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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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발표된 <소설의 기술>은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 대한 성찰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첫 번째 책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에 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들과 대담, 그리고 연설문들을 엮은 일종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것입니다. 먼저 에세이에서는 카프카, 플로베르, 조이스, 톨스토이, 세르반테스, 곰브로비치 등 최고의 문학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소설쓰기, 나아가 소설을 통하여 서구의 문화적, 철학적 흐름과 전통, 그리고 인간 실존에 대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방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 비평가 크리스티앙 살몽과 두 차례에 걸쳐 가졌던 대담의 내용을 정리하여 2부 ‘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과 4부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에 담고 있습니다. 특히 살몽과의 대담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품에서 역사를 어떻데 다루고 있느냐는 살몽의 질문에 대하여 쿤데라는 나름대로의 몇 가지 원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역사적 정황들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취급한다. 둘째, 여러 역사적 정활등 중에서 등장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셋째, 역사적 연대기는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광범위한 원칙은, 역사적 정황은 소설 속 인물에게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역사는 그 자체가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개별 작품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내용에서 ‘덫’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삶의 덫이라는 것은 사람들도 항상 알고 있었죠. 사람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났고 스스로 택하지 않은 육체에 갇혀 있다가 결국 죽지요. 그러나 세상이라는 공간은 영원한 탈출의 가능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세계는 우리 주위로 갑자기 좁아져 버렸습니다. 세계가 덫으로 바뀌는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 1914년의, 이른바 세계대전이었을 거예요. (중략) 모든 재앙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또 점점 우리를 서로 닮아 가게끔 만드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사실 앞에서 공포감을 한층 더 웅변적으로 표현해주죠.(44쪽)” 다시 새겨 읽어도 알쏭달쏭한 것 같습니다.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등의 작품 속에 숨겨진 리듬과 화성이라는 음악적 요소나 수학적 체계가 담겨져 있다고 하는데, 음악적 요소는 아무래도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소설에 접목한 것이라고 합니다. 문학과 음악과의 관계에 대하여 쿤데라는 “소설을 구성한다는 것은 음악처럼 여러 다른 정서에 공간을 배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쿤데라의 작품에 감추어진 수학적 구조는 체코의 한 비평가가 쓴 ‘<농담>의 기하학’이라는 글에서 처음 지적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학적 구조에 대하여 “이러한 ‘수학적 질서’라는 것은 형식의 필요로부터 자연스럽게 오니 미리 계산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127쪽)”라고 답하는 것을 보면,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소설의 기술> 6부에는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이라는 제목으로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에서 좋아하는 단어를 일종의 사전형식을 빌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체코어로 쓴 <농담>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쿤데라가 가졌던 불편한 심정에 대하여 <데바>의 편집자인 피에르 노바의 권유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단어에 대하여 쿤데라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내 소설에서 인물들의 행위는 대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루어지지지만 나는 내 소설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만들어진 단어인 이 말은 너무 젊고 역사적 뿌리가 없으며 아름답지도 않다. (중략)그래서 내 작중 인물들의 나라를 지칭하기 위해 나는 언제나 보헤미아라는 낡은 단어를 쓴다.(206쪽)” 쿤데라의 이런 설명을 인용하여 권오룡교수님은 보헤미아 문학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고향에 정착해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 보헤미안들의 삶의 무대는 세계 로 흩어질 수밖에 없고 세계로 확대된 상상의 공간을 따라 펼쳐지는 것이 보헤미아 문학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박성창 외 지음, 밀란 쿤데라 읽기, 158쪽)

 

막상 <소설의 기술>을 읽고보니 쿤데라의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읽고 그의 작품세계를 가늠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제 리뷰를 읽는 분들께서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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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 양장본
김승옥 지음 / 범우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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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방에는 대입 논술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들이 여전히 책꽂이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아내는 아이와 같이 책을 읽었던 모양입니다만 저는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챙겨보곤 합니다.

 

