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의 민족학자(民族學者)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적 저서 <슬픈 열대>를 읽었습니다. 적지 않은 인문서적들이 읽기를 추천하고 있어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정작 읽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슬픈 열대>의 첫 구절입니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105쪽)” 저자가 지금은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민족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브라질을 떠나온 것이 15년 전인데, 그동안에도 수없이 해오던 책쓰기를 미루어 온 것은 자신이 해온 민족학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는 시시콜콜할 모험이야기를 써야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민족학자의 시각에서 서구문명의 유입으로 왜곡되어 가는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참담함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삼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부드러우면서도 무력한 희생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내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145쪽)” 그러면서도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여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레비-스트로스를 갈등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상호 교섭할 수 있는 힘이 생겨 그들의 접촉을 통해 서로를 부식시키는 일이 드물수록, 각기 다른 문화에 파견된 사자는 그 문화의 다양성의 풍부함과 의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149쪽)”

 

문화인류학 분야의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요즈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정글의 법칙> 류의 연예오락프로그램들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의 곁으로 끌어오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한낱 웃음거리로 지나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인류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분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자가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1998년에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편찬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는 좋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돈희교수님은 기획의도를 담은 머리말에 “인류학에서 발달된 중요한 개념인 ‘문화상대주의’란 세계 여러 문화를 우리 자신의 가치관이나 우열의 척도를 가지고 보지 않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세계화시대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현대인들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개념이다.” 라고 적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된 현실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우리사회를 후퇴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열대>에는 이 책을 번역하신 박옥줄교수님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과 <슬픈 열대>에 대한 해설을 앞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65쪽)”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레비-스트로스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회조직이나 행위를 연구함에 있어서 구조적 분석방법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교수님은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조화(調和)에 대한 탐구이며, 어떤 대상들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관계의 체계를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의 구조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의 화학적 요소처럼 과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자연이나 사회현상에는 임의적인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게 된다.(65쪽)”고 정리하였습니다.

 

<슬픈 열대>는 모두 9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레비-스트로스가 밀항선을 타고 마르세유에서 뉴욕까지 가는 선상여행을 회고하였습니다. 제2부에서는 과거로 거슬러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토로스가 민족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과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의 사회학교수로 취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어서 3부에서는 브리질로 가는 항해과정에서 열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고 4부에서는 브리질에서의 생활과 현지조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5부에서 8부까지는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카라족 그리고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민족지(民族誌)로서,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과 각각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하고 분석하였습니다. 마지막 9부는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여행기가 추가되었고, 그때까지의 개인적 체험과 현지조사의 내용을 종합정리하면서 자신이 인류학적 연구에서 부딪혔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문명이 원주민과 처음 접촉한 이래 그 사회를 파괴하는 침략성을 보여 온 데 대하여 분노하고, 서구문명의 침입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원주민 문명, 즉 ‘사라져버린 실체’를 탐구하고 있는 민족학자라는 직업의 역설에 비통함을 토로하곤 했다는데, <슬픈 열대>에는 저주받은 원주민 사회에서 느낀 레비-스트로스의 비애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트로스는 민족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학문의 시녀, 즉 과학적 탐색의 시녀나 보조자가 아니라,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심미적 관조였다. 철학이 수세기에 걸쳐서 점점 경쾌하고 대담한 구성을 다듬어가고, 균형과 능력의 문제를 풀어가며 논리적 세련화를 창안해가는 것을 보아왔는데(162쪽), (…) 민족학의 연구대상인 문화의 구조와 나 자신의 사고구조의 유사성 때문에 내가 민족학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164쪽) (…) 민족학은 나에게 지적만족을 가져다준다.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라는 양극을 결합시켜, 인류와 나 사이에 공통되는 근거를 동시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173쪽)”

 

