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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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교상의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순례’라 하면 우선 기독교의 이스라엘, 이슬람의 메카와 메디나, 불교의 룸비니 등지가 있겠습니다만, 최근 불고 있는 걷기 열풍과 관련하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이 먼저 생각납니다. 언젠가는 저도 걸어보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드라마작가 레이철 조이스의 첫 번째 소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정말 놀라운 순례의 길을 걸어간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산티아고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순례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남서쪽 끝에 있는 사우스햄스 킹스브리지에서 영국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스코틀랜드와 만나는 북동쪽 끝에 있는 버윅어폰트위드까지 대략 800킬로미터의 거리를 실수와 일탈 때문에 우회하는 경우도 있어 1,000킬로도 넘게 걸어서 87일 만에 도착하는 동안, 해럴드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엮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해럴드가 걷기 시작한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해럴드와 아내, 아들 데이비드 그리고 해럴드가 만나러 가는 퀴니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해럴드의 순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미스터리 소설은 아닙니다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내용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해럴드의 놀라운 순례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퀴니의 편지는 4월 중순경에 받게 됩니다. 해럴드가 집을 나선지 한참 뒤에야 내용이 알려지기는 합니다만, 몇 가지 의문점 때문에 미리 인용을 합니다. “해럴드에게, 이 편지를 받고 좀 놀라실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지난날을 쭉 생각해 왔어요. 작년에 종양 수술을 받았는데, 암이 이미 퍼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나는 차분해요. 또 편안해요. 어쨌든 오래 전에 해럴드가 나에게 보여준 우정에 감사하고 싶었어요. 부인에게도 안부 전해 줘요. 여전히 좋은 마음으로 데이비드를 기억하고 있어요.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며.(171쪽)” 해럴드가 은퇴하기 전에 다니던 양조회사에서 경리를 보던 퀴니는 이십년 전에 쫓겨나 떠난 다음에 연락이 끊겼던 것인데 그야말로 느닷없이 연락을 보내온 것입니다.

 

