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올 봄에 있었던 부서 워크숍에서 “책은 왜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등에 관한 저의 경험을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94946). 발표를 준비할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저의 독서경험 중심으로 진행하다보니 깊이가 없고 너무 제 자랑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회가 생겼을 때 더 나은 발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독서에 관한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 작가 샤를 린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읽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독서는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위험한 능력이다’, ‘독서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독서는 뇌리에 새기는 문신이다’, 등등의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독서는 □□다”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양한 답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독서를 정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증오의 거품을 무는 천박한 독서’ 등과 같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독서에 관하여 전방위적 정의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 문제는 책이 도구로 전락하면서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0쪽)”라는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만들어진다’가 아니라 ‘만들어져야 한다’로 적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작가보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작가의 일갈에 뜨끔했습니다. 작가가 지적한대로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편견을 굳히려는 생각에서 하는 이기적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혐오스러운 독서에 대한 씁쓸한 추억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틀림없이 맞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책을 읽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dskgdkT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217쪽)‘라고 적은 구절에서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광적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책을 가까이 했던 것,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던 버릇이 지금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글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글쓰기교실에서 만난 김용택시인님께서 많은 독서와 글쓰기가 시인에 이르게 만들더라면서 재능보다는 후천적 노력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4013).

 

옮긴이께서는 “저자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독서가 우리를 구출해줄 구세주’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지도 모른다.(263쪽)”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책읽기는 역시 위대한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과 문학 사이의 줄타기에 대한 글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9.11사건 당시 저널리즘이 보여준 행보가 커다란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테러소식에 즐거워하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의 모습이나 불길을 피해서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추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작가답게 마르셀 프루스트를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의 할머니가 세비네 부인과 도스토엡스키의 닮은 점을 밝혀낸 점이라거나, 노르푸아를 통해서 ‘빅토리아-니안자 호수의 서안에서 무한성과 관련된 작품’에 관한 말을 했다는 점은 라비슈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등등입니다.

 

또 한 가지, 작가가 적성에 맞지 않는 자신의 법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법대는 내게 최고의 학과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라고 했다는 말을 읽고,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예로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와 기호들 들뢰즈의 창 4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해 6월 초순 ‘스완네집 쪽으로’편을 읽기 시작해서 10월 중순 ‘되찾은 시간’편까지 한 여름의 더위와 더불어 자신의 인내심과 겨뤄본다는 느낌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출발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였습니다. 그가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조나 레러 지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148쪽)”는 부분을 인용하고,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끌렸던 것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얻은 자극이 잊고 지내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제 경우는 프랑스의 기타리스트인 클로드 키아리(Claude Ciari)가 연주하는 <안나를 위한 노래(Song for Anna)>를 들을 때마다 대학 시절 친구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친구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첫째 편,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을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50쪽)”고 적어 프루스트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이 더 멀어져 가고 불확실해지기 전에 기억의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잠시 리뷰 읽기를 멈추고 시계바늘을 옛날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의 전체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평소에 겪은 일들을 메모해두거나 소상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다시 저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북소리]에서도 소개드렸던 알랭 드 보통이 쓴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을 읽으면서입니다. 자기계발서로 분류되고 있는 이 책에서 보통은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알랭 드 보통 지음,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15쪽)”라고 요약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을 더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국일미디어판을 다 읽고 난 뒤에 새롭게 번역한 민음사판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도 계기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달린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1784>을 통해서 당시 프루스트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작가들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화가들>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된 책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자 작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저작들을 썼다고 합니다. 들뢰즈에게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니체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모습과 감각, 사건, 정신분열, 영화, 철학 등과 같은 다방면의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는 생성의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 모습이 들뢰즈의 ‘실체’와 ‘양태’로 서로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철학적 분석과 해석의 시각으로 읽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1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한 것을, (…) 2부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하는 측면에서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을 다루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들은 역자서문에서 ‘들뢰즈의 프루스트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내놓고, 먼저 들뢰즈의 대표적 작업을 생의 전반기에 집중했던 사유의 문제와 생의 후반기에 집중했던 욕망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통하여 임의적 사유의 공리로부터 출발한 그리스시대 이래의 서양철학과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 들뢰즈는 (서양의)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개념을 사유하는 반면, 동방의 현자 - 즉, 유대출신의 프루스트는 아마도 형상(figure)을 통하여 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포크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마들렌의 맛 같은 것 속에 감싸여 있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들’ 혹은 내가 머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던 형상들의 도움으로 씌어진 진리들이다. 내 머리 속에서는 종탑, 무성한 잡초 등의 형상이, 복잡하게 잔뜩 엉킨 판독할 수 없는 글씨를 조판하고 있었다(…)(되찾은 시간, III, 878-880)”[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텍스트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판(1954년, 전3권)이라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텍스트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본질은 마들렌과자나 포석(鋪石)을 매개로 하여 콩브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들렌과자나 어머니와 함께 갔던 베니스의 생 마르탱 성당의 추억을 떠올리는 기억의 탐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즉 무의식적 기억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배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와 관련되기 마련인데, 프루스트는 살롱으로 대표되는 사교계를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예술적 기호들 뿐 아니라, 외교, 정치, 사회, 전술, 의학 등 다양한 사회학적 기호들을 이끌어 촘촘히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작업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데트와 스완, 그리고 화자와 알베르틴과의 사랑이야기는 단순히 쾌락과 질투와 같은 고통스러운 면 이외에도 그 안에서 사랑의 기쁨이라는 참된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황에서 드러나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하고, 번역하고 그리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진실 찾기’인데, 이 과정은 기호 자체의 전개와 뒤섞이기 때문에 시간이 관계되며, 진실은 시간의 진실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존재를 변화시키고, 존재했던 것들을 없애버리는, 지나가는 시간일 뿐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는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이 영원성을 갖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헛되어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곧 배움의 본질입니다.