5장을 시작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현황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하였을 당시만 해도 남부 브라질 전체에는 제(Gé)라는 집합적 명칭으로 구분되는, 언어와 문화의 모양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해안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투피(Tupi)어를 사용하는 침략자들에 의해 몇 세기 전에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변지역의 투피족은 유럽의 식민지개척자들에 의해 소탕되었지만, 접근이 어려운 숲속으로 물러나 있던 원주민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는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들을 외부세계에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주지역에서 유럽문명이 필요로 하는 자원들이 발견되면서 이를 개발하기 위하여 철도, 전신선 등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노출되고, 브라질 정부에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구문명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문화인류학적 조사결과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들과 소통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레비-스트로스 당시의 현지조사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조사대상 주민들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해석한 것으로 보여 심층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원주민사회에서 관찰한 내용들을 구조적 분석을 통하여 해석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카두베오족이 사용하는 도자기나 목각상과 같은 생활미술품이라거나, 그들이 서열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채색하고 있는 가문(家紋)에 해당하는 문신이나 형판을 그림으로 담아낸 것 등이라거나, 보로로족의 서열을 나타내는 성기덮개나 마을의 사회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등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민족지에서 읽은, 저로서는 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초반 지구적 재앙이었던 스페인독감의 악몽이 아마존 밀림 속에 고립되어 살고 있던 원주민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지나 콜라타가 <독감; http://blog.joins.com/yang412/3963341>에서 ‘스페인 독감은 1918년과 19년에 걸쳐 맹위를 떨쳐 고립되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지 않은 지역이라고는 없었다.’고 적은 것처럼 아마존의 밀림까지도 침투했던 것입니다. 한때 1,000명으로 알려진 남비콰라족의 사바네 무리는 1938년에 19명의 남자만이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페인독감은 호흡기를 통하는 감염성질환입니다. 환자가 기침할 때 튀어나오는 비말에 담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마신 사람이 감염되고, 잠복기를 거쳐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는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서구의 과학적 논리와는 달리, 원주민의 원시적 사고는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독특한 지식 습득의 방식일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결국은 원시적 사고는 세계를 하나의 동시적(同時的), 공시적(共時的) 전체로 파악하기 위한 무시간성(無時間性)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해온 작업들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 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이다.(742쪽) (…)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743쪽) (…) 개인이 집단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각 사회가 여러 사회들 가운데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도 우주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여기 있고 또 세계가 존재하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그 가느다란 아치는 우리 앞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744쪽)”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시작부분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슬픈 열대>를 읽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그 기억이 글자 그대로 나타나는 한은 그렇지 못하다. 회상을 해보는 것은 좋아하더라도, 그 고된 일들과 괴로움을 다시 겪어보고자 하는 이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생 그 자체이기는 하나,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다. (179쪽)”라고 적은 글을 읽으면서 제가 기획하고 있는 여행회고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1990년대 초반 미국을 여행하면서 적어두었던 여행기를 손에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도 넘은 옛날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과거를 여행하는 자가 되어 내게는 거의 전부가 이해도 안 될 뿐더러 비웃음과 혐오감밖에 못 일으킬 어마어마한 광경에 접하든가, 아니면 현대의 여행자가 되어 사라져버린 현실의 흔적을 뒤쫓아 다니든가 해야 하는(149쪽)”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었다는 고백처럼, 의미 없는 과거의 여행을 복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의 여행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읽을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답은 이미 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문화인류학 분야로 분류되는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의 여행기와 현지조사를 통하여 발견한 것들을 적고 있어 방대한 분량에 비하여 잘 읽히는 책입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우경화 경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에서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 277쪽)”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위원님 한 분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은 화첩을 주머니에 항상 넣어가지고 다니시는데,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로 그려낸 그림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제가 그리기에는 재주를 타고나지 못해서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권고를 제대로 실행에 옮긴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김한민님의 <그림여행을 권함>입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그림여행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에게 그림여행이란, 대가들의 명화를 찾아다니는 미술관 투어가 아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낙서라도 직접 끼적거리며 다니는 여행, 그림을 그리면서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는 여행, 여행 중 어느 날엔가는 과감히 사진기를 숙소에 팽개치고 포켓용 스케치북과 연필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홀연히 문을 나서는 여행....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림여행이라 부른다.” <그림여행을 권함>은 그런 여행을 통하여 남겨진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여행’을 위하여 특별히 여행을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여행을 하다보면 부딪힐 수 있는 상황에 따라서 그림과 이야기거리들을 나누다 보니, 작가의 다양한 여행경험들이 뒤섞여 나오는 바람에 읽는 이가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그림그리기에 중점을 두어 읽는다면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읽는 이가공감하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남미여행 때 공항버스를 타기 직전에 화장실 하수구에 문제가 생긴 상황을 읽다보니,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서부로 열흘간 여행을 떠나기 전날 쏟아진 폭우에 침실로 물이 스며드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옆집에 뒤처리를 부탁하고 용감하게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물이 넘쳐흐르는 방을 놔두고 한 달간 여행을 나선’ 저자의 찜찜함이 오롯하게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개인적인 기내 생활의 지혜가 있다면, ‘옆좌석에 앉은 사람과는 말을 트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조언도 완전 공감합니다. 해외여행에 나서던 초반에는 옆좌석에 앉은 사람이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말을 트고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다보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곤 해서, 언젠가 부터는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책에 코를 처박곤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인데, 떠든다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 참 편한 것 같습니다.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그림들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릴려면 이 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림들 가운데 글의 분위기를 완전 살리는 대목은 비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실 국내여행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외국여행에서 비가 오면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도 긍정적으로 보는 저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비는 모든 관광의 적이라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무료해하지 말자. 한 줄 한 줄 비를 그리다 보면 원치 않아도 어느 새 그쳐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여유일까요?

