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달린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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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말에 양재천 산책길에 나가면 땀을 뒤집어 쓴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마지막으로 달려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달리는 재주가 없어 단거리는 반에서 꼴찌를 면한 적이 없고, 장거리 달리기 역시 달리기 시작하면 이내 숨이 턱에 차서 주저앉는 편이 수월해서인지 걷기는 할지언정 달리기는 기피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달리기 열풍으로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데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분들도 이유가 참 다양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혹은 기록에 도전하기 위하여 등등... 그런데 철학자는 왜 달리기를 할까요? <철학자가 달린다>는 제목의 책을 보고 첫 번째 든 궁금증입니다. 영국 웨일스 뉴포트 출신으로 현재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마크 롤랜즈교수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야성이 남은 늑대와 11년을 같이 지내면서 돌아보게 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내 인기몰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늑대가 롤랜즈교수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집안의 물건들을 물어뜯어 자칫 집안이 초토화될 위기를 맞으면서 개를 지치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여덟 개로 나눈 글은 저자의 달리기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세월을 거슬러 소년시절을 보냈던 영국의 미니드 마엔에서 개 부츠와 달리기를 하던 1976년의 기억, 앞서 말씀드린 늑대 브레닌과 달리기를 하던 아일랜드의 레스모어반도에서의 1999년의 추억, 이어서 마이애미로 이주한 2007년 새로 만난 개 휴고와 마이애미의 위험한 소택지를 달리던 추억, 그리고 늑대 브레닌과 프랑스 오브강둑에서 늑대 브레닌과 마지막으로 달리던 추억을 거쳐서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를 마무리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기르던 개 부츠와 동네 야산을 뛰어오르던 롤랜즈교수가 늑대 브레닌 때문에 다시 뛰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말벗도 하고 격려도 주고받거나, 바람도 함께 느끼면서 같이 있으려고 함께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롤랜즈교수는 개 혹은 늑대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거리 달리기가 궤도에 오를 때마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기는 사유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으로, 저자는 자신의 육체가 달릴 때, 그의 사유도 장비나 선택과는 거의 무관한 방식으로 함께 달린다(80쪽)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자신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달리기! 이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활동이 도대체 있을까? 달리는 동안 정신은 육체와 함께 달아나고, 뇌 속과 다리의 리듬과 팔의 흔들림 속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만개해 고동치는 것 같다.(81쪽)’라고 한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나 ‘내가 달릴 때, 나의 정신은 텅 빈다. 달리는 동안 드는 모든 생각은 그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달리는 동안 나를 덮치는 사유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돌풍과 같다.(82쪽)’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결정한 마라톤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아리근육이 파열하는 위기도 맞게 되지만 출전을 강행하게 된 것은 쇠락하는 육체와 정신의 한판 승부를 붙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의 자유를 스피노자보다는 데카르트의 자유라고 비유하고 있는 저자는 마이애미 마라톤대회에서 하프코스에서 풀코스를 뛰기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달리기와 사유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자아가 독립된 부분이나 단면들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체화된 형태에서 데카르트의 탈육체화를 거쳐 흄의 춤추는 사유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221쪽)” 이런 단계를 자아의 해체과정이라고 본 저자는 하프코스를 넘어가면서 느낀 사르트르기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스피노자기에서 데카르트기를 거쳐 흄기까지 오는 동안 자아는 육체와 정신의 연장선에서 정신으로 그 다음은 다시 사유로 축소된다. 사르트르기에는 정신이 사유에서 무(無)로 더욱 축소된다.(223쪽)”

 

이처럼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누낌을 철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사유한 결과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 색다른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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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 사유의 스승이 된 철학자들의 이야기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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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제철학학교의 로제 폴 드루아 교수님의 신간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을 읽었습니다. 드루아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일상에서 철학하기; http://blog.joins.com/yang412/12905092>였습니다. 저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이라는 부제를 달아, 지극히 평범한 일상 행위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우리에게 의외의 놀라움을 안겨주고 이 놀라움으로부터 철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희망했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하여 ‘철학’이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학문이라는 인식을 뛰어넘어 일상의 삶 자체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와의 두 번째 만남은 일상의 의미에서 조금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통사(通史) 형태로 요약한 <처음 시작하는 철학; http://blog.joins.com/yang412/13199292>이었습니다. 그리스,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 고전주의시대, 계몽주의시대 그리고 현대로 구분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스물세 명(사실은 네 명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을 한 명으로 묶는다면 스무 명이 됩니다.)의 서양철학자들을 고르고 그분들의 삶과 대표적인 철학적 사유를 정리하였습니다. 처음 만남에서는 엉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방대하다고 할 서양철학의 핵심을 철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요약하고 있어 철학적 내공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 될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은 <처음 사직하는 철학>의 속편으로, 역시 전편과 같은 형식으로 <사유의 스승들>이라는 원제처럼 모두 스무 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과 정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 철학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미국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이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대부분철학의 깊이가 없는 저도 이젠 익숙한 이름입니다만, 그래도 간혹은 정말 처음 이름을 듣는 분도 있습니다.