 

들뢰즈는 기호가 사유를 강요한다고 보았습니다. “감각적 기호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혼이 사유를 움직이게 하고 사유에다 감성이 당하는 압박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마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능력들은 초재적인 실행을 하게 된다. 이 실행 속에서 각각의 능력(기호를 포착하는 감성, 기호를 해석하는 영혼과 기억력, 본질에 대해 생각하도록 강요된 사유)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에 직면하고 거기에 도달한다.(151쪽)”고 설명하였습니다.

 

2부에서 만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서야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통일성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부분 간의 부조화, 불균형, 조각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통일성의 개념을 창조하고 있다고 읽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설명하고 있는 산책길의 두 방향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시간상의 이유 때문에 한 번의 오후에 한쪽 길밖에 이용할 수 없는 제한점을 가지고 있어 두 길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개의 산책길은 프루스트가 탐구해온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 계급의 방향을 상징하는 기호라고 할 수 있는데, 메제글리즈 쪽 사람인 질베르트(스완의 딸)과 게르망 쪽 사람인 생 루(게르망트공작의 조카)가 결혼하여 딸 생루를 낳는 것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들은 시간이라고 하는 횡단선으로 연결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토리를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영역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과 본질들로 정의됩니다. 가장 특정한 것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추억과 본질들에] 해당하는 시간인 되찾은 시간의 생산에 의해, 생산 조건과 생산자(자연적 기호들과 예술적 기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예술 및 예술 작품에 관여하는데, 불완전한 두 번째 영역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즐거움과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그 다른 것은 사교계의 기호 혹은 사랑의 기호로서 잃어버린 시간의 생산에 개입하는 모든 것입니다. 세 번째 영역은 역시 언제나 예술에 간여하는데 <보편적인> 변질, 죽음과 죽음의 관념, 대재앙의 생산(노쇠, 병, 죽음의 기호들)을 통해 정의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는 이 세 영역의 본성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는 사교계의 가치들을 사교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즐거움과 한 종류로 묶고, 사랑의 가치들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종류로 묶으며, 잠의 가치들조차 수면 중의 꿈들과 한 종류로 묶어 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천직>이 문인(文人)이기에 이 모든 가치들을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는다.(235쪽)”라고 보았습니다. 세 가지 영역을 연결하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기계(충동)>, <공명기계(에로스)>, <강요된 운동의 기계(죽음)>의 세 가지 기계로 각각의 진리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부분적 대상들의 분할을 통해서, 되찾은 시간은 공명을 통해서 생산된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은 이와는 다른 방법, 즉 강요된 운동의 폭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때 이 상실, 이 잃어버리는 일은 바로 다름 아닌 작품이 되며, 또 작품이 형태를 갖추기 위한 조건이 된다.(249쪽)”

 

