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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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이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단어를 묶어 제목으로 정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쿤데라는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모두 7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7개의 이야기는 간혹 같은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혀 독립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소설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잃어버린 편지들’이나 ‘천사들’과 같이 같은 제목을 단 이야기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립된 이야기 모음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헷갈릴 수도 있겠다싶었던지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설명하고 나섰습니다.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음악에서 주로 사용되는 변주(變奏)란 ‘음악을 선율적·화성적·대위법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편지들’의 주인공 타미나가 다시 등장하는 ‘천사들’에서 쿤데라는 오랜 투병에 지친 아버지가 손을 잡아끌어 베토벤의 소나타 「op 111」의 악보를 펼처보이면서 “이젠 난 알아!”라고 한 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사상 처음으로) 변주를 최고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그의 가장 아름다운 생각을 집어넣었다.(300쪽)”, “교향곡은 음악의 서사시다. 교향곡은 외부 세계의 무한을 가로질러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인도하며 점점 더 멀어지는 여행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변주에서 베토벤은 탐험할 다른 공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변주는 새로운 여행에의 초대였다.(308쪽)” 음악의 변주가 새로운 영역의 발견이었던 것처럼 쿤데라는 인간이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한 파스칼의 생각을 인용하여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펼쳐 놓은 변주는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308쪽)

 

웃음과 망각에 관한 변주를 통하여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소련의 꼭두각시들에 점령당한 조국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 혹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사람들이 겪는 정체성의 해체과정을 에둘러 혹은 콕 짚고 있다고 읽었습니다.

 