 

출판사 리뷰를 요약하여 얼개를 다시 정리해보면, 이 책은 일곱 가지 주제에 따라 스무 명의 사유의 스승들을 분류하여, 그들의 철학을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부에서 고대 철학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서 잃어버린 명증성을 찾아 다시 경험으로 돌아온 앙리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본질이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경험할 수는 있다는 확신을 가진 분들입니다. 2부에서 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뭇 다른 견해를 가졌던 버트런드 러셀,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다루었습니다. 20세기 철학에서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언어’가 소리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추구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한나 아렌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을 분석하였습니다.

 

4부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의미의 해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지난 2천여 년에 걸쳐 이어오던 인간의 질서 - 더 행복하고, 정의롭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어왔던 -가 빠르게 붕괴되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지구적 파괴현상을 두고 침묵한 철학자들과 달리 의미와 무의미, 우연성과 자유, 행동과 부조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성찰해온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알베르 카뮈를 다루었습니다. 5부에서는 진리는 해방을 가져오고, 새로운 자유를 창출한다고 믿고, 정신의 문을 열어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 마하트마 간디, 루이 알튀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철학을 분석하고 6부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 인간 개념의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노력한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에마뉘엘 레비나스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논쟁과 대립을 통하여 인류가 맞고 있는 위기를 해결할 무엇이 도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현대철학은 여전히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마지막 7부에서 자크 데리다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경험, 과학, 언어, 자유와 부조리, 진리 탐험, 위기, 논쟁 등 일곱 가지 키워드를 중점적으로 파헤쳐온 선각자들의 생각들을 읽다보면 진리를 향한 인간의 모험은 계속되고, 역사의 가능성 또한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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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한 클래식 - 음악이 삶에 가르쳐주는 소중한 것들
요아힘 카이저 지음, 홍은정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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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부터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부문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앎을 넓혀보려는 노력조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바탕이 얇은 탓에 이해하는데 힘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무슨 공부든지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다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처럼 전통 클래식에 관한 공부기회가 생겼습니다. ‘음악비평의 교황’이라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의 <그가 사랑한 클래식>을 읽게 된 것입니다. 1928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난 요아힘 카이저는 음악학, 독문학, 철학, 사회학(테오도르 W. 아도르노에게 사사)을 전공했고 <쥐트도이췌 차이퉁>에 입사한 이래 클래식 음악전문 저널리스트로 50년 넘게 음악비평을 싸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며, 1977년부터 1996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 음악·조형예술 국립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고 합니다.

 

<그가 사랑한 클래식>은 요아힘 카이저의 클래식 에세이입니다. 특히 클래식 애호가들이 그에게 보내온 질문들에 대하여, 독일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카이저의 클래식 수업’이라는 비디오 칼럼을 통하여 답을 주어왔는데, 2년여 간 연재된 칼럼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녹아나는 글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어렵게만 생각되는 클래식음악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4분 33초 동안 아무 음도 연주하지 않는 휴식을 둔 <4분 33초>라는 피아노곡을 설명하면서 휴식마저도 음악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위대한 음악은 항상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결코 중단되는 법이 없으며 그 안에 움직임을 품고 있다. 그 속에서 무언가 감동적이고 감정적인 것, 무언가 우울하거나 경쾌한 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음악은 어떤 내용, 중요한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휴식, 휴지부는 영혼의 숨고르기와 같다.(33쪽)”

 

<그가 사랑한 클래식>을 읽으면서 몇 차례 눈길이 멎은 것은 바그너에 대한 의문들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과연 독일 사회에서 용인되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반유대적이며 아돌프 히틀러가 숭배하던 음악가를 진지하게 대해도 괜찮은 것인가의 문제였다.(77쪽)” 역시 일제시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던 예술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나치의 기수’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독일국가민주당(1964년 창당한 독일의 극우정당)을 지지할 위험에 빠지게 될까?(207쪽)”라는 질문에 대하여 “독일국가민주당에 표를 던질 이유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겨 듣는다고 해서 갑자기 그 당의 지지자로 둔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정치적 입장의 토대가 될 수 없다.(208쪽)”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모두 암기해서 연주해야만 하나?”라는 질문에 대하여 연주자의 기억력에 관한 글도 흥미롭습니다. 연극제작에 참여하다 보면 배우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배우들의 대사를 모두 외울 수 있게 됩니다. 오랜 시간을 배우들과 같이 연습을 진행하다보면 절로 외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훈련을 거치면 악보에 담은 연주내용을 모두 암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프란츠 리스트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외우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반면 요하네스 브람스는 한 번도 악보를 연주회장에 들고 간 적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하구요.(91쪽)

