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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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처럼 책읽는 버릇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 젊어서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옮겨가더니 최근에는 인문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 책읽기에서 비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기도 합니다.

 

소설쓰기를 지망하시는 분들을 위한 안내서나 교육과정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과문한 탓인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간직하거나 젊어서는 독서회에 참여해서 책을 읽은 느낌을 서로 나누는 토론회를 통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소설가>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2008년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받은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밝힌 자신의 문학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설가로 성장하기까지 35년에 달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은 나의 소설 읽기 경험도 담겨 있지만 대부분 나의 소설 쓰기에 관한 내용입니다.(177쪽)”라고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읽어도 크게 도움이 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라포르시안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이 엄청난 독서양을 자랑하시는 분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독서의 깊이에 놀라곤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그림그리기에서 소설쓰기로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11쪽)” 그리고 보니 파묵씨의 책읽기와 비교해보면 저의 책읽기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입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이라는 논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는 여러 개의 비슷한 의미로 번역소개되었지만, 옮긴이는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소개하는 이유는 소설을 읽거나 쓰는 사람을 나누는 파묵의 기준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인식하지 않고, 즉 소설을 쓰는(읽는) 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소박한’ 작가(독자)로 규정하고, 반대로 소설을 읽거나 쓸 때, 소설에 사용된 기법과 독서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면 ‘성찰적인’ 작가(독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20쪽)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만, 저자는 소설을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공감하십니까? 1. 전체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딘가에 있을 모티프와 아이디어, 의도, 중심부를 찾습니다. 2.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하여 책이 말하는 것을 추적해 갑니다. 3. 소설 속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지 상상인지를 궁금해집니다. 4. ‘현실도 이럴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 주고, 묘사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서와 같을까?’를 궁금해 합니다. 5. 단어와 비유와 문장에 숨어 있는 음악을 음미합니다. 6. 주인공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작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7.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며 작가와 공범 관계를 형성합니다. 8. 읽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기 시작합니다. 9.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감춰진 소설의 중심부를 찾습니다.

 

집착적으로 보이지만 순수한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순수박물관>을 발표한 다음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40쪽)”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분명 케말이 소설가 파묵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4300>에서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소설의 기능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파묵은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를 꼬투리로 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박물관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소설은 기억을 보완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과 기억의 관계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중국 작가 모옌이 수상했다고 해서 스웨덴 한림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내온 인물이라는 이유라고 하는데,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에서 문학의 독립성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과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묘하게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인용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반(半)폐쇄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61쪽)”

 

소설의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작가는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73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이 주변 풍경과 사건과 배경에 녹아들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배회하고, 머물고, 한데 뒤섞여 그 일부가 되는 순간,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9422>에 등장시킨 괴테를 빌어 다음과 같이 불멸의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불멸, 81쪽)”

 

자존감, 차별화 의식, 정치 등을 화두로 한 소설의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도 공감되는 점이 많습니다. 아마도 소설 <순수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순수박물관 권2, 113쪽)” 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사물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소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작가의 눈으로 통하여 언어의 형태로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은 기획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면 프루스트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물론 살롱에 드나드는 인물들의 의상에서부터 말투 등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 역시 최근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국일미디어판으로 읽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민음사판으로 읽을 기회가 생겨서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 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147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작가가 처음 소설을 쓰도록 이끄는 직감, 사고,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의도하는 중심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그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심부를 일찍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중심부가 옮겨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보르헤스가 쓴 <모비딕>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작가의 대표작 <순수박물관>에서 중심부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순수박물관 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제가 ‘약혼녀가 아닌 여성과의 관계가 순수할까?’라는 리뷰제목을 달 정도로 순수해보이지 않은 케말의 행적을 볼 수 있었다면 <순수박물관 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케말의 지순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퓌순의 마음을 다시 얻는데 성공하지만 소설의 중심부는 다시 반전해서 순수박물관으로 대상이 옮겨간다는 정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뜻을 제대로 읽고, 더 나아가 발전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유념할 점들이 잘 설명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소설 읽는 즐거움을 중심부를 찾는 노력에서 시작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목록을 소개하고 있어 앞으로의 책읽기에 참고할 수 있는 덤을 얻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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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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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다보니 걷을 수 없는 신세가 안타깝습니다. 6월에 보스톤학회에 다녀오면서 얻은 무릎부상으로 걷기를 자제하라는 주치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걷기에 좋은 코스를 따라 걷곤 했습니다(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uid=yang412&folder=42). 역시 걷기에는 청명한 가을이 제격입니다.