 

해왜여행에서 자주 부딪히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잠들기일 것입니다. 미국쪽으로 갈때는 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지고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잘 안 되는 침대 맡에서의 독서가 여행 중엔 참 잘된다. 몇 페이지 읽다가 그대로 편안히 잠이 들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국 쪽으로 여행하면서 잠이 오지 않아 들었던 책에 빠져서 밤을 하얗게 새운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잠들기 전 독서에 잘 어울리는 세 사람의 작가들 가운데 눈에 익은 분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왜 고전을 읽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4688>로 친숙해진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으려 하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림이 많은 탓에 쪽수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 경우는 여행에 나설 때 들고 가는 노트북에 꼼꼼하게 느낀 점을 적곤 합니다만, 그림에 다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림그리는 여행을 한번 기획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르한 파묵 전작 읽기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파묵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파묵의 오랜 화두인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 이번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종교원리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갈등, 쿠르드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들 사이의 갈등, 민간이 군부와 결탁하여 국지적 구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한 사회적 구조 등을 그리려다 보니, 이스탄불을 벗어나 아르메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카르스를 무대로 삼은 것 같습니다.

 

주인공 카(Ka)는 시인으로 과거 반정부운동에 연관되어 독일로 망명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12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오는데, 여성들의 연쇄 자살 사건과 진행 중인 시장 선거를 취재하라는 임무를 받고 폭설(Kar)을 헤치며 카르스(Kars)에 도착합니다. 카가 이곳으로 향한 가장 큰 이유는 이루지 못했던 옛사랑 이펙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카르시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자살사건들은 최근에 읽은 최수철교수님의 소설 <페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220780>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세력과 개혁세력 모두 카르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원리주의자인 라지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살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관심을 가질수록 이 병은 확산되지요!(115쪽)” 자살한 여성들의 뒤를 쫓는 한편 이펙을 만나는 과정에서 교내 ‘히잡’ 착용을 금해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교육원장이 살해되고, 이어서 무대예술가 수나이가 군부-경찰을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에 휩쓸리게 됩니다. 쿠데타 세력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며 카는 두 개의 세력 사이에 끼어든 셈이 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선 카에서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1권이 끝나면서 정작 작가가 카의 친구로 등장하면서 잠시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접고 있던 주인공은 카르스에서 급변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시적영감이 봇물 터지듯 일면서 시를 이어서 쓰게 되는데, 정작 그 시들을 적은 시작(詩作)노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또한 등장인물 들 사이의 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면서 이펙과의 사랑을 완성해서 독일로 돌아가려는 카의 생각은 꼬이고 마는데... 이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최근에 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http://blog.joins.com/yang412/13243912>에서 설명하고 있는 비극의 이론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파묵 역시 같은 모양입니다. “눈은 항상 도시의 더러움, 진흙, 어둠을 덮어 잊혀진 순수한 감정을 그에게 일깨워줬었다. 하지만 카르스에서 보낸 첫날, 카는 눈과 관련된 이 순수한 감정을 잃어버렸다. 이곳에서의 눈은 그를 지치게 하고, 지겹게 하고, 위축시키는 종류의 것이었다.(1권 22쪽)” 그러면서도 무신론자인 카로 하여금 “눈의 고요함은 나를 신에게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 같아.(93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파묵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교육원장의 죽음처럼 공공의 장소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이라든가, 2권에 등장하는 작가가 카의 유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순수박물관>에 대하여 언급한다거나하는 등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등장인물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는 여러 차례의 반전을 보이면서 비극적 결말로 치닫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파묵의 전작 읽기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학 - 세계의 고전 사상 7-004 (구) 문지 스펙트럼 4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상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에 그리스 비극의 해석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할 때, 소포클레스 원작을 장 아누이가 해석한 <안티고네>를 공연할 무렵에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던지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 선 크레온왕보다는 인륜을 표방한 안티고네의 편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역시 소포클레스 원작의 <오이디푸스왕>과 연결하여 생각을 해보니 신의 의지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해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고명섭님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com/yang412/12970004>이 시발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세계관에 입각해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해명하고, 이어 바그너 예술을 그리스 비극의 부활로 해석하고 찬양하는 것이 핵심 내용(121쪽)”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에서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22쪽)”라고 시작하는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본문에는 “결국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과 본질은 서로 얽혀 있는 두 개의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이중성 자체에 있다는 것을 발견(74쪽)”했다는 설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스비극을 논한 책들을 읽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논한 바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비극이 무대에 올려지던 당시에는 어떤 시각에서 비극을 보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게 만들었습니다. 이상섭교수님께서 옮긴 텍스트를 선택한 것은 별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0번 이상을 읽어온 <시학>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새롭게 느끼는 점이 많았다는 옮긴이의 설명이 있었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근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론의 고전으로 여기는 책이라고 합니다.

