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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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까지 최근 고전명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를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영화화 된 명작들을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물론 원작까지 읽게 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우연히 원작을 읽고서 <레 미제라블>을 관람하게 되면서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이름은 익숙하지만 원작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까닭에 개츠비씨가 왜 위대한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話者) 닉 캐러웨이가 자신의 옆집, 무려 160제곱미터나 되는 잔디밭과 정원이 달린 대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과 비교될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요즘 우리네 안방극장에서 만나는 드라마의 줄거리보다 간단하달 수도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 닉 캐러웨이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먼 친척 여동생 데이지와 대학동창인 남편 톰 뷰캐넌을 뉴욕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뉴욕 맨하탄의 동쪽에 있는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지역에 각각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지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사랑했던 제이 개츠비와 헤어지고 톰과 결혼을 한 것이었고,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는 돈을 모은 다음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웨그의 집이 건너다보이는 웨스트에그에 대저택을 사고 데이지와의 재결합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막상 두 사람을 다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하게 되고, 데이지 이외에도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복잡한 톰은 막상 데이지가 게츠비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들자 맹렬한 질투를 보입니다.

 

부모의 반대로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데이지와 개츠비는 옛사랑을 다시 이어가려 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이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톰이 비밀스럽게 만나던 머틀의 남편 조지 윌슨이 아내의 외도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투는 과정에서 집을 뛰쳐나간 머틀이 집으로 향하던 데이지와 개츠비가 탄 차에 치여 즉사를 한 것인데, 사고를 낸 차가 톰의 차인 것을 알고 있는 조지가 톰을 찾아가 추궁을 하게 되고, 톰은 개츠비가 운전을 했다고 알려주게 됩니다. 조지는 개츠비가 머틀의 남자이며 고의로 머틀을 죽인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개츠비의 집을 찾아가 총으로 쏘고 자살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미국 사회의 모습, 무너진 도덕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개츠비가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의 불법성, 닉 캐러웨이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의 도덕불감증 등인데, 주요들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둘러싼 풍경, 청교도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미국의 동부지역이 변한 모습을 개츠비가 주말마다 여는 파티에서 쏟아져 나온 과일 껍질들, 조지의 정비소 근처에 있는 쓰레기 계곡, 그리고 근처에 서 있는 광고탑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만나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가 5년 뒤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첫사랑을 다시 찾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당신 집의 부두 끝에는 항상 밤새도록 초록빛 불이 켜져 있더군요.(135쪽)”라고 고백한다거나, “난 모든 것을 옛날과 꼭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159쪽)”라고 의지를 보이는 개츠비는 요즘으로 치면 스토커로 분류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츠비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작가는 개츠비의 죽음을 대하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안타까운 캐러웨이의 눈을 통하여 개츠비가 꿈꾸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고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김욱동교수님이 옮긴 민음사판 <위대한 개츠비>는 2003년 처음 번역한 것을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게 2010년에 다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읽는 느낌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면 개봉하는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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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귀환 - 희망을 부르면, 희망은 내게 온다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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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한 것에 분노한 제우스신은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내렸을 뿐 아니라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성 판도라를 내려 보내게 됩니다. 판도라에게 제우스는 생명을 주었고, 아테네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헤르메스는 거짓을 말하는 혀를 주었다고 합니다. 제우스는 생명에 더하여 호기심을 더 얹어주었다고 합니다. 한편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게 된 판도라는 결국 날로 커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상자를 열게 되고, 상자에서는 제우스가 넣어둔 온갖 불행의 씨앗들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상자를 열자 쏟아져 나오는 불행의 씨앗들에 놀란 판도라가 엉겁결에 상자를 도로 닫았을 때는 오직 희망만이 상자 안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온갖 불행의 씨앗들이 때문에 인간 세상에 불행이 퍼지게 되었지만 상자 안에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마음에 희망이 남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세상에 나왔어야 할 희망이 상자에 갇히고 말아 인간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무지개 원리>로 우리와 친숙해진 차동엽신부님은 근래 우리의 마음의 지형이 심란하기 짝이 없고 예외 없이 거의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20~30세대는 너무 일찍 비정한 경쟁사회의 ‘쓴맛’을 알아버렸고, 40세대는 제대로 용 한번 써보기도 전에 ‘피로 및 노쇠’증후군에 시달리고 있고, 50~60세대는 떠밀리듯 인생 메이저리그와의 결별 고민에 불쑥불쑥 ‘황망’에 빠지곤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틀림없다.(19쪽)”고 적고, 절망의 환청을 견디다 못해 악몽을 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힐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신부님은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는 답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혀버린 희망을 우리 곁으로 불러주려 하신 것이 바로 <희망의 귀환>입니다.

