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기를 - 인문학 카페에서 읽는 16통의 편지
노진서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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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불혹(不惑)이라고 부르는 나이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에 이르렀으므로 부질없이 엉뚱한 것에 마음이 갈팡질팡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요약해서 들려준 <논어> ‘위정편’에 있는 글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삶의 기초를 이루고 마흔이 되어 남의 의견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쉰에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예순이 되어 남의 의견을 다 들을 수 있게 되고 일흔에 하고 싶은 바를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풀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마흔이 될 무렵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으니 부질없이 마음이 갈팡질팡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편부당하다는 생각을 접고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는 변명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흔’에는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아야 한다는 노진서교수님의 생각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태에 따라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초지일관(初志一貫)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새로운 해석도 나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마흔,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기를>에서 저자는 마흔을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과거와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는 나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의 열병을 앓던 베르테르는 로렌스의 금지된 사랑을 훔쳐볼 수도 있다거나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처럼 힘겨운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다가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기약없이 온다는 누구를 기다리며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고 체념하는 나이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해석에 반대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만화에 빠지던 제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생각나 그 만화책을 넘겨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책보다는 만화형식으로 담은 메시지를 쉽게 이해한다고 해서 항생제에 대한 지식을 담은 <만화항생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731223>가 젊은 의학도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느닷없이 만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런던에서 애니메이션작업을 하시는 엘로의 만화가 이 책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프롤로그에 이어 나오는 만화가의 프롤로그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소시민이 만나게 될 환상여행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이 책의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잠시 꿈나라로의 여행을 통하여 심신을 정화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하철을 이용해서 퇴근하던 주인공이 어느 순간 꿈에서 깨어나, 혹은 꿈속에서 만나는 누군가의 안내로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 여행을 통하여 일상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기회를 붙잡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저 매일 매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책에서 나오는 열여섯 정거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도심에서는 지하철 역 사이의 거리가 짧은 편이라서 금방 다음 역에 도착하게 됩니다만 부도심에서 시외로 빠지는 노선에서는 한 장면의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아려 보았습니다. 사당역에서 열여섯 번째가 되는 한대앞 정거장까지는 43분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정거장은 ‘어린 날의 풍경’입니다. 조용필씨의 노래 ‘못 찾겠다 꾀꼬리’를 모티프로 해서 어린 시절 흔히 하던 술래잡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별로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술래잡기를 하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요즈음 어린이들이 노는 법을 모르고 노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큰일이라고 글머리를 열어 어린 시절을 잃고 사는 어른들의 현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읽는 이가 어린 시절에는 숨은 친구를 찾는 술래였다면 지금은 잃어버린 꿈을 찾는 술래가 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래잡기를 할 때 꽁꽁 숨은 친구를 찾지 못한 술래가 친구찾기를 포기할 때, ‘못 찾겠다. 꾀꼬리’라고 소리치는 이유를 아십니까? 꾀꼬리는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서 울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 숨어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그만 나오라고 포기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저자는 시인 앤 머로 린드버그의 <어른과 아이>라는 시를 인용하여 어른이 되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아이의 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혹시 린드버그 시인의 아픔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앤 머로 린드버그 시인은, 1927년 5월 21일 비행기 ‘세인트루이스의 정신’호를 몰고 뉴욕에서 파리까지 무착륙횡단비행에 처음 성공하여 세계적 영웅으로 떠오른 찰스 린드버그의 부인입니다. 1932년 3월 1일 14개월 된 린드버그 2세가 뉴저지주 호프웰에서 유괴되어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세기적인 유괴사건으로 린드버그 부부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됩니다. 린드버그 시인은 어른과 어린이를 대비하면서 잃어버린 린드버그 2세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미네소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미네소타주의 리틀 폴스에 있는 린드버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을 방문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열여섯 꼭지의 이야기 가운데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다섯 꼭지나 되는 것을 보면 역시 옛날을 추억하는데 있어 사랑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모양입니다. 사랑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사랑, 아름답고 잔혹한 본능’으로 이끄는 만화에서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낸 엽서를 모아놓은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엽서를 받은 여자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대신 우표를 주고 갔다는데, 우표에 담긴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환상여생을 안내하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참지 못하고 누어버린 소변에 떨어진 우표의 뒷면에 그녀의 마음이 나타나게 되었더라는 것이지요.

