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골랐습니다. 1932년 태어난 에코는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볼로냐대학교의 교수로,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에코 자신의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놀라운 지적 추리 소설”이라고 소개하도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서 프랑스 사제 뱅자맹 발레가 불어로 번역한 아드송의 수기를 우연히 입수하고 번역까지 마쳤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잃어버리고 나서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드송의 행적을 뒤쫓으면서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68년 얻은 스토리를 1980년에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하여는 “1968년 당시에는, 작가는 모름지기 현실 참여를 위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식자들(식자들 고유의 권리를 되찾은)은 쓴다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22쪽)”라는 설명으로 작가관의 변화가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장황하게 스토리를 소개하는 일이 스포일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출판사에서 요약한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그를 수행하는 아드소와 함께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한다. 수도원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연쇄 살인이 〈묵시록〉의 예언에 따라 벌어지고 있었고, 사건의 열쇠를 쥔 책은 그들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미궁을 꿰뜷는 거대한 암호를 풀어낸 윌리엄은 어둠 속에서 수도원을 지배하는 광신의 정체를 응시하게 되는데…….”

 

시대적 배경은 1309년 교황 클레멘스5세가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긴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르는 때입니다. 클레멘스5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요한22세와 프랑스가 교황성에 간섭하는데 반발하는 영국과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황제가 대립하는 가운데 양측이 협상이 필요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수기를 적은 아드소는 루트비히측에 속하는 윌리엄수도사를 수행하는 수련사로, 협상장소로 선정된 아페니노산맥의 어느 기슭에 있는 사원에 먼저 도착하게 되는데, 윌리엄수도사는 도착하는 날부터 발생하는 수도사들의 죽음을 규명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장미의 이름>의 전편에서는 당시 교황청의 전횡에 반발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교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고 교황청은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화형에 처하는 대립상황에 대하여 윌리엄수도사를 비롯하여 호르헤수도사 등 원로 수도사들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어 당시의 종교계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교황청의 부조리에 대하여 “루트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찬탈과 성직매매를 일삼으며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30쪽)”이라고 적시하고 있으며,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교회의 계율과 모순되지 않는,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 이래 프란체스코회를 비롯하여 청빈을 내세우는 수도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리하다 보니 성격이 모호한 집단도 없지 않아서 이단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국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며,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 처형된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은 엄청난 규모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수도사들이 이를 필사하거나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건이 일어나는 발단이 되는 셈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주로 그리스에서 생산된 저술들을 넘겨받아 이를 보관하고 필사하여 정보를 배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보권력을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수도원의 이런 정보독점은 독일의 구텐베르크(?1398~1468)가 활판 인쇄술을 개발하고 1460년경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해 출판한 것을 계기로 정보혁명을 계기로 일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드소들이 방문하는 수도원은 “귀 수도원의 장서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서른여섯개의 장서관, 비지르 이븐 알알카미의 1만 권의 필사본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도 알고...(75쪽)”라는 윌리엄수도사의 헌사처럼 상당한 규모에 이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필사 등을 담당하는 수도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장서관은 오직 사서계의 수도사만이 출입이 허용되고 있으며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이라는 수도원장의 설명처럼 복잡한 미로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수도원의 장서관을 이토록 폐쇄적으로 운영해온 원장의 전횡에 반발하는 수도사들은 장서관을 공개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은 그저 장서관이라는 미로의 성채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축적되는 장소로서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그 구조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 수록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이 떠오릅니다.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며, 그 구체의 정 한가운데는 어떤 종류의 육각형이건 육각형이고, 그것의 원주로는 접근할 수 없다.(픽션들 99쪽)”는 알쏭달쏭한 구절이 생각나고, 장서들을 배치하는 기호들, 혹은 책에 쓰여 진 글자 역시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기호 혹은 암호라는 설명이 이 수도회의 장서관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느낌이 듭니다.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완전하고 비밀스러운 보물의 주인이라고 느꼈다.(픽션들 103쪽)”는 구절에서 장서관을 지키려는 수도원장의 굳은 결심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기호학자로서 에코 역시 보르헤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장미의 이름>의 상권에서는 세명의 수도사가 죽음을 맞거나 실종된 상황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델모수도사와 베난티오수도사의 죽음은 요한의 묵시록의 계시처럼 보일 뿐 아니라 장서관의 미로에 등장하는 작은 방들에도 요한 묵시록에서 인용한 구절이 적혀있는 것처럼 묵시록과 베난티오가 남긴 암호로 대표되는 기호의 의미가 하편에서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네 번째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서 창세기편에 나오는 죄악이 극에 달한 악명의 도시로 유황과 불로 멸망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은 폭력을 일삼고 성적문란상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여 쾌락을 뒤쫓는 삶이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죄의식이 사라져 오히려 죄악을 자랑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시고 유황과 불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가 그리고 있는 19세기 당시의 프랑스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될 정도로 도덕의식이 무너지고 있었을까요? 지금까지의 이어진 이야기로 보아서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시에 이미 공공연해지고 있었지만, 누가 나서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던 동성애를 작품소재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형태의 애정행각이었을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 역시 독자들로부터 비난은 물론 친지들로부터 절교를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발표한 것이라 합니다. 결과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격려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느새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올 정도로 공공연해지고 있고, 그들을 성소수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적 경향에 선천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의학적 근거들이 나오고 있어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의 애정행태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소돔은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고 고모라는 여성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작가가 그리고 있는 사교계 활동에서 만난 동성애자들의 행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펼쳐놓기 전에 곤충이 매개하는 꽃의 수태에 관한 식물학적 지식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암꽃은, 만약 벌레가 오면, 그 암술대를 요염하게 휘어, 벌레가 들어오기 쉽도록, 새침하면서도 정열적인 색시처럼,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 길을 줄여 준다.(9쪽)” 작품해설에서는 프루스트가 성도착 경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등장하는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야기는 지난 편에서 초대여부로 긴가민가하던 게르망트 대공 부인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다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 등장했던 발베크에서 생긴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교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느 정도 심드렁해졌다 싶습니다만, 새로 등장한 주제인 동성애에 관한 저자 나름대로 관찰한 기록은 흥미로운 부분도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1)’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쥐피앙과 사를뤼스씨의 관계를 숨어서 관찰하는 모습이 흥밋거리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건 하나로 아쉬웠던지 끝부분에 이르러서 샤를뤼스씨가 파리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저자도 잘 아는 샤를리 모렐과 수작을 붙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들끼리 통하는 신체언어가 있어 그들의 눈에는 같은 동성애자를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모양입니다.

