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 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 판미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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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속상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그런 경우에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리는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런 집착이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은 역설적으로 원하던 일에 대한 집착을 버렸더니 쉽게 이루어지더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놓아버림’이 가지는 힘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편집한 프랜 그레이스는 자아발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때로는 신체적, 정서적 문제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느낀 경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킨스박사의 이론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놓아 버림>은 더욱 자유로운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날 용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지도가 되어 줄 이라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즉, “이 책에서 제시하는 틀을 활용하면 각자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과 성공, 건강, 안락, 직관, 조건 없는 사랑, 아름다움, 내면의 평화, 창조성에 이를 수 있다.(9쪽)”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전작 <의식혁명: http://blog.joins.com/yang412/2511139>을 읽으면서, 1부터 1000까지의 척도로 인간의 의식수준을 수치화하는데 성공하여 과거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의식수준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가 해왔다는 다양한 연구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인상을 가졌었고, 심지어는 그의 주장이 지극히 서구적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놓아버림’에 대하여 저자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듯 마음속 압박을 갑작스레 끝내는 일이다. 놓아버리면 마음이 놓이고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한결 기쁘고 홀가분해진다.(32쪽)”고 하면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전작에 비하면 저자는 종교,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동양적인 것을 배워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사람이 감정을 다스리는 방식은 크게 억제, 표출, 도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이로서도 감당이 되지 않을 때는 표출 기제를 사용하여 감정을 분출해서 억제할 수 있는 분량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표출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감정에서 벗어나는 회피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놓아버림’은 전혀 새로운 접근방식인가? 사실 놓아 버림은 타고난 능력이라고 합니다. 다만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놓아버리면 아예 그것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 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아버림의 정의하고 감정의 신경해부학적 원리를 설명한 다음, 저자는 무의욕과 암울함, 비탄, 공포, 욕망, 분노, 자부심, 용기, 받아들임, 사랑, 평화 등 놓아버림과 관련이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들, 심지어는 자신의 경험까지도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기억해야 할 점이라면 “타인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타인이 내게 보내는 감정표현을 알아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개는 주인의 가슴에 사랑을 가져와 사랑의 크기를 키우는데, 사랑은 수명을 연장한다고 합니다(220쪽).” 다만 제가 서양의학을 전공한 탓인지, 스트레스에 대한 에너지 체계의 반응과 침술 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술체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체 에너지 청사진에 따라 육체 구석구석 필수 에너지가 흐른다고 본다.(247쪽)”는 주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합니다.

 

놓아버림과 정신의학 영역의 심리치료와의 차이점에 대하여 저자는, “심리치료에서는 치료자에게 의존하므로,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또한 치료자와 환자가 동의하는 심리이론에 의존한다. (중략) 놓아버림의 기제에서는 환자 역할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다.(282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놓아버림의 목표는 모든 괴로움과 아픔의 근원 자체를 없애는 것(284쪽)’에 두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객관적 근거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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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서로돌봄 - 사랑과 섬김의 실천
성규탁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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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자녀를 지원하던 노부모까지 함께 어려움이 처하거나 부모와 자녀가 불화를 겪고 심한 경우에는 패륜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늙은 부모를 자녀가 모시던 옛 풍습이 대가족제도의 붕괴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있는 것이며,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녀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고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42660). 결국 노인 부양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나 노인복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복지를 전공하신 성규탁박사의 제안을 담은 <서로 돌봄>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우리 겨레는 일상생활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인자함을 베풀어 서로 돌보는 도리를 문화적 가치로 오랜 세대에 걸쳐 실행해왔다.”고 하고, 최근 변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의 개념을 확대하여 “가족을 비롯한 이웃과 사회가 서로 돌보는 공동사회를 이루는 시대적 흐름이 현저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추구하는 서로 돌봄과 국가가 개발하는 사회보장을 효율적으로 융합하여 한국적 사회복지가 구현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봄>은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방향: 서로 돌봄-넓은 사랑의 실현’에서는 돌봄은 물질적인 면 뿐 아니라 정서적인 면까지도 실현되어야 할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2부 ‘실천: 변하는 돌봄 방식’에서는 가족 구성이 변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가족 바깥의 사회적 지원망과 사회복지 서비스를 활용하는 방안을 사례를 인용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마지막 3부 ‘이념: 이어지는 전통’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족 중심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고, 서로 돌봄이 한국적 가치로 실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서구사회의 복지모델을 인용하여 사회복지가 국가적 책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된 서구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복지제도만으로는 국민의 복지요구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단즌 결론에 도달하고, 가족이 자체의 성원들을 돌보는 본래의 기능을 보다 더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여,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경우, 부모와 가까이 사는 경우,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 등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 따른 돌봄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관계가 소원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노력하면 지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바람직한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돌봄의 이론적 배경 뿐 아니라 현실적 실행방안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가족 중심의 돌봄의 유형에서도, 개인적 돌봄, 가족을 위한 돌봄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돌봄에서 자주 제공하는 돌봄의 형식을 제시하고, 많은 자녀들이 고민하고 있는 위급할 때의 돌봄 형식도 제시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시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고, 이용할 시설을 선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 몇 가지 예를 들면, 시설의 분위기가 안락하고 가정적인가, 면허를 소지한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는가, 시설의 안전은 확보되어 있는가, 오락 등을 포함한 사회활동 프로그램은 얼마나 제공되는가 등, 쉽게 놓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있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봉양이라는 고답적인 의미를 돌봄이라는 현대적 표현으로 다시 해석하여 전통적 돌봄 방식이 현대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라거나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돌봄의 현황 등에 관한 논의도 더하고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격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기에 안정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실질적 도움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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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1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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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집 <오월의 밤>을 붙들고 씨름했다는 한 독자는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나에게도 시를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요즘은 詩 읽기가 힘들까,”라고 리뷰에 적고 있습니다만, 저도 한 때는 시구절을 읊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詩 읽기를 그만둔 것이 언젠가 조차 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뮈세가 라마르틴, 비니, 위고와 더불어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사실도 몰랐다는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의 밤>을 읽은 것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어보자는 의욕 때문입니다.