퀴니 헤네시의 소식을 들은 모린은 위층에 있는 아들 데이비드의 방으로 올라갑니다. 사실 여기서 작가가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읽다보면 이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린은 위층 데이비드의 방에 들어가 문을 조용히 닫고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아이를 들이마셨다. (…) 그녀는 데이비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방을 늘 깨끗이 청소해 두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한 부분은 늘 기다리고 있었다.(17쪽)” 모린이 아들과 함께 있는 동안 해럴드는 퀴니에게 답장을 씁니다. “퀴니에게, 편지 고마워요. 정말 안타깝네요. 당신의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며-해럴드(프라이)” 이보다 더 무미건조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한 줄로 된 답장, 그리고 퀴니의 편지를 보면 퀴니와 해럴드 부부 사이는 특별한 관계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부치러 나간 해럴드가 집근처 우체통에서 편지를 밀어 넣지 못하고 다음 우체통 그리고 우체국까지 지나치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간식을 사러 들른 주유소의 아가씨와 편지를 받을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건넨 것도 영국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일까요? 고모가 암이었다는 소녀가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약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돼요. 인간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주 많아요. 하지만 있잖아요. 믿음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28쪽)”라고 전한 말이 해럴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퀴니가 입원하고 있는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해럴드 프라이가 가는 길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구해 줄 거니까. 나는 계속 걸을 테니. 퀴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전해주겠어요? (…) 걸어갈 거예요. 사우스데번에서 버윅어폰트위드까지 쭉. 내가 걷고 있는 동안은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내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33쪽)”라고 하는 것까지는 이해불가입니다. 해럴드는 자신이 퀴니에게 걸어가는 것만으로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 믿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시작한 걷기입니다. 시내에 나갈 때나 신으면 좋을 보트슈즈에 갈아입을 옷도 없이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간편한 복장으로 말입니다. 휴대폰도 없고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8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이렇게 나서는 해럴드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혹시 집에 돌아가 아내와 상의를 했다가는 아예 출발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정작 모린은 전화를 건 해럴드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걸어갈 것이라는 말을 하자 “뭐, 버윅에 가도록 해, 해럴드.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어디 당신이 다트무어를 넘어갈 수나 있는지 알고 싶어―(40쪽)”라고 쿨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해럴드가 걷기를 이어가면서 비용이 문제가 되면서는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은 다 해 본 거겠죠”라고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퇴직금을 쓰겠다는 해럴드의 말에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지는 않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걷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해럴드의 계획에 동감하고 응원하는 모습입니다. 정작 해럴드는 자신의 여행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어떤 부인은 <순례자가 되려면>이라는 찬송가를 불러주기도 합니다. 첫날 묵은 호텔에서 만난 웨이트리스나 손님들 모두 해럴드가 떠날 때 그가 여행을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걷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망설임 없이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면 영국 시골의 인심도 참 푸근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유럽 몇 나라를 자전거로 여행했다는 지인의 여행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을을 지나는 외지인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행기나 기차로 질 알려진 장소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여행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걷는 일이 별거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는 매일 10km 정도 꾸준하게 걸어서 휴가기간 중에 모두 100km를 걸었습니다. 걸은 다음 샤워를 하고나면 나른한 느낌에 더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해럴드 처럼 먼 길을 가는 경우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뒤꿈치가 따끔거리고 등이 아팠다. 게다가 발바닥에는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주 조그만 돌만 들어가도 아팠다.”는 해럴드의 호소는 애교로 볼 정도일 것입니다. 해럴드가 걷기 시작하면서 만난 여자의 말은 걷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걷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셨군요. (…) 그냥 한 발 앞에 다른 발을 내놓으면 되는 거라고요. 하지만 본능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놀라곤 해요.(71쪽)” 먹는 것도 중요하고 잠을 자는 장소도 중요한 일이지요. 결국 해럴드는 노숙을 하고 길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야말로 순례자의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까요?

 

헤럴드는 걷는 동안 꾸준히 모린과 퀴니 심지어는 그를 걷게 만든 주유소의 소녀에게까지 편지를 쓰고, 모린과 퀴니에게 줄 선물도 사곤 합니다. 그리고 해럴드의 걷기에 대한 모린의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모린은 해럴드가 퀴니에게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받은 정신이 멍해지는 충격과 곧이어 찾아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노여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120쪽)”는 표현이 어쩌면 정상적인 아내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내가 데이비드를 위해서 이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121쪽)”라는 해럴드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린의 모습에서 이들 부부 사이에 놓인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모린은 걷고 있는 해럴드를 찾아가고, “보고 싶었어, 해럴드. 당신이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어요(305쪽)”라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던집니다. 해럴드 역시 “나도 보고 싶었어. 하지만 모린, 나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평생을 보냈어. 그러다 이제 마침내 뭔가 하고 있어. 나는 걷기를 마쳐야 해. 퀴니가 기다리고 있어. 퀴니는 나를 믿고 있어.”라고 화답을 합니다.

 

사실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해럴드가 걷기 시작한지 한 달도 넘어서 만난 믹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정말로 버윅까지 갈 수 있다고 믿느냐”는 믹의 질문에 “밀어붙이지도 않지만 미적거리지도 않아. 계속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이야기”라고 대답하는 해럴드는 이제 걷기에 달관한 모습입니다. 그런 믹이 헤어지면서 “그냥 아저씨를 기억하려고” 해럴드의 사진을 찍었는데, 믹이 해럴드의 이야기를 ‘코번트 텔레그라프’에 기고하면서 해럴드는 일약 화제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보면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오래하는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해럴드를 따라 버윅까지 걷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 누워있는 퀴니의 회복을 위한 성지순례단이 꾸려진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순례단의 일정을 해럴드가 아닌 사람들이 결정하고 사람들이 모여들다보면 자연히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해럴드는 순례단에서 빠지게 되고, 순례단은 결국 해럴드 없이 요양원에 도착하여 버윅 지역의 유력자들과 매스컴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요양원에서 순례단에게 따로 관심을 두지는 않는 이유는 나중에 밝혀집니다.

