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콘서트
홍승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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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어사전에는 철학에 대하여 두 가지 설명을 붙였습니다. 먼저 두 번째 것을 보면, ‘자기 자신의 경험 등에서 얻어진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라 했으니 일반화할 수는 없더라도 개인에게는 중요한 삶의 줄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의 첫 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 원래 진리 인식(眞理認識)의 학문 일반을 가리켰으나, 중세에는 종교가, 근세에는 과학이 독립하였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의 하위 부문이 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설명을 일반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삶의 줄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 ‘철학’하면 서양의 학문인 것처럼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고유의 철학을 일반에 널리 알려 소개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이 부족한 반면 해방후 교육제도에 서양의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서양철학이 어느 사이 주류학문으로 자리 잡게 된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 철학 콘서트>의 저자 홍승기님이 책서문에서 “서양 철학에서 쓰이는 정신이나 물질 같은 용어는 뭔가 손에 잡히는 느낌, 그래서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한국 철학의 이(理) 나 기(氣) 등은 그 뜻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일 같다는 막연한 생각과 특히 조선 후반에 우리 사회를 병들게 했던 당쟁의 빌미가 되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부정적인 생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홍승기님은 우리나라에도 엄연히 철학이 있어왔고, 그것은 서양 철학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현실과 세상사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이 무엇인지 공부를 시작한 입장에서는 전체의 줄거리를 관통하여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홍승기님의 <한국 철학 콘서트>는 좋은 텍스트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한국철학의 새벽을 열었다고 평가한 원효대사로부터 참된 믿음으로 시대의 양심을 피워 냈다고 평가한 함석헌목사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이름을 알만한 스물한분의 사상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 <한국 철학 콘서트>라고 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임성주와 최한기는 제가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 저자께서 정리한 내용을 읽으면서 이분들이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근대 이후의 인물들 가운데는 선정하신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선정된 인물의 성장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사상의 줄거리를 요약소개한 다음에 글의 말미에는 사상의 핵심이 되는 저술의 일부를 붙여서 독자들이 생각해볼 여유를 만들어주고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 실린 분들의 사상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제의 생각을 새롭게 한 몇 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먼저 이규보(1168-1241)가 쓴 <문조물(問造物)>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은 원인을 알 수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 하늘도 알지 못하고 조물주인 나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나지 하늘이 내지 않는다. 곡식과 뽕나무, 삼나무도 자기 스스로 생겨났다.(61쪽)”서양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던 시절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은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 변화한다.”는 이규보의 물자생자화(物自生自化)의 철학은 고려초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하나다. 마음의 수양을 잘 하면 살아가는 동안에도 부처의 세계에 살고, 죽어서도 불교의 천당인 극락세계에 간다.’는 의천의 마음을 중요시 하는 철학으로부터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철학사상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근대서양과학이 증명한 우주의 시원과 생물의 진화 등에 관한 기본원리에 해당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理)와 기(氣)의 근본을 두고 유학자들 간의 논쟁의 꼬투리를 만들어낸 서경덕과 이황의 사상은 그렇다고 쳐도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완성하였다는 최한기의 인식론적 사유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한기가 쓴 <기측체위>의 서문입니다. “기(氣)는 진실한 이(理)의 근본이고, 츠측은 앎을 넗히는 요체이다. 이 기에 근거하지 않으면 탐구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고 괴이한 이가 된다. 추측을 통하지 않으며 앎의 근거가 없어져 증명하지 못할 말이 될 뿐이다.(419쪽)” 서양의 인식론과 비교하여 당당하다는 생각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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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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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입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사는 정읍으로 놀러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이서 내장사에 올라갔는데, 내장사 못미처에 있는 폭포를 구경하다가 백양사를 먼저 보기로 한 것입니다. 당연히 백양사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갔어야 하는데, 폭포 옆 절벽을 따라 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가기로 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며, 정읍친구도 그길로 백양사에 가본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절벽 위로 올라서 내장사로 가는 계곡을 굽어보면서 산등성이를 타고 걷기 시작했지만, 이내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양을 방향삼아 산꾼이 다닌듯한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해 걷다가 냇물을 발견하고서는 냇물을 따라 걸어 내려갔습니다. 하루 온종일을 걸어 내려간 끝에 인가를 만나고 결국은 백양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한참을 기운 다음이었습니다. 장성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가 기차로 정읍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아마 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지른 황당사건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저질러봐야 생각지 못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카트린 파시히와 알렉스 숄츠가 같이 쓴 <여행의 기술>입니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 책을 쓴 의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잃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길을 잃은 상황을 스스로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다는 것입니다. 실수로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어지면 의도적으로 길을 잃는 것이 흥미로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길을 잃는 것이 시간을 절약해준다거나, 훨씬 경제적이라거나, 휴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거나와 같은 저자들의 주장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봐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의 내용을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어가다 보면 저자들의 의도가 읽히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책을 여행기로 채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초보자가 길을 잃었을 때 어떤 정신 상태를 갖고자 노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195쪽)”고 적은 부분입니다. 