가능한 설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일부 저자들은 담당한 지역의 민간설화까지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그들의 죽음문화를 설명하고 있기도한데, 하니족의 기원신화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득한 옛날 하니족의 조상은 물고기였다는 것입니다. 조상물고기가 큰 바다에 나아갔는데 그곳에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어 만물을 낳기 시작했는데, 하늘을, 땅을, 있음과 없음을, 색깔을, 크고 작음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물고기는 땅이 점차 커지면서 물이 줄어들게 되자 뭍에 올라오게 된 조상물고기가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하여 점차 인간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7쪽) 지구생물의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류에서 인간에 이르는 진화론의 원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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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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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년전에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9772557>를 읽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서구사회에서 정신병 환자에 대한 인식과 그 환자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역사적 흐름을 뒤쫓고 있는 방대한 저서입니다. <광기의 역사>는 세월이 지나 현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논리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니 책읽기는 언젠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덤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질환과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푸코를 인용하자 남다른 시각을 보이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마도 푸코가 좌파성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학자인 폴 벤느교수의 <푸코, 사유와 인간>을 읽기 전까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푸코의 30년 지기인 폴 벤슨이 쓴 <푸코, 사유와 인간>은 철학적인 주해와 전기적인 일화가 유려한 문체 속에 어우러져 있는 책으로 저자는 자신이 이해한 푸코(의 글)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푸코(의 삶과 말)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첫마디 ‘아니다’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는 이른바 ‘68사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주의자도, 역사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이데올로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고 간파해냈던 것도 아니다. 이 세기에 매우 드문 일인데, 그는, 스스로 로백한대로, ‘회의주의’ 사상가였다.” (68사상은 프랑스의 우파 철학자 뤽 페리와 알랭 르노가 1985년에 발간한 68사상에서 유래한 용어로 두 사람은 1968년 5월 혁명과 연대기적으로 가깝고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적 사조들-푸코, 부르디외, 데리다, 라캉을 ‘68사상’의 꼬리표 아래 한데 묶었다고 해서 부르게 된 용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65쪽)”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의 진리가 영원히 잠정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과 거짓의 대립으로부터 도출한 진리를 새로운 참이라고 믿고자 할 수 있지만, 이는 새로이 등장할 진리에 의하여 폐기될 운명을 배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는 푸코에 대하여 전투적 행동주의자로서 푸코는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믿지 않았고, 혁명도 마오도 믿지 않았으며, 사적으로는 선량한 진보주의적 정서에 냉소를 보냈다.(187쪽)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란혁명을 완성한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강력한 개성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푸코에게는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열린 정신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모든 저항에 호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생전의 푸코와의 교류를 통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푸코의 신념과 사상을 다시 정리해서 푸코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부류가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푸코는 혁명도 기성질서도 맹목적으로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는 그를 싫어했고, 그 반동으로 좌파는 그를 좌파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 포퍼와는 다른 대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린사회를 추구한 포퍼의 자유주의는 우파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 비판의 영향으로 좌파진영에서도 기피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는 점에서 말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참인 지식과, 권력에 더하여 인간의 주체에 대하여 고민하였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하여 확립해가는 인간의 주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인간은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했다. 즉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옮겨놓고, 상이한 주체성들의 무한하고 다원적인 연속 안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이 연속은 결코 끝이 없으며, 우리는 절대로 인간이라는 것을 향해 위치하지 않는다.(70쪽)” 이 주체는 윤리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푸코의 유고가 출간되고, 푸코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한 푸코 철학의 해석등이 이어지면서 푸코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신자유주의 경영기술이나 자기계발 담론의 분석, 이슬람에서의 정치적 영성 문제, 사회보장과 위험의 계보학,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정치적 분석, 대안적인 존재윤리와 언론 자유의 문제, 주변화되고 박탈당한 다중들의 새로운 연대와 사회 운동 등이 푸코의 논의로부터 새롭게 정식화되고 탐구”되고 있다고 하니 관심을 두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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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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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낯선 땅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니 벌써 20년도 넘어 정말 오래전 일입니다. 병원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도 벅찼지만 가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큰 아이 역시 말도 통하지 않는 학교생활이 힘겨운 눈치였습니다. 그나마 작은 아이는 세 살을 넘겨 아직 어린 탓인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작은 아이와 집에 있는 아내였습니다. 작은 아이가 낮잠에라도 들면 멍한 느낌이 들고 창문 밖 하늘에 비행기라도 지나가면 서울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몇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향수가 지나치면 병이 될 것을 걱정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면서 아내의 문제도 사그러들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부터 주말여행을 떠나면서 뜸해지기는 했습니다만, 결정적인 시기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기억에 든 것이 많은 어른들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타향에 머물게 되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지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쿤데라는 다른 의견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뒤에 남겨둔 시간이 거대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목소리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격언은 자명한 이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틀렸다.(…) 향수가 가장 강할 때는 소년기, 즉 지나간 삶의 부피가 대단히 적을 때다.(82쪽)” 밀란 쿤데라의 <향수>는 소련 공산주의에 점령당한 조국 체코에서 구속되는 삶을 견딜 수 없어 망명을 선택한 이레나와 조제프가 붉은 군대가 물러나고 공산당이 몰락한 조국에 돌아가서 느끼는 생경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쫓기듯 떠난 체코 망명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체코로 돌아가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레나는 여기에 더하여 낮만 되면 조국의 풍경의 환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들판으로 난 길이 섬광처럼 나타거나 전철에서 떠밀리는 순간 갑자기 프라하의 녹지대에 있는 조그만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와 같은 짧은 고향의 이미지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그녀의 정신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같이 체코를 탈출한 남편 마르틴이 죽은 다음 어렵게 버틸 때, 스웨덴에서 온 남편의 사업파트너 구스타프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는 구원과 같은 것이었고, 구스타프가 체코에 사업을 열게되면서 프라하에 돌아가게 되는 이레나는 돌아온 고향이 생경하고 남아있던 친구들 역시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간극은 사람들의 생각까지 바꾸는 것일까요? 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힘든 시간을 같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묘한 적의(敵意) 같은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작가는 핏줄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을 경계한 듯 합니다. 고향의 동무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을 그녀도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리는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파리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친구들을 초대한 만찬에서 친구들은 이레나가 준비한 보르도산 포도주를 거부하고 체코 맥주를 선택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한 이레나의 모습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 김광남은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고...“하고 노래불렀는지 모릅니다.

