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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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사회파 미스터리소설의 선두주자로 손꼽히고 있다는 다카노 가즈히로의 신작입니다. 사실 전작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3780>를 읽으면서 그 스케일이나 구성의 꼼꼼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데뷔작 <13계단;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8761>을 내쳐 읽었던 것 같습니다. <13계단>에서도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의 사법제도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한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K·N의 비극>은 일본냄새가 물씬 나는 미스터리소설입니다. 임신이라는 고귀한 생명현상을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중절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의 경박함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냄새라고 적은 것은 예상치 못한 아내의 임신이 넉넉한 신혼을 위협하게 되자 중절을 선택하는 젊은 부부에게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생의 혼령이 빙의하여 임신을 지켜준다는 설정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즈히로는 이런 일본적인 생각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현대 정신의학의 방법론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즉 임신한 아내에게 죽은 초등학교 동창의 사령이 빙의한 것이라 믿는 주인공 슈헤이와 빙의현상을 정신의학적으로 설명하여 자칫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의사 이소가이를 대치시키면서도 초자연적 현상의 가능성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점도 눈에 띕니다.

 

죽은 혼령이 빙의했다고 믿게 하는 현상은 시종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등줄기에 서늘한 무엇이 흐르는 느낌을 주고,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나에게도 일어나는 것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실재하지 않지만 혹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은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혼령의 빙의를 다루는 스토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임은 일본의 가정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임신이 되지 않아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결국은 자살을 선택하는 여성이 등장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불임 때문에 쏟아지는 시어머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 여성이 다행스럽게 생명을 구했는데 알고 보니 정신과적 치료를 받는 동안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살시도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임신부의 생명의 끈을 붙들고 결국은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만든 것은 이 여성의 몸안에 자리잡은 새생명이었다는 점도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작가가 데뷔작이었던 <13계단>을 통하여 일본의 사형제도와 사법제도에 관하여 꼼꼼하게 조사했더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만, <K·N의 비극>에서도 빙의현상과 같은 심령에 관한 사항들이라거나 빙의현상을 설명하려는 정신의학적 설명에 대하여 꼼꼼하게 조사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잘 엮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임신과 중절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우려하는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의 전개는 <제노사이드>, <13계단>에서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신뢰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바리지 않은 아이는 안 태어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라는 슈헤이의 질문에 대하여 의사 이소가이가 ‘원하지도 않은 아이를 만든 부모는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어도 당연하다는 거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인간이 있을까요?’라고 되묻는 질문은 생명에 대한 작가의 사랑을 담은 것이라 보입니다.

슈헤이-나가미 부부의 기묘한 사건에 엮이게 된 의사 이소가이가 산부인과를 전공하다가 정신과로 전공을 바꾸었다는 설정은 임산부의 심리적 갈등에서 오는 문제, 특히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중절과 임신의 유지를 결정하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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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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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을 한국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파묵의 첫 번째 미스터리 작품인 것 같습니다. 배경은 1591년 겨울 이스탄불입니다. 당시 터키회화의 주류를 이끌던 세밀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습니다. 파묵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 이난아 교수님은 최근에 발표한 <오르한 파묵-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26504>에서 “페르시아의 회화 전통과는 달리 터키의 세밀화는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경쾌하고 묘사하고 있다.(이난아 지음, 오르한 파묵-변방에서 중심으로, 121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파묵이 <내 이름은 빨강>에서 선보이는 독특한 소설적 구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즉,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13쪽)” 시작하는 첫 번째 문단의 제목은 ‘1. 나는 죽은 몸’입니다. 즉 죽은 자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은 물론 죽은 자, 개, 나무, 금화, 혹은 죽음과 같이 살아있는 인간 이외의 무생물에서 무형물까지도 스토리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동서양 문명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파묵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의 여주인공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시테는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중세유럽의 회화의 화풍을 터키의 전통 회화기법에 녹여보려는 새로운 시도로 술탄을 설득하여 헤지라 천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화집을 비밀리에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 작업은 참여하게 된 세밀화가들이나 참여하지 못하게 된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살인이 거듭 일어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주인공 세큐레를 둘러싸고, 어릴 적부터 세큐레를 사랑해온 이종사촌 카라와 전쟁터에 나간 세큐레의 남편의 소식이 4년째 끊기면서 형수에게 연정이 노골화되어가는 시동생 하산, 그리고 아내의 하산의 구애에 놀란 세큐레가 두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오자 딸에 대한 사랑이 점차 커져서 곁에 두려는 에니시테의 심리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사랑이야기도 중요한 축입니다. 세큐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카라와 재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중세 터키사회의 결혼풍습과 남녀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죽은 채 등장하는 엘레강스와 세큐레와 카라의 혼인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는 에니시테가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터키인들의 생사관도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척 슬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슴이 훼하니 뚫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생을 떠나오는 순간, 뭔가가 팽창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꿈속에서 잠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 나는 잠들 듯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짜릿한 느낌을 맛보면서 이쪽으로 옮겨왔다.(17쪽)” 그리고 엘레강스를 죽였던 살인자에 의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에니시테의 증언도 중요합니다. 에니시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동화에서 찾아온 죽음을 맞은 노인이 당호하게 “아니야. 너는 다 끝나지 않은 내 꿈이야”라고 말하면서 죽음이 손에 들고 있던 촛불을 단숨에 불어 껐는데, 그리고 노인은 20년을 더 살았다는 것입니다.