그런 방법들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은 “자연과 합일이 되고 패닉에 빠지지 않는 한, 자연은 너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128쪽)”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잃었을 때에는 보수적으로 행동하기, 걱정하기, 일찍 되돌아가기와 같은 것들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괴테가 1829년에 쓴 <이탈리아 여행>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작은 시냇물에서 시작해서 이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강의 지류에 속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지역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연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산과 계곡은 그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132쪽)” 앞서 내장산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저의 경험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제가 콜로라도 국립공원을 따라 운전할 때 황당했던 경우가 이해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옛날 통상로를 만들기 위해 길 방향을 정할 때, 발이 젖지 않을 것, 짐마차의 바퀴가 진흙에 빠지지 않을 것 등이 중요 조건이었다. 이런 길들은 보통 건조한 산등성이를 따라 나거나, 비탈과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다. 강을 건너지 않고는 길을 계속 갈 수 없는 상황이거나 목적지가 근처에 있을 때 길은 계곡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133쪽)”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가 만났던 황당한 경우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들이 이 책에 숨겨둔 비밀이 있습니다. 나오는 글에 적어 둔 삶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입니다. “어쩌다가 길을 잃었을 때, 가끔 한 지역을 비껴가는 대신 훨씬 재미있는 다른 지역에 도착하는 것처럼, 학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질문에 대답하는 도중에 뭔가 새로운 다른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249쪽)”는 구절이 바로 힌트입니다. 그러면서도 길잃기는 제대로 된 생존방식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제의 주변환경과 환경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해야만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찾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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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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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신문에서는 과학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1995년에 처음 번역 소개된 리처드 도킨스의 1976년 작 <이기적 유전자>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5298). 저도 최근에 읽었으니 이런 경향에 일조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고 적지 않게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출간하고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책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2판을 내면서 달아둔 보주를 통해서 제기된 비판과 초판 이후의 학문적 성과 등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도킨스교수가 제안한, 문화도 모방되고 복제되어 전파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을 담은 단어, 밈(meme)이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입니다.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등을 밈의 예라고 한다면,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년, 323쪽)”는 도킨스교수의 설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물이란 단지 ‘자기복제자’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도킨스교수의 주장에서는 생기로 넘치는 생물체를 피동적인 기계에 비유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지나친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런 느낌이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한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를 통하여 매트 리들리의 특유의 논리적 글쓰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를 읽고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리뷰를 남겼습니다. “비관주의자들은 인류가 경제성장이라는 어리석은 목표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후퇴하라는 거짓 경보에 속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스스로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과업을 계속할 것이다. 간혹 후퇴하는 일도 있겠고, 설사 각 개인은 진화를 통해 획득한 불변의 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21세기는 살기에 아주 근사한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거리낌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자.’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The Origins of Virtue’라는 원저의 제목을 <이타적 유전자>로 바꾼 것은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에서 힌트를 얻었거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인기를 고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킨스교수 역시 <이기적 유전자>의 제 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에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집단선택설에 근거하여 개체의 이타적 희생도 알고 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기주의적 개체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개체가 잘 살아남게 된다는 설명에 더하여 이기주의적 개체만으로 구성된 생물계를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타주의적 개체들과 규형을 맞추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리들리는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철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도소를 탈주하는 장면으로 프롤로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체와 개체 간의 투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동인(動因)은 아니며, 개체 사이의 상호부조(相互扶助) 추구도 역시 진화의 동인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근간으로 인간의 본성, 특히 경이로울 정도로 사회적인 본성에 관한 내용을 담으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근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쌓아올린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가 이 책의 전체를 요약하는 총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킨스교수가 정리한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1960년대 중반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이 주도한 생물학계의 혁명적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개체의 행동을 결정하는 일관된 기준은 그 소속 집단이나 가족의 이익이 아니며, 그 개체 자신의 이익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어떤 개체이든 그 선조들의 행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30쪽)”라는 내용이 혁명의 골자였던 것입니다.