 

뮈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에 처음 등장합니다. 마르셀의 할머니가 설날에 마르셀에게 줄 선물로 루소의 작품과 상드의 <앵디아나>와 함께 골랐던 것인데 아버지의 반발로 상드의 전원소설들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상드와 소문난 연애와 뒤따른 실연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연작시가 어린 마르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이 친구 블로크와 나눈 이야기를 적고 있는 부분에서 뮈세의 「10월의 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선가 뮈세의 시를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셀의 고백에 대하여 블로크는 “뮈세 선생에 대한 네 저속한 취미 따위는 이제 버려. 아주 위험한 녀석에다 기분 나쁜 작자야. 고백하는데, 그 녀석이나 라신이란 작자는 평생 동안 운율을 잘 맞춘 시구절 하나씩은 쓰긴 했지만, 그 시구절은 내가 보기엔 절대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데에 그 최상의 가치가 있어. 예를 들면,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La blanche Oloosone et la blanche Camyre)' 그리고 라신의 ’미노스와 파지파에의 딸(La fille de Minos et de Pasiphaè)이라는 구절이지.(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쪽으로 1, 162쪽, 민음사 펴냄;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라고 혹평했다고 합니다. 사실 뮈세는 1833년 데뷔 초기 관심을 쏟던 낭만주의적 시작에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위고와 불화를 빚고, 이어진 상드와의 세상이 떠들썩한 열애도 1835년 파국을 맞은 상황에서 쓰여진 시들이 문단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47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올린 희곡 <변덕>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시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프루스트 자신은 뮈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의 리뷰에 따르면, “실연의 고통에 빠져 있던 뮈세는 ‘내 영혼 속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무언가’를 느낀 오월의 어느 밤, 촛불로 온 방 안을 밝혀놓은 채 아침까지 쉬지 않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영혼에서 빠져나온 것이 바로〈오월의 밤〉이었다. 뮈세가 무려 112행에 이르는 시를 하루저녁에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영감이 손을 움직여 시를 쏟아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연의 아픔은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눈뜨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고통 없는 시는 없으며 시인은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에게 시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프루스트가 인용한 시 ‘오월의 밤’의 한 구절를 살펴보면, 절망의 나락에서 실연의 아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시인을 뮤즈가 위로하는 대목입니다. “오세요. 신 앞에서 노래합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 잃어버린 환희 속에서, 지나간 고통 속에서 노래합시다. / 입맞춤을 한 채로 미지의 세계로 떠납시다. / 닥치는대로 당신의 생명의 메아리를 일깨웁시다. (중략) 색색의 나무가 우거진 펠리온 산꼭대기와, / 푸른 티타레스와, 백조가 떠다니는 물 위로 /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가 비치는 / 은빛의 만(灣)이 여기 있습니다.(78쪽)”

 