 

조금 아쉬운 점은 57꼭지의 이야기들 가운데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기를 권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바그너의 오페라의 경우 ‘클래식, 들어볼까요?’에서는 볼프강 빈트가센이 부르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중에서 <머나먼 나라에>를 들어보라 합니다. 느끼신 것처럼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악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저자가 추천하는 음악들을 따로 모아 CD로 제공했더라면 이 책이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허영한 교수님이 오라토리오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담은 <헨델의 성경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2555544>에서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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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 1~2 세트 - 전2권 - 문학으로 지구를 읽고, 환경으로 문학을 읽는다
이시 히로유키 지음, 안은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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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계 출신으로 오랫동안 환경문제를 천착해온 이시 히로유키님은 우연한 기회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극시<브란트> 속에 백 수십 년 전 영국에서 국경을 넘어 북유럽까지 날아온 대기오염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문학 속에서 다루고 있는 지구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뒤쫓게 되었다고 합니다. <닛케이 에콜로지>를 통하여 연재해오던 성과물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것이 <세계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문학일까요?

 

안상헌님은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com/yang412/13062938>에서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한 문장을 얻기 위하여’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원리를 알면 세상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 접근방법으로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으로, 전면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방식은 철학, 역사, 문학, 즉 인문학의 핵심입니다. 문학을 떼놓고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두고 연결가능한 모든 부분을 동시에 조망하면서 파악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터키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은 “나에게 소설 쓰기란 사물과 이미지로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각을 감지해 내는 기량이다.”(소설과 소설가, 89쪽; http://blog.joins.com/yang412/12935937)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에서 소유물, 그림, 사물, 잡동사니의 풍부함이 불러일으킨 사회적·개인적 욕구를 소설 속 풍격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작가는 발자크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 <고리오 영감; http://blog.joins.com/yang412/13203157>의 서두를 보면, ‘<모든 것이 사실이다.>’라는 셰익스피어 <헨리8세>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드라마는 너무도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나, 어쩌면 자기 마음속에서 이 드라마의 요소들을 인정할 게다.(9쪽)”라고 적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세계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의 저자는 집필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명작에 등장하는 환경 문제를 날실로 하여 문제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그 후의 전개를 꿰고, 동시대 인물·사건과의 연관성을 씨실로 하여 사람과 환경이 촘촘히 엮인 역사를 펴 보이려 한 것이 이 책이다.(6쪽)” 그렇습니다. 출발은 문학작품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련된 많은 분야를 섭렵하여 인문, 사회, 과학 등을 아우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장융의 <대륙의 딸>을 통하여 마오쩌뚱의 제철입국을 위한 정책이 가져올 파국을 다루면서 저자는 “1958년 가을, 6세였던 나는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 매일 학교를 오가며 나는 자갈 사이의 흙 속에 박혀 있는 구부러진 못, 녹슨 쇳조각, 기타 금속 물체를 줍기 위해 길바닥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걸어야 했다.”는 구절을 인용하지만, 작품의 기획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작가에 배경도 살피고, 사건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전하기 위하여 신문기사, 보고서 등등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스물 세 꼭지나 되는데 주제는 제한적인 것 같습니다. 