 

“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시 창작 기술, 시의 여러 종류, 그들 각각의 본질적 기능들을 논의하고, 시 창작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플롯 구성의 방법을 설명하고, 시를 이루는 부분들의 수와 성질을 가려내고, 기타 이 연구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취급하려고 한다.(15쪽)”고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예술 활동 전반이 인간의 모방 본능에 뿌리박고 있다는 유명한 모방설로부터 논술을 전개하는데, 모방의 수단·대상·방법에 의하여 예술의 장르가 나누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여기에 따라서 연극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비극은 플롯, 성격, 언어표현, 사고력, 시각적 장치 그리고 노래 등, 여섯 가지의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요소 가운데 플롯이 비극의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다양한 방향에서 플롯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1장에서는 ‘뒤바뀜과 깨달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어떤 사람이 오이디푸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주려고 오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오이디푸스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42쪽)”는 설명은 뒤바뀜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뒤바뀜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점을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작가들의 특징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은 일상적 현실을 반영하는 데 반하여, 소포클레스는 자기 인물들을 당위성에 따라, 즉 있어야 할 모습대로 그렸다고 했다.(87쪽)”

 

이상섭교수님은 본문보다 더 많은 분량의 주석을 달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 왜 그리스시대의 작가들은 인간은 신의 의지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만 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리스비극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더 찾아 읽어봐야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 적게 써도 행복해지는 소비의 비밀
엘리자베스 던, 마이클 노튼 지음, 방영호 옮김 / 알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기사는 3선에 성공한 메르켈 독일총리의 고민을 전하고 있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은 한 나라의 성과를 재는 척도로선 문제가 많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메르켈 행복 독트린’의 근거가 되었던 “‘돈=행복’이란 등식이 꼭 성립하는 것만은 아니다”는 ‘레이어드 가설’이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38737). 인간의 물질적 욕망엔 이른바 ‘만족점(satiation point)’이 있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 가설의 핵심인데, 레이어드교수는 1인당 국민소득 기준 1만5000달러(약 1650만원)를 만족점으로 제시했다가 몇 년 전에는 2만 달러로 상향 조정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미시간대학 경제학과의 저스틴 울퍼스교수와 베시 스티븐슨교수는 실제 조사해보니 만족점은 존재하지 않더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행복감은 커진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던교수와 마이클 노튼교수의 <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역시 돈과 행복의 관련성을 소재로 한 17,000건의 논문을 조사했더니 대부분 소득이 늘어나도 의외로 행복은 별로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과연 행복을 돈으로 사는 일이 불가능할까?’하는 의문을 두고 연구를 해본 결과 돈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좀 더 행복한 방식으로 지출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행복한 지출’에 관한 연구를 벨기에부터 동부 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를 이 책에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만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주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행복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소득보다는 지출습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행복을 담보하는 지출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체험을 구매하라, 2. 특별하게 만들어라, 3. 시간을 구매하라, 4. 먼저 돈을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 5.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라. 원칙만을 보면 알쏭달쏭하게 보입니다.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예쁜 볼펜, 근사한 주택 등)보다 체험적인 것(여행, 콘서트 관람, 특별한 저녁식사)에서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다양한 사례를 들어, 2달러를 쓰던 20만 달러를 지출하던, 물질적 구매보다는 체험적 구매를 하는 경우에 구매자가 후회하는 경우가 적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그 체험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나는 체험이라 고 하더라도 언제든 가능한 조건이라면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특별한 체험으로 바꾸게 된다면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아닌 시간에 초점을 맞춰야 행복을 증진시키는 활동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과중한 업무로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돈으로 보상하는 것보다는 업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보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소비가 일어나기 전에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면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더하여 당장 돈을 내는데 따른 고통 때문에 과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익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하여 지출을 하는 경우보다 타인을 위하여 지출하는 경우에 행복감을 훨씬 더 느낀다고 하는데 이런 베풂의 혜택은 두 살도 안 된 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에필로그에서 시민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출을 통해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우선시되는 방법은 먼저 시민들이 어느 정도 안정된 소득을 벌어들이도록 보장하는 것이고, 소득의 분배가 개선될수록 시민들의 행복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부유하든 빈곤하든 시민들의 행복수준은 상대적 소득격차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시민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국가의 정책도 앞서 말씀드린 다섯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는 점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신의 직감 이외에도 다양한 조언을 참고하면서도 돈을 쓰는 일은 직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을 잘 써서 보다 행복해지는 길 역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