 

“난 두려워 우리 사랑한 뒤에 멀어진다면, 다시 볼 수 없는 건 견딜 수 없기에 우정이라 말하고 그대 곁에 있지만 너무나 깊은 사랑인 걸 어떻게 하나.” 떠나간 그녀는 이 청년을 너무 사랑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떠난 그녀가 우표에 남긴 마지막 글 “P.S. I LOVE YOU”에서 이 책의 저자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되는 사랑...’이라는 박정현의 <P.S. I LOVE YOU>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동명의 비틀즈 노래를 떠올립니다. 젊었을 적에 다방에 가면 꼭 신청해서 듣던.... 그리고 사족입니다. 주인공은 오줌에 젖은 우표의 뒷면에서 나타난 글씨들이 산성성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상인 뇨의 산도는 4.4~8.0으로 중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대 안에 갇힌 사랑’은 시인과 촌장 그리고 조성모씨가 부른 감성적인 노래 <가시나무 새>가 모티프가 되고 있습니다. 저도 노래방에 가면 가끔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라고 당신을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노랫말과는 달리 가시나무새의 전설에서는 가시나무새가 가시나무에 날아들어 아름다운 목소리를 노래를 부르다가 크고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을 찌르고 죽음을 맞는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명적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저자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그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통하여 운명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드가 앨런 포의 슬프고도 지고한 사랑을 노래한 <애너벨 리>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께서 따로 프린트해서 나누어준 <애너벨 리>를 읽어주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만 감미로웠더라면 더 빠져들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 속에서도 슬픈 사랑에 몸을 떨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누구나 지울 수 없는 옛사랑의 그림자를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 이미 희미해졌어도 결코 지워지지는 않는 그런 그림자 말입니다. 이런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지 싶습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흰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라는 가삿말이 있는 이영훈의 노래 ‘옛사랑’에 끌려 자신의 지워지지 않는 옛사랑의 한 자락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라면 블루벨즈가 불러 사랑을 받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모티프로 하여 떠나간 옛사랑의 기억이 자꾸 흐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푸른 달빛은 호숫가에 지는데 멀리 떠난 그님의 소식 꿈같이 아득하여라”로 시작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1960년대에 멕시코출신 트리오 로스 트레스 디아멘테스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루나 예나(Luna Llena)라는 라틴음악의 고전을 원곡으로 하는 쓸쓸함이 물씬 묻어나는 노래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작고하신 코미디언 서영춘씨의 조카 서지숙씨가 노래한 소월시인의 시 <부모>라는 노래를 들으면 부모님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겨울의 기나긴 밤. /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 옛 이야기 들어라. /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 내가 부모가 되어서 알아보리라” 만화에서는 부모의 존재가 마치 물과 같아서 옆에 계실 때는 고마움을 잊고 살다가 안 계실 때에서야 부모님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고 설명하고, 작가는 그런 부모의 존재가 흔들리고 있는 세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애가 모성애를 범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 것도 자기애가 모성애를 앞서고 있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 함께하는 우리의 이름’에서도 가정은 구성원들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인용하여 가족관계가 변질될 수도 있음이 이미 예견되었지만 우리가 최고의 축복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은 ‘우리’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삶이 지쳐 주저앉을 때 그들은 어느 새 내 곁을 지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제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문세의 노래 <그대와 영원히>는 세상살이에 지친 나에게 힘을 주는 동반자와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끝까지 함께 할 것을 노래하는 내용이라고 보여서 가족애를 논하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유재하 작사 작곡의 <그대와 영원히>는 저의 십팔번이기도 합니다.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편지의 마지막 주제는 피할 수 없는 외길, 즉 나이 듦과 죽음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삶이 있듯이 늙어감에도 꼭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콕 짚을 모범답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과 생각에 맞추어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만, 저자는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여파로 어수선하던 시기에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시골에 자리를 잡고 노년을 시작한 니어링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 온 부부는 남편 스콧 니어링이 100세가 되는 생일을 앞두고 스스로 살만큼 살았다고 판단하고, 단식을 통하여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부부가 삶을 같이 하는 것으로 넘어가서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주제만으로도 여러 권 분량의 책이 될 터이기에 아쉽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어린 시절로부터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을 때까지의 인생항로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짚어 시와 책 등 다양한 인문학적 자료들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정리하고 있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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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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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새로 나온 책을 중심으로 하여 책읽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책읽기를 하는 중에 다른 책, 특히 고전을 인용하여 풀어가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면 그 책을 읽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메모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지난 해 읽은 책들 가운데 <안나 카레니나>를 인용한 경우가 두어 번 있었기 때문에 필독 도서의 목록에 위쪽에 올려 두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3월 중에 새로 만들어진 <안나 카레니나>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 초연된 뮤지컬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2541>을 보러 갔을 때는 원작 읽기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 