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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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스터리 소설 <나사의 회전; http://blog.joins.com/yang412/13259819>은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려가며 하는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친했던 이야기꾼 친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방과 후 학교 뒷동산에서 놀다 지친 친구들을 모아 학교 우물에서 나온다는 귀신 이야기를 연속극처럼 이어가곤 했습니다. 이야기는 수학여행길의 어느 날 밤, 경주의 한 여관방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날 새로 듣게 된 동무들을 위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효과음까지 넣어가며 띄운 음산한 분위기에 다시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한다면서 이불장에 숨었던 동무 하나가 결국은 공포에 질려 튀어나오는 바람에 동무들이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한번 들은 이야기를 잘 전하는 이야기꾼이 있기 마련입니다. 피터 매칼리스터는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 서사시를 구전하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구슬라르(1현 현악기인 구슬라로 반주하며 이야기에 가락을 붙여 노래하는 세르비아의 가수 집단으로 서사시의 구비전승을 지켜온 사람들)에 대하여 적고 있습니다. 구슬라르 집단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하는데, 최후의 구슬라르 가운데 도축업을 하는 아브도 메데도빅씨는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59개의 서사시를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외우는 서사시를 글로 옮기면 35만 476행에 달하는 놀라운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메데도빅씨는 처음 듣는 노래도 빨리 배우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2294행의 시를 단지 한번 듣고서 자유자재로 불렀을 뿐 아니라 원곡의 서술에 충실하면서도 6313행으로 늘이기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음유시인이라고 할 구슬라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 이야기할 베르너 풀트(Berner Fuld)의 <금서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한번 읽고 기억해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있는 이상 금서의 효과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쓴 베르너 풀트는 독일의 유서깊은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나서 문학사와 예술사를 전공하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전기와 사전, 일화 등을 저술해왔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는 ‘금서’란 “읽지 못하도록 출판이나 판매를 금지한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대부분의 이념서적들을 금서로 묶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부작용(?)을 가지고 오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념서적은 아니었습니다만, 당국이 금하던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익명으로 썼던 분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니 이제는 문제가 될 것도 없을 것 같아서 공개합니다. 사실 금서로 인한 진짜 큰 부작용은 해당 책의 관점을 지지하는 매니아들만 공유하고 그런 생각을 키워나갈 뿐, 그 책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이 커나갈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금서사건으로는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폭정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민생과 직결된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심지어는 유생(儒生)들까지도 생매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건을 진시황만 저질렀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금서의 역사는 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까지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다스리던 태평성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는 그런 일을 원천봉쇄하려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지도자도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책을 쓰지 못하게 하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겠는데, 실제로는 폭압적 조처에 반발하는 지식인들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요한 아담 베르크가 1799년에 쓴 <책읽기의 기술>의 한 대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책을 금지하는 일은 금지다. 그 일도 정당하다면 세상에 결실을 거둘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 중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발언권에 대한 침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금지다.(5쪽)” 주목할 점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이라는 단서 조항일 것 같습니다. 사실 금지된 책을 쓰는 일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자가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금서의 절멸을 막기 위해 빈번히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무명의 남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책뿐만 아니라 그들의 용기에 더 큰 신세를 졌다.(7쪽)”라고 감사를 표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금서 조치를 내리는 주체는 권력을 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의외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금서의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또한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한때는 금서로 묶어 탄압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금서로 묶인 이유가 얼토당토하지 않다거나, 혹은 금서로 묶이는 바람에 오히려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노이즈 마케팅에 해당된다고 할까요?

 