 

여성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1)’의 뒷부분에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전편에 다시 등장해서 ‘나’와 긴밀한 관계가 열리게 되는 알베르틴이 친구 앙드레와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 그 기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알베르틴은 동성애와 이성애 모두에 열려있는 셈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알레르틴보다는 블로크의 누이동생이 전직 여배우와 동성애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벌이는 모습을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스완네집으로’에서 이미 몽주뱅에서 뱅퇴유 아가씨가 그녀의 여자친구와 사디즘적 행위를 묘사하여 동성애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드러낸 바 있기도 합니다. 알베르틴의 경우는 동성애자로 보이는 여성의 유혹을 받는다는 등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언급은 ‘게르망트쪽’에서도 이미 샤를뤼스씨가 ‘나’를 집으로 불러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의 동성애적 취향 가능성을 드러내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다루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와는 전혀 거리가 있는 주제가 되겠습니다만, ‘게르망트쪽’에서 다루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반면 할머니의 장례과정을 너무 간략하게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편에서 어머니와 함께 간 발베크의 호텔에 들었을 때, 갑자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207쪽)” 지금까지 애도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죽음이 뒤늦게 현실이 되면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인데, 역시 기억의 심연에 묻혀진 할머니에 대한 생각들이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 더, 여기에서 ‘나’는 발베크의 호텔 지배인을 빌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어의 용례를 바로 잡는 열정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우리글 왜곡현상을 바로 잡는데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 밀란 쿤데라 전집 7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쿤데라의 소설을 읽다보면 난수표의 숫자들을 연결하듯 해서 집중해도 의미가 쉽게 정리되지 않은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불멸>이 그런 경우였는데, 그 독특한 구조 때문에 작가의 뜻이 쉽게 붙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 일곱편의 이야기들은 마치 독립된 단편소설처럼 읽히기 시작하지만, 어디선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팁이 숨겨져 있습니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큰 줄기는 쿤데라가 직접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데, 현대 파리의 헬스클럽 실내수영장 앞에서 아베나리우스교수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예순 근처의 부인으로부터 아녜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을 하나 둘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녜스와 남편 폴, 아녜스의 동생 로라와 그녀의 애인 베르나르 베르트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큰 줄기 사이에는 괴테의 주변을 끊임없이 돌고 있는 베티나 브렌타노로 인하여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그리고 있는데, 저자는 소설의 제목이 되고 있는 <불멸>의 의미를 괴테의 말을 빌어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81쪽)” 쿤데라는 자신의 고향 모라비아의 기억을 떠올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생각하는 불멸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또한 쿤데라는 사후세계에서 괴테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만나 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이 세인의 갑론을박으로 얼마나 불편한지 따지기도 합니다.