 

두 건의 살인이 진행되는 동안 살인자가 누구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즉 살인한 자는 있지만 누구인지 밝히는 과정으로 후반부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이 나오게 된 배경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에니시테가 살인자가 내리치는 물감병에 맞고 쓰러졌을 때 암시되었다가,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31.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분명하게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거인을 멋진 검으로 두 동강 냈을 때는 거인의 낭자한 피 속에, 뤼스템이 머물던 궁전에서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을 나누며 밤을 보낼 때는 그들이 덮었던 이불의 구김살 사이에 있었다.(331쪽)” 그렇습니다. 빨강의 본명은 피였습니다.

 

어떻든 살인자는 분명 엘레강스, 에니시테와 같이 세밀화작업을 하던 동료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가 왜 살인을 저질러야 했는지는 후반부에서 드러나게 될 것 같습니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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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즈 루어만감독이 다시 만든 2013년작 <위대한 개츠비>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제이 개츠비 역), 토비 맥과이어(닉 캐러웨이 역), 캐리 멀리건(데이지 뷰캐넌 역), 조엘 에저튼(톰 뷰캐넌 역) 등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보니 이번 영화를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가 각각 제이 개츠비와 데이지 뷰캐넌을 연기한 잭 클레이톤 감독의 1974년작과 비교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민음사판으로 나온 F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19884>를 읽고서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리뷰를 적었습니다. 오히려 젊어 한때 마음 속에 각인 된 데이지라는 어찌 보면 아주 속물적인 여성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지독한 스토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생략되었던 디테일을 루어만감독은 적절한 장소에 집어넣음으로써 개츠비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루어만감독은 캐러웨이를 주식중개업자에서 작가로 변신시켜 사건 이후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정신요양시설에서 지내게 된 캐러웨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마음에 맺혀 있는 것들을 글로 써보라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서 캐러웨이가 개츠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들어서 친척 데이지와 결혼한 대학친구 톰 사이에 삼각관계를 만들고 결국은 개츠비의 비극과 함께 속물이라고 할 톰과 데이지는 멀쩡하게 살아남는 세상사에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는 과정을 서술해나가게 됩니다.

 

 

원작에 디테일이 빠져있던 부분은 톰이 데이지와 개츠비, 조던과 캐러웨이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개츠비의 과거 비리, 옥스퍼드를 졸업했다는 거짓과 금주법을 어겨가면서 돈을 벌고 부당주식거래 등을 통해서 부를 확대해온 사실을 폭로하여 개츠비에 데이지의 관계를 흔드는 장면, 이어서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톰의 정부 머틀을 치어 죽게 하는 뺑소니사고를 낸 다음에, 캐러웨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나날은 온통 데이지를 위한 삶이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면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불행해질 것을 걱정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는 점 등입니다. 결국은 소설에서 분명하게 서술되지 않아서 저 같이 예민하지 못한 독자는 놓치기 쉬운 부분을 콕 집어서 설명해줌으로서 개츠비의 사랑이 지고지순한 것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사고를 계기로 다시 마음이 흔들린 데이지가 톰과 함께 뉴욕을 떠나는 것으로 그녀의 속물성을 충분히 강조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개츠비가 위대했다고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데이지와 같은 속물에 콩깍지가 씌인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해야 할지 다시 헷갈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눈에 당장 보이는 재물에 천착하는 데이지는 게츠비의 위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말입니다. 사고현장 부근에 서 있는 광고판에 나오는 안과의사 TJ 에클버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동차정비공 윌슨은 아내 머틀에게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 ‘하느님은 당신이 지금껏 한 짓을 전부 알고 계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당신은 나를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절대 못 속여(225쪽)”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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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 개정증보판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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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너무 길어 읽노라면 숨이 찰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 당신 사랑>으로 줄여 부를까 합니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은 그때그때 적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른 다음에 적어두었던 글이나 사진을 다시 꺼내 들여다 보면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출판사 이벤트에 “오래 전 써 두었던 여행기록을 끄집어 내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를 찾는 여행에 동반자로 삼아보고 싶어지는 책입니다.”라고 적어서 당첨이 된 책입니다.