두 개의 ‘잃어버린 편지들’에서는 조국을 떠나지 못한 미레크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감추고 싶은 기록들은 헤어진 연인 즈데나와 주고받았던 끔찍할 정도로 감상적인 편지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잃어버린 편지들’에서는 조국을 등지고 떠난 타미나가 망명길에 들고 나설 수 없어 시댁에 맡겨두었던 편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그리고 있는데, 편지는 죽은 남편과 같이 한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편지들’에서 미레크는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11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옌데 암살은 러시아의 보헤미아 침공에 관한 기억을 금세 뒤덮어 버렸고, 방글라데시의 유혈 사태는 아옌데를 잊게 했으며, 시나이 사막 전쟁은 방글라데시의 울부짖음을 뒤덮었고, 캄보디아 학살은 시나이를 잊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잊을 때까지 사건이 이어졌다.(19쪽)” 쿤데라가 체코 동포들이 쓰라린 기억을 망각해가는 것을 걱정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일본이 지난 세기 우리선조를 비롯하여 아시아 주변국에 저질렀던 만행을 잊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전쟁중에 저질렀던 반인륜적 행위를 철저하게 반성해온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기를 쓰고 부정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과거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천사들’에서 웃음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웃음과 악마들의 웃음을 대비시키면서도 애초부터 웃음은 악마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웃음에는 어딘지 사악한 데가 있으며 또한 웃음에는 편안한 안도감을 주는 측면도 있다.(122쪽)고 합니다. 웃음은 곧 쾌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쾌락의 범위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배뇨하는 것, 만지는 것, 듣는 것, 혹은 그저 존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수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가 수도원의 장서관의 비밀장소에 감추고자 했던 서책이 바로 그리스 희곡을 바탕으로 한 웃음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편’이었던 것은 중세기독교 사회에서는 웃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쿤데라는 웃음으로 대표하는 쾌락주의가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도피하려는 일탈된 행동이라는 비판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엄마’에 서 마르케타와 에바가 카렐과 함께하는 성행위라던가 ‘리토스트’의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외도를 통하여, 혹은 ‘경계선’에서 바바라가 주도하는 집단 성행위 등이 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쿤데라가 웃음을 망각과 관련지은 뜻을 ‘경계선’에서 새길 수 있을 듯합니다. “얀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옛 조국을 떠나서 잃어버린 자유를 위해 투쟁에 모든 시간을 바친 친구들이 있다. (…) 그들은 경계를 보고 경계 너머로 미끄러져 들어갈까 봐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경계 너머에서는 고문당한 그들 민족의 언어가 이매 새들의 지저귐처럼 아무 의미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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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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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독자층이 탄탄하다는 요시모토 바나나씨의 소설을 처음 만났습니다.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막다른 골목의 추억>인데, 재미있는 것은 다섯 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할 수 있는 청춘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목에서 받는 인상처럼 삶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만 같은 상황에 봉착한 인생들이라는 공통점에, 저자는 이들이 어떻게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인생길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한폭의 수채화 그리듯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섯 여인의 다섯 색깔의 사랑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첫 번째 이야기 「유령의 집」의 남녀 주인공은 롤케익점을 하는 남자친구와 가족레스토랑을 가업으로 하는 여자주인공의 특징없는 생활 자체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할 수 있읗 것 같습니다. 가업 이어받기를 거부하는 남자주인공과 역시 가업 이어받기를 거부한 오빠 덕분에 가업을 이어받게 될 여자주인공이 우연히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되고, 일상을 탈출하기 위하여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남자주인공과 헤어지기 전에 잠자리를 같이 하지만 미래를 서로를 구속하는 약속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소인 남자친구의 숙소에서 나타나는 노부부 유령의 모습에서 무색무취할 정도로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엄마!」에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소녀가 역시 아무 것도 할줄 아는게 없는 엄마로부터 받은 학대가 마음 한켠에 쌓여있는데, 어느 날 사내 식당에서 주문한 점심에 넣은 독극물(사실 음식에 넣었다는 감기약은 안전영역이 넓은 편이라서 건강에 심각할 정도의 부작용이 생기려면 상당한 양을 복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설정이라고 보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을 복용한 여자 주인공은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 등 응급가료를 받고 퇴원하게 됩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의 희생양이 된 여자 주인공은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받은 학대와 그 사건으로 엄마와 헤어지게 되면서 형성된 보호본능이 발동되는데 퇴원하고서 복귀한 회사업무 상 만난 사람의 지나치다싶은 관심에 다시 보호본능이 표출되면서 감정조절에 혼란을 겪게 되는 ‘막다른 상황’에 봉착한다는 메시지로 보입니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는 남자친구의 무심한 듯한 격려가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장 짧은 스토리 「따뜻하지 않아」는 어린 시절 부잣집 이웃에 사는 남자아이와 함께 했던 기억에 붙들려 있는 여성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널찍한 자기 집보다도 헌책방 2층에 있는 여자아이의 집을 더 좋아했던 남자 아이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가정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생모에 의하여 납치되어 죽음을 맞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맞은 갑작스러운 이별은 오랫동안 여자아이를 미로 속에 밀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거의 기억과 어떻게 화해하는지 또 다른 해결방안은 없었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의 이혼, 그리고 10대 시절 소꿉친구에 의해 강제로 관계를 맺는 등 여자 주인공의 삶은 이미 뒤틀려져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도모 짱의 행복」에서는 5년여의 기간을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이 이루어질까 하는 기대를 걸게 하고 있습니다. 짝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우리들의 편견을 작가가 속 시원하게 깨트려 주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마음에 담았던 짝사랑을 이루지 못한 저의 아픈 기억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점은 유독 이 작품에서만 작가가 소설가로 등장해서 소설 속의 소설로 만드는 결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상처를 담고 사는 여자 주인공이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결말로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약혼한 남자가 떨어진 곳으로 근무를 떠나게 되면서 조금씩조금씩 멀어지다가 결국은 다른 여자가 생긴다는 끔찍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만큼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탓도 있겠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도 있는 상황이고, 좋은 도움말을 주고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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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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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후편은 전편에 이어 발베크가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드렸던 살롱문화는 파리와 같은 대도시 말고도 시골에서도 그곳에서 사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는 살롱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파리의 살롱와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겠습니다. 발베크 부근에 사는 베르뒤렝씨와 그들이 세들고 있는 집의 주인인 캉부르메르씨의 살롱이 등장하는데, 주무대는 베르뒤렝씨댁이지만, 두 집안이 은근히 대립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어 당시 유명 살롱들끼리 참석하는 인사들의 면면에 따라서 수준이 비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사들은 파리의 게르망트공작 살롱이나 스완씨의 살롱에서 이미 낯이 익은 분들이기도 합니다. 휴양지인 발베크로 쉬러온 파리의 인사들을 유치해서 살롱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 싶기도 합니다.