 

어떻든 순례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와서 하루, 또는 이틀을 걷다 돌아갔다. 날이 맑으면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운동가, 산책자, 가족, 낙오자, 관광객, 음악가, 깃발, 모닥불, 토론, 준비운동, 음악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암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일을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후회가 되는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수가 늘수록 속도는 느려졌다. (…) 속도는 느렸지만 이 집단은 해럴드에게는 낮선, 묘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제 잡다한 몸통과 발과 머리와 심장이 아니라, 퀴니 헤네시로 묶은 하나의 단일한 에너지라고 말했다.(287-8쪽) 일종의 집단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데서 모이는 힘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걷기 시작할 무렵에 만났던 신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헥섬으로 우회하는 문제로 순례단과 결별한 해럴드는 홀가분해졌지만, 정작 버윅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생긴 오한을 견디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행한 개가 사라지면서 공황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확신이 사라집니다. 모린과 통화하면서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결국 모린의 격려의 도움으로 편지를 부치기 위하여 집을 나선 87일 만에 1000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걸어서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 도착한 해럴드는 이어 도착한 모린과 함께 퀴니의 죽음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해럴드와 모린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든 문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눈빛만으로 뜻을 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부부도 대화를 통하여 진심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에 담긴 비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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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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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참 독특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외로움을 경험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 경우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분명 외로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억이 애매한 것은 누구나 외로움에 빠져들곤 하지만 곧바로 빠져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인간에게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측정하거나, 어떻게 생기는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치료하는 방법은 없는지 하는 다양한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뇌와 몸이 사회적 반응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해온 시카고 대학의 존 카치오포교수는 사회적 유대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외로움에 관한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모아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에 담았습니다. 흔히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만, 정신과 의사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혼자 있는 것의 즐거움을 탐구하고 때로는 혼자 있어 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유전자와 후천적으로 생겨난 개성이 동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람마다 외로움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104쪽).

 

외로움을 느끼는 수준은 20 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UCLA 외로움 측정 기준’이라는 심리학적 검사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외로움은 1. 사회적 단절에 대한 취약성 수준, 2. 고립된 느낌과 관련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3. 다른 사람에 대한 심적 표상과 기대 그리고 추리 등 세 가지 복잡한 세 가지 요인이 서로 작용하여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25쪽). 저자는 외로움의 보편적 구조가 브루어와 가드너가 발견한 자아의 세 가지 차원과 맞아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는데, “자아의 경우 개인적, 상관적, 집단적 차원으로 나타난다면, 외로움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회적 연결관계, 다시 말해서 유대감의 경우도 개인적 연결관계, 상관적 연결관계 그리고 집단적 연결관계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외로움은 분명 심신을 피폐하게 해서 건강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댄 러셀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로움 측정치가 높게 나온 65세 이상 노인들은 향후 4년 안에 요양원에 입원할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131쪽). 저자에 따르면 외로움은 1. 건강한 생활습관, 2. 스트레스 요인, 3. 스트레스 인자와 대응, 4. 스트레스가 일으키는 생리적 반응, 5. 휴식화 회복 등 다섯 가지 경로에 영향을 미쳐서 건강을 해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저자는 외로움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규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7세기 수학자이자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겠지만 서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을 인용한 것을 시작으로, 마음과 몸의 유기적 관계에 관한 다양한 동물실험과 심리실험의 결과를 인용하여 외로움과 사회적 유대관계의 관련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하여 충동을 제어하고 편향된 의미 창출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호관계를 경쟁의 차원에서 협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진화해 오는 과정에서 서로 협동하는 정신이 강화되었는데, 진화생물학자 마르틴 노바크는 사회적 협력은 다섯 가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왔다고 정의하였습니다. 1. 혈연 선택, 2. 직접 호혜주의, 3. 간접 호혜주의, 4. 네트워크 호혜주의, 5. 집단 선택 등입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사회적 협력은 침팬지나 보노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에서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하여 사회적 유대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저자는 1.다른 사람에게 손내밀기, 2. 구체적인 행동계획, 3. 선택, 4. 최선을 기대하기 등을 묶어서 EAS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는 늘 얽히고설켜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외로움은 더 많은 요구를 부른다, 2. 외로움은 남을 비난하게 만든다, 3. 외로움은 수동적인 행동과 위축을 부른다, 등입니다(326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의 사회적 현실 대부분을 우리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외로움의 생물학을 통해서, 더 큰 행복, 심지어 경제적인 풍요까지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행동이라는 교훈에서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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댜웅 2013-08-2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신데요. 전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데.

