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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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소설 속의 장면을 마치 그림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 이유를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com/yang412/12935937>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술 특히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프루스트는 평생을 바친 자신의 유명한 소설에 대해 “나의 소설은 그림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파묵은 이러한 점에서 프루스트와 비교할 만한 작가로 헨리 제임스를 꼽았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내 이야기를 본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서술자를 ‘화가’로 부릅니다. 사건과 거리를 둔 채 그다지 관여하지 않고, 도덕적 고민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임스는 소설 창작은 항상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서문과 비평에서 ‘파노라마’, ‘그림’, ‘화가’같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또는 은유로 계속 사용한 작가입니다.(오르한 파묵 지음, 소설과 소설가, 109쪽)”

 

리얼리즘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었으며 모더니즘 소설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되는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읽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영국의 한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젊은 여성이 유령을 목격한다. 혼자 걷던 산책길의 오래된 탑 위에, 세차게 펄럭이던 촛불이 꺼진 어둠 속 계단 꼭대기에, 아무도 없는 주방의 창밖에, 한적한 오후 호수 건너편에, 누군가 나타난다. 가정교사는 그 집에 유령이 나온다고 확신하고 자신이 돌보는 순진무구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아이들을 유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다양한 문학작품들이 유령을 소재로 다루는 것은 읽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나사의 회전>은 대표적인 유령소설이자 최초의 심리소설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작가가 몇몇 사람들과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어 듣는 모임에서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화자가 젊은 시절 영국 시골의 고성에서 경험했던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사십년 넘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유는 너무 무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라고 운을 떼는 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과 후에 뒷산에 올라 이야기꾼인 친구로부터 귀신이야기를 듣는 과정과 아주 흡사합니다. 매일 오후 조금씩 끊어서 연속극처럼 듣던 무서운 이야기는 결국 수학여행갔던 날 밤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 친구는 자정을 치는 시계소리, 심야에 들리는 누군가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 등, 효과음을 실감나게 추임새로 넣어가면서 우리들의 심장을 옥죄어가곤 했습니다.

 

어떻든 이 책의 제목이 나사의 회전인 이유를 저자는 “어린아이와 관련된 감칠 듯한 이야기치고 (…) 만약 어린아이 하나가 나사를 한 번 더 죄는 효과를 낸다면, 어린아이가 둘일 경우 (…) 두 번 죄는거죠!(8쪽)”라고 했는데, 나사를 죄는 만큼 감칠맛이 더 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화자가 유령을 처음 목격하던 순간은 긴 하루가 끝날 무렵이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기에도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떻든 작가는 화자가 유령을 목격한 순간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두 개의 탑은 (…) 번드레한 옛 모습으로 보건대 이미 상당한 과거가 되어버린 낭만주의 양식의 복고물이었다. (…) 내 기억으로 이 형상은 청명한 황혼 속에서 나의 내부에 다급하고 선명한 두 가지 감정을 유발했다. 그것은 처음의 놀라움에서 온 예리한 충격에 이어, 두 번째 놀라움에서 온 충격이었다.

 

화자는 마일스라는 남자아이와 플로라라는 여자아이를 맡았는데 화자가 만나는 유령은 이전에 아이들을 맡았던 가정교사 제셀양과 주인이 데리고 왔던 집사 피터 퀸트씨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마치 유령과 모종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화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 역시 유령을 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자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상상해가면서 읽어가다 보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령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화자의 환상의 결과물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해답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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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시 쓴다
샘 파르니아 & 조쉬 영 지음, 박수철 옮김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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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은 제가 오랫동안 쥐고 있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샘 파르니아교수의 <죽음을 다시 쓴다>는 제목만큼이나 매혹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을 되돌리려는 의사들의 노력을 재조명하고 죽음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며 죽음 이후의 생명현상까지도 살피고 있습니다. 즉 ‘소생의학’과 ‘임사체험’에 관한 연구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소생의학은 익사(溺死) 혹은 급성 심기능장애로 심장이 멎은 사람의 심장기능를 되돌리려는 의학적 노력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일반에는 심폐소생술로 알려진 의학적 술기를 발전시키는 분야입니다.