 

발베크의 살롱에서는 몰리에르의 연극과 발자크의 문학세계가 화제에 많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17세기 중반 활동한 몰리에르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몰리에르는 전통적인 희극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대비시켜 이것들의 상호관계에서 희극적 요소를 추출해내는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대학연극반에서도 몰리에르의 <강제결혼>이 레파토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의사 망나니>에서는 몰리에르가 의사를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던지 화가 날 지경이었던 경험도 생각납니다. 몰리에르는 의사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자크는 19세기 초반에 명성을 얻은 소설가입니다. 따라서 프루스트가 사교계에 드나들 무렵 파리의 살롱가에서 화제에 많이 올랐던 것들을 기억하고서 소설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어, 하편에서는 주로 샤를뤼스씨와 모렐씨 사이의 관계를 주로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작은 할아버지댁에서 일했던 사람의 아들인 모렐은 자신의 내력을 감춰달라고 주인공에게 요청하면서도 요청을 승낙하자마자 태도가 일변하여 으스대는 꼴을 보이는데, 이런 자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작가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주인공과 알베르틴의 관계입니다. 전편에서는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후편을 통하여 주인공과의 연애는 깊어져 혹시 결혼으로 이어질까 어머니가 걱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리고 성장기에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상황을 묘사하던 주인공이 청년이 되어 많은 여성들과의 사랑을 그려내면서부터는 이야기 가운데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별로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발베크에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설명은 몇 줄 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틴이 등장한 이후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스케치를 다니는 알베르틴을 위하여 자동차를 세내어 편의를 봐준다든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동숙을 한다거나 하다가도 헤어질 결심을 한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편집광적인 성격을 드려냈던 스완씨와는 달리 주인공은 불안심리가 두드러지는 성격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전편에서보다 동성애자들의 심리나 행동양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제 마음에 드는 이들에겐 열렬히 친절한 만큼이나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이들을 멸시하는 게 성도착자들의 버릇이다.(53쪽)”라는 설명이나 게르망트 공작이 모렐을 꼬드겨서 홍등가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된 샤를뤼스씨가 파리에서 쥐피앙을 불러들어 잠복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의 경우 이성애자들보다 질투의 정도가 심하다고 들었는데, 새로 생긴 동성애 상대를 감시하기 위하여 옛날 동성애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곳곳에서 고유명사의 어원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숙한 외교관인 오르메송(Ormesson)의 이름에는 베르길리우스가 좋아한 울무스(ulmus, 느릅나무), 또는 울름(Ulm)이라는 도시 이름이 되기도 하는 오름(orme, 느릅나무)이 보입니다.(70쪽)” 아마도 이런 화제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1920년대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프루스트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예언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이 우리의 비잔틴 문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사회 풍조로 된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된 효력에 관해 엄숙하게 토론하다니, 착실한 프랑스 사람, 아니 착실한 유럽 사람이 할 짓이 못 됩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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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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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실종되었던 장서관 사서보조 베렝가리오 수도사가 사체로 발견되는데, 그의 죽음은 묵시록의 예언을 증거하는 듯 보입니다. 세명의 수도사의 죽음이 미궁에 빠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황제측 사절단이 먼저 도착하고 이어서 교황측 사절단도 도착하게 됩니다.