처음처럼 2013-08-29 21:39   좋아요 0 | URL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낀다는 분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덜 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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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해보겠다고 팔을 걷고 나서서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여전히 암중모색인 것 같습니다. 과학분야에서 일하다보니 특히 철학부문은 거의 앎이 없다시피 해온 까닭에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개론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리뷰에 적기도 했습니다만, 드디어 저의 생각에 꼭 맞는 느낌이 드는 책을 만났습니다. 로제 폴 드르와의 <처음 시작하는 철학>입니다. 철학의 전체를 다룬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골라 그분들의 삶과 대표적인 철학적 사유를 정리하였습니다. 시대별로는 그리스,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 고전주의시대, 계몽주의시대 그리고 현대로 구분한 것 같습니다. 모두 열아홉 분의 철학자들과 그리스시대의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제논,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묶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대별 대표적 철학자들을 고르다보니 일종의 통사(通史) 형태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옮긴 박언주교수님은 “이 책의 취지는 서양철학사에 대한 한 편의 화려한 파노라마도 아니고, 전문 철학 참고서가 되고자 함도 아니다.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전무한 독자들, 단 진리 추구 모험에 동참할 의지만은 마음 한구석에 늘 안고 사는 독자를 철학에 가장 쉽게 접근하게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목적에서 출발한 책이다.(347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나이에 상관없이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라고 들어가는 말의 서두에 적은 저자의 집필의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자는 시대별로 구분된 철학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리스 철학을 요약하여 “최초의 철학 행위는 일정한 체계에 따른 진리추구였다. 철학은 시적 언어, 즉 잠언이나 직관적 방식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그 이후 플라톤이 등장하면서 철학의 언어는 변화를 맞이한다. 신화의 언어가 증명과 논거, 개념의 분류와 논리적 절차를 통해서만 가늠되는 진리추구에 그 자리를 내어주기 때문이다.(22쪽)” 저자가 플라톤을 이 책에 처음 등장시킨 이유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일단 어렵기만 한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쉽게 풀어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읽다보면 눈길을 끄는 구절이 많습니다만, 이런 부분에 표시를 달았습니다. “행복은 우리 손닿는 곳에 있다. 행복은 다가갈 수 없는 목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두려움과 잘못된 생각, 오류화 방황만 폐기할 수 있다면 언제나 가능하다. 철학은 행복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다. 철학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묘약이다. 제대로 확실하게만 처방하면, 우리는 이 약을 통해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53쪽)”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아테네에 살았던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지나간 ‘힐링’에 이어 떠오르는 화두가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 행복을 누가 가져다줄까 궁금했는데, 철학이 바로 답이라는 것을 2,500년 전에 가르치고 있었군요.