어느 독자는 김용규님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읽고 ‘꿈(문학)보다 해몽(철학, 해석)이 더 재미있다’고 적었습니다만, 들뢰즈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해석은 재미보다는 날카롭다는 느낌을 남기는 책읽기였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들뢰즈의 철학적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자의 영혼을 깨우는 여행의 기술
롤프 포츠 지음, 강주헌 옮김 / 넥서스BOOKS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던 대학 후배가 있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대개 전공의 과정을 밟고 전문의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거나 개업하거나 하는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언젠가 만난 이 친구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모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생각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평생 일해야 하는 병원에 붙들리기 전에 세상을 두루 돌아본다는 생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작에 읽었더라면 이 친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은 책을 만났습니다. 롤프 포츠가 쓴 <여해의 기술>입니다. 정원사로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모은 돈으로 떠나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자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배거본드(vagabond)라는 단어에서 “질서있는 세계를 떠나 크게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하는 여행을 의미를 담은 ‘배거본딩’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저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에드 버린이라는 사람이 혼자 여행할 때 겪는 어려움과 즐거움, 그리고 철학을 차분하고 통찰력있게 담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의 배가본딩>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는 사실을 알고서 낙담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는 저자의 고백을 읽으면서 ‘정말 그랬을까’ 싶었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읽으면 바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1부 배거본딩’은 바로 ‘자유인이라 선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부 떠나라’에서는 자유를 벌려면 항상 단순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부 길에서’는 여행길에 한계는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여행길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관계는 어떻게 맺는 것이 좋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부 길고 긴 여행’은 이렇게 떠나는 여행은 길고도 먼 것이기 때문에 순간에 충실하며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부 집으로’에서는 여행의 끝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을 통하여 얻은 모든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훌쩍 떠나는 여행을 권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빠트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했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여행을 떠날 때마다 보고 싶은 곳들을 하루 일정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하고 도면에서 이동하는 연습까지 해보는 준비작업을 거쳐서 현지에서 이것들을 확인하는 일이 또다른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찰리와 함께 한 여행>에서 “우리가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물을 꾸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새로운 변수가 끼어들어 여행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여행, 사파리, 탐험 등은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다.(70쪽)”라고 했다는 존 스타인백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계획이 치밀해도 막상 현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상황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계획은 임기응변의 여지를 두어 탄력적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저자는 ‘이상하게도 누구나 찾아가는 코스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115쪽)’고 했습니다. 물론 직접 계획을 세운 저는 미리 계획된 코스를 변경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짜준 여행계획을 들고 여행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계획대로 움직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글 매듭마다 배거본딩에 필요한 팁을 요약하고 있어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는 사람에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팁들은 저자가 붙여둔 것이라기보다는 편집자가 붙여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배거본딩을 경험한 선배들의 짧은 조언에서도 참고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자유여행을 꿈꾸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런 여행이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이 남는 책읽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웰컴 투 지구별 웰컴 투 지구별
로버트 슈워츠 지음, 황근하 옮김 / 샨티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부정하는 단계, 왜 자신의 운명에 분노하는 단계, 그래도 운명을 피할 길은 없는지 타협하는 단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절망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상실수업; http://blog.joinsmsn.com/yang412/9264552), 마찬가지로 살면서 부딪히는 장애, 병, 불의의 사고와 같이 절망스러운 상황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시련에 맞서지 못하고 삶을 접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합니다.

 

<웰컴 투 지구별>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에이즈, 유방암을 앓게 된 환자, 장애아를 가진 어머니와 장애를 가진 환자, 약물중독인 아들을 가진 어머니와 딸,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사람, 그리고 생각도 못한 사고로 평생 장애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에 닥친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들은 모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시련을 겪기로 예정된 삶을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적성숙을 얻기 위하여 시련을 당하는 삶을 선택하였다는 것인데, 심지어는 시련을 안기는 사람 역시 영혼들의 사전협의를 통하여 역할을 담당하기로 동의하였다는 주장이고 보면 솔직하게 공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 시련을 당하고 자신의 시련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다 싶기는 합니다.

 

이 책에서는 영혼과 영매 그리고 채널러라는 존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혼들은 저자가 특정하지 않은 방에 모여 환생하게 되는 영혼의 삶을 계획하는데 참여한다고 합니다. 현세에서 부모, 자녀의 역할을 각각 맡게 되는데 심지어는 환생하는 영혼을 현세에서 살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영매와 채널러는 다양한 존재들과 소통하는데 그 안에는 길잡이 영혼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길잡이 영혼은 대부분 육체의 윤회를 수차례 이상 경험한, 고도로 진화된 비물질적 존재로, 이러한 윤회를 통하여 얻은 깊은 지혜로 물질계에서 일반영혼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모호하기는 합니다. 영혼이 불멸의 존재가 될 때까지 다시 태어나며 꼭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불교의 윤회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매 코비가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제니퍼에 관한 세션을 시작하면서 드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보면 기독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주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신 하느님, 오늘 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마련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당신의 조건 없는 사랑과 보호하심,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지혜와 진실의 빛으로 저희를 감싸주소서. 진실을 말하고 진실만을 듣게 하여주소서.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96쪽)”

 

뿐만 아니라 끈이 중심점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 개의 차원에서 환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우주생성에 관한 끈이론을 연상케 합니다. 영혼이 정신이나 몸이 겪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데, 점성학에서는 한 사람의 성격과 소질, 신체적 특성을 별자리를 보고 파악하기도 하고, 한 사람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세포정보, 즉 DNA의 전달이라고 하는 점에 이르면 현대 종교와 과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이론이다 싶습니다.