 

쿤데라가 논한 불멸의 의미를 새기다 우연히 소설가 오정희선생님께서 조선일보의 [101 파워클래식]에서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은 느낌을 “원고지 4만 장에 ‘뭇생명’ 담고… 박경리는 그렇게 ‘불멸’이 되었다.”라는 제목으로 적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오정희선생님은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또한 떠나고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도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한 세계는 살아 숨 쉰다. (…) 필멸의 작가는 그가 창조한 세계로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세인들이 불멸의 존재가 된 작품은 잊고 작가의 시시콜콜한 삶을 떠들게 될 것을 우려하는 듯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책들이 불멸하리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죠.(345쪽)”

 

작가는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는 보조 스토리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영역의 역사적 인물들을 이끌어  이고 있습니다. 아녜스와 로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인용한다거나, 앞서 언급한 헤밍웨이를 비롯해서 소설가 로맹 롤랑,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폴 앨뤼아르, 음악가 베토벤에 이르기까지...(이런 분위기는 보르헤스의 단편들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이들을 인용하는 것은 괴테와 베티나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은 괴테에게 향하는 베티나의 감정이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지만 쿤데라는 그녀를 쇠파리같이 귀찮은 존재였다는 괴테의 입장에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매개가 되어 괴테는 “베티나가 그를 실제로 사랑했으며, 그녀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부당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327쪽)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인물인 아녜스는 네 번째 이야기가 되는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충격을 안겨줍니다. 이런 이야기의 진행은 아녜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폴과 로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녜스가 끔찍하게 죽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로라가 고통에 짓눌린 폴을 방문했다. ‘폴, 이제 이 세상엔 우리뿐이군요.’하고 그녀가 말했다.(328쪽)” 사실 로라는 형부 폴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언니의 존재 때문에 접게 된다는 느낌을 여러 번 시사하고 있습니다. 폴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루벤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파리를 방문할 때면 만나던 류트의 여인이 바로 아녜스였다는 점도 놀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話者)의 역할을 하고 있는 쿤데라는 작품 곳곳에 직접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등장하듯이 말입니다. “술집 주인이 말했다. ‘쿤데라 선생은 좀 늦을 겁니다. 기다리는 동안 기분전환이나 하라고 이 책을 두고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폴리오’라는 보급판으로 발행된 나의 소설 <삶은 다른 곳에>를 그에게 내밀었다.(250쪽)”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355쪽)”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직접 등장(?)하여 “소설은 사이클 경주를 닮을 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해.(382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또한 <농담>의 성격에 대하여도 “소설 속의 소설이고,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것(382쪽)”이라고 말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복잡하게 펼쳐지는 복선과 미로찾기에 흥미있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할 만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음사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시리즈로 내면서 쿤데라의 소설세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일찍이 읽었지만, 삶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없을 때였던 젊을 때라서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의 [101 파워클래식]을 통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소개되고 북콘서트를 통해서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쿤데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났습니다. 피아니스트로 야나체크 음악원교수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그는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습니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에 진주하면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지만 결국은 일자리를 잃고 저서마저 압수되고 말았습니다. 1960년대 작품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이 체코에서 발표되었는데, <농담>은 1968년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출판사에서 불어로 번역출간되면서 단숨에 프랑스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 작가 아라공(Louis Aragon)은 <농담>의 불역판 서문에서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농담>을 통하여 체코의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쿤데라는 집필활동을 금지당하는 불운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농담>을 통하여 쿤데라를 알게 된 프랑스 문화계의 도움으로 쿤데라는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정착하고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체코에서의 작품활동이 금지된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는 4인 4색의 사랑을, <느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8261>에서는 절차가 생략된 인스턴트식 사랑을, <향수;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0113>에서는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서 뿌리가 없는 사랑을, <정체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2675>에서는 우연에 흔들리는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농담>은 젊은 시절에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쓰인 작품으로, 불안한 느낌을 주는 젊은이의 좌충우돌식 사랑이 느껴집니다.