생각 같아서는 권력자로부터 탄압을 받은 작품을 화제로 삼을 만도 한데 저자는 작가 스스로 금서로 묶었던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께서 2010년 입적하시면서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분의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무소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미 세상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생각들을 회수할 수 없다면 출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글쓰는 사람이 써둔 글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이유도 다양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첫머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영국의 화가 겸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사랑하던 여인이 죽자 슬픔에 휩싸여 자신이 써놓은 모든 시의 유일한 원고를 상자에 넣어 그녀의 무덤에 같이 묻었지만 세월이 흘러 슬픔이 엷어지게 되자, 그녀의 무덤을 도굴하여 원고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생전에도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워버리곤 하던 프란츠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남긴 편지를 통하여 “내 모든 유고 … 일기, 원고, 편지”를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데,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브로트 덕분에 우리들은 카프카의 명작 <성>, <소송>, <실종자> 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의 사적 소유의 범주라고 할 원고를 스스로 없애는 경우, 작가의 팬 입장에서나 혹은 작가를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두 번째로 고른 금서의 영역은 종교계입니다. 로마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의 금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주옥같은 고전이 쏟아져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인기 없는 작가들을 단호하고 가차 없이 축출하고 작품까지 폐기하도록 한 조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특히 기원전 12년 말에는 정치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만, 2,000권이 넘는 신탁서와 예언서를 압류해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군사령관으로서 외부정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민중들이 신탁서나 예언서를 바탕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강남 번화가에 가면 타로점을 비롯하여 개인의 미래를 알려주는 점을 치는 카페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뿌리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교회 역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과 예언을 반론 없이 신도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 발전 혹은 학문을 빙자한 점성술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어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는데, 세속의 정부가 교회에 동조하게 된 것은 앞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예처럼 점성술은 때로 정치적 예언을 다루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움베르코 에코는 <장미의 이름; http://blog.joins.com/yang412/12895088>에서 금서를 숨기는 이상적인 장소로 도서관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에코는 수도원에 있는 도서관이 심지어는 수도사들마저도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감추는, 일종의 정보를 왜곡시키는 곳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그 서책을 묻어버리고 있구나.(장미의 이름 2권, 712쪽)” 이처럼 금서를 숨겨 독자로부터 차단하는 방법도 있지만, 저자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금서를 몰수하여 태우는 분서(焚書)라는 적극적인 정책적 행위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1920년 저급한 에로스 문학을 파기하는 대신 독자로부터 ‘분리’보관하는 정책을 채택한 독일 바이에른주 국립도서관장리 “에로스 문학 서적은 문화의 단면에 대한 철저한 시대사적 평가를 위해 여전히 큰 가치가 있고, 어떤 서적은 예술적으로도 의미가 충분하므로,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분리’구역에 보관되어야 한다.(91쪽)”라고 한 견해와 함께 “각각의 서적들이 금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검열연구가들의 견해까지 인용하면서 이러한 파괴적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금서의 이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궁금한 사항입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주로 영혼의 구제와 권력 유지에 대한 근심이 교회와 정부에 의하여 자행되어 온 금서의 근거였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진보를 위하여 봉건의 잔재를 지우려고 관련된 책들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흑인노예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 대륙의 노예소유주들의 성경읽기 반대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히틀러의 제3제국은 단지 유태인에 반대하기 위하여 금서조처를 내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시민운동가 앤서니 컴스톡은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지금도 대부분의 국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한편 저자는 체계적으로 금서를 해온 대표적 집단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559년 금서목록을 처음 발표하였는데, 일종의 블랙리스트라고 할 금서 목록은 1544년 소르본대학의 신학부가 여섯 가지의 위험한 도서목록을 발표한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파스칼, 데카르트, 칸트, 프리드리히 대제,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하이네, 발자크, 레오폴드 폰 랑케,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등, 로마의 금서목록에 올라 있는 서적을 보자면 마치 세계문학 사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154쪽)”고 적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찰스 다윈의 저서 <자연선택에 따른 종의 기원>은 로마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지 않다고 합니다. 교리로 하고 있는 창조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진화이론을 지지하는 과학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기독교계와는 달리, 로마 가톨릭은 진화론과의 충돌을 피하는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불거진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은 미국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1925년 테네시 주 하원은 침례교도인 의원의 제안으로 생물수업시간에 창조설에서 벗어난 학설을 가르칠 경우 벌금을 물린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진화론과 창조론은 법정에서 맞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제소된 교사를 변호한 클라렌스 대로가 ‘학문 대 믿음’이라는 법정전략으로 승소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최근까지 남아있는 금서대상은 외설시비에 걸린 책들일 것 같습니다.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로 금서판정을 교묘하게 피해갈 여지가 있습니다만,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 읽는 흐름이 깨지기도 합니다만, 역시 비밀에 대한 호기심은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금서의 비밀을 캐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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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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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작가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바탕으로 쓴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에 붙인 변주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면 나는 극도로 정치성을 띤 세상의 덫에 걸려든 쾌락주의자라고 말하겠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투영하기에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인 <우스운 사랑들>은 바로 그 상황을 얘기한다. 묘한 우연이다. 그 단편들(1960년대에 쓴 것들이다.) 중 마지막 작품을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사흘 전에 끝냈으니 말이다.(밀란 쿤데라 지음, 자크와 그의 주인, 16쪽)”

