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시간 : 길고도 아픈 치매가족의 하루 - 세계 최고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이 제공하는 치매극복 가이드
피터 V. 라빈스, 낸시 L. 메이스 지음, 안명옥 옮김 / 조윤커뮤니케이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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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 홉킨스의대에서 치매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진들이 치매환자와 가족들에게 치매진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81년에 처음 내놓은 책입니다. 1991년, 2006년 그리고 2011년에 발전된 내용을 담아 개정판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1991년에 나온 개정판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만해도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만, 2011년에 나온 개정판은 분량이 두배가 넘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간략하게 요약한 글처럼 한 가정에 치매환자가 있게 되면 치매환자는 물론 가족 구성원 모두가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아 생활이 통째로 흔들리게 됩니다. 어쩌면 하루가 36시간이 아니라 48시간, 60시간 같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고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의미에서 ‘36시간’이라는 제목을 정한 것 같습니다.

 

제가 치매를 공부하던 1990년대 무렵 만하더라도 미국 내 치매환자가 400만명이라고 하던 것이 2010년대에는 500만명에 이르게 되었고 2008년에 치매치료에 1,600조 달러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의 치매환자는 53만명으로 2025년에는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고 하니 치매가 국가적 질병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치매의 본질을 세세하게 다루기보다는 치매환자와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치매환자가 보이는 증상은 제각각이라서 맞춤형 대응방식을 마련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치매환자들이 보일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변형하여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은 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다양한 대응방안을 제시하고 있어 실제상황에서 응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치매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치매를 진단하는 과정, 치매 환자들의 전형적인 행동 증상과 대응방법, 치매환자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 치매환자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는 의학적 문제들과 각각의 상황에서의 대응방안, 간병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상황들, 가족들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협력방안, 가정에서 돌보기 어려운 치매환자를 요양시설로 모시게 되는 경우 고려할 점,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속설들에 대한 평가, 치매에 대한 연구의 현주소 등등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제목 가운데 중복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중복되는 점도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의료제도 안에서 대응방안들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보도 적지는 않습니다.

 

제가 치매에 관한 책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 1996년이었고, 2003년에 개정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치매치료에 관하여 발전된 내용을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입니다. 그동안 관련 자료를 꾸준하게 수집해왔고, 최근에 출판사와도 개정판을 내기로 의논이 되었지만, 막상 금년들어 하고 있는 일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원고를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계기가 되어 개정판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기간에는 하는 일도 다소 줄기 때문에 원고작업이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녁시간에 책읽는 시간을 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은 17대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으로 보건복지분야, 특히 치매환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안명옥의원님께서 번역을 맡으셨는데, 번역이 아주 잘 되어서 읽기에 편하고 이해가 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세집 건너 치매환자가 있을 정도로 치매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집안에 치매환자를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 반드시 읽어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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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 밀레니엄 북스 22
앙드레 지드 지음, 김동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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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뒤쫓는 책읽기의 일환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푸르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 앙드레 지드와 마르셀 프루스트를 연결하는 고리가 크게 두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이 모두 동성애자였으며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동성애 행위를 작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완네집 쪽에서’의 출간을 거절했지만 후속작을 출판한 누벨 르뷔 프랑세즈라는 문예지의 창간인이자 출판인이 앙드레 지드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동 시대를 살았던 지드의 작품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했을 법도 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편에서는 노골적인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는 푸르스트였고, 지드 역시 남색을 다룬 소설 <코리동>, <씨앗이 죽으면>, <위폐범> 등을 발표한 바 있음에도 프루스트는 지드의 작품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와 지드의 작품세계를 비교한 텍스트를 읽기 위하여 지드의 <좁은문/전원교향악>을 읽게 되었습니다. <좁은문>은 1909년에 <전원교향악>은 1919년에 각각 발표된 작품입니다. <좁은문>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라고 한 누가복음 13장 24절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좁은문의 주인공 제롬은 두 살 연상인 외사촌 엘리사를 사랑하지만, 엘리사의 동생 쥘리에트가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엘리사가 한발 물러서고, 이런 정황을 알게 된 쥘리에트가 다시 양보하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결국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엘리사가 죽음을 맞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 됩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을 통해서 엘리사가 제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제롬보다 나이가 2살 위라는 것, 그래서 자기는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 둘째, 자기 동생 줄리엣이 제롬을 사랑하고 있다는 배려심, 셋째는 자기가 결혼하면 혼자 남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 넷째, 불륜에 빠진 자기 어머니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충격” 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줄리엣이 제롬에게 빠져 있다는 정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달아난 다음 홀로 된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제롬은 이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이기 때문에 둘이서 같이 모셔도 될 상황입니다. 엘리사가 연상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프랑스사회에서 연상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좁은문>보다 앞서 발표된 조르주 상드의 <사생아 프랑수와; http://blog.joins.com/yang412/13190187>에서 이미 두 살 정도의 연상녀가 사회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보이는 점입니다.