 

<농담>의 전체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캠퍼스에서 만난 마르케타에게서 사랑을 느낀 루드비크가 봉사활동을 떠난 마르케타의 마음을 얻으려 보낸 엽서에 쓴 농담이 꼬투리가 되어 사상을 의심받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평소 친하게 지낸 제마네크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출당과 퇴교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는데 앞장서는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사태는 퇴교로 끝나지 않고 군입대와 탄광노역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여인 루치에에게 마음을 주게 되지만 평소 헌신적 사랑을 보이던 그녀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닫아걸고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고통스럽던 탄광노역도 끝나고 프라하로 복귀한 루드비크는 우연히 만나게 된 제마네크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여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르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작가는 전체의 스토리를 모두 7개의 작은 이야기로 쪼개고 있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은 주인공 루드비크를 비롯하여 조연격으로 등장하는 헬레나, 야로슬라프, 코스트카가 화자(話者)가 되어 이끌고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 이야기는 루드비크와 헬레나 그리고 야로슬라프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데, 현재 시점의 사건은 루드비크의 고향 모라비아에서 진행됩니다. 헬레나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루드비크가 대학에서 쫓겨나는데 앞장선 제마네크의 아내이고, 야로슬라프는 고향 모라비아에서 루드비크와 함께 전통음악 지킴이 활동을 같이 한 친구이며, 코스트카는 대학시절부터 여러 차례 위기에 빠졌을 때 루드비크로부터 도움을 받은 친구입니다. 코스트카는 현재 모라비아에 정착하고 있어 루드비크의 계획을 도와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루드비크의 여인 루치에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건들이 일어나고 소소하게 묻히는 사건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눈길이 가는 이슈들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전체 스토리의 발단이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농담’입니다. 진실만 이야기하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일단 재미가 없고, 혹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듣는 이의 입장을 고려하여 말을 지어내는 경우가 선의의 거짓말(white lie)이라고 옹호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농담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윤활유가 될 수 있는 농담도 상황을 보아 적당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루드비크의 비극은 사랑하는 여성 마르케다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산간지방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에 보낸 엽서 한 장에서 시작됩니다. 평소 장난기가 상당한 루드비크와 달리 마르케다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1948년 2월 이후 진행된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코사회는 해학이나 아이러니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있었다는 것인데 루드비크는 내밀한 슬픔 같은 것이 많지 않아 사회변화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산간지방의 봉사활동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보내는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에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마르케다에게 충격을 던져 혼란스럽게 할 요량으로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라고 적어 보낸 엽서가 당의 감시망에 걸려들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쓴 편지를 누군가 감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근래 우리의 일상이 감시카메라에 담겨 제3자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회안전망이기 때문에 용인하고 있는 것이며, 이 정보가 범죄의 수사 이외에 사용되지 못한다는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농담>에 등장하는, 편지마저도 감시당하는 사회가 끔찍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사로운 생각이 감시의 기준에 걸려 진실이 왜곡되어 해석되고 제대로 해명할 기회도 없이 그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위협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왔다는 점입니다. 북한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사회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경계합니다.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일부 사회적 문제점들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남과 북이 대처하고 있는 분단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이 그토록 살기 좋은 사회라면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두 번째는 루드비크의 사랑에 대한 생각입니다. 전편을 통하여 그의 애정공세를 받는 여성은 세 사람입니다. 철없던 시절 연모했던 마르케다는 그의 삶을 탄광의 막장으로 몰아넣고서 홀연히 그의 삶에서 사라집니다. 인생의 막장과도 같았던 탄광에서 만난 루치에는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안겨 캄캄하기만 하던 삶에 한줄기 빛이 되는데, 그는 과연 루치에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요?