김미성교수가 옮긴 뮈세의 <오월의 밤>은 뮈세의 <신시집>의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전체를 완역하지 못하고 발췌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집의 말미에 뮈세에 관한 다양한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시인과의 상인터뷰를 싣고 있어 뮈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마치 대화하듯 시구절들을 배치하고 있는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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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소설집
조르주 상드 지음, 박현석 옮김 / 동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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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할머니가 선물로 고른 조르주 상드의 소설 네 가지 가운데 <사랑의 요정(꼬마 파데트로 번역되기도 합니다)>과 <마의 늪>을 싣고 있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며 상드의 작품들은 시기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는데, 1기에는 주로 연애소설을, 2기에는 사회소설, 3기는 전원소설을 그리고 4기에는 회상록과 프랑스 상류사회의 연애담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사랑의 요정>과 <마의 늪>은 상드가 머물던 프랑스 노앙지방의 민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들로 ‘소박하고 한가로우면서도 풍성함이 넘쳐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상드가 삼 두드리는 사람의 구전을 통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마치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거나,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를 듣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르셀의 어머니가 고른 책은 <프랑수와 르 샹피>였는데, 마르셀은 “엄마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언어의 강력한 분출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잔재주나 꾸밈을 추방하고,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 말하자면 엄마의 감수성이라는 음역 안에 들어있는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셀 푸르스트 지음, 김화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I, 민음사 펴냄)

 

<마의 늪>에 대한 작품해제에서 상드는 ‘전원생활에 대한 꿈은 어느 시대에나 도회 사람들의 이상이자 또한 궁정 사람들의 이상’이라 생각하고, ‘문명인을 소박한 생활의 매력 속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향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상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박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고 겸양하게 표현했지만, 프루스트는 “조루주 상드의 전원 소설들은 마치 옛 가구처럼 유행이 지난 비유적인 표현들로, 시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들로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요정>은 콕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가운데 동생 랭드리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파데트의 거치 외양 아래 숨겨진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을 찾아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는 성장소설입니다. 콕스지방에서는 쌍둥이를 따로 키우지 않으면 한쪽에 불행이 닥친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건강한 랭드리와는 달리 형 시르비네는 병약했던 탓에 부모와 랭드리의 사랑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데, 어느날 사라진 시르비네를 찾아 헤매던 랭드리는 파테트의 도움으로 시르비네를 찾게 되고, 파데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 부탁은 성 안도슈 축제일에 자기하고만 춤을 춰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예쁜 마드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랭드리로서는 힘든 부탁이었지만, 심지가 굳은 랭드리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동무들이 비아냥거리지만 랭드리는 파데트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파데트를 놀리는 동네 아이들을 혼쭐을 내주기까지 합니다. 결국은 못생기고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파데트가 심지가 굳고 신앙심도 깊은 것을 발견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파데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파데트를 돌보아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던 바르보씨도 파테드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다는 해피엔딩입니다.

 