 

올해 초에 같이 일하는 분들과 함께 대한심폐소생협회에서 주관하는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았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088893). 35년 전, 인턴 때 응급실에서 해본 이후로는 처음이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른 탓인지 이론도 많이 바뀌고 장비도 간편해져 실생활 공간에서도 응급상황을 맞게 되면 누구나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학드라마를 보면 할 만큼 했다고 하면서 중단할 것으로 권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만, 그 할 만큼 했다고 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심정지로 인하여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심폐소생술을 중단해도 좋다는 권고가 마련되어 있는 정도로,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다시 쓰다>에서는 놀라운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뉴욕 장로교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을 때 심장이 멎은 운전기사 조 티랄로시를 살리기 위하여 의료진은 40분이 넘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여 뇌손상없이 가족들 곁에 돌아갈 수 있었던 사례를 비롯하여 추운 날 길에 쓰러져 저체온증에 빠진 이룬 베이슨이 병원에 도착해서 심정지가 일어났는데, 무려 3시간 반에 걸친 심폐소생술 끝에 역시 인지장애 없이 사회에 복귀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은 자연상태에서 혹은 심정지 발생 이후에 저체온을 유도하여 뇌세포의 대사를 떨어뜨려 손상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최근에 개정된 심폐소생에 관한 기준에서는 저체온의 효과에 대한 근거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심장박동이 정지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던 심장사에서 인공적으로 심장을 뛰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신체기능을 총괄하는 뇌의 기능이 중단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뇌사로 바뀐 사망의 정의에 대하여도 뇌사의 기준을 적용하는데 있어 한계가 드러나는 사례들이 간혹 발표되고 있다는 사실과 산소공급이 차단되면 빠르게 사멸한다고 알려진 뇌세포 가운데 일정 시간이 경과된 다음에 적절한 상태에서 배양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뇌세포의 생존만으로 뇌기능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정의를 뇌사에서 뇌세포사의 수준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의 두 번째 핵심주제는 ‘임사체험’에 관한 의학적 연구 수준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실 임사체험을 다룬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제프리 롱과 폴 페리가 같이 쓴 <죽음, 그 후; http://blog.joins.com/yang412/12832081>에서는 임사체험의 사례연구를 통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자는 ‘임사체험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진짜인 것처럼 보였겠지만, 죽음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심리학적, 화학적 변화가 그런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있다’고 하면서 임사체험을 영혼의 존재 가능성을 연계하는 듯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장정지 이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대략 10~20퍼센트는 실제사망체험의 여러 가지 특징을 기억해내는 반면 나머지 80~90퍼센트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점, 임사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유체이탈을 입증하는 실험적 데이터가 없다는 점 등이 아직 임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죽음, 인간의 정신과 뇌 사이의 관계, 임사체험 등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선도하는 전문가로, 어웨어 연구(AWARE Study, AWAreness during REsuscitation)를 이끌고 있는 저자의 독특한 점이 잘 녹아 있어 다루고 있는 주제에 관하여 의학적 인문학적 접근이 돋보인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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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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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기를 마친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유입된 서양문명이 터키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동양문명과 충돌하는 현상을 다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얀성;  http://blog.joins.com/yang412/12975968>에서 쌍둥이처럼 닮은 주인공들인 베네치아에서 노예로 잡혀온 학자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학자가 서로의 고향에서 살게 된다는 마무리를 통하여 동서양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6년 스웨덴 한림원이 파묵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파묵은 고향인 이스탄블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 간 충돌과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216쪽)”고 말한 배경이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터키는 지중해를 두고 마주하고 있어 그리스 시대로부터 끊임없이 교류해왔다고 볼 수 있어 문명 간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교류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철학, 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의 영역에서 두 지역의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이 서로 영향을 주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충돌을 말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 태동하여 유럽으로 건너가 꽃을 피운 기독교문화와 이 지역을 지켜온 이슬람문화라는 종교적 배경이 충돌을 빚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양과 서양문명의 차이를 가늠한다고 한다면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류의 양이 많지 않았던 동아시아 문화와 유럽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지역의 경계가 희미해질 정도로 세계는 뒤섞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의 리처드 니스벳교수님의 <생각의 지도>는 좋은 기획이라 생각합니다. 서론에서 저자는 동양에서도 지역적으로 그 문화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은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유교문화권의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과 유럽문화의 영향을 받아온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생각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인지를 찾으려고 했다고 적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의 사고를 이해함으로써 더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20쪽)”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요약한 이 책의 내용은 1장에서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서양 사고의 전형적인 예로 들면서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차이를 살피고, 2장에서는 사회적 행위, 특히 자기 개념에서 두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소개하였습니다. 3장에서 6장까지가 이 책의 핵심인데 현대의 동양인과 서양인이 지각하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차이들을 비교하였습니다. 7장은 그러한 문화적 차이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살피고 8장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가 심리학, 철학, 그리고 일상생활의 분야에서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다루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최인철교수님께서 니스벳교수님을 사사하면서 공동연구를 진행한 때문인지 한국, 한국인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게 인용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선물로 주는 볼펜을 고르게 하는 실험에서 미국인들은 대체로 희귀한 색의 볼펜을 고르는 반면 한국인들은 가장 흔한 색의 볼펜을 고르는 경향을 두고, 미국인들은 항상 남의 눈에 띄고 싶어하나 한국인들은 늘 남들 정도만 되고 싶어한다고 해석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같은 실험을 한다면 저를 포함해서 많은 한국인들이 희귀한 색깔의 볼펜을 고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대목을 인용합니다. “한국은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북한은 전적으로 실패한 체제를 고수해온 나라이다. 따라서 한국과 북한을 비교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논하는 논쟁이 벌어진다면 모두가 한국의 우월성을 인정할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전통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옳은 주장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77쪽)”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고대 중국이 문화적 동질성이 강했고, 오늘날 중국인의 95%가 한족출신이고 50여개가 넘는 소수민족들의 대부분이 중국의 서부에 한정되어 거주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중국의 역사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들기는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와 서양의 문화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에필로그의 질문에 대하여 저는 서로 융합되어 진일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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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제로 - 분노와 폭력, 사이코패스의 뇌 과학