 

한편 프라하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조제프는 돌아온 고향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공산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조제프는 한때 위험인물로 몰리기도 했지만, 친구 N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고 결국은 덴마크로 망명하게 되는데, 당원이었던 형의 가족들의 눈에 조제프는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쫓아 달아난 탕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레나나 조제프 두 사람은 병이 될 지경으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온 고향은 물론 가족까지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이 등장하는 것 같은 이레나와 조제프는 젊어서 만났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는데, 이레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조제프의 기억에 이레나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드러나게 됩니다.

 

저자는 떠나온 조국 체코에 대한 두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면서 곳곳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과 그가 고향에 도착해서 얻은 새로운 감정들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있는 동안에는 오직 자신의 귀환만을 생각했지만 일단 고향에 돌아오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삶, 그 삶의 본질, 그 중심, 그 정수가 이타카 밖에, 이십년 동안의 방랑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이 주목되는 이유는 우리사회에 이들과 같은 분들이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에 있는 고향을 떠나올 때는 각자 사정들이 모두 달랐겠지만, 그 분들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생각과 생활의 차이는 어쩌면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차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되돌아갈 수 없는 그분들을 우리 사회가 보듬어 안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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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의 이해 - 신학으로 건축하다
이정구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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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면서 유적을 찾다보면 오래된 사찰이나 교회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절집을 자주 보게 되는데, 물론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전란이나 실화로 소실되고 중건한 경우도 있지만, 조촐하면서도 오래된 건물을 만나게 되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진에서 소개하는 교회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학회때 찾았던 마치시 성당입니다. 마침 수리중이라서 제대로 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교회 전체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남시 구산동에 있는 구산성당은 좁은 마당 끝에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조촐한지 쉽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절집의 경우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부터 만날 수 있고, 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설명을 듣기 때문에 어떤 점을 주목해서 봐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교회당의 경우는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닌 듯,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1755>에서 주인공이 휴양차 노르망디 해변으로 가는 도중에 유명하다는 발베크 성당을 찾았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발베크 성당에서 꼭 보았어야 할 유물들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정구교수님은 <교회건축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교회건물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신학으로 건축하다’라는 부제가 있는 것처럼 교회건물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까지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으니, 교회나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도 미처 모르고 계셨다면 교회건물에 담겨있는 신학적 의미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다니지 않는 분들도 혹시 교회나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이런 의미들을 눈여겨 살펴보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저자께서는 이 책이 여행자들을 위한 교회건축물 해설서가 아니며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될 건축신학서로 만들어졌으며, 나아가 건축학도와 신학도들이 교회건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지만, 텍스트를 이용하는 독자 나름대로의 이용법이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책은 교회건물의 구조에 따라서 1. 예배공간, 2. 문, 3. 통로, 4. 벽과 창, 5. 천장과 지붕, 6. 공간위계, 7. 죽은자의 공간 등으로 나누어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내외 유명 무명의 교회와 성당의 사진을 적당한 공간에 곁들여 이해를 돕고 있는 점도 돋보입니다. 저 역시 가톨릭계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는 주말에 교회에 출석한 바 있으니 교회가 전혀 생소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저자가 해설하는 신학적 의미와 연결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문’의 의미를 새기는 부분입니다. “문은 건물에 들어오는 자들에 대한 친절과 환영의 표지이며, 방향을 알리는 안내표지이다. (…) 선택받은 자만이 이 문을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이 문을 들어오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자로 선택받게 된다는 메시지도 전한다.(59쪽)”고 적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정교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적지 않게 배타적인 해석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린 세상을 추구하는 요즈음 닫힌 세계를 향하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커다란 문을 활짝 열어 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교화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을까요?

 

얼마 전에 교회를 알리는 십자가 표지의 네온사인을 야간에 켜지 않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 한밤의 도시를 내려다보면 눈길을 끄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셀 수 없이 흩어져 있는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당의 모습을 보면 높은 첨탑에 벽돌로 지어진 바실리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고유의 건축 양식과는 다른 모습이라서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생경하다는 느낌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물에 뜬 기름처럼 여전히 우리 생활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건물은 양식으로 되어있지만, 지붕을 붉은 기와로 올려 절충을 꾀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교회와 성당이 우리 문화에 어떻게 녹아내릴 것인가는 기독교계와 가톨릭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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