 

다만 <사생아 프랑수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근친상간이 오히려 문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사촌이라면 비교적 가까운 친척이라고 볼 것입니다. 인륜적인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육체적인 쾌락과 지상 위에서의 행복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높임으로써 사랑을 한층 더 애절하고 절실한 존재로 창조해냈다고 하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연히 만나게 된 불쌍한 처지에 놓인 농아 제르튀르드를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돌보는 과정에서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게 된 목사님은 아들 자크가 제르튀르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충격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르튀르드가 사랑한 것이 자신이라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진퇴유곡이라 할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결국은 제르튀르드가 죽음을 택하고 마는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과연 ‘인간에서 출발해서 사랑으로 승화한 한 편의 전원시’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은지 따져볼 일이 아닐까요?

 

프루스트와 지드는 어릴 때 병약했던 것까지도 닮은 점이 많은 작가였음에도 작품세계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점은 다시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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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 강제윤 시인의 풍경과 마음
강제윤 지음 / 호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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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같은 제목에 끌려 읽게, 아니 보게 된 책입니다. 글보다 사진에 담긴 저자의 글을 읽어보려 했다고 할까요? 서문에 해당하는 ‘여행자의 서’에 적은 저자의 여행관(?)은 이렇습니다.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안다. 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어떠한 여행도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구도행 아닌 것은 없다.” 저는 아직 이런 여행을 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 충격이었습니다.

 

강제윤시인은 특히 섬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8년 동안 한국의 섬 약 300여개를 걸으며 바다의 풍경과 그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에게서 삶을 찾는 여행자의 모습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에서는 섬여행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자연의 모습과 함께 여행에 비유되는 인간의 삶을 사는 지혜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 여행자이며 길의 자녀들이다. 지구는 은하계를 여행하는 우주선, 이 순간에도 우리가 탑승한 지구는 시속 11만 킬로미터의 놀라운 속도로 우주를 항해한다.”(38쪽, 은하 여행자) “우리는 늘 삶에 서툴다. 그렇다고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하거나 탓할 이유는 없다.”(17쪽, 처음 살아보는 삶)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우리네 삶이기에 연습이라는 것을 할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나의 삶은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섬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폭풍이 거센 바다에서는 파도를 이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애써 중심을 잡으려 몸부림치지 말고 파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라 권합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구요. 섬에서는 느림의 미학을 절로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카페리가 다니지 않는 섬에서는 오로지 두 다리에 의지해야만 어딘가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섬의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릿느릿 걷고 또 걸어도 작은 섬에서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는다구요. 이렇게 걷다보면 걷기의 의미를 깨닫게 되나봅니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생각의 폭을 넓히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61쪽, 걷기는 정신의 운동)

 