내면상태 등에 대한 정보가 없어 전개되는 이야기를 겨우 뒤쫓을 뿐 뮤지컬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금년에 극장에서 만난 영화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9357>은 원작을 이미 읽은 다음이어서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그리고 사상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3년 집필에 착수하여 1978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위선, 질투, 신념, 욕망,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연진희 번역본은 모두 8부로 구성된 이야기를 세권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에서는 1부와 2부를 담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목차에 이어서 열 한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를 요약하고 있어 안상헌님이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에서 귀띔해주는 것처럼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스티바(스테판 오블론스키)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정분이 난 사실을 아내 돌리(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가 알게 되면서 갈등을 빚는데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페테르부르그에 사는 스티바의 동생 안나(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여자 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가 모스코바로 찾아오고, 비슷한 시기에 스티바의 절친인 레빈[콘스탄친(코스챠) 드미트리치 레빈]이 포크로프스코예에서 돌리의 여동생 키티(카체리나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모스코바로 찾아 오는데, 키티는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로, 모스코바 사교계에 처음 등장해서 만난 무관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와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스티바와 돌리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흥을 좋아하는 스티바는 친화성이 좋은 탓에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빈과 브론스키라고 하는 주요 등장인물이 스티바를 축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레빈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크게 상처를 입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키티와 그 부모는 돌리와 가족관계에 있어 주요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1권에서는 레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당장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여 레빈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데, 키티 역시 언니 돌리와 형부 스티바의 갈등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모스코바에 도착한 안나와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작가들은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순간 사랑의 불꽃이 튀는 운명적 사랑을 한다고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편입니다. 어떻든 정부 고위직에 있는 20살이나 연상인 남편과 아들이 있는 안나가 싱글인 군인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키티와 교제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운명이긴 한 것 같습니다.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안나의 뒤를 따라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브론스키는 안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결국은 안나는 임신하기에 이르고...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의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게다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통에 책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3인칭으로 진행되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3인칭으로 서술하는 시각의 위치가 변화무쌍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다가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미시적 시각으로 견지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특징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기법입니다.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독자들이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어 등장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안나가 일찍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그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빠져든 생각ㅇ르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리고, 브론스키를 떠올리고,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을 떠올리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떠올렸다.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 불현듯 원인 모를 기쁨에 사로 잡혀 자칫 웃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줄감개에 조인 현처럼 점점 더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223쪽)”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에 저자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비벼 넣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빈에게서 톨스토이의 냄새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소로우가 <월든>에서 작가들에게 당부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서술하라는 당부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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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 불멸의 고전 <월든>에서 배우는 충만한 인생의 조건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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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읽고 난 다음 리뷰를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복잡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사는 꿈을 회샹하면 쓸 이야기가 샘솟듯 할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긴 리뷰를 써냈지만 내용은 마음에 썩 들지 않아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평소 이런 저런 글을 써오고 있는 탓인지 제가 살아온 인생을 정리해보아야 겠다는 꿈을 언젠가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월든>을 읽고서 그 생각이 조금 분명해졌는데, 김선미 작가님의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을 읽으면서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 작가가 소로우의 다음 글에 시선을 붙들린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다른 모든 저자들에게도 남의 생활에 대하여 주워들은 이야기만을 하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소로우, 월든 ‘생활의 경제학’ 10쪽)”