 

<우스운 사랑들>에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있습니다. 심오하다기보다는 경박한 쪽에 가까운데 언젠가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누구도 웃지 않으리’는 흔히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기를 더해가다 보면 결국은 수습할 수 없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적용한 것인데, 다들 총대매기를 피하다가 막차를 타게 된 사람이 결국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웃지 못할 상황입니다. 생즉사(生卽死)요 사즉생(死卽生)인데, 처음에 진솔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믿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이유로 쿤데라는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12쪽)”고 미리 예고편으르 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와 반대로, 마지막 이야기 ‘에드바르트와 신’의 경우는 ‘누구도 웃지 않으리’와는 달리 죽을 각오로 문제해결에 나선 결과 상황을 주도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소설가 김연경님이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한 “형이상학인 것(철학과 종교)과 형이하학적[성(性)과 배설]을 뒤섞고 또 뒤집는 희(비극)이야말로 쿤데라 소설의 핵심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밀란 쿤데라 읽기, 17쪽)”는 말이 꼭 들어맞는 작품들이 바로 <우스운 사랑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사랑을 하는 연인들에게 흔히 사랑을 시험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히치하이킹게임’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은 휴가를 떠나는 길에 갑작스럽게 시작하는 상황극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몰고 가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살짝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히치하이킹게임’이 시작되면서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연료 계기판 바늘이 갑자기 0을 행해 흔들리자, 이 컨버터블은 대체 기름을 얼마나 먹어대는 건지 모르겠다고 운전하던 젊은이가 말했다.(105쪽)” 습관처럼 연료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주유소로 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여행할 적에 인가가 없는 산골로 들어가면서도 기름을 미리 채우지 않는 바람에 간이 조마조마한 상태로 운전해야 했던 경험이 있고, 후배의 차를 타고 도시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순간 엔진이 멎는 바람에 주유소까지 몇 십 미터 거리를 차를 밀고 간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끝나면서도 무언가 찝찝한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진하게 남는 느낌입니다만, ‘콜로키움’은 조금 다르게 마무리되는 느낌입니다. 병원 당직실에 모인 두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들은 서로 물리는 애정관계를 짜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거나 상대가 내비치는 욕망을 거절하는 상황이 펼쳐지다가 간호사 엘리자베트가 옷을 모두 벗은 상태로 가스가 새고 있는 방에서 발견되어 자살을 시도한 것인가? 아니면 가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해프닝인지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의과대학생 플라이슈만이 프로포즈를 하는 것으로 해피앤딩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에서 그리고 있는 스무 살이 넘는 나이차를 둔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은 과연 가능할까 의심을 하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썼던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치열한 맛보다는 가벼운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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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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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미국 여행에 관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주한 여행에 관한 글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워싱턴까지 여행하면서 루레이동굴을 구경하러 가면서 셰난도어 국립공원을 자동차를 타고 지나간 인연때문입니다. 그때가 4월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마른 나무들이 어린 싹을 티워 내려고 물을 끌어올리는 느낌만 있을 뿐 아직은 겨울느낌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에서 굽어보는 셰난도어 계곡 역시 떠난 사람으로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만, 저자가 밟았다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의 끝에 있는 메인주에서 남쪽에 있는 조지아주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등성이를 따라, 14개 주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2100마일(3360km)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1,500미터가 넘는 봉우리만 350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계절적으로도 제한이 있어 보통은 겨울을 지나고 3월초 눈을 보면서 남부 조지아주 스프링어 마운틴에서 출발할 해서 북쪽 끝 메인주에 있는 마운트 캐터딘까지 도착하면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 사계절을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힘든 여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해도 걷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사건 사고에서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즉흥적으로 시작한 여정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라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도 같은 식으로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는 트레일을 따라가다가 곰이나 뱀과 같은 위험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거나, 예상치 못한 폭풍설, 한파, 폭풍우로 인해 조난을 당해 죽음을 맞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 않다는 사실도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발적인 범죄로 보이는 사건에 말려 희생된 사람도 있는데, 워낙이 다니는 사람이 적은 탓에 목격자가 없어 사건이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1921년 몽상가 벤턴 매카이가 아이디어를 만들었는데, 워싱턴의 해사법 전문 변호사이자 실력있는 등산가 마론 에버리를 만나게 되면서 1930년에 첫삽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험난한 길을 내는데 자원봉사 인력을 활용하여 7년 만인 1937년 8월 14일 공식적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한번에 종주하는 사람을 스루 하이커라고 하는데, 요즈음도 1년에 2000여명이 도전하지만 전코스를 완주하는 사람은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1,392킬로미터, 즉 전체 트레일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정도를 걸었을 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저자는 살고 있는 마을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지나는 것을 알고는 종주에 도전할 생각을 하는데, 성공 가능성을 먼저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도전하겠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물론 출판사에 먼저 떠벌인 것을 보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는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성장을 꾀하려는 의도보다는 걸었다는 사실을 포장해서 글을 팔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연락도 없던 고등학교 동창이 느닷없이 동행하게 되는 것이나, 그 동창이 알고 보니 알코올중독에 빠져있었다는데, 자신은 물론 그 동창이 험난한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동창은 트레일을 걷기 시작한 첫날 단지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배낭에 넣었던 의복, 식량 등을 내버리고 말았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두 하이커가 얼마나 계획없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했는지 알만합니다.