 

“루치에를 발견하고서 나도 나의 운명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123쪽)”고 적었을 뿐 아니라,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139쪽)”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심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루치에를 신비로운 존재로 감추어 두는 편을 택한 것으로 보이며, 루드비크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코스트카에 의하여 밝혀지는 루치에의 과거의 상처를 루드비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둔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마지막 여인 헬레나, 남편 제마네크와의 결혼이 파경에 이른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녀를 유혹하여 제마네크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루드비크의 어쭙잖은 계획은 오히려 제마네크에게 들통이 나는 묘한 상황으로 루드비크를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레나의 자살소동 마저도 희극적으로 마무리한 것은 루드비크의 치기에 가까운 사랑놀음에서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쿤데라는 코스트카의 목소리를 통하여 이런 루드비크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용서를 모릅니다. 당신은 복수를 열망하지요. (…) 하지만 증오는 또다시 증오를 낳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 불러올 뿐, 대체 무엇을 가져다주나요? 루드비크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지옥에서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407쪽)”

 

<농담>은 쿤데라가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에 체코에서 쓴 작품이라서인지 모라비아 토속음악과 ‘왕들의 기마행렬’이라는 토속문화로 대표되는 체코의 토속문화에 대한 작가의 자부심과 그것들이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라비아는 와인과 전통공예로 유명한 지역이며 남부 모라비아의 중심이 되는 브르노(Brno)는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슬라브코프(Slavkov)성을 중심으로 한 전쟁과 승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밀란 쿤데라를 비롯하여 에드문트 후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레고르 요한 멘델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바로 모라비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쿤데라가 그의 작품에서 고향의 모습을 자주 그리고 있는 것은 고향에 대한 자신의 향수를 담고싶어서가 아닐까요? <농담>에서 그리고 있는 다음 장면, “그때부터 나는 작은 들판들이 이어진 들길로 나가곤 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비탈 위로 홀로 들장미가 피어나는 그 들길로...(271쪽)”에 나오는 들판길은 <향수>의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그녀는 갑자기 섬광처럼 들판으로 난 길을 보았다.(향수 21쪽)”는 대목에 나오는 들판길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느낌이 듭니다.

 

야로슬라프로 대변되는 전통문화에 대하여 적고 있는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변화는, ‘왕들의 기마행렬’에서 왕으로 지목된 아들이 숨어버리는 사건과 기마행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거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행사가 그저 형식만 갖춘 초라한 행사로 전락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마음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리고 모라비아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모임에 루드비크가 참여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마저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술집에서 열린 연주회가 민속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취객들의 소란 속에 묻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더하여 야로슬로프의 죽음으로 전통문화의 종말을 우려하는 쿤데라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처럼 2012-08-2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7240
 