 

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출생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스무살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콩코드에서 교사로 일하다 스물하나에 진보적인 학교를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스물여덟이 되던 1845년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월든 호수가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기록한 생각들을 서른 일곱 살에 출간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은 저자가 소로우와 같은 나이에 서울을 떠나 경기도 광주의 끄트머리 야트막한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짓고 남편과 젖먹이를 포함해 어린 딸 둘과 함께하는 10년의 전원생활을 보내면서 얻은 생각들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거르고 걸러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월든>을 읽는 동안 계속 밑줄을 긋게 된 여러 구절들 가운데 뽑은 서른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낸 것이니 소로우가 말한 대로 ‘남에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셈입니다.

 

‘탐하지 않는 삶’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욕심이 전혀 없었을까?’ 되묻고 있는 저자는 정말 탐을 내야 할 것은 월든 호수와 숲보다 소로우의 생활이었을 터인데 자신은 숲과 월든이라는 허상만 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자가 자신의 월든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던 시기, 우리나라가 IMF파동으로 휩쓸리기 직전에 저는 오히려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 그것도 대치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전혀 반대의 선택을 한 셈입니다. 언젠가 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그 결과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들의 월든 호수가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고 했습니다만 월든숲에서 하루를 온전하게 보낼 수 있었던 소로우와는 달리 부부가 모두 하루에 네 시간을 들여 서울로 출퇴근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무늬만 월든이었을 뿐 오히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첫 꼭지에 등장하는 이웃집 여자(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가의 호칭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가 오히려 월든방식의 삶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보입니다.

 

직업병이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산업화된 현대축산업이 남긴 재앙을 설명없이 광우병공포와 연결시킨 것도 의아스러울 뿐 아니라,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 겨울, 숲으로 들어가 나무그루터기의 나이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렸고 끝내 폐결핵으로 악화되었다.(26쪽)”는 작가의 설명은 의학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독감은 바이러스가 원인이 되고 폐결핵은 결핵균이 원인이니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넘이가 먼저 보이는 쪽 마을(95쪽)’이라는 설명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쪽 마을은 해가 먼저 뜬다면 서쪽 마을은 해넘이를 늦게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도 작가들 가족이 찾아오는 사람보다 산새나 고라니, 산토끼 같은 방문객들이 더 많은 골짜기에서 칠흑같은 어둠과 함께 지낸 월든 세계는 티없이 자라는 어린 두 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월든을 만들어낸 작가님의 용감함에 박수를 보내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저의 월든을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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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 - 스캇 펙 박사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메시지
M. 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 율리시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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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달리 해서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스캇 펙의 <이젠, 북을 수 있게 해줘>는 <Denial of the soul>을 원제로 하여 1997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1년에 민윤기님의 번역으로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이란 제목으로 김영사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불과 6년 전에 읽은 책인데 번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저의 책읽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제목이 달라진 책을 샀다가 다른 책으로 바꾼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이 책은 안락사와 자살 같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지 않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안락사의 문제는 벌써 15년도 전의 생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안락사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책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리뷰 역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습니다.