 

<내 사랑, 당신 사랑>은 2007년 봄, 첫 번째 여행에세이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최갑수님의 여섯 번째(?) 여행에세이가 되는 모양입니다. <당분간>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정거장을 거쳐 어느 이름모를 역으로 이어지는 여행느낌을 정리했던 저자는 <내 사랑, 당신 사랑>에서는 첫 번째 계절, 두 번째 계절, 그리고 세 번째 계절을 거쳐 남아있는 나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글보다 사진에 눈길이 더 머물렀다고 하면 작가에게 미안한 노릇입니다만, 그만큼 사진에서 무언가 사연이 읽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작정을 하고 여행을 떠나 써내려간 글이라기보다는 앞서 제가 적은 오래 전 써두었던 여행일기에서 낚아 올린 생각들을 정리할 것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보니 에필로그에 그런 심사가 읽힙니다. “다시 들춰보았다. 마루에 걸터앉아 봄이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그런 날이었다. (…) 다시 보아도 문장은 어색하고 사진은 유치했다. (…)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단 하루의 봄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께서 우려하는 것처럼 문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사진은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작가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깨달은 것, “인생은 지나가며 사물은 사라지고 풍경은 퇴색한다는 사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 부디, 슬퍼하지 말자. 우리가 길을 추억하듯, 길은 때로 우리를 추억할 것이니.(17쪽)” 정말 길이 우리를 추억해줄까요?

 

저의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 군산 철길마을을 다녀오셨군요. 그런데 군산에는 경안동이라는 동네는 없답니다. 아마도 경암동이겠지요. 그리고 2003년 여수가는 기차에서 만난 한 여자와 울진 용추곶에서 따로 만난 한 남자는 서로 아는 사이 맞아요? 아무리 세상이 좁다고 해도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세상 여행자가 100명이라면 100명 모두가 여행하는 이유가 제각각일 거라면서 ‘당신은 왜 여행을 떠나나요?’라고 묻는 작가는 퇴근길에 그저 여관이 그리워 허름한 여관에 들어 양말을 빨고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여관방을 구경하다가 집에 갔다는 고백(?)을 듣고는 타고난 여행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자에 역마살이 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한순간이 때론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나,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은 살아오면서 어떻게 알아지게 되었습니다만, 마지막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잃어버린다는 사실.(193쪽)’은 작가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니 적지 않은 여행을 해보았지만 무작정 떠난 여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작가님은 붙임성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을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오지랖이 넓어서인가요? 아니면 외로워서? “당신이 외롭다면 당신의 외로운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은 여행자다. 여행자는 당신의 외로움을 가지고 먼 길을 걸어가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깊은 숲 속에 묻어버릴테니까(138쪽)”라는 인도 순례자의 말에 대한 믿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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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과 윤리 - 출간 30주년 기념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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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윤리학 분야의 거장이자 동물해방론자인 프린스턴대학의 피터 싱어교수가 쓴 <사회생물학과 윤리; 원제 The Expanding Circle: Ethics, Evolution and Moral Progress>는 1981년에 출간되어 우리나라에는 1999년 김성한님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2011년에 3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것을 역시 김성한님이 번역하여 2012년 소개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이 책을 발견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만, 아마도 매주 연재하는 북리뷰에서 다루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을 읽어가면서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리의 본질을 천착해온 저자는 종교가 더 이상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과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우리에게 <통섭>으로 친숙한 에드워드 윌슨교수가 1975년에 내놓은 〈사회생물학:새로운 합성 Sociobiology:The New Synthesis〉였다고 합니다. 윌슨은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윤리를 철학자들의 손에서 과학자의 손으로 넘겨주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있어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인데, 싱어교수는 윌슨교수의 윤리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접근방식이 부정할 수 없는 미숙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접근 방식은 윤리에 대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점입니다. 즉 윌슨교수의 <사회생물학>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싱어교수의 비판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1995년 민음사에서 핵심을 요약하여 <사회생물학 1,2>로 소개하였는데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싱어교수는 <사회생물학과 윤리>에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서 이타성의 기원을 추적하는데서 사회생물학적 접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윤리의 생물학적 토대를 인간의 윤리에서의 혈연에 기반한 이타성에서 호혜적 관계를 기대한 이타성, 나아가 집단의 이타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타성을 논하려면 인간의 이기성을 논할 필요가 있는데, 호혜적 이타성에 대한 해석은 1976년 나온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종족유지본능에 따른 이타성으로 해석이 가능한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타성에 대한 다른 시각을 매트 리들리교수의 <이타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7182>에서는 호혜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헌신성이 이타적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리들리교수의 주장이 도킨스교수의 주장을 번복한다기 보다는 보완하는 설명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싱어교수는 자기 보존에 관한 다윈의 진화이론과 윤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살피고 있습니다. 사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본능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윤리의 핵심요소라고 할 이타성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이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혈연과 공동체의 성원들을 보호하려는 유전적 토대를 가진 이타성에서 윤리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러한 이타성이 곧 윤리는 아니며, 이성 능력이 역할을 함으로써 오늘날의 윤리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문화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됨에 따라 유전자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옮긴이가 잘 정리하고 있는 풍부한 각주와 각 장의 논지를 요약하여 먼저 읽을 수 있더록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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