 

걸으러 나갈 수 없으니 걷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아쉬움을 달래보려 했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의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가 쓴 <걷기 예찬>입니다. 저자 역시 ‘움직이지 않고 오래 걷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걷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금 장소를 탐험과 명상의 장소로 탈바꿈시켜 가지고 그 장소에서 장기간에 걸침 미시적 여행을 시작한다. (…) 비록 공간은 협소해 보이지만 그래도 매우 다양한 여정이 제공된다.(86쪽)” 여기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에세이 모음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은 철학적이고 진지한 글 모음입니다.

 

저자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9쪽)”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걷는 이유는 건강을 위한 목적이 큰 탓에 아직은 걷는 매력을 충분히 느끼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써내야 하는 글이 있는 경우에는 걸으면서 글의 틀을 생각하고 다듬는 경우도 있어 저자가 의미하는 걷기의 즐거움에 가까운 경우도 없지는 않은 듯합니다.

 

<걷기 예찬>에 실려 있는 글들은 성격에 따라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걷는 맛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걷는 맛’에 담겨있습니다. ‘지평을 걷는 사람들’은 구도적 걷기에 나선 분들에 관한 글모음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도시에서 걷는 맛에 관한 글은 ‘도시에서 걷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으면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 승화감은 ‘걷기의 정신성’에 담았습니다.

 

걷는 맛은 어떤 것일까요? 다른 지방을 여행할 때는 대개 비행기나 차량을 이용해서 현지에 도착한 다음 둘러보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장소는 대개 관광지이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걸어서, 조금 발전시키면 자전거로 여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곳의 보통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 생활 그리고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21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걸으면서 동행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저 묵묵히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저자는 이런 경우를 다음 처럼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 (…) 걷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동차의 소음과 꽝꽝대는 카라디오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 밖으로 외출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68쪽)”

 

저자는 걷기에 관한 많은 저자들의 다양한 글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도 하고 있어 걷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걷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복잡하고 바쁜 일상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고려하면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도시에서 걷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예기치 않은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취재를 위하여 외국의 도시를 방문하는 대기자는 당장 취재원으로 달려가는 피라미들과는 달리 낯선 도시의 거리를 목적없이 걸으면서 그 도시의 구체적인 삶을 느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처음 방문하는 외국의 도시에 도착하면 거리로 나서기 전에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도시가 안전한지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시골길의 여유로움을 찬양한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바람부는 길에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6006>에서 도시 역시 우리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냄새를 풍기고, 감촉을 느끼게 한다고 하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말에 집을 나서 걷는 경우와 달리 여러 날을 머물게 되는 여행을 하는 경우 여행지에서 겪는 대소사를 글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이런 점을 ‘글로 쓰는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간추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 흐려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여행의추억을 기억에만 갈무리하는 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행하면서 얻은 느낌은 바로바로 글로 정리하고 사진을 덧붙여 놓으면 좋은 기록이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걸을 수 없는 저의 안타까운 시간을 위로해준 좋은 읽을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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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되찾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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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읽기를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을 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결승테이프를 끊은 셈입니다. 6월초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장장 4개월이 조금 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철들 무렵부터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졌지만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책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신경과학자 조나 레러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를 읽으시고 신경과학에 매료되었다고 적으셨습니다. 당연히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구해서 읽게 되었고, 조나 레러박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에서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구절에서 강한 끌림을 얻었던 것입니다.