연애와 결혼의 과학 - 지금까지 당신이 몰랐던 사랑의 진짜 얼굴
타라 파커포프 지음, 홍지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 장성해서 짝을 지워주어야 할 때가 되어서인지 친지의 결혼식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만나는 여자친구도 없는 눈치라서 좋은 배필을 만나는 일이 신경쓰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도 부전자전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주팔자와 궁합을 보러가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사실 그렇게 믿지도 않으면서 소리가 나올까봐서 궁합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을 가장 기본적 요소들로 해체해서 특정 결혼이 성공할지 아니면 이혼으로 끝날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8쪽)”는 주장을 듣게 되니 혹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타라 파커포프가 쓴 <연애와 결혼의 과학>입니다. 가장 불확실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삶을 같이하는 일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과학적 접근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자신의 결혼생활이 17년만이 파경으로 끝나게 된데 충격을 받고, 의학과 사회과학 부문에서 결혼과 부부관계에 관한 연구성과를 찾게 되었고, 그것들을 분석하여 어떤 부부관계가 지속될지, 어떤 사람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지 보다 잘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과 결혼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잘 알았더라면 부부의 한계를 깨닫고 닥쳐올 갈등을 예고하는 징후를 일찍 파악하고 파경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서문에 이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해두었습니다. “이 책의 각 장에서는 일부일처제, 사랑, 성, 자녀, 금전문제, 가사, 갈등 등 결혼의 다양한 측면에 숨은 과학을 살펴본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결혼의 과학을 실천 가능한 실용적 조언으로 풀이해서 결혼의 건강 상태에 대해 처방을 내리고 부부 관계를 개선하는데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12쪽)”라고 했으니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글 ‘결혼을 둘러싼 숫자들’은 ‘통계 수치에 감춰진 진실’이라는 부제처럼 주로 언론에서 전하는 결혼에 관한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를 들면 이혼율에 관한 기사를 보면 언제적 자료를 인용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경우는 최근 들어 결혼한 커플의 이혼율은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혼한 커플을 결혼시기별로 구분하여 비교해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가까울수록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인데, 정신적으로도 성숙되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에서 결정한 결혼이 파경을 맞을 확률이 낮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결혼을 미루다가 혼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9세기말에 이미 이런 사회적 현상을 예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결혼의 진정한 단점은 그것이 자아를 잃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자아가 지워진 사람은 색깔이 없는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개성이 없으니까.”라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적으로 분석해볼 때, 결혼은 분명 장점이 많은 사회적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쓸 수 있는 재원이 두 배가 되며,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다는 점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성관계도 자주 하게 되고, 잠도 더 잘 자고, 정신적 신체적 건강도 더 좋아지므로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은 결혼생활의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제2부 나쁠 때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만한 결혼생활에 위기가 될 수 있는 적신호를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는지, 그리고 부부사이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역시 과학적 근거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법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인의 이혼을 연구한 마비스 헤더링턴은 결혼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남편이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는 전업주부인 ‘전통적 결혼유형’에서 이혼률이 가장 낮았고, 부부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조화시키는 ‘따로 또 같이 유형’이 뒤를 이었는데, 이 경우는 우리보다 나를 중요시하면 이혼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한쪽(주로 여성)이 결혼생활의 문제점을 따지고 다른 쪽이 물러서는 ‘추격자-도망형 유형’에서 결혼만족도는 가장 낮고 이혼율은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각자 자족적인 두 개인으로 구성되는 ‘이심개체 유형’은 많이 다투지도 않으며 일상적으로 서로가 필요하지도 않는 타입이고, 오페라처럼 극적이고 기복이 심한 ‘오페라 유형’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며 부부싸움을 성관계로 해소하는 경향이 커서 성만족도는 가장 높다고 합니다.

 

저자가 종합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가 행복을 유지하고 부부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일곱 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쁜 소식은 나누고 함께 기뻐하라, 2) 결혼생활의 황금비율을 터득하라, 3) 높은 기대수준을 유지하라, 4) 가족과 친구에게 관심을 쏟으라, 5) 배우자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6) 따지지 말고 그냥 하라, 7) 연애 감정의 불씨를 되살려라 등입니다.

 

결혼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는 부부들 모두가 참고할만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조언서라는 점에서 일독을 권합니다. 참, 이 책은 커플이 같이 읽으면 더욱 효과적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