 

신부님의 작품은 처음 읽었습니다만, 젊은이로부터 나이 지긋한 사람들 모두에게 쉽게 읽히는 평이한 글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시에서, 때로는 책에서, 심지어는 동서양의 속담에서 뽑아낸 글귀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숨어 있는 희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접하여 포옹하기를 청하고, 불끈 도약하는 희망과 함께 춤을 추고, 즐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잠시 어려운 점은 은근과 끈기로 맞서 이기고 심기일전하여 희망을 키워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추겨 희망을 가지도록 하려는 마음이 간곡해서였을까요? “멀쑥하게 불편 없이 잘 자란 사람들은 신의 눈에는 별로다. 고통과 역경을 이겨낸 이들, 그 한가운데를 헤쳐 나간 이들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159쪽)”라는 저자의 질문에 공연히 삐딱한 답을 달아두고 싶습니다. 온갖 조건을 갖추어서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도 모든 것을 가졌다는 생각이 부담스러워 공연히 방황하지 말고 신이 그런 것들과 함께 준 과제를 마치기 위하여 신명을 바쳐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매 장의 끝에 붙인 <괜찮다 괜찮다>는 일종의 Q&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장의 말미에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괴롭힌다 극복할 길은?’이라는 제목의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도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제안에서 제 나름대로 건져 올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의 단계적 전이보다는 ‘공연히 남의 밭, 남의 들판을 기웃거리지 말고,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여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라는 것(35쪽), 그리고 누구의 인생도 카피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멘토가 되라(216쪽)’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운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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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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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뉴스매체들은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선 부근에서 폭발물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하면 1947년, 막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참석한 서윤복선수가 1위로 골인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1위부터 3위를 독식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경기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못했지만, 지난 해 마침 보스턴마라톤 결승점이 위치한 보일스톤 거리 근처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덕분에 역사적 현장에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남달랐고, 휴일 보일스톤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행렬을 지켜보면서 보스턴시민들의 뜨거운 마라톤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테러의 주체가 오리무중에 싸인 채 미해결사건으로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전자시대를 맞아 수사정보의 원천이 다양해진 덕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수사협조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러시아의 체첸에서 이주해온 형제인데 체포과정에서 형은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동생 역시 총상을 입은 상태라 범행동기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격단체가 개입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혹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리적인 불안감 등이 범행의 원인(遠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부 국가에서 구성원들의 불확실한 삶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인적 유동성이 증가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을 생각합니다. (모두스 비벤디;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12980). 바우만은 최근 들어 국가 간의 거리가 좁아지고, 구성원들의 유대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집단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역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일상의 인문학>의 서문에서 장석주님은 이처럼 불안과 공포와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야말로 위험한 사회가 아니겠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다. 또는 사냥꾼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한다.(모두스 비벤디, 160쪽)”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세상은 사냥꾼들의 정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냥꾼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짚었다면 해답도 찾았을 터. 장석주님이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책으로 천년을 사는 법)’는 구절을 인용하여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일상의 인문학, 7쪽)”고 하였습니다. 자신 역시 책읽기와 더불어 사유의 싹이 트고 풍성하게 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당장 밥이 나오는 것을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삶을 살찌우고 풍요하게 만드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해주려는 말씀입니다.

 

앞서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이 문학, 역사, 철학을 묶는 인문학 분야의 책을 어떻게 읽어 삶의 본질을 찾아들어갈 것인가를 안내하는 안내서였다고 한다면, 오늘 소개하는 장석주교수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게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주제의 중심이 되는 책과 함께 관련이 있는 몇 권의 책을 읽어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적 책읽기의 심화과정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일상’이란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를 줄인 말입니다. 즉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하루가 쌓여가는 일상이기에, “흔하고 하찮은 것, 더러는 의미를 머금지 못한 채 날것의 덧없음으로 뒹구는 그 무엇이다.”라는 저자의 정의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속에서 남들과 다른 무엇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생명의 기하학이 역동한다.(8쪽)” 하루하루의 의미가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까? 삶의 기본단위가 되는 일상이 없다면 당연히 삶도 없을 것이며 존재의 의미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50개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책을 꼬투리로 펼치고 있습니다. 자연히 특정한 책의 리뷰가 아니라 특정 주제에 관련된 책에서 건져낸 화두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자가 주제를 이끌어내는 쉰한 권이나 되는 책들 가운데 김훈의 <칼의 노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만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화두 ‘기다린다는 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학시절 연극부 활동을 할 때 몇 차례 공연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 늘 오늘의 괴로움이 끝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13쪽)”고 적어 기다림을 인간이 타고난 숙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있는 시골길 위를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고받는 의미없는 대사를 끌어왔을 것입니다.