사이먼 배런코언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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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충동적으로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치밀하게 준비하여 불특정 다수를 연쇄적으로 살해하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던지기도 합니다. 과거 싸이코패스(psychopath; 정신병질자) 혹은 소시오패스(sociopath; 사회병질자)가 벌이던 이런 사건들을 최근에는 반사회성 인격장애라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저지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회적 규범이 없는 사람으로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의 가능성이 검토되어 왔습니다. 충동적 행동을 억제하는 세로토닌 호르몬의 수준이 낮은 선천적 이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명도 있고, 사회적 규범을 배우지 못하여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물에 떠있는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것이라는 후천적 요인에 관한 설명도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유년기의 불우한 환경이 심리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환경적 요인만으로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지고 있습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의한 범죄는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적 견해가 발전해오면서 이런 범죄는 범인이 앓고 있는 질환의 영향으로 생긴 점을 감안하여 처벌을 경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건의 피해자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는 법의 관용성을 악용하는 사례까지도 있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폭력이 충동적으로 표출되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싸이코패스의 본질을 뇌과학과 심리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해부한 사이먼 베런코언교수의 <공감 제로>를 소개합니다. 베런코언교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실험 심리학 및 정신 의학부의 발달 정신 병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폐증을 연구하고, 자폐증 아동들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왔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공감능력을 연구하기 위하여, 설문을 통해 공감 능력을 자가 측정할 수 있는 공감 지수(Empathy Quotient, EQ)와 체계화 정도를 측정하는 체계화 지수(Systemizing Quotient, SQ)를 개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에게서 공감 능력이란, 단지 있거나 없는 두 가지 상태가 아니라 공감이 완전히 바닥난 공감 제로(0단계)에서 충만한 6단계까지 연속되는, 총 7단계의 종형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공감제로>는 공감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싸이코패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감사의 글에서 <공감제로>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이제 <공감제로>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와 정서적인 공감의 상실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낳는지를 조사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공감의 신체적(뇌) 기반을 파헤치고 사회적, 생물학적 결정 요인들을 조사하며 예전보다 훨씬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생각이다. 또 공감의 상실을 초래하는 질병들 몇 가지를 면밀히 조사하며 더 광범위한 부분까지도 다룰 예정이다.(12쪽)” 특히 저자는 공감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폐환자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잔인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고, 잔인성이 몇 가지 공감장애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공감부족과 잔인성이 결합한 형태의 사이코패스를 사회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이 같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악(evil)이라고 하는 인간의 잔인함의 극한 상태를 공감의 침식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악마라 불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의 만행을 비롯하여, 24년 동안 딸을 감금하여 강간하고, 딸에서 태어난 손자를 살해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 사건(1984년 밝혀짐), 1994년에 콩고 반란군이 저지른 만행 등을 인용하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개인이 저지른 범죄와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인간이 보이는 잔인성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전쟁이나 권력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대규모 제노사이드에 대하여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com/yang412/12853780>에서 정리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제3의 침팬지; http://blog.joins.com/yang412/12920729>에서 설명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의 원인은 그 정의만큼이나 어렵지만 이데올로기적 혹은 심리적 동기가 작용하는 경우와 이데올로기 대립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현실적인 이해대립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공감은 타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고와 기분에 적절한 감정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32쪽)”라고 정의한 저자는 “공감은 우리가 관심사에 외골수적으로 집중하기를 중단하고 대신 이심적으로 집중하는 방식을 채택할 때 일어난다.(32쪽)”고 하였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행을 떠나려고 기차를 탔는데 키가 작은 승객이 선반에 무거운 가방을 올리려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선뜻 일어나 도와주십니까? 아니면 간섭하는 것 같아 내버려 두십니까? 물론 그 사람은 무거운 가방을 올리지 못해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까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자존심이 센 그가 스로로 해결하겠다는 투지에 불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도와주고서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불쾌하다는 반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사회를 같이 사는 사람들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감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사회생활을 잘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저자의 공감측정도구를 이용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특히 연령에 따라 성인의 경우 40개의 항목으로, 아이의 경우 27개 항목으로 된 설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조사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공감 지수(Empathy Quotient, EQ)를 바탕으로 공감기제의 수준을 0에서 6까지 일곱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레벨 0의 사람은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데, 그 중 일부는 살인, 폭행, 고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낄 뿐이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길 원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지적을 받아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합니다. 레벨1의 사람도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되돌아보고 유감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가진 공감능력은 충동적 행동을 제어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레벨2의 사람들은 아직 공감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렴풋이 눈치를 채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레벨3의 사람은 자신의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그 사실을 감추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레벨4의 사람은 평균이나 그 이하의 공감능력을 가지는데, 그들의 무딘 공감능력이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레벨5인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평균보다 아주 조금 높은데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를 삼가는 편이고 다양한 관점을 참고하거나 고려하기 위해 결정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레벨6인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그것을 살피고 지원하려 애를 쓰는 놀라운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지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공감능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를 활용하여 뇌 속에 있는 공감회로라고 하는 특정 부위의 작용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덕분입니다. 어쩌면 <공감제로>를 읽는 분들이 신경과학에 기본적 지식이 없다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 같습니다. 공부를 조금 한 저도 최근에 바뀐 의학용어집을 참고하여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다소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공감회로에 참여하는 뇌 부위로는 안쪽앞이마겉질(내측전전두피질), 눈확이마겉질(안와전두피질), 이마덥개(전두판개), 아랫이마이랑(하전두회), 꼬리쪽이마띠겉질(미측전두대상피질)과 앞뇌섬엽(전측뇌섬엽), 관자마루이음부(측두두정접합부), 위관자고랑(후측상측두구), 몸감각겉질(체감각피질), 아래마루소엽(하두정소엽)과 마루엽속고랑(두정엽내구), 그리고 편도체 등 모두 열 곳입니다.