 

생전에 계획된 삶은 경우에 따라서 현세에서 부딪히는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계획으로 변경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시련을 겪는 영혼을 돌보는 길잡이 영혼을 비롯하여 관련된 영혼들이 삶의 계획을 새롭게 세우게 된다고 합니다.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때로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가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화는 에너지라고 합니다. 그 에너지를 자신을 향해 내뿜지 말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시각화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영혼의 성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시련이란 영혼이 자기 주변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삶인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를 위한 다섯 가지 선물
에란 카츠 지음, 김현정 옮김 / 민음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놀랄만한 기억력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에란 카츠는 전해 내려오는 유대인의 두뇌 계발법을 바탕으로 쓴 <천제가 된 제롬>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 기억력 강화와 두뇌 계발 비법을 주제로 한 강연으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뇌를 위한 다섯 가지 선물>은 유대인의 지혜를 널리 알려온 그의 활동이 전환점을 맞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대문화와 아시아문화를 접목하여 독특한 두뇌 계발 비법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5개국의 전통문화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어려운 상황을 수습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치 않는 기억, 필요 없는 정보를 지우고 더 나은 기억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능력, 망각의 선물을 찾아냈습니다. 인도에서는 실수를 방지하고 의사 결정을 개선하는 법, 안전하다는 믿음이 주는 선물을 찾아냈고, 태국에서는 자제력을 발휘하고 압박감에서 벗어나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법, 욕망 관리의 선물을 찾아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지혜가 담긴 5단계 비즈니스 전술과 유대인의 비결을 비교한 설득의 선물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완벽한 감탄의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일본의 신경미학 법칙, 미의 선물을 찾아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찾아낸 뇌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극대화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잘 활용하면 우리가 극복하기 힘든 어떤 삶의 문제도 해결하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자기계발서로 분류된다는 점에 동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오히려 미스터리 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제롬이 “인간에게는 숨겨진 능력, 평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뇌의 숨겨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16쪽)‘을 제안하는 ‘아시아 학생’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미선이라는 한국계 제자와 함께 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인도에서는 사업을 같이 하던 형을 잃은 산토쉬 쿠마르씨의 도움으로, 태국에서는 승려 아잔 사와트의 도움으로, 그리고 중국에서는 사업가 리한의 도움으로,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예술가 후미코 야마다의 도움으로 각각 두뇌의 잠재적 능력을 끌어내는 방법을 도출하게 됩니다. 미선은 제롬교수를 동행하여 과제를 풀고 졍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마지막 일본으로 가는 일정은 제롬교수 혼자서 맡게 됩니다. 그래서 미학의 선물을 강화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방법을 정리하는 역할은 독자의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뇌를 위한 다섯 가지 선물을 찾아가는 미스터리로 가득한 여행은 시작부터 읽는 이를 추리의 세계로 안내하며 사건의 전후를 꿰어 맞출 힌트를 조금씩 내놓습니다만 결국은 한국전쟁이 사건을 잉태하는 계기가 되고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할 장소는 북한의 수용소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주요 5개국에 더하여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호주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있는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미스터리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한국독자로서 특히 반갑고 감사하게 읽었던 것은 한국에서 발명한 금속활자가 구텐베르그보다 앞섰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 점, 망각의 선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우리 고문화를 인용하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신라의 월명사의 제망매가, 고려시대 불교 계파간의 갈등을 통합한 보조국사 지눌, 한글을 창제하고 이의 반포를 반대하는 훈구대신을 설득한 세종대왕 그리고 마테오 리치를 통하여 기독교 복음서를 전해 받은 이수광 등 다른 나라에 비하여 돋보이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아마도 한국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은 서문에서도 읽힙니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놀라운 나라이자 이스라엘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때가 된 듯하다.(8쪽)”

 

아쉬운 점은 최근 일본이 보이는 안타까운 행보가 책에 반영되지 못한 점이라고 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 바로 용서의 힘’이고 그게 바로 한 국가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본 저자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괴롭힌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에 감동하고 원자폭탄을 피해를 입은 일본도 같은 길을 걸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이 저지른 온갖 만행을 참회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