주로 자연을 남용해서 일어나는 기후변화, 고래와 코끼리의 멸종위기, 스페인독감을 비롯하여 산업화과정의 결과로 환경이 오염되어 생기는 질병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출애굽기>, 메소포타미아지방의 <길가메시 서사시>, 플라톤의 <크리티아스: 아틀란티스 이야기>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 동서고금을 망라한 작품들에서 환경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고 있어, 그의 관심이 얼마나 방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삼림의 남벌로 인한 자연재해입니다. 황사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인구감소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철기시대로부터 석탄과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이전 단계까지 나무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이고, 해양운송과 전함건조를 비롯하여 건축자재로 엄청난 분량의 나무들이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스터섬의 모아이로 대표되는 것처럼 종교적 목적의 건축물을 조성하는데도 삼림을 필요로 하였던 것인데,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나무들은 대부분 생장에 적지 않은 기간에 필요하기 때문에 대체할 수 있는 수목을 얻으려면 오래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주요 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세계인들의 관심 밖에 있던 이스터섬에 관심을 쏟았던 노르웨이 인류학자 토르 헤위에르달의 <아쿠아쿠: 고도 이스터 섬의 비밀>을 인용하면서 삼림파괴의 비극을 정리한 경우를 보겠습니다. 최근 연구에서 폴리네시아로부터 건너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만, 헤위에르달은 이스터섬의 주민들이 남아메리카에서부터 왔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초원은 있으나 숲은 거의 보이지 않는 이스터섬이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헤위에르달은 “달세계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스터 섬의 원추형 사화산에 올라가 보라. 그러면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스터 섬은 바다와 하늘 사이에 걸려 있는 작은 섬이다.(112쪽)”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4,000년 전 약 200명이 이주해온 이스터섬 주민들은 18세기에 7,000명에서 1만 명까지 늘었는데, 인구가 늘면서 씨족 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종교의식에 집착하면서 종교의식으로 제작되던 모아이의 크기와 숫자도 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아이의 제작에는 막대한 노동력과 그들을 부양할 식량 그리고 목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이스터섬의 제한적인 자원은 결국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원남획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사회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나 라오서의 <낙타 상즈>에서 다루고 있는 황사현상은 결국 집약식 농업으로 지력을 상실한 초원이 사막화되면서 거대한 흙먼지폭풍을 불어오고, 황사는 광대한 영역에 걸쳐 사람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매년 봄 반복되던 황사경보가 최근에 뜸해진 것은 결국 우리나라 기업과 자원봉사자들까지 나서 중국의 고비사막을 비롯한 황사발원지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녹화사업에 참여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최근 일본의 후지산이 대규모 분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거나, 백두산 역시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지구과학자들의 경고를 듣곤 합니다만, 대규모 화산폭발은 해당지역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지구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사례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만과 편견>으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에 나오는 한 장면, “그 농장과 비옥한 목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양떼, 꽃이 만발한 과수원,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차분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에서 영국에서는 통상 5월에 피는 사과꽃이 6월 하순에 피었다고 서술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엠마>를 집필하던 1814년 1월부터 1815년 3월 사이 영국은 이상저온에 보였는데, 이는 카리브해 세인트빈센트 섬의 수프리에르 산과 인도네시아의 아우산(1812년), 가고시마 현의 스와노세 섬(1813년), 필리핀의 마욘산(1814년) 등 대규모 화산 분화가 이어져 이상 기후가 한층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1815년 말 집필을 마치고 퇴고 중이던 4월에 인도네시아의 탐보라산이 대분화를 일으켜 한랭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입니다(2권, 60쪽).