 

앞서 레벨 0에 해당하는 공감제로인 사람들 가운데 일부 사람은 살인, 폭행, 고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저자들은 공감제로가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정신의학에서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경계선 성격장애(B 유형), 사이코패스(P유형) 그리고 나르시스트(N유형)로 구분하고 각각의 대표적 임상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신병과 신경증 사이의 경계선에 걸치는 경계선 성격장애(B유형)는 초창기 아동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에 따라 부모가 자기 아이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고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임하는 경우에 생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B유형인 사람에서는 세로토닌 수용체에 대한 신경전달물질의 결합정도가 감소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연구결과 유년기의 부정적 경험들이 뇌를 변화시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는 사이코패스(P유형)인 사람은 처벌을 두려워하도록 배우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유년기의 장기적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의 증가를 가져와 종국에는 관련 부위에 손상을 입히게 되는데, 편도체의 활성이 지나치거나 이마겉질(전두피질)의 활성이 불충분해서 반응성 공격이 과민하게 나타나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자랑과 자기과시로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나르시스트(N유형)은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잔인한 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다고 합니다. N유형 역시 유년기의 감정적 학대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추론하고 있는데, 그들의 외모나 재능에 대한 과대평가와 지나친 방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지만, 구체적 연구로서 뒷받침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굿닥터>는 자폐3급과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 시온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외과를 공부하는 의사로서 자리잡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자폐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시온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증후군이 공감제로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긍정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공감에 어려움을 겪지만 정보처리 방식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인다는 점과 비도덕적이라 보다는 초도덕적인 면, 그리고 인지적 공감은 평균보다 못하더라도 정서적 공감은 온전하다는 점 등입니다.