 

저자나 도킨스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개미와 꿀벌집단의 협동체계는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목표, 즉 공동선과 조화를 지향하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군체(群體)를 생물체와 비교하여 개체 하나하나를 유전자라고 본다면 개체가 모인 군체는 유전자들이 모여 만든 염색체가 되어 생물체 전체를 이루게 만든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현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인용했다는 인체 기관들에 관한 우화에서,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기관들이 서로 협동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는 것처럼 유전자 역시 서로 협동하는 것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시지구에서 처음 등장했던 유전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하여 복합생물체로 진화해온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하여 상호협동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만, 이런 돌연변이를 제어할 수 있는 대응체계가 발동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명체의 오묘함이라 하겠습니다. 간혹 암과 같은 이기적 돌연변이 유전자가 이런 대응체계의 감시를 벗어나기도 하는데, 개체의 사망이라는 파국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기적 돌연변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리들리는 노동의 분업화를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집단 간의 협동체계로 흡혈박쥐들이 사냥해온 피를 서로 나누는 사례들을 인용하여 이타적 행위가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하는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이타주의에 관한 가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보다 뛰어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호혜주의를 구사하여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특별한 재능입니다(185쪽). 인간의 호혜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감정(感情)인데 감정은 이타주의가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호혜주의에서 한걸음 발전한 이론이 헌신성 모델입니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도덕감정론>에서 제안한 헌신성 모델에서는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 계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래의 비용을 현재의 시점으로 앞당겨 도입함으로써 호혜주의에서 기대하는 이타적 행동에 대한 이기적 반대급부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한 프랭크의 헌신성모델에 대한 설명부분입니다. “헌신성 모델의 정직한 인간은 신뢰성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뢰성에 대해 물질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가는 그의 관심 밖이다. 행동이 감시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신뢰성은 그것이 상대에게 인식될 수만 있다면, 인식되지 못할 경우에는 불가능한 매우 소중한 기회를 창출한다.(193쪽)” 눈앞의 이기적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은 우리의 도덕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장래에 기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기적 측면을 강조해온 지금까지의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셈입니다.

 

리들리는 개체의 헌신성 모델로 이타성을 설명하면서 집단의 폭력성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장류인 침팬지와 인간이 집단의 협동을 통하여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죽고 죽이는 폭력까지도 일어난다는 것인데, 특히 침팬지와 달리 인간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무리밖에 홀로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주된 것입니다. 저자는 집단을 형성하지만 폐쇄성이 없는 암컷 코끼리 사회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집단의 폭력성은 부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집단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며 폐쇄적으로 살아온 유인원의 진화적 유산으로, 특히 종교적 교리가 거의 예외 없이 집단 내부와 외부의 차별을 강조해온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부족으로 분할된 폭력적 사회에서의 배타적 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인류학자 존 하퉁의 말입니다. “편협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다. 종교는 대부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집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배타적 도덕성은 그것을 잉태시킨 경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267쪽)” 세월이 흐르면서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던 교리를 수정해온 것도 이교도들을 집단 내부로 끌어들여 타 종교와 경쟁에서 비교우위에 서려는 종교집단의 생존전략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교역을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는 집단들 사이에 교역을 매개로 하여 협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는 교역이 이미 석기시대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요크반도의 원주민 이르요론트족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의 분화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 총성없는 교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교역이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홍적세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인디언들의 조상이 짧은 기간에 대형 포유동물의 73%를 살육해 사라지게 했다거나, 근세 들어서도 마다가스카르섬,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대륙 등에서 자행된 살육을 통하여 무수한 생물들이 멸종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을 무절제하게 사용해온 인류의 탐욕 때문이라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생각 자체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근거한 관념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리들리가 이성적인 낙관을 하는 것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실행에 옮길 때라는 금언대로 바로 지금 인류는 종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해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논하기 위하여 인용했던 죄수의 딜레마가 이기성이 인간됨의 원형이라는 결론 대신에 반복적으로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조건에서 실행했을 때, 게임은 늘 선한 시민의 승리로 끝났음을 지적한 저자는 게임이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이기적인 자연착취자들의 행위를 멈출 수 있게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인식에서 자원의 남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공동의 소유인 경우는 서로간의 견제를 통하여, 개인의 소유인 경우는 지속가능한 자원활용을 고려하기 때문에 자원의 보존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저자는 공동소유의 것을 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비극의 주범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타적 유전자>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회성과 협동성과 신뢰성을 지향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성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협동의 방식을 계발하고, 믿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고, 스스로 믿을 만한 사람임을 과시해 좋은 평판을 쌓고, 재화와 정보를 교류함으로써 노동분화를 이루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사회성은 유전자의 명령이다’라는 카피와 ‘<이기적 유전자>의 인간을 위한 제2권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어야 한다.’는 도킨스교수의 추천사가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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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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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싯적에는 물리를 조금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입시험에서도 물리과목이 들어가는 대학에 응시했고, 예과 때도 물리학 시험만큼은 자신있게 치뤘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성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관심을 가지게 된 우주의 생성에 관한 책을 읽으려니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예전에 배운 물리학이 우주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옛날 배운 것을 잊어버린 탓일 것입니다.