 

일본이 2020년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오염의 위험을 감추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이 우경화되는 경향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에서 일본이 지구환경에 개입한 구체적 사례를 별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미심쩍었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으로 풀어내고 있는 고래남획의 사례에서도 유럽과 미국의 무차별적인 남획으로 고래가 빠르게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래남획의 현장에 남아있던 일본에 대하여는 “특히 일본을 통치했던 미국 주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에 원조하는 식량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래고기의 소비를 장려하기도 했다.(2권, 22쪽)”거나 “일본은 연안에서 끝까지 상업포경을 이어갔고 1988년을 마지막으로 그만둘 때까지 국제적인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2부, 23쪽)”고 간략하게 적고 있어 지나치게 필봉을 사리는 자세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독일의 헤켈이 에콜로지의 개념을 정립하기 약 200년 전에 이미 자연보호를 내세웠다는 구마자와 반잔(1619~1691)의 <대학혹문(大學惑問)>을 인용하여 일본에서의 삼림남벌과 보호의 역사를 정리하는 대목에도 마찬가지 대목입니다. 반잔은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자연은 나라의 근간이다. 요즈음 산이 망가지고 강물이 얕아졌다. 나라가 심각하게 황폐해졌다. 예로부터 이런 사태에 이르면 세상이 혼란에 빠져 100년이고 200년이고 전국(戰國)의 세상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2권 80쪽)” 일본의 삼림역사를 보면 3번의 삼림 소실기가 있었다는 것인데, 6세기말 아스카 시대부터 9세기 중반 개간과 함께 장원이 발달하던 시기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부터 에도 바쿠후 체제가 확립되던 17세기 중반까지, 그리고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후 부흥기라고 합니다. 조선이 일제 치하에 있을 때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의 깊은 산에서 아름드리나무들을 벌채하여 강물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평야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일제가 조선의 깊은 산에 우거져 있던 나무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시바 료타로의 글을 빌어 한반도의 숲을 황폐시킨 것과 일본은 관련이 없다고 피하는 듯합니다. 석탄이 상용화되기 전까지 제철산업의 에너지원은 목탄이었기 때문에 제철산업이 숲을 망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시바는 “제철로 삼림을 잃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한반도의 제철공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설을 전개했다는 것입니다. 우수한 제철기술은 곧 전쟁의 판세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제철기술자는 물론 제철에 필요한 자원을 허투루 관리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경우 지질학적으로 산이 노쇠한데다가 기후도 일본 열도보다 건조한 탓인지 산림을 지속적으로 베어내면 암석이 드러나고 이윽고 민둥산이 되는 일이 많았다. 산이 벌거숭이가 되자 그들이 이즈모로 건너왔다는 것이 나의 추정이다.(2부, 215쪽)”라고 적었다거나, “최근 민둥산이 특징적인 풍경이라 여겨지는 한반도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민둥산은 겨울철 온돌에 쓸 땔감을 너무 많이 베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라 전해지나, 고대 한국의 수준 높은 금속 문화를 생각하면 반드시 난방에 쓰기 위한 벌채만이 그 원인은 아니라고 본다.(2부, 210쪽)“고 적었습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일제가 주도했던 벌채와 6.25사변의 전란의 영향은 고려하지 않고 국민의 무책임한 행동 탓이라 치부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닛케이 에콜로지에 연재할 무렵 환경문제로부터 문학으로 들어가게 된 학생이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문학은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가능한 영역 같습니다. 저 역시 문학으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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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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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할 적에 장아누이가 각색한 소포클레스 원작의 <안티고네>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서슬이 퍼렇던 제3공화국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어서였던지 권력의 표상인 크레온왕에 대한 안티고네의 저항을 응원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연결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때는 공연을 준비하는 일도 벅차서 따로 읽어보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오이디푸스 일가의 비극을 새겨보기 위해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모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강대진교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오이디푸스 왕>에는 소포클레스 원작의 비극,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아이아스 그리고 트라키스 여인들 등 4편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려합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가 낳은 아들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죽이고 아내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자 죽이라는 밀명을 내리게 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신탁이 내려지는 경우에는 지난날의 알게 모르게 저지른 과오에 대한 신의 업보로 내려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신탁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신탁이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피를 받은 자식을 버린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죄과를 짓는 일이고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고, 이어서 두 아들과 딸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는 신의 뜻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이디푸스를 살해하라는 라이오스의 명을 받은 신하가 왕명을 어기고 오이디푸스를 살려준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신탁을 받은 운명임을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라면 누군가 죽여야 할 상황이라면 제고에 제고를 거듭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끊임없이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디푸스>를 읽어가다 보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한 외디푸스가 신탁을 받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가 살해된 라이오스를 대신하여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어 장성한 다음에 역병이 돌아 위기에 처한 테바이를 구할 방안을 묻기 위하여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에 신탁을 받기 위하여 처남인 크레온을 보내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점은 크레온이 자신의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의심하는 정황이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크레온이 받아왔다는 신탁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크레온이 데려왔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들일 생각을 했는지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물론 라이오스의 명을 받았던 신하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하는 등 꼬인 실타레를 풀어내는 증언이 결국 신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됩니다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아들이 아버지를 적대시하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본능의 표현”으로 해석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입양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를 아버지로 알고 자라다가 신탁을 두려워하여 외국으로 떠도는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무엇을 근거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자녀들을 돌보아주기를 부탁받은 클레온은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테바이의 왕권을 둘러싸고 대결하다가 모두 죽음을 맞은 다음에 테바이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결국은 오이디푸스의 두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까지도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을 꾸며내게 된다는 점도 이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음과 같은 오이디푸스의 부탁을 저버린 셈입니다. “오, 메노이케우스의 아들이여, 이들을 낳은 두 사람이 모두 파멸하여, 그대만이 이들의 아버지로 남았으니, 그대의 친족인 이들이 남편도 없이 거지로 유랑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이들이 나와 같이 불행해지도록 만들지도 말아 주시오.(오이디푸스 왕 114쪽)

 

안티고네에서도 외세를 빌어 테바이의 왕위를 노렸던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한 크레온의 포고에 대하여 인륜을 내세워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안티고네의 고집스러운 대결양상 또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었다는 그리스 신들의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합리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고 의문이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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