 

이 책에서 몇 가지 배울 점이 있다면, 아무리 짧은 길이라도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점,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관한 모든 것-트레일이 설치된 역사,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 식물, 심지어는 위험까지도-을 알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트레일을 걸으면서 저자가 깨닫게 된 인류의 자연파괴의 역사, 그리고 숲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들에 공감할 수 있다는 점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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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와 그의 주인 -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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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대중의 주목을 받은 작품을 다른 장르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경우는 너무 많고, 반대로 영화가 소설로도 독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인기몰이를 한 영화가 연극으로 혹은 뮤지컬로 각색되어 무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르마다 특출한 창작물이 이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작가적 인프라가 척박한 탓일 수도 있겠고, 한 장르에서 이미 검증된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보려는 얄팍한 상술일 수도 있겠습니다.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라는 부제가 달린 <자크와 그의 주인>은 밀란 쿤데라가 작품의 모두에 붙인 ‘변주서설’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점령한 이후 그를 도와주려는 연출가의 요청으로 드니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쿤데라는 자신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빠진다면 소설의 역사는 이해될 수 없고 불완전해질 것이다. 심지어 나는 세계 소설의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 작품이 오직 디드로의 전체 글 속에서만 고려되는 고초를 겪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의 진정한 위대성은 <돈키호테>나 <톰 존스>, <율리시스>나 <페르디두르케>와 견줄 때 드러난다.(17쪽)” 디드로의 원작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쿤데라의 확신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 <카운슬러>를 읽으면서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게 되면 스스로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가면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곱씹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희곡 역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 연출부에서 작품을 고르고 전체 단원을 소집하여 초독을 하면서 연출방향이 결정되면 각 파트에서는 연출방향에 맞추어 아이디어를 모으게 됩니다. 배우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창조하고 장면마다 관객에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디드로의 원작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음이 분명한데도, <자크와 그의 주인>이 각색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작품이고, 고유의 ‘디드로에 대한 변주’이며, 디드로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쿤데라가 밝히는 이 희곡의 구성은 자크와 그의 주인의 여행을 바탕으로 세 가지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주인의 사랑, 자크의 사랑 그리고 포므레 부인의 사랑입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폴리포니 기법(일종의 옴니버스 스타일로 이해했습니다만, 세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서로 뒤섞이지는 않도록 하는 기법이라고 합니다.)과 변주 기법(이 세 가지 이야기는 사실 제각기 다른 아야기의 변주라는 것입니다.)을 적용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면 같은 배우가 여러 등장인물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기법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백성희님은 쿤데라가 이 작품에 집어넣은 이중적 장치는 “인물들도 닮고 인물들의 사랑이야기도 모두 닮았으며, 인간사가 결국 반복의 역사라는 생각(밀란 쿤데라 읽기, 180쪽)”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주인과 자크의 대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 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으냐! 자크: 제가요? 반복을 해요? 나리, 자기 말을 반복한다는 말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110쪽)“

 

막이 오르면서 등장한 주인과 자크의 대사는 작품 전편을 통하여 흐르는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나 관객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또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섞여드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전체 공연 동안 무대는 바뀌지 않는다. 무대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쪽은 조금 낮고, 뒤쪽은 조금 높아 연단 형태를 이룬다. 현재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무대 앞쪽에서 연기된다. 과거 일화들은 뒤쪽 연단 위에서 표현된다.(38쪽)”라는 작가의 무대설명을 꼼꼼히 읽지 않은 탓일 것입니다.