 

저자와 겹치는 책읽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4741>에서 저자가 추출해낸 사유는 같은 책을 읽고 제가 느낀 점과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고생을 사서하는 여행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보통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다.(140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간단하게 적거나, 책내용을 요약하여 전하는 수준의 리뷰에 머물고 있는 저와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문학공부의 심화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책읽기는 궁극적으로 글쓰기로 이어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읽기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에세이는 제가 가야할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을 인용한 서평쓰기에 대한 에세이에 주목하게 됩니다.

 

다양한 방식의 서평쓰기가 있습니다. 서평을 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과거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서점을 찾아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살펴 책을 고르곤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서평이나 인터넷 리뷰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책을 고르게 되면서 누군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고르게 됩니다.

 

저자는 월터 카우프만의 책에서 “서평은 정치다.”라는 문장에 꽂혔다고 합니다. 이유는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108쪽)”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109쪽)”고 잘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서평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가혹하다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 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가 훨씬 더 즐겁다는 고백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면 작가로서 저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임이 분명합니다. 저의 책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을 읽으면서 작가의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된 리뷰를 적었다고 생각한 저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사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판단하기에 오류투성이의 내용을 담은 책이란 생각에 정치적(?)으로 톤을 상당히 낮춘 서평을 쓴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서평에 대하여 해당출판사가 서평을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경우도 있었고, 작가 자신이 서평을 올린 저의 블로그에 스토커 수준으로 덧글을 달면서 비난하던 경험도 있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복적 사유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살피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삶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서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열광적인 독서광이었던 발터 벤야민은 문학․정치․영화․미술․철학 어느 하나에 고착하지 않고 그것들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중심에서 현대성의 의미를 건져 올렸는데, 예를 들면 철학과 시를 뒤섞고, 정치와 형이상학, 신학과 유물론이라는 재료를 비벼 독자적인 사유세계를 펼쳐냈다는 것입니다.(238쪽) 하지만 그의 글들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가운데 1940년 불과 48세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철학적 사유들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때이른 죽음으로 파리에 대한, 파리를 위한 철학적 대기획은 미완으로 그치고, 남은 것은 지식 유목민의, 변화하는 20세기 사회와 문화 지형에 대한 사유의 균열과 협로, 포식의 흔적들뿐이다.(239쪽)“고 적어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의과대학시절 면역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던, 의학에 대한 저의 꿈은 지극히 한국적인 장애를 만나 병원병리학으로 궤도수정을 하고, 신경병리학, 특히 퇴행성 뇌질환으로 좁혔던 관심은 너무 일렀던 탓에 기획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고 접어야 했으며, 대안으로 시작했던 독성병리학 역시 아직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우리나라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지금까지의 제 삶은 의학의 노마드로 살아온 셈이라고 자위해야 할까요?

 

노마드(nomad)는 ‘유목민’ 혹은 ‘유랑자’로 번역되는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노마디즘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라는 부제처럼 인문학공부를 심화학습하는 과정의 책으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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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모먼트 - 행운과 능력이 교차하는 결정적 순간의 힘
프란스 요한슨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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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최근에 화제가 된 깜짝 스타는 단연 싸이가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기획사의 치밀한 전략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유튜브를 매개로한 홍보전략이 맞아떨어져서 월드 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싸이의 성공이 우연이라는 행운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의 음악적 재능과 부단한 노력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스 요한슨의 <클릭 모먼트>는 바로 그런 우연을 붙들어 성공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성공은 우연히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포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분명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포괄적인 사항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이렇듯 자신을 우연히 찾아온 행운을 알아채고 이것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경우 <아웃 라이어>에서 “어떤 일에서건 성공의 열쇠란 대체로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1만 시간 동안 기울인 연습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재능보다도 부단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클릭 모먼트>을 읽는 독자들에게 우연히 찾아온 행운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즉 1부에서는 세상이 왜 예측불가능한지에 대하여 검토하고, 이어서 2부에서는 우리가 사는 인생에 우연이라는 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연을 포착하기 위하여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클릭 모먼트, 즉 예상치는 못하였지만 시의 적절하게 상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둘째는 의도적인 모험,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면서도 여전히 시도하는 행동, 마지막은 복합력인데 이는 예기치도 않고 미리 예측하지도 않았음에도 성공으로 이어지는 행동결과를 말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클릭 모먼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사나 조직이 지나온 길을 돌이켜본다면 특정한 순간과 특정한 만남, 사건, 인상, 통찰력이 다른 것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이런 순간을 ‘클릭 모먼트’라 부른다.(183쪽)” 클릭 모먼트를 창조하는, 즉 우연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늘어놓기에는 다소 장황해질 것 같아 생략합니다만, 1.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려라, 2. 교차적 사고를 이용하라, 3. 호기심을 따르라, 4. 예측 가능한 경로를 거부하라. 등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의도적 모험을 성공시키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으로는 1. 모험의 횟수를 늘려라, 2. 모험의 규모를 최소화하라, 3. 실행가능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라, 4. 감당한 수 있는 손실을 계산하라, 5. 열정을 연료로 활용하라, 등입니다. 그리고 복합력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1. 의도하지 않은 결과, 2. 폭포효과, 3. 자기 강화 순환고리가 있습니다. 마지막 요약이 될 것 같습니다만, 복합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는 1. 강력한 견인력을 만들어라, 2. 뜻밖의 사건을 세밀히 살펴라, 3. 호기를 노려라, 4. 복합력의 추진력과 강도를 감지하라, 5. 더블 다운하라, 등입니다.