사실 제가 운동 삼아 하는 걷기는 속도를 붙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깨우칠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렇게 꼬집고 있습니다. “동일한 풍경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그려내는 풍경이 제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고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60쪽, 걷기의 속도) 연전에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를 타고가서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느껴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로 이동을 해도 그곳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업기 마련이지요. 최선이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고, 자전거만 해도 그래도 낫더라는 것이지요.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저자는 “집을 떠나 자연의 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바쁘게 걷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온갖 헤찰을 하면서 느리게 걸어야 한다구요. 목적지가 여행이기 때문에 걷다가 길을 잘 못드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잘 못 든 길이 바로 여행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여행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누군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늙음은 결코 죽어가는 일이 아니다. 삶을 완성해가는 일이다. 삶의 근원에 더 깊이 다가서는 일이다.”(156쪽, 늙음은 삶의 완성이다.) 삶을 완성해가다 보면 미래에 올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서 비롯된다.”(100쪽,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삶이라는 여행을 통찰하고 나만의 여행이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느리게 걸으면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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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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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EBS 인문학특강] 공개강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김상근교수님이 진행하시는 ‘인문의 시대, 르네상스’입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84697). [EBS 인문학특강] 시리즈의 마지막 공개강좌라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강좌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날 공가강좌에서 김교수님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한 엘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미술세계와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살았던 마키아벨리의 삶과 철학을 주제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녹화된 공개강좌 내용은 8월 15일과 22일 밤 11시 15분에 각각 [EBS 인문학특강]에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혹시 교수님의 열강에 빠져있는 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를 찾아라!’는 게임처럼 저를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신학을 전공하시는 김상근교수님은 16세기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대한 연구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다고 하는데,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문화예술에 눈을 뜨게 되고, 16세기 동서양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찾기 위해 르네상스 예술로 표현된 유럽의 시대정신을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EBS 인문학특강]를 통하여 김상근교수님이 그동안 정리해온 연구성과를 관심있는 분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날 강의의 첫 번째 주제였던 화가 엘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이름이 생소할지도 모르겠다는 교수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귀에 익은 이름이다 싶었던 것은 영화기획자 고형욱씨가 아들과 함께 한 유럽 미술 기행기 <아빠의 자격; http://blog.joins.com/yang412/12327788>에서 읽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날 준비해오신 두 화가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김상근교수님의 설명을 듣게 되니 그림에 문외한인 저도 작품에 담긴 화가의 뜻과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이외에도 두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직접 다녀오신 그리스의 크레타섬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 그리고 스페인의 톨레도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모습을 곁들인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설명을 통해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제, 마키아벨리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생소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군주론>으로 유명하고, 이 책을 계기로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 정치사상’을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약자들의 수호성자였다는 김상근교수님의 재해석이 당혹스럽기도 하면서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날의 공개강좌에서는 참석하신 분들을 추첨하여 교수님의 최신작 <마키아벨리>를 선물로 주는 이벤트도 있었습니다.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행운은 제 편이 아니었는데, 동행하신 분이 전 시간에 얻은 행운을 제게도 나누어주셨습니다. 덕분에 [북소리]에서 김상근교수님의 <마키아벨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자신과 생각이 같은 주장에 마음이 솔깃하게 기울고 다른 주장은 색안경을 끼고 보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 생각과 다른 주장을 담은 책도 열심히 읽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주장에 허점은 없는지 찾아서 저의 생각이 맞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결국 다양한 생각을 두루 읽어 나름대로의 생각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상근교수님께서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한 마디로 ‘괘씸하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527년 사망하여 르네상스시대의 절정기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그가 남긴 그 많은 문장 가운데 피렌체예술이나 르네상스 예술가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에 관한 기록은 물론 그가 살았던 피렌체에서부터 그의 족적이 남아있는 길을 모두 뒤쫓았는데,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공무차 네 차례 방문했던 프랑스의 모든 도시도 순례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군주론>에 담은 마키아벨리의 진심이 왜곡되어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에게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음흉한 참모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상근교수님은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진짜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하던 신학자들, 사회과학자들, 처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를 해석해왔고, 그의 심오한 사상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 온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착한 심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이었고, 르네상스 정신의 근간을 제공했던 인문학의 정수에 도달한 탁월한 인문학자였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품에 안으며, ‘울지마라,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던 약자들의 진정한 수호성자였다.