 

교황측 사절단의 일원인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기는 경호병을 이끌고 수도원 안팎을 조사하다가 수상한 행적을 벌이는 식료계 살바토레가 마을 여자를 붙잡는 것이 계기가 되어 레미지오 수도사의 과거행적이 들통나게 됩니다. 소형제회에 소속되었다가 돌치니와 함께 반교황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토벌대에 몰리자 돌치니가 잔당에게 전하는 밀서를 휴대하고 탈출한 레미지오가 이 수도원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이 심문을 통해서 밝혀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교황측과 황제측 사절단의 청빈, 즉 소유에 관한 복음서의 해석을 두고 팽팽하게 맞서던 대립의 기울기를 한순간에 교황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습니다.

 

청빈을 내세우는 프란체스코수도회에서는 개인의 소유에 관하여 재산으로서의 소유와 일상의 소비재로서의 소유로 구분하고 일상의 소비재로서의 소유 이외에 교회의 재산소유를 부정하는 입장인 반면, 교황측은 교회에 소속된 신도들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들어 반박하였습니다. 사실 고래로 문헌의 자구의 해석을 두고 서로 다른 논리가 나오는 경우 쉽게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해석을 두고 시작된 설전은 순식간에 상대에 대한 험담으로 발전하여 감정대립이 되고 마는데, 베르나르 심문관이 레미지오를 체포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협상은 결렬되고 교황측 사절단은 레미지오를 아비뇽으로 압송하여 떠나게 됩니다.

 

사실 사절단의 협상은 아비뇽으로 대표되는 교황청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청빈을 내세운 수도회를 황제측이 수용하여 극한으로 치닫던 대립을 해소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내막을 보면 협상을 깨뜨리려는 교황 측의 전략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수도원에서 내밀하게 일어나는 일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무색할 지경으로 타락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 할 지경이라서 종국에는 불어 닥친 파멸이 오히려 필연이었구나 싶습니다.

 

교황측과 황제측 사절단의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본초학자 세베리노가 시약소에서 타살된 채로 발견되어 장서관을 둘러싼 미스테리가 절정으로 치닫게 되지만,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들은 여전히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셜록 홈즈나 포아로 탐정들은 척보면 단서를 꿰뚫어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는 모습에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 답답하다 싶은 순간, 사건은 우연한 순간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윌리엄 수도사의 말처럼 전기를 맞게 됩니다.

 

역시 마지막 무대는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는 장소가 되어야 제격인 것 같습니다. 사건의 실마리는 모든 것이 장서관의 숨겨진 장소 아프리카의 끝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권에서는 장서관의 이미지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 나오는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권에서 드러나는 장서관의 실제 모습은 오히려 에코가 바벨의 도서관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측면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 복도에 붙어 있는 거울은 사물을 복제해서 도서관이 무한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반하여 에코의 장서관에 등장하는 거울은 사물을 왜곡시켜 잠입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미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이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고, 도서관은 빵이나 피라미드 혹은 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는 활용하기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지만, 에코는 이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도서관이 심지어는 수도사들마저도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감추는, 일종의 정보를 왜곡시키는 곳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그 서책을 묻어버리고 있구나.(712쪽)” 문제는 금서로 지정되는 기준은 복음서의 해석에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그 해석은 수도원장과 사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소수의 편향된 철학에 따라서 대중의 권리가 제한되는 불합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미의 이름>에서 등장하는 장서관과 호르헤 수도사는 보르헤스에 대한 에코의 헌정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보르헤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어, ‘바벨의 도서관’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서책에 대한 보르헤스와 에코의 기호학적 해석을 인용합니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이 서로 다를지라도 동일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즉, 띄어쓰기 공간과 마침표, 쉽표, 그리고 스물두 개의 철자기호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픽션들 102쪽)”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에코는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事象)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 없다.(7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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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의 생명에 관한 철학 에세이
이브 파칼레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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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우리 과학계는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한국이 창조주의자의 요구에 굴복하다)”라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로 시끄러웠습니다. “교과서진화론 개정 추진위원회”라는데서 압력을 가해서 우리나라 일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이 삭제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교육과학기술부가 교과서의 내용을 출판사에 맡긴 때문이라 합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490274).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에 해당하는 존재로 진화론의 상징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조새의 화석에 대한 논란이나 조류의 진화에 대하여 몇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진화의 상징이라는 시조새 화석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진화론 역시 논란이 많은 이론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려는 창조주의자 혹은 지적설계론자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계의 인식인 것 같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627019).