 

먼저 저자는 자살은 물론 자비로운 살인이라고 미화되는 의사조력자살, 나아가 적극적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1950년 14살의 나이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이 웬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장 ‘플러그를 뽑다’에서는 젊은날 그는 아직은 뇌사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다른 의사의 견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명유지장치를 꺼서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저자가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해결 불가능한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안락사라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이미 유용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의 개선을 지칭할 뿐이다.(89쪽)”라고 적고 있어 안락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38년에 설립된 미국 안락사협회에서 안락사를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끝낼 목적으로 통증 없는 수단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정의한 것이 ‘지극히 부적절한 정의’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안락사는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 고유한 생존적, 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도움 없이 자살하는 행위다.(173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내가 내 삶의 창조자니까. 나는 자 자신을 파괴할 권리도 있다.”고 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매우 교만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2부는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고 기르시는 고유하며 발전적인 영원한 인간 정신이다.(196쪽)”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에 대한 깊은 믿음은 저자가 쓴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7702>에서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심지어 죽음이 배움과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논하는 가운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죽음의)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는 결국 영혼의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이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인간의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225쪽)”라는 저자의 주장은 ‘안락사는 신으로 향하는 길을 단절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속이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우리 자신을 속인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안락사를 재생산하는 것, 적어도 불필요하게 적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락사 대신에 집에서 호스피스의 간호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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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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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해리스 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를 통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 의지란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행동을 상상하고, 그 행동들을 선택한 자기 나름의 논리를 심사숙고하며, 이러한 심사숙고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모순된 욕망들에 직면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역량의 집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53쪽). 이와 같은 자유 의지의 관념은 “1.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2.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13쪽)”라는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데, 저자는 이 두 가지 가정 역시 틀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저자가 인용하는 과학적 데이터는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는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신호를 내보내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 신경세포가 내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면 인간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의식적 주인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유 의지는 저자가 이 책에서 연결하여 논하고 있는 것처럼 도덕, 법률, 정치, 종교, 공공정책은 물론 사적인 관계, 죄책감 등 우리의 모든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 책임의 한계를 규정하는 사법적 판단을 함에 있어 자유 의지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다섯 건의 살인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모두 젊은 여성인데,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장전된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 놀다고 오발하는 바람에 젊은 여성이 사망한 경우, 학대를 받고 있는 열두 살짜리 사내애가 자신을 괴롭히는 젊은 여성을 총으로 쏘아 죽인 경우, 유년기에 학대를 받았던 젊은이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젊은 여성을 쏘아 죽인 경우,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한 젊은이가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을 쏘아죽인 경우,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한 젊은이가 별다른 이유없이 젊은 여성을 쏘아 죽였는데, 그 청년의 뇌의 전두엽에 종양이 발견된 경우 등입니다. 개별 사례를 동일한 무게로 판단하여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해자의 자유의지의 여부에 따라서 책임의 정도를 달리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자유 의지의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이들 모두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저자는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 중 하나는, 우리가 대개 처벌로 억제할 수 있을 만한 행동에 한해서만 사람들이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도저히 통제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73쪽)”고 적고 있는 점을 참고할 만 합니다.

 

결론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자유 의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대단한 미스터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81쪽)”라고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이른바 사회적 정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거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니힐리즘과 절망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믿을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 역시 자신의 환자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그것은 하워드의 뇌에서 비자발적인 화학물질의 변화가 일어난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었다.(스캇 펙 지음, 이제 죽을 수 있게 해줘, 122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 역시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신경세포가 활동을 하더라는 뇌신경생리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저자가 ‘자유 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에 대하여 다소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뇌과학이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 아직도 무한하다고 보기 때문에 뇌신경세포의 네트워크를 돌아서 우리가 인식하기까지의 시간은 특정 영역의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는 시간보다 늦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00쪽 정도의 짧은 책입니다만, 어떻든 인간의 자유 의지의 존재에 대한 좋은 가설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접근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나와서 좋은 토론의 장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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