<마의 늪>은 독특하게도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홀바인의 판화 밑에 덧붙여진 오래된 프랑스 사행시, “이마에 땀 흘리며 / 너는 가난한 생활 / 오랜 동안의 일과 피로 끝에 /  보라, ‘저승사자’가 너를 부르고 있다”를 인용한 작가는 소박한 표현 속에 감춰진 깊은 슬픔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역설적으로 무덤의 허무도, 강요받은 체념으로 살아야 하는 농부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다음에도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제르망은 새장가를 가라는 장인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은 청혼을 하러 떠나게 되는데, 일자리를 얻어 외지로 나가는 젊은 여인 마리와 동행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 숨어있던 작은 아들까지 어울린 일행은 생각지도 않게 안개 속에서 마의 늪에 갇히게 되고, 밤을 지내는 동안 어린이로만 생각했던 마리에게서 여성을 발견하고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늪의 조화로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해피엔딩 소설입니다. 부록으로는 당시 프랑스 지방의 결혼식 풍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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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예술의 풍경들 - 1826년 최초의 사진부터 현대사진까지
진동선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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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주, 결혼기념일을 깜박 잊어버리는 바람에 아내에게 면목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침부터 회의가 꼬리를 무는 바람에 챙길 정신이 없었다는 변명을 너그럽게 받아주어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것이 남습니다. 아이들도 잊고 있었는지 들어오지 않아, 둘이서만 작은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을 때, ‘지금까지 살아줘서 고맙소!’라고 감사표시를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혼 3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감동을 주는 이벤트를 미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신혼여행 사진 이야기 때문입니다. 제주도로 다녀온 신혼여행에서 들고 간 두 개의 카메라로 36커트 필름 열통을 모두 찍었습니다. 저도 찍었습니다만 여행을 안내하신 택시기사님도 찍어주셨는데, 좋은 사진은 생각보다 많이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필름을 많이 가지고 간 것은 많이 찍다보면 좋은 사진이 많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역시 사진은 찍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매형의 카메라를 빌어서 흑백사진을 찍으면서 사진하고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울 여건은 되지 않아 남이 찍은 사진을 눈동냥하거나, 여기저기에서 주어들은 요령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사진은 저의 삶의 기록 정도의 의미일 것 같습니다. 처음 카메라를 장만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을 받을 무렵입니다. 사무실을 찾아온 카메라 세일즈맨으로부터 눈대중으로 거리만 맞추면 되는 반자동 삼성미놀타 카메라였고,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제대로 된 미놀타 카메라를 샀던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를 거쳐서 스마트폰에 장착된 카메라기능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어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가를 뒤쫓고 있는 현대사진연구소 진동선소장님의 <사진예술의 풍경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동선소장님은 ‘사진이 갖는 완벽한 시간의 알리바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진작가이며, 사진평론가 겸 전시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저술을 통하여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원리를 깨치면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정직한 눈과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면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값비싼 카메라나 멋진 촬영지,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힌 도식적인 촬영 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사진의 본질이 올바른 눈과 마음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한 마디는 쉬운 것 같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From today, painting is dead).”라고 통탄했다고 하는데, 프랑스사람이 영어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속성(永續性)이 없는 사물을 화폭에 담아 남기는 유일한 시각예술로 대우를 받던 회화에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미술가들은 사진을 예술로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이 발전해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결국 미술이라고 하는 불멸의 시각예술의 얼굴을 없앤 주인공은 사진이고, 미술을 하나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게 한 것도 사진이고, 미술을 옛 모습으로 자리할 수 없게 만든 것도 사진이다. 예술이 끝없이 그 모습을 바꾸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사진인 셈이다.(7쪽)”라고 정리한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사진예술의 풍경들>은 시각예술의 한 분야로서 사진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리뷰를 인용하면, “174년의 역사 속에서 사진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 기술의 진보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사진이 어떤 대상을 향하느냐, 어떤 미학으로 담느냐,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진예술 또한 얼굴을 달리해왔다. 그 역사의 중심에는 사진을 통해서 예술적 미감을 발휘했던 뛰어난 사진가들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있다. <사진예술의 풍경들>은 그러한 전설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사진예술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여정이다.”라고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170여년의 역사를 한권으로 축약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사진예술의 변화를 한눈으로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저자는 174년에 걸친 사진의 역사를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시대는 <예술로서의 사진, 그 시작>으로, 새로 발명된 사진이 어떻게 예술과 접목을 시도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1860년대까지도 기술적 완성도가 미숙한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오랜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피사체가 움직이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없어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진가들은 사진이 예술이 되기를 열망했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피사체를 복제하듯 찍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고민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최봉림의 <세계 사진사 32장면>에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인물사진가 펠릭스 나다르의 말을 인용한 저자는 당시 사진가들은 모델에 대한 ‘정신적 인지’, 사진의 ‘심리적 측면’, 그리고 ‘내면의 닮음’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찾으려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사진만의 미학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던 초기라서 아무래도 앞서 있던 시각예술인 회화에서 구하는 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예술로서의 사진의 역할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이어서 사진 자체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언뜻 헷갈릴 것 같은 개념인 ‘예술로서의 사진’과 ‘사진으로서의 예술’의 차이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예술로서의 사진’은 사진의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반면에 ‘사진으로서의 예술’은 사진의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로서의 사진’은 조작, 합성, 변형이 가능한 탈시간적인 사진표현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으로 미술의 요건을 갖추고 찍은 미술적 경향의 사진을 말하며, ‘사진으로서의 예술’은 사진의 시간성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사진, 즉 시간에 예속적이라 할 만큼 시간성에 충실한 사진을 말한다. ‘예술사진’과 ‘사진예술’의 개념적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45쪽)” 두 번째 시대를 설명하는 <사진으로서의 예술을 향해>에서 저자는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로부터 시작된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미래파와 기계미학, 특수기법, 즉물사진, 추상 표현, 찰나의 미학, 누드의 미학, 1차 대전 이후의 사진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누드의 미학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진이 발명된 직후인 1845년부터 1995년까지 약 50년 동안 파리에서 제작된 사진들을 살펴보면 사진관에서 제작된 초상사진 못지않게 지하에서 음성적으로 제작되어 유통된 누드와 포르노 사진들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도색물 시장을 맡고 있던 그림의 자리를 정밀성과 선명함을 무기로 하는 사진이 차지하게 된 때문일 것입니다. 누드 사진이 예술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초현실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체를 왜곡한 이미지를 초현실주의 누드사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리얼리티를 왜곡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관점에서 누드를 찍은 사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고 합니다.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사진적으로 완벽한 누드예술사진은 에드워드 웨스턴에 의하여 1930년대 중반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웨스턴의 1936년작 <누드>는 사진의 역사에서 최고의 누드사진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웨스턴의) 누드사진의 특징은 정갈한 인체 형상과 절제된 감정이다. 상상으로 구현해낸 그림 같은 형상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몸과 같은, 살아있는 듯 생생한 여성의 누드를 보여준다.(242쪽)”는 저자의 설명이 없더라도 모델의 벗은 몸에서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누드예술사진이 늦게 등장하게 된 것은, 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진이 가지는 사실성, 정확성, 선명성이라는 특징에 대하여 화가들은 창의성의 산물이 아니라 기계적 요소로 보고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에 사진가들은 오히려 이러한 특징을 지우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시대는 현대사진이 출발하는 195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휴대가 간편한 라이카카메라가 나와 ‘순간포착’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사진예술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했습니다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1952년 출간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서 사진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결정적 순간’과 ‘절묘한 포착’이라는 두 가지 사진적 요소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은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 여기에 구성 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렵되는 결정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묘한 포착’이라 함은 “완벽에 가까운 조형 감각, 예리한 세부 관찰, 순간의 우연성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절묘하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276쪽). 저자가 <새로운 표현, 새로운 미학>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것처럼 이 시대에는 사진작가의 시각과 표현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웨이브 스테이지, 혹은 메이킹 포토의 방법론이 등장하면서 조각하고, 칠하고 만들고 연기해도 사진이라 할 수 있는지 하는 고민이 들 정도로 모호해진 사진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을 겪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지막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에서는 198년대 후반부터의 현대사진의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주목받았던 연출사진, 구성사진, 설치사진, 무대사진, 조작사진 등 메이킹 포토에 쏟아지던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다시 사진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새로운 개념을 찾게 된 것입니다. 역시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무표정의 미학, 정신 심리학적 이미지, 패션사진, 21세기 기계미학, 신표현주의 등입니다. 심지어는 몸을 통한 자연적인 치유를 표현하는 힐링으로서의 사진예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르노 라파엘 미키넨과 마이클 케나의 사진이 주목을 받는 이유에 대하여 저자는 “손맛이 묻어나는 흑백 톤이 일품인데, 여기에 정갈한 프레임, 마음을 정화시키는 흑백 농담, 깊은 철학적 사색까지도 깃들어 있다.(426쪽)”고 했습니다. 한편 마이클 케나는 “아마도 위대한 침묵 같은 것, 그러니까 내 사진을 통해 잠시 바깥의 소란스런 소리를 잊고자 한 게 아닐까요?”라고 했답니다.