 

이 책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나름 들어본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역시 철학의 깊이가 부족한 탓에 생소하다는 느낌이 드는 철학자도 두어 분 있었다는 무식한 고백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증장인물아 철학적 사유를 완성해가는 과정까지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어 이해를 더할 수 있고, 여유가 없는 분들을 위하여 그 분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작을 필독서로 추려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간략하게 서너줄로 그의 철학을 요약하고, 이어 논할 철학자에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요약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철학이란 생각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며,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을 체에 걸러 꼼꼼히 검토하여 지속 가능한 견고함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11쪽)”는 구절을 새기는 것으로 이 책을 읽은 값어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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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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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까닭에 생각해볼 일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을 한번 옮길 때마다 새로 맡은 분야에서의 도전, 아이디어를 모아 기획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사연들,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준비해서 추진하던 일들을 놓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들... 아마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담아 자신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전히 일에 묶여 기록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작가로 성장해온 배경을 이스탄불이 변화해온 과정과 엮어서 기록한 자전적 회고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생물인 건물과 거리로 구성되는 도시가 세월을 따라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시가 성장할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하루가 다르게 거리와 건물이 늘어나고 활력이 넘치지만, 내부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활기가 줄어들면서 건물도 퇴락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동물이 늙어 쇠락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비잔틴 시대를 거쳐서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접점에 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과거인물들이 남긴 기록과 또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온 것들을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는데, 그 안에는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글로 적어내기 어려운 부분은 이스탄불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물론, 1819년에 발간된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의 세밀화는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모습들, 혹은 퇴락해서 스러져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도 기록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파묵의 기억에 갈무리된 그런 사건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나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해오고 있는 이난아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너무나 허망하고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너무 빠르게 새로워져 가는) 이스탄불의 소멸에 대한 저항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 자신의 방식으로 이스탄불의 쇠락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이스탄불이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란 자신과 도시를 혐오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이스탄불에 대한 파묵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의 가난한 변두리 마을까지도 사랑하는 그는,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그 마을, 즉 폐허로 덮인 그 가난한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351쪽)”

 

한편으로는 숨겨두고 싶을 것 같은 개인 혹은 가족의 어두운 과거사까지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밖으로 도는 아버지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과 갈등,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형과의 힘겨루기, 첫사랑 이야기 등 자신이 작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성장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연결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여 사는 파묵아파트는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 등장하고 박물관 같은 할머니집의 거실 풍경은 <순수박물관>의 배경이 되었고, 레샤트 에크렘 코추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에 관한 이야기는 <고요한집; http://blog.joins.com/yang412/12957187>에서 백과사전의 편찬에 매달리는 의사 셀라하틴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파묵이 어렸을 적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한기르에 있는 이모집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는 꼭 제가 어렸을 적 외갓댁으로 보내졌던 일이 생각나게 하고, 가족들이 차를 타고 보스포루스로 산책을 나가면서 형과 싸웠다는 이야기에서는 미국여행길에 아이들이 싸우는 통에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해서 지나칠 것 같은 일에서 읽는 이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파묵의 세심한 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탄블>을 읽으면서 언젠가 꼭 방문할 도시의 목록에 이스탄불을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저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정리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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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매주 토요일 심야시간에 방영되는 리얼 체험 프로젝트 <인간의 조건>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이미 우리네 삶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문명의 이기를 배제한 삶을 통하여 그 소중함을 느끼게 하거나, 생각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생활패턴에 제약을 두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원산지와 생산자가 확인되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먹을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만약 한 차원 높여 스스로 얻은 식재료, 혹은 스스로 얻은 식재료로 교환한 음식만을 먹을 수 있도록 한다면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요? 당장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수렵이나 채집을 해야 끼니를 해결하게 될 터인데, 들이나 산에 나가 채집한 식재료가 독이 없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굶는 도리밖에 없겠습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우리가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식품의 재료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제공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유칼립투스나무잎만 먹고사는 코알라와는 달리 인간은 식물, 동물에서 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품을 먹을 수 있습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나무잎의 모양과 냄새만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면 되지만, 채집과 수렵시기의 인간들은 비슷한 모양이나 냄새를 가진 다양한 것들 가운데 독이 있는 것을 가려내야 해를 입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면 먹을 수 없다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경기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식물을 길러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고, 산업사회에서는 식품분야의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com/yang412/12583563>에서 밈(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지식의 축적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판단과 기억을 공유하는 문화라는 이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하여 축적한 음식에 관한 풍부한 지혜를 문화로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금기, 의식, 조리법, 예절, 전통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 안에서 지혜로운 식사규칙을 규범화해놓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식사 때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19쪽).