(6~7쪽)”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훗날 “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얻기 위하여 아홉 달 동안 색인작업에 매달리는 힘든 노력을 기울이고,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건넨 끝에 책을 제본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의 서재에는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전집, 로마의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의 책,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로마를 대표하는 자연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의 책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가 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베르나르도의 파산은 변변치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값이 만만치 않은 책들을 구입한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의 풍성한 서재가 아들 마키아벨리의 인문학적 소양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배경에서 조선 시대의 선비의 모습이 읽혀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요즘 같으면 집안 살림에 관심 없는 남편이라면 쫓겨나기 십상일 터이지만 조선시대의 선비나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좋은 시절을 살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영혼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고, 너그러웠으며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마키아벨 리가 간교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군주론>에서 국가를 통치하는데 필요한 덕목을 강한 용어로 설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고, 특히 이탈리아적인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프랑스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가 미친 영향도 크다고 합니다. 김상근교수님은 피렌체공화국에서 제2서기관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스페인과 결탁한 교황청의 음모로 공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가 복귀한 메디치가문에 헌정한 <군주론>이 일종의 취업제안서였다고 보았습니다. 군주론에 담긴 내용은 일견해서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공국을 세워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에 대한 영감을 얻었던 것이고, 보르자를 이상적 군주로 보았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김상근교수님은 <군주론>에서 흔히 오독되어 마키아벨리의 진정성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로 군주론 3장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대중이란 머리를 쓰다듬거나 없애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타인에게 해를 가할 때는 보복의 우려가 없도록 해야 한다.(219쪽)”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전제를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언어, 풍습, 제도가 다른 지역의 영토를 지배할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르게 마련인데, 그것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과 함께 행운이 따라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전제로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민족을 통치하는데 있어 강압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권고가 옳은지도 제고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 시절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하여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주론>을 통하여 통일 이탈리아를 이끌어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군주상을 담았다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군주론>이 복귀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당신을 도와 피렌체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위대한 과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키아벨리의 염원을 담았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군주론>의 서문에서 “군주의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은 군주가 받아서 기뿐 선물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인데, 자신도 ‘전하에 대한 보잘것없는 충성의 표시를 가지고 찾아뵙고’ 싶다고 애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의 역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김상근교수님은 이탈리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르네상스시절의 시대적 상황이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시대는 영웅을 요구하고 있지만, 운명은 마키아벨리나 우리국민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배어있다고 할까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500년도 넘은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와 비교하는 것보다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과 비슷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비교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국가가 난립하던 이탈리아와 춘추전국시절 중국의 사회상에서 유사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상주의적인 국가를 추구한 사람으로 공자를 마키아벨리와 대비시켜 비교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바나 인생행로에서 비슷한 점도 있을 것 같고, 차이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서 피력하고 있는 이상주의적인 군주상은 “원래 인간은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고, 신변의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이다.