 

어제 회의에서 통계수치를 바탕으로 연산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 처리방식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적절한 예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했는데, 바로 그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1961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는 훗날 ‘카오스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날씨의 패턴을 예측하는 기상관측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일한 숫자와 동일한 데이터, 동일한 정보를 입력해서 두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그 각각의 결과가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바로 두 번째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소수점 세 자리만 입력하면서 사사오입이 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331쪽) 바로 나비효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복잡한 계산식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초기에 생긴 미미한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는 조금 더 큰 변화로 이어지고 여러 차례의 계산과정이 이어진 최종결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계작업을 할 때는 일정한 규정에 따라서 처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핵심사항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1.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무서운 속도로 변한다는 것, 2. 사람들이 인생에 우연을 끌어들이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망설인다는 점, 3. 사건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펼쳐지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행운의 순간을 멀거니 바라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낚아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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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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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을 읽으면서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스24 메인에서 프루스트에 관한 도서를 검색했을 때 저의 눈길을 끈 책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주목받던 작가와 작품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이 쓰신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작가들을 활동 시기에 따라 소개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가, 작가, 음악가, 건축가 등 예술가 100여 명의 작품 200여 점을 인용하고 있는데, 유예진교수님은 그 가운데 허구의 인물인 베르고트를 포함하여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다양한 시기에 활동한 소설가,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 열 명을 골랐습니다. 이들은 프루스트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며, 그러한 영향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녹아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존했던 작가들과 그들의 문학 작품들이 프루스트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과 스토리와 엮여있어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17세기 작가인 세비녜 부인과 라신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상드,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말라르메를 그리고 20세기 작가로는 지드와 바르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사후에 활동했던 바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문인들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유예진교수님은 이들 문인들의 글과 사상,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이들이 주고받은 서간까지 인용하여, 문학 작품에 얽힌 일화, 당시 시대 상황이나 사건, 소설 밖에서의 프루스트의 삶을 알게 해 주는 전기적 내용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부록으로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세비녜 부인의 편지, 공쿠르 형제의 일기, 상드와 플로베르, 프루스트와 지드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들 자료는 프루스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것 들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작자가 인용한 외국의 문헌목록을 덧붙이고 있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내용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점과 차이가 있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라신의 작품 <페드르>가 미친 영향에 관하여 ‘사라진 알베르틴’편을 인용하여 질베르트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소유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미리 한 걸음 물러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질베르트 역시 마르셀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꽃피는 아가씨 그늘에(1)’에서는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다가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 사랑하는 마음을 접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질베르트는 확실히 외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질베르트가 있었다. 그 부모의 두 성질은 단지 그녀의 몸 안에 섞여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성질은 서로 다퉈 그녀를 빼앗고 있었다.(200쪽)”라고 적어, 마치 현대 정신의학에서 해리성장애로 정리되는 성격의 단면을 드러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5068).

 

작가가 맨 마지막 등장인물로 프루스트 사망당시 일곱 살이었던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텍스트의 기쁨>에서 “프루스트는 나를 찾아온다.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라고 할만틈 프루스트를 경외한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바르트식 프루스트 읽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밖에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인들의 작품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구체적인 구절까지 인용하고 있어,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의 작품을 읽고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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