 

인구가 늘고 식품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딜레마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빵과 파스타를 삼가면 고기를 많이 먹으면서도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로버트 엣킨스박사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황제다이어트로 알려진 다이어트법의 이론적 바탕이 된 연구이기도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건강의 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스테이크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반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던 빵과 파스타는 도덕적 오명을 뒤집어쓰고 수많은 빵집과 면류제조회사가 파산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엣킨스박사의 주장은 몇 가지 새로운 역학연구결과로 지지하는 분위기를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국가적 섭식장애라고 표현하고 식문화를 통하여 극복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사례로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이 이념적 주장 때문에 식품으로서의 안전성이 의심받았던 2008년 광우병 파동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에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입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산 쇠고기 혹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하여 땅에서 식탁까지 식재료가 어떻게 생산되고 식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음식사슬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음식사슬은 태양광선으로부터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식물로부터 그런 능력이 없는 종들에게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시스템입니다. 식품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해결하던 시기로부터 유기적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길러 먹거리로 이용하던 시기를 거쳐 농작물과 가축을 산업적으로 생산하여 먹거리로 만드는 시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먹거리가 발전해온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가면서 음식사슬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제 1부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을 먼저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2부에서는 저자가 전원적 음식사슬이라고 부르는 산업농업의 대안방식(유기농, 지역농업, 생물학적 농업, 초유기농 등)으로 생산되는 음식사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 3부에서는 후기 구석기적 음식사슬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렵·채집 음식사슬입니다.

 

저자는 이들 세 가지 음식사슬 모두에서 경험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가에서 옥수수재배와 관련된 노동을 직접하고 축산농가에서 공장식(?)으로 키우는 소를 키우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였는데, 닭을 키우는 농장이나 공장식 도축시스템을 적용하는 도축장은 보안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직접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유기농 기법으로 경영되는 농장에서 밭작물과 가축을 키우고 도축하는 과정은 직접 경험한 것들 입니다. 마지막으로 맷돼지를 사냥하고 버섯과 소금을 채집하는 경험을 직접하고 그렇게 얻은 식재료를 가지고 직접 조리를 해서 특히 사냥과 채집을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조그만 파티로 음식사슬을 탐구하는 저자의 긴 여행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 가지 음식사슬 가운데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는 단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후 간식시간에 구수한 냄새가 딱 좋은 찐옥수수를 먹을 수 있는 계절입니다. 강원도 옥수수가 간식거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만, 옥수수에 숨어있는 놀라운 비밀을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중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1492년까지 구세계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인데, 옥수수가 우리의 땅과 몸을 점령해온 이야기는 식물세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스토리 가운데 하나라고 저자는 단정합니다. 1621년 봄, 원주민 스콴토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운 미국 최초의 청교도 이주민들은 구대륙에서 들고 온 밀이 혹독한 신대륙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전적 변이성이 뛰어나 새로운 환경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옥수수야말로 답이었던 것입니다. 옥수수의 풍요로움 덕분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옥수수씨 한 알을 심으면 150알 이상, 많게는 300알까지 생산되었는데, 1950년대 개발된 화학비료가 더해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여기에 유전자재조합방식으로 개발된 신품종은 대단한 생산량을 보장하게 된 것입니다. 병충해 뿐 아니라 밀식재배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 1920년 아이오아에서 1에이커당 평균 20부셀(미국도량형으로는 35.2리터) 생산되던 옥수수는 1950년대 70~80부셀로 늘고, 지금은 200부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옥수수가 자라는 일은 언제나 태양광선을 포획하여 이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는데, 이제는 상당 부분이 화석연료를 음식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67쪽)