 

한 번 읽고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디드로의 원작도 읽어보아야 할 것 같고, 연극인들이 반복작업을 통하여 작가가 희곡에 담은 생각을 잡아내어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처럼 반복해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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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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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이러저런 이유로 찾아 읽게 되는 고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몇 차례 인상적인 인용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이시 히로유키의 <세계 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225840>입니다. “명작에 등장하는 환경 문제를 날실로 하여 문제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그 후의 전개를 꿰고, 동시대 인물·사건과의 연관성을 씨실로 하여 사람과 환경이 촘촘히 엮인 역사를 펴 보이려 한 것이 이 책이다.(6쪽)” 라는 기획의도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환경문제를 짚어내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는 집약식 농업으로 지력을 상실한 초원이 이어 닥친 가뭄으로 황폐화하면서 그 땅을 붙이며 살던 사람들이 유랑하는 신세에 빠지는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사회상에서부터 기후변화, 그리고 작가의 성향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챙겨 작품을 분석적으로 읽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미국의 남서부로 돌아보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김영주님의 <태양, 바람 그리고 사막; http://blog.joins.com/yang412/3242002>입니다. 농사짓던 땅을 은행을 앞세운 자본에 빼앗기고 고향을 등져야 하는 조드 일가가 오클라호마에서 LA로 이어지는 66번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장면을 그린 구절, "긴 콘크리트 도로는 붉은 땅과 잿빛 땅을 넘어 산을 휘감아 올라갔다가 로키산맥을 지나 햇빛이 쨍쨍한 무서운 사막으로 내려선다. … 사막에서는 멀리 있는 것들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중앙에 자리한 검은 산들은 멀리서 감질나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을 인용하면서 조드 일가가 이동한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분노의 포도>에 대한 유혹은 결국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갔던 저의 경험을 되새겨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친구와의 우연한 충돌이 생각지 않은 살인으로 이어져 형무소에 수감된 톰 조드가 가석방되어 오클라호마의 고향에 도착하지만, 이미 고향은 가뭄과 대공황의 이중고에 땅을 은행자본에 빼앗기고, 그래도 가뭄피해가 없어 일손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부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가재도구를 팔아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중고차를 구입하고 개조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하여 스무명이 넘는 대식구가 서부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서부는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의 연속이었을 뿐입니다. “뒤쪽에서 해가 떠오르더니 갑자기 아래쪽에서 거대한 계곡이 나타났다. (…) 포도원, 과수원, 크고 평평하며 초록색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계곡,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농가들. (…) 곡식을 심어 놓은 밭들이 아침 햇살 속에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버드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1권 477쪽)”

 

겉으로 보아서는 분명 희망에 넘쳐야 할 서부는 일꾼들의 임금을 착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려는 자본의 사탕발림에 속아 몰려든 이주민들에게는 다른 형태의 삶과의 싸움터였던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나마 일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작가는 국외자의 시각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 조철원 교수님이 작품해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나 문제제기가 없다는 거센 비판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공황 당시의 미국 사회의 바닥을 살았던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작가의 생각으로 재단하지 않고 기록하여 전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부로 이동하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죽음을 맞고, 그 죽음을 정리하는 일가족의 모습에서 삶을 달관한 모습을 보거나 혹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에 들어서면서 톰의 동생이, 그리고 캘리포니아 난민촌에서는 여동생의 남편이 차례로 가족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에서도 작가는 충분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실,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은 다음의 구절에서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2권 255쪽)” 사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 이제 등장인물들이 무언가 상황을 바꾸려는 행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감에 긴장감이 고조됩니다만, 작가는 그저 농장주의 횡포에 맛선 케이시목사가 허망하게 쓰러지고, 그 과장에서 톰이 사람을 죽이고 다시 쫓기는 신세로 몰리는 과정을 그려내고 말아 실망에 빠지게 합니다. 아이를 사산한 샤론의 로즈가 폭우를 피해 옮겨간 대피소에서 만난 굶주린 노인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으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도 무언가 더 할말은 없었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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