 

마침 아내 역시 구입해두곤 펼쳐보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집쪽으로(1)>를 서가에서 찾아내 읽기 시작한 것이 프루스트 읽기 대장정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책읽기의 버킷리스트에 0순위에 올라있던 숙제를 마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니 박완서선생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노릇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되찾은 시간>은 대하소설을 마무리하는 부분인 만큼 프루스트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많은 인물들이 죽고 나이 들어 퇴장하고 있습니다(주인공의 절친 로베르 생 루 역시 전쟁터에서 부하를 구하기 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만, 주요 등장인물들이 전장터에 나설 수 없는 여인들인 까닭에 여전히 무대는 파리에 있는 살롱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보았을 때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될 무렵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최소 2000만명에서 최고 1억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는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이 “지난날 스완부인이 ‘꼼작없이 진저리나는 인플루엔자(influenza)에 걸리고 말았어요’하고 말했듯이…(190쪽)”라는 인용문 하나로 처리되고 있어 놀라울 따름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내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한(恨)을 덜어주기도 하고 더해주기도 하는…(52쪽)”이라고 한탄했던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모두 여섯 편으로 나누어 전개되는 이야기들에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변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되찾은 시간’은 주인공이 노년에 이른 시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요 등장인물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교계를 그려내고 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저 역시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도하여 35년 전에 만든 대학동아리가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그 이야기들이 지금 젊은 후배들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일어 언젠가 그 옛날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려 하였지만, 기억이 분명하지 않거나 사건 현장에 없었던 경우가 난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동아리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옛날을 회고하여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스완네집 쪽으로’에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에 대한 이야기는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한 조각 마들렌의 맛이라거나 콩브레나 발베크를 산책하면서 얻은 느낌은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250쪽)”고 적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중요한 점은 프루스트의 작가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으면서도 기억에서 더 멀어져 가는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에 대한 저자의 단상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에서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순간이 쌓여 만든 시간이 바로 기억이라는 점입니다. 프루스트 역시 좀이 슨 자신의 노트를 인용하면서 “노역으로 분장한 얼굴로부터 잃어버린 시간의 관념이 주어지자마자, 내가 불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노릇(481쪽)”이라고, 시간에 대한 관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이라도 나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만한 오랜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면, 우선 거기에 공간 속에 한정된 자리가 아니라, 아주 큰 자리, 그와 반대로 한량없이 연장된 자리 ‘시간(temps)' 안에 차지하는 인간을 그려보련다.(499쪽)”고 오래 끌어온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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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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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편에서 퓌순이 사라진 다음에서야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말이 그녀의 종적을 뒤쫓지만 묘연하기만 하던 그녀와 가족이 사는 곳을 결국은 찾아내게 되고, 그녀가 원했던 자전거와 귀걸이 한짝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영화감독 페리둔과 결혼을 한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기를 2864일... 이 시점에서 퓌순에 대한 케말의 사랑을 재평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집념이라고 매도하기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순수함에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퓌순과의 관계를 시벨과의 결혼과는 무관한 혼외의 사랑으로 가져가려는 단순한 생각이 잘 못된 선택이었기에 먼 길을 돌아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작가는 이러한 케말의 사랑을 집념이라는 값싼 단어보다는 순수함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겠습니다. “독자들이나 관람객들은 내가 그 순간과 상황을 경험할 때는 전적으로 진심이었으며 항상 순수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89쪽)”

 