 

학생들의 교과과정을 두고 진화론과 창조론이 뜨겁게 맞붙는 나라는 미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전과학을 비롯하여, 천문과학, 지질학, 고생물학, 생화학 등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증거들은 우주의 생성을 비롯하여 생명의 탄생과 진화이론을 강화시켜오면서 창조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그동안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퇴출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해 온 창조론 지지세력은 이제 교과과정에서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는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9333>에서 2000년대 초반 펜실베니아 도버시 법정에서 벌어진 진화론과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의 격돌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2004년 10월 펜실베니아 도버시 교육위원회에서 “학생들에게 다윈의 이론 및 이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지적설계론을 포함한 기타 진화에 관한 이론들의 허점/문제를 알게 할 것”이라고 결정한데서 발단되었습니다. 피글리우치교수는 “지적설계론에 관해 간략히 분석해 보니, 이 이론이 초자연적 원인을 끌어들여 베이컨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 접근법을 위반하므로 과학이 아님이 드러났다.”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에서 사이비창조론 혹은 이를 변형한 지적설계론을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한 사이비과학으로 분류하고 있는 마이클 셔머는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비하여 과학적 타당성을 검증하고 있습니다.

 

창조론이 과학계에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는 생명의 탄생과 우주의 시원에 관하여 분명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담은 책들을 읽어왔습니다만, 최근 읽은 책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들어보면, <눈먼 시계공;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4835>에서 리처도 도킨스는 바이오모프 모델을 이용하여 진화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전체에 담긴 생물체의 형질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가 자연에 의하여 선택되어 살아남게 되고 그러한 변화가 누적된 결과가 종의 차이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생물학자 제럴드 캘러헌교수는 <감염;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66190>에서 인간의 DNA의 반 이상은 감염에 의하여 인간염색체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감염을 통하여 인간의 유전자에 삽입된 미생물의 유전자가 인류의 진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주의 시원과 생명체의 진화를 같이 다룬 대표적인 분은 칼 세이건교수입니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69363>이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 태양계의 탄생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하는 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진화해온 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을 비롯하여 물리학, 분자 생물학,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지구상에서 일어난 일을 뒤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우주의 시원과 지구생명체가 진화하는 과정을 다룬 책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 쓴 것들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자연과학을 전공한 분들의 책은 대체적으로 전공용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글이 어렵고 딱딱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하는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소르본느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가 쓴 이 책은, 자연과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본 우주의 시원과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사유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혀 색다른 책읽기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파칼레는 시선을 태양계 넘어 우주의 시원으로까지 넓히고 있습니다.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우주 속에 태양계가 자리를 잡고 지구가 만들어지기까지 천문학을 비롯하여 우주물리학 등 다양한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7억년전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인류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루기에는 원고의 분량이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인지 5억 4,200만년전 캄브리아기까지 지구상에 등장한 지구생명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세 가지 근본 관심 가운데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두 가지 질문은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를 통해서 그 답을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 질문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는 후속작인 <인간의 장편소설>에서 다룰 예정이라고 합니다.