 

미국대륙에서 옥수수가 넘쳐나게 된 것은 각종 보조금을 포함한 정부 정책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옥수수 가운데 사람들이 직접 먹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가축사료의 원료가 되거나, 옥수수를 증류하여 에탄올을 만들고, 그리고 옥수수로부터 고과당옥수수시럽을 포함한 다양한 식품첨가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블레어목장에서 송아지를 사서 입식하는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도축되는 과정도 뒤쫓았습니다.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풀을 양질의 단백질로 바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의 반추위는 용량이 45갤런이나 되는 발효탱크로서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가 풀을 셀룰로오스로 분해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진화된 것입니다. 이런 소에게 엄청난 양의 옥수수와 단백질 및 지방보충물,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약물을 투입하여 불과 14개월 만에 80파운드에서 1,100파운드로 만드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만해도 4~5년 걸리던 일입니다. 농축칼로리라고 할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는 금세 살이 찔 뿐 아니라 고기의 마블링이 좋아서 소비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인데, 풀을 먹도록 진화된 소가 옥수수 사료만 먹게 되면 고창증과 산중독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이번에는 항생물질을 사료에 첨가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소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하여 동물성 단백으로 만든 육골분을 사료에 첨가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광우병이 발생하고 인간에게까지 전달되는 불행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작은 풀입니다. 저자는 닭과 소, 칠면조, 토끼, 돼지에다 토마토, 단옥수수, 딸기류까지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들을 키우고 있는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에서 초유기농 농산물과 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생산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100에이커의 목초지에서 4만 파운드의 쇠고기, 3만 파운드의 돼지고기, 1만 마리의 영계, 1,200마리의 칠면조, 1,000마리의 토끼, 42만개의 달걀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하여 목초지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풍요로워지는데, 풀은 더욱 무성해지고 땅은 더욱 비옥해지고 건강해지는 것은 지렁이 덕분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주 셀러틴은 우리가 먹을 음식을 생산하는 일이 제로섬 게임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먹을거리를 거두어들인다고 해도, 자연이 꼭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고-표토가 줄어들거나 생산력이 줄어들거나 서식 생물이 감소한다고-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무와 풀, 야생동물 그리고 가축이 모두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방식의 농장경영을 통하여 농장폐기물을 줄이고 인공화학물질의 투여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폴리페이스 농장의 또 다른 특징은 이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은 대부분 농장 인근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점입니다. 산업적 음식사슬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이오아주에 있는 옥수수농장으로부터 캔자스시티의 사육장과 포장공장을 거쳐 이곳저곳에 산재해있는 식품가공업체로 흩어진 식재료가 마린 카운티의 맥도날드 매장에 이르기까지 대략 1,500마일을 이동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대단히 짧은 식품마일리지라고 하겠습니다. 이 농장에서는 농장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팔거나 농민장터, 대도시의 구매클럽, 인근의 소규모 상점, 혹은 원하는 레스토랑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농장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신선하다는 점과 도축과정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오래 전 방문했던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가 도축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짐승을 도축하는 모습을 보면 그 고기를 먹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자가 다루지 않고 있는 공장식 도축시스템에 관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게일 아이스니츠의 <도살장; http://blog.joins.com/yang412/10092378>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쓰면서 ‘알고는 먹기 어렵겠네요’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을 보면 저 역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세 번째 주제 ‘수렵과 채집의 음식사슬’은 내가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고, 재배한 식재료들로만 저녁식사를 준비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런 방식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사냥감, 야생식물이나 버섯도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잡식동물의 축복은 자연에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데 있는 반면 잡식동물의 저주는 그 가운데서 먹어도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365쪽)”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고르든 그것이 산업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애써 떠올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라는 마무리 글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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