(157쪽)”라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견해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 공자사상의 근간이 되는 유교에서는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니 마키아벨리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공자 역시 스스로를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일의 전수자라고 했으니, 요새 말로 치면 바로 인문학에 정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키아벨리와 통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옛것은 배움을 통하여 익힐 수 있는 것인데, 배우는 이유는 자신을 발전시켜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널리 펼치기 위한 방법으로 요즘으로 치면 정치라고 할 공직에 참여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공자는 50세를 전후하여 고국 노나라에서 최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의 도덕적 엄정성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왕의 측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여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의 고결한 정치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지만 결국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때 유럽 각국을 누비며 놀라운 통찰력으로 피렌체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하던 유능한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바뀐 정국에서 변신의 계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향 산탄드레아에 머물면서 <로마사논고>를 비롯한 저술작업과 루첼라이 정원모임을 통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공자의 삶과 마키아벨리의 삶에서 닮은 점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제환공이 관중의 권고에 따라 9차례에 걸쳐 제후들을 규합하여 동맹을 맺되 무력을 쓰지 않은 구합제후(九合諸侯)의 사례를 칭송한 것처럼 무력과 간교함과는 거리가 있었던 공자의 철학이고 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서는 거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면모를 찾기 위한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군주론>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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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프랑수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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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1847년 작품입니다. 프루스트 공부하기의 일환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스완씨의 방문으로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겨 슬퍼하는 마르셀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머니가 읽어주기 위하여 고른 책입니다. 할머니께서 어린 마르셀의 생일에 주기 위한 선물로 고른 책인데, 처음에는 무세의 시집, 루소의 작품 한 권, 그리고 상드의 소설 <앵디아나>를 골랐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바꾼 소설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민음사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에 옮긴이가 붙인 각주에는 “ 방앗간 여주인 마들렌과 그녀가 입양한 업둥이 프랑수아 사이의 근친상간적인 사랑을 담은 이 이야기가 어머니와의 행복한 결합을 다룬다는 점에서, 어린 마르셀의 팡타즘을 구현한다(76쪽).”고 적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방앗간 부부가 프랑수와라는 남자아이를 입양해 기르다가 폭력적이며 괴팍한 남편이 죽은 후 젊은 아내가 입양한 아들과 결혼한다”는 근친상간을 다룬 소설로 성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103쪽) 한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의 사랑을 애처로울 만큼 맹목적으로 요구하는 프랑수와에게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상드는 독자가 프랑수와의 순수한 열정과 그 표현방식을 안심하고 허용하도록 자연스럽게 이끈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3; http://blog.joins.com/yang412/12974277>에서는 1831년 당시 파리의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떠돌이 생활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테나르디에부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딸은 귀하게 키우면서도 아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어린 아들을 남에게 주어버리는 짓까지도 하는 모습을 보면 1847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주인공 프랑수와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업둥이로 자라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남편 클레쟁제와의 갈등에서 오는 고통을 전원생활을 통하여 다독이는 가운데 상드는 ‘밤모임’에 가곤했는데, <사생아 프랑수와>를 밤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를 옮겨적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것입니다. 상드는 버려진 아이에 대한 당시 사회의 편견에 맞서고 고아에 대한 부유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질타하기 위한 의도를 담아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설적 상황, 즉 비정상적 사랑, 비도덕적인 출생, 부모로부터 버려진, 혹은 부모와 헤어진 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혈연관계로 이어지게 된 사람들 간으ㅟ 신비로운 애정 등에 대한 상드의 관심과도 관련이 있다.(251쪽)” 옮긴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들렌과 프랑수와의 관계를 입양아와 어머니의 관계라고 하고 있지만, <사생아 프랑수와>에서는 입양에 따른 행정적 절차를 밟았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마들렌의 시어머니의 사주를 받은 프랑수와의 어머니 자벨이 프랑수와를 멀리 버리려 할 때 마들렌이 10에퀴를 내주면서 프랑수와를 사겠다고 선언하지만, 마들렌은 이를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또한 프랑수와를 친자식 자니와 꼭 같이 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프랑수와가 근본적으로 착하고 심지가 굳은 아이라는 점을 상드는 “전 남에게 고통을 주는 쪽보다 차라리 제가 고통을 당하는 편이 나은걸요.(46쪽)”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들렌의 남편 블랑셰가 마음을 빼앗긴 세베르가 프랑수와를 유혹하였음에도 넘어가지 않자 블랑셰를 꼬드겨 프랑수와를 집에서 내쫓게 합니다. 결국 블랑셰를 속여 방앗간을 포함한 재산을 빼돌리고, 블랑셰는 빚만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 프랑수와는 다시 마들렌에게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프랑수와의 친어머니는 프랑수와를 위하여 4000프랑을 맡겨두었던 것인데, 그는 이 돈을 이용하여 마들렌을 위험에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베르와 블랑셰의 누이동생 마리에트가 공모하여 마들렌이 프랑수와 정을 통하고 있다고 입방아를 찧는 소리를 듣게 된 프랑수와는 고민에 빠지게 되고, 프랑수와가 일하던 에귀랑드 지방의 물방앗간집 딸 자네트는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마들렌에게 청혼을 하라는 조언을 하게 됩니다.

 

전체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마들렌과 프랑수와의 관계는 일단 공식적으로 입양이 성립된 관계가 아니라 구두로 언약한 정도의 관계이며 모자간에 볼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주변에서 이들의 사랑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발전하도록 촉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19세기 프랑스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으나 현대적 시각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 아니 프루스트의 눈으로 보기에 <사생아 프랑수와>는 지극히 교훈적이고 모범답안 같은 삶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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