그러면 퓌순이 케말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편의 끝장면에서 가난한 퓌순이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케말이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도움이 절실해서였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나를 만난다는 것을 이제는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15쪽)” 퓌순의 어머니 역시 그런 소망을 노골적으로 지원해달라 요청하기도 합니다. 케말은 퓌순의 그런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지만 결국은 퓌순과 그녀의 남편 페리둔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케말은 신체적 접촉을 거부하는 퓌순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퓌순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에도 감지덕지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보니 중학생 무렵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가더라도 가끔 바둑을 두기도 하지만 따라 책을 읽던가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편하게 느껴졌던 것인데, 이런 기억에서 케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둔이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촬영에 들어가지만 퓌순은 상대 남자배우와의 신체적 접촉을 꺼려하는 페리둔과 케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배우로 데뷔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퓌순의 미모에 반한 다른 영화감독이 그녀를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역시 두 사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런 정황이 퓌순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한편 페리둔과 퓌순의 결혼생활에는 비밀이 있었고, 결국은 페리둔이 감독한 영화의 주연배우 파파트야와 사랑에 빠지면서 퓌순과 페리둔이 파경을 맞게 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케말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몸을 열었던 퓌순이었지만, 페리둔과의 결혼생활에서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케말과 결혼을 약속하고 있음에도 혼전관계를 거부하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케말은 퓌순과 어머니 네시메고모와 함께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불가리아에서인가 술을 마신 퓌순이 차를 운전하면서 버드나무로 돌진하여 자신은 현장에서 죽음을 맞고 케말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 앞서 배우로 데뷔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으로 보아 퓌순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그래도 케말과 동반자살을 꿈꾸었다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케말은 퓌순이 떠난 다음에 그녀와 연관이 있는 물건을 수집하며 그녀를 기억하려 노력하였는데, 퓌순이 죽은 다음에는 그녀가 살던 집을 아예 박물관으로 꾸며 그녀와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하려 기획하게 됩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113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순수박물관인데, 순수박물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참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치 저자가 이토록 많은 박물관을 방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였을 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케말이 방문한 박물관 가운데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케말의 행적을 그리는 과정이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듯도 합니다. 작가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즉 순간들을 모은 시간이 바로 기억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을 글로 남긴 프루스트는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돌아온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고 있기도 합니다.

 

케말은 바로 시간을 기억하고자 순수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파묵에게 부탁하여 퓌순과의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달라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파묵이 <소설가와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인 것으로 혼동하는 독자들은 무언가 착각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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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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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학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를 읽어가다가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그의 소설 <순수박물관>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집착적인 사랑에 빠진 케말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느낌을 주제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순수박물관이 출판된 다음 작가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파묵씨,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씨, 당신이 케말인가요?(소설과 소설가 40쪽)”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케말의 사랑을 사실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어 자전적 소설이라고 믿게 되는 독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355쪽)”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즉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경험을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 혹은 주변인물이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소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수박물관>은 파묵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 쓴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합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을 그려내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집착도 이 정도면 병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975년 터키 이스탄불,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이 넉넉하게 성장한 케말은 역시 훌륭한 신부감인 시벨과 약혼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어렸을 적 가깝게 지냈던 먼 친척의 딸인 퓌순을 만나면서 묘하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를 유혹하여 관계를 맺게 된 케말은 한편으로는 시벨과의 약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약혼식장에 퓌순과 그 가족을 초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게 되고,약혼식장에서 자신이 퓌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퓌순이 잠적하게 됩니다. 퓌순의 종적이 묘연해지자 케말의 일상은 흩어지면서 약혼녀 시벨과의 관계 역시 뒤틀리게 되고 종국에는 거리를 두었다가 종국에는 파경에 이르게 되는데 까지 1부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약혼을 앞둔 남성이 갑자기 등장한 먼 친척 여인을 적극적으로 유혹하여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현실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사회가 혼전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이고 서구문화를 접한 여성이 혼전순결을 지킨다는 터부를 깨는 용감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이 혼전 관계 혹은 혼외정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다소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주인공 케말과 그 친구들은 최근 화제에 올랐던 브이 소사이어티처럼 ‘당신은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라는 케말의 친구 자임의 별명처럼 방탕한 생활이라고 할 정도의 행적을 보이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케말은 퓌순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나는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또 걱정스러웠다. 나의 영혼이 이 행복을 진지하게 여기는 위험과 가볍게 여기는 통속성 사이에 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 머리는 혼란스러워졌다.(86쪽)”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퓌순을 진지하게 사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퓌순을 약혼식에 부른 것은 그의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한편 퓌순이 사라진 다음에 그녀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으로 보입니다. ‘눈에서 벗어나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는 유명한 말처럼 보이지 않으면 불같던 사랑도 조금씩 식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사라진 알베르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27835>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 독백하면서도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 사랑했었노라고 중얼거리는 주인공을 보면 정신이 온전한지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파묵 역시 대화체로 풀어가던 이야기를 사라진 퓌순의 뒤를 쫓는 케말의 행적과 생각의 흐름은 프루스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아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부에서는 사라졌던 퓌순이 최근 결혼한 상태로 다시 등장하는데까지입니다. 다시 나타난 퓌순과 케말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아주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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