 

이어서 저자들은 공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감정인식을 담당하는 세 종류의 유전자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즉 세로토닌 수송체 유전자(SLC6A4), 바소프레신 수용체 1A 유전자(AVPR1A) 그리고 카나비노이드 수용체 유전자 1(CNR1)입니다. 물론 더 많은 유전자들이 공감에 관여할 것입니다만, 저자들은 이 세 유전자들의 유전자구성이, 뇌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 즉 공감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다른 형태의 공감제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비롯하여 공감회로의 이상을 해석하는 방법 등 뿐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공감이 결여된 상태임을 진단하는 등 많은 영역에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저자는 공감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자원 중 하나임을 설득하기 위하여(219쪽)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공감이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http://blog.joins.com/yang412/12128887>에서 공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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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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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로 20세기 형이상학, 유대신학적 요소를 사적유물론과 결합시킨 독특한 사상가로 알려진 발트 벤야민의 저술을 처음 읽게 된 것은 생뚱맞게도 누군가 쓴 여행기에서 그가 쓴 글을 인용한 것을 읽고서였습니다. 좌파 아웃사이더로 인식되고 있지만, 문학이론, 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결과물이 정신, 사회과학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는데 오히려 저의 시야가 좁았던 것 같습니다.

 

최성만교수님이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부유한 유대인 시민 가정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강요한 것은 몰락해가는 계급 속에 갇힌 정체성, 사회로부터 차단된 정체성으로서 이는 어린 벤야민을 소외시켰고, 이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을 그는 주로 책읽기에서 찾았다.(30쪽)”고 하면서도 “유복한 시민 가정의 보호막 속에서 자라왔기에 어린 벤야민에게 빌헬름 제국의 말기 계급적 갈등들은 대부분 은폐되어 있었고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었다.(31쪽)”고 적고 있어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자격 취득에 실패하고 특별한 직업이 없을 때, 신문과 잡지 등에 산문, 여행기, 서평을 기고하던 그가 1920년대 몰락해가는 독일 시민사회에서 받은 파노라마적 인상이나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철학적, 정치적, 문학비평적 관찰과 성찰들, 꿈, 여행기, 기억 등을 몽타주형식으로 엮은 철학적 아포리즘 모음집이 <일방통행로>라고합니다. <사유이미지>는 에세이와 산문단편들을 묶고 있는데 기지에 찬 사상적 통찰들만이 아니라 문체와 아방가르드적 형식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60편으로 이루어진 <일방통행로>는 ‘주유소’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마치 길거리를 따라 가로에 늘어선 다양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래카드, 광고판, 쇼윈도, 번지수가 적힌 집들, 기타 공간들처럼 다양한 공간들의 열림과 닫힘,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모습들을 벤야민의 관상학적 내지는 현상학적 시선으로 ‘사유적인 이미지’로 읽어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세 분의 옮긴이들이 완역을 했는데, <사유이미지>는 선집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번역했다고 합니다. 일방통행로의 길을 거슬러 들어서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타국에서... 진입금지 표지를 보지 못했던 탓에 신호를 받아서 들어선 도로에서 마주선 차량이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도로상황이 복잡하지 않아 곁길로 빠지면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복잡한 도로상황을 고려하여 차량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하여 설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작가는 자신의 사유의 흐름이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방통행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 ‘주유소’의 첫 번째 구절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69쪽)”의 의미를 깨닫는 일부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읽어가다 보면 제목과 글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93쪽)”라는 이야기는 글을 쓰는 단계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제목은 왜 ‘계단 주의!’일까요? 하나 더,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 ‘속물들에 맞서는 13가지 명제’, ‘비평가 기법에 대한 13가지 명제’로 구성된 이야기의 제목은 왜 ‘벽보 부착금지!’일까요?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소화물 운송 및 포장’이라는 제목의 글,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140쪽)”은 주변을 잘 관찰하면 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사유이미지>는 <일방통행로>에 비하여 비교적 의미파악이 쉬운 편인 것 같습니다. 특히 벤야민의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가’,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 등은 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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