 

파칼레는 서문에서 시적이고 반어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이 책을 쓸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영향으로 받아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생명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는 생명체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잘것없는 물질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점도 깨닫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파칼레는 우주가 인간의 모태 혹은 활동무대로 쓰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거부합니다. 즉 창조론은 지구상에 나타난 생명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쌓아올린 오만의 극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주의 기원이라고 할 137억년 전 빅뱅이 일어나는 시기에 “태초에는 말씀도 없고 신도 없었다.(37쪽)”고 일갈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도는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구나”라고 <도덕경>에 적은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하늘보다 앞서 있었으나 비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이 무엇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니 정말 기가 막힌 직관(66쪽)”이 아닐 수 없다고 탄복하고 있습니다.

 

파칼레는 매 장의 글머리에서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을 인용하고 현대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유물론을 계승한 책으로, 원자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 공간에서 상호작용하여 모든 사건이 발생한다는 원자론적 우주관을 담은 고전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중간에는 일종의 하이쿠라고 할 만큼 두 세 줄의 짧은 시를 넣어 본문을 요약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빅뱅에 관한 시는 “신 없는 신 / 전부이자 무(無) /말할 수 없는 빅뱅(38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원에 일어난 빅뱅으로부터 소립자들의 작용으로 빛이 생기고 원시 원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주가 확산되는 과정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레너스 서스킨스교수가 <우주의 풍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7504>에서 상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소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주에 물질, 별, 태양, 태양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지구에 생명이 등장하여 진화하는 과정을 손에 쥘 듯 그리고 있습니다.

 

고대 원자론을 확립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지구라는 행성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태양계가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지구가 지금의 위치에 만들어진 우연(偶然)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시지구에서 생명의 원천이 되는 유기물질이 만들어지고 이들 물질이 생명체로 발전해 나오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책보다 구체적입니다. 유기물질로부터 유전물질이 만들어지고 유전물질이 단세포동물이 되고 단세포동물이 다세포동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우연도 작용하였지만, 지구환경의 급변이 계기가 되어 생존을 위하여 마련한 자구책의 결과였다는 설명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하게 된 몇 차례의 전기가 있었다는 것인데, “첫 번째는 137억년전 빅뱅과 함께 우리는 물질과 에너지로서 한 번 태어났고, 40억년 전에 리보자임과 핵없는 세포로서 다시 한 번 태어났으며, 10억년 전 진핵세포와 성(性)의 출현으로 세 번째 태어났고, 5억 3,000만년 전에 척삭동물 계열이 출현하면서 네 번째 태어났는데,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0만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호모(Homo)속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550쪽)”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던진 저자는 진화가 특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존재가 진화(進化)에서 ‘정점’을 찍거나 ‘궁극’이라고 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지구생물들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도 고생대 혹은 중생대에 일어난 대규모 멸종을 통하여 사라진 생명체들처럼 어느 순간 지구를 떠나게 될 운명을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583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에서 보면 태양계에 속하는 위성에 대한 설명이나 캄브리아기에 나타난 생물들에 대한 설명들은 어떻게 보면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캄브리아기를 전후해서 등장한 생물들에 대한 설명은 명칭부터 생소한 탓인지 이미지조차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석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생물 가운데 상당수는 현존하는 어떤 동물과도 닮은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전자변이가 일어나 진화가 시도된 생물군이 살아남지 못한, 즉 지구 생태계로부터 진화를 승인받지 못하고 폐기된 생물일 것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설명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물론 철학자로서 저자는 아이들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창조론이 여전히 권세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창조주의 의지에서 나왔고,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권정치사회에서는 창조론 이외의 다른 이론은 설 자리조차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인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32803>에서도 천지창조에 신의 의지가 개입된 바 없다는 주장을 읽은 바 있습니다만, 이브 파칼레의 <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에서는 물리학, 천체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유전과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주와 물질,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장대하고 웅장한 대서사시를 철학과 과학 그리고 문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필치로 펼쳐내고 있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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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8-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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