 

관심은 있지만 이해가 어려운 우주의 시원에 관하여 궁금한 과학적 사실을 아주 쉬운 말로 풀어준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페리미터이론물리연구소 닐 투록소장이 쓴 <우리 안의 우주>입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이며 스티븐 호킹과 함께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호킹-투록 인스탠탄 솔루션을 개발한 바 있고, 폴 스타인하르트와 함께 순환하는 우주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 안의 우주>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을 이해하고 마음속에 우주를 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14쪽)”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가장 작은 원주구성입자에서부터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아이디어들의 지속적인 원천이 되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래의 세대에 대하여 저자가 거는 기대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출신인 저자가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고, 그런 기대를 기대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도록 아프리카수리과학연구소(AIMS)를 열어 젊은 인재들이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노력을 보면 이 시대의 리더로서 귀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요약한 저자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그리스의 수학자와 과학자들로부터 시작한 물리학이 현대물리학으로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사람들의 업적을 쉽게 이해할 있도록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철학자들과 유클리드, 피타고라스, 히파티아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 등을 그린 라파엘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인용하여 설명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디어들은 천년 이상 잠들어 있다가 15세기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시작한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꽃피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무렵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기술을 종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뉴턴의 역학법칙, 전기와 자기, 빛에 관한 멕스웰의 이론, 윌리엄 톰슨이 정립한 열에 관한 이론 등을 거쳐 20세기 초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등이 기여한 양자역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주가 특이점에서 시작한 거대한 폭발을 통하여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이 확립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우주가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주가 순환한다는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빅뱅이 시작되는 특이점을 한 번 통과할 수 있다면 계속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빅뱅이 무수하게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빅뱅 이후에 우주는 팽창했다가 수축하고, 또 순환할 때마다 우주의 크기는 커지고 점점 더 많은 물질과 복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나는 파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겁의 개념과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이르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바로 우주물리학이 밝혀낸 것들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 우연일까 싶습니다.

 

특히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낙관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마무리 글에서 오랫동안 눈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과학과 인간성을 서로 연결할 때가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쪽 다 시야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지적 능력과 마음을 연결시킬 수 있만 있다면 더 밝은 미래와 더 통합된 과학을 이용한 더 통합된 세상을 향한 문을 활짝 열려 있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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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1
이븐 알렉산더 지음,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버드의대의 부속병원에서 신경외과교수로 근무했던 이븐 알렉산더박사가 7일 동안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담았습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하려는 핵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임사체험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입장입니다.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믿음의 탄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1601>에서 “영혼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독특한 정보패턴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개인 정보 패턴을 존속할 매개체가 없는 한, 영혼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일원론적 관점과 “의식을 가진 천상의 물질이 있어 생명체의 독특한 본질이 죽음 뒤에도 생존한다.”고 믿는 이원론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관점은 천상의 물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한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셔머는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작동한다. 사실 초자연적․초과학적인 것은 없다.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원인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을 뿐이다.(256쪽) (…)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은 과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257쪽)”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박사는 특별한 상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균에 의한 뇌수막염으로 빠르게 의식을 잃고 뇌사상태에 빠져 7일간 생시의 갈림길에서 투병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환하였는데, 그 사이에 자신은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리조차 없이 어둡고 젤리같이 끈적한 물질로 채워진 공간에 갇혀있는 느낌에서 황금색의 빛줄기가 나타나고, 그 빛이 나오는 구멍을 통하여 빠져나온 그는 밝게 빛나는 대지 위를 날아가다가 다시 캄캄하고 무한하게 어두운 빈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창조주이며 만물을 있게 한 근원 - 저자는 이 존재를 옴(Om)이라고 부릅니다 -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들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영혼과 사후세계, 환생, 신, 천상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내가 이런 것들의 사실성을 의심했던 주된 이유는, 내가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단순한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04쪽)”고 하는데, 단지 자신이 임사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정황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임사체험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기간 동안에 저자의 뇌가 어떠한 활동을 보여주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뇌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현재의 뇌과학으로 기록할 수 있는 한계 이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의료진이나 보호자와 전혀 의사교환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던 환자가 아내에게 이제는 포기하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공포에 빠졌는데 다행히 아내가 의료진의 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오랜 투병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아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은 <죽음, 그 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081>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산더박사의 경우는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환자들로부터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임사체험과정에서 느낀 다중우주에 관한 내용들은 아마도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리학 혹은 우주과학에 관한 글을 읽어 기억하고 있던 사항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성주의자인 친구가 있다거나 열심히 나가지는 않았지만 목회자들과의 돈독한 관계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경험했다고 하는 임사체험은 아마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 투병기간 동안에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힘든 투병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비한 임사체험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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