 

저의 추억과 관련된 부분을 짚어보면, 발명 초기 사진은 두 가지 커다란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오랜 노출시간으로 인하여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과 인간의 눈으로 보는 컬러세상을 오직 흑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1870년대 후반 들어 노출시간을 줄이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진은 시간의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컬러로 표현하는 기술을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컬러사진이 나오기 전까지 사진관에서는 컬러사진을 요구하는 손님이 있으면, 흑백필름이나 인화지 위에 채색물감으로 칠해주기도 했는데, 1970년을 전후해서 학교 앞에서 파는 물감으로 흑백사진에 컬러를 입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무렵 학교를 다니셨던 분들에게는 추억의 한 장면을 회상하는 기회도 되겠습니다. 사진에서 컬러가 구현된 것은 1895년 영화를 탄생시킨 뤼미에르형제가 1907년 오토크롬기법을 영화에 컬러영화를 구현한 이후, 1908년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오토크롬 사진을 선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사진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들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저자는 174년의 사진의 역사를 시기마다 주목받는 사진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에 있는 저의 관심에 대한 저자의 다음 구절을 답으로 뽑아보았습니다. “사진은 눈으로만 말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 사진은 마음의 눈만으로는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는다. 여전히 부족하다. 손의 눈이 필요하다. 눈-마음-손이 적절히 맞잡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눈은 세상을, 사물을 보는 일을 하고, 마음은 느끼는 일을 하고, 손은 표현하는 일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사진예술의 바탕이 튼튼해진다.(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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