김승옥님의 <무진기행>에 눈길이 갔던 것은 최근에 짙은 안개 때문에 일어났다는 헬기사고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게 읽기 시작한 김승옥님의 단편집 <무진기행>에는 ‘야행’, ‘서울․1964년 겨울’, ‘역사’ 그리고 ‘무진기행’이 실려있습니다. 오래된 판본이라서 책갈피가 조금 변한 느낌에 묵은 듯한 종이냄새가 이야기 속 분위기에 제대로 쏠려들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는 서울에 둥지를 틀었던 70년대 초반보다도 10년 가까이 전의 시점입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세월이 요새보다는 느리게 흘렀던 것 같은 느낌이라서 작가가 묘사하는 서울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서울․1964년 겨울’의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하는 포장마차 분위기는 요즘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종일 병동실습으로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느라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눈앞의 포장마차를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합을 하나 굽고 소주를 반병 시켜 한 잔을 마시면 온몸에 따듯한 열기가 퍼지면서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느낌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손님이라도 있으면 눈인사가 오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인사 끝에 그날 뉴스거리라도 화제에 오를라치면 판이 커지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포장마차에서 이루어진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서울․1964년 겨울’입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일과가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갑니다만, 젊었을 적에는 공연히 명동이나 종로를 쏘다니곤 했습니다. 대학원에 다닌다는 안이라는 젊은이이가 사관학교 입시에서 미역국을 먹고 백수생활을 하는 김이라는 젊은이에게 “밤거리에 나오면 뭔가 좀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46쪽)”라고 묻는 것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음의 열기를 쏟아내기 위해서였을까요? 이런 젊은이들의 생생한 분위기와는 달리 뇌막염으로 죽은 아내를 해부실습용으로 팔았다는 사내는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월부 책장사를 한다는 사내 나이가 중년에 이르렀다면, 아내의 죽음으로 바닥이 난 삶의 희망을 되살려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이제 버릴 세상의 마지막 모습을 젊은이들과 같이 지켜보고 싶다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 같아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에는 친척집에 얹혀살기도 하고, 하숙집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사’라는 단편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하숙집 분위기에 관심이 가면서도 생경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하숙집이 있는 동네에 따라서 하숙생의 성분이 다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은 경운궁 앞에 있어 대학생들보다는 회사원들, 혹은 재수생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처럼 대학가 하숙집처럼 하숙생들 사이에 공감대가 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하던 하숙생 송별파티에서 계란껍질을 술잔삼아 소주를 나누어마시던 기억은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무진기행’ 이야기로 넘어가면, 일단 ‘무진’이라는 곳이 어딜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무진기행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같은 생각을 해보았을 것 같습니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무진은 바닷가에 가까운 동네지만, 정작 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항구가 들어설 수 없는 곳입니다. 무진이라는 곳이 무안, 광양 혹은 순천이라고들 하는데, 그 가운데는 작가가 성장한 순천이 가장 가깝다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광양이나 순천을 전라선으로 갈 수 있고, 무안은 목포로 가는 편이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김승옥님이 언젠가 인터뷰를 통하여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오는 가치파괴와 전통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새로운 질서가 생기지 않아서 안개가 끼어 있는 곳이 바로 무진이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굳이 어디라고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의 설명은 소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103쪽)”

 

내서 무진을 떠나 서울에서 얻은 것들은 무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들일까요? 그들 가운데 특히 인숙과의 요즘말로 치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은 단지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로 안내하겠다는 결정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인숙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의문은 여전히 남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요즈음이라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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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 삶이 때로 쓸쓸하더라도
이애경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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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애경작가님의 전작이 <그냥 눈물이 나; http://blog.joins.com/yang412/12506027>였음을 생각해보면 제목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작에 이어 쓴 속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보면 전작에 붙였던 프롤로그도 없이 바로 본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저의 짐작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눈물이 나>에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에세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것은 어쩌면 방황하는 젊음을 어쩔 수 없어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이는 느낌이 들었다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은 이제 삶의 지향점을 정하기 위하여 방황을 멈추기를 조언하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언제 적 이야기였던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서른 언저리는 아무래도 사랑이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연인’이라는 코너에서도 보면 친구처럼 지내는 남녀가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는 순간을 애써 부정하는 장면을 코믹하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미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시나브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작가는 ‘어디서부터 사랑일까’고민해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 가운데, 저는 “너에게 시선도 못 주고 네 옆을 재빨리 지나갈 때부터 사랑(17쪽)”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헤어질 때 마음 아플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바래다 주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의 생각들을 읽어가다가 깜짝 놀란 대목이 있습니다. ‘기억의 속도’에 관한 글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끄집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너를 만난 순간, 내 대뇌피질에 언제나 네가 붙어 있었던 것처럼 너를 기억해 내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고, 네가 한 말들과 약속들을 네 앞에 꺼내 놓는 데 단 1분도 지체되지 않았다.(68쪽)” 기억 속의 누군가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저로서는 놀랍고도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젊어서 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동생처럼 지내던 사람이 멀리 떠나던 날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던 그녀는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났다. 그건 슬픔이 오는 길을 돌아가느라 수고한 내가 흘린 땀방울이었을 것이다.(79쪽)”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애꿎은 땀방울을 핑계 삼는 것 같습니다만, 어쩌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골라보는 재미를 즐겨보라는 듯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두루 꼽아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더 많은 경우를 생각해냈겠지만 아마도 지면관계상 일부만 소개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든 그녀가 내놓은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가운데 “온몸의 수분이 말라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가 마음에 듭니다. 생리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ㅋㅋ

 

요즈음 제가 자료를 모으고 있는 여행에 관한 그녀의 재미있는 생각은 완전 생각지도 못하고 덤으로 받은 선물 같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입니다. “전 세계 70억 명의 사람 중에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인사를 나누게 되는 사람은 3천 명 정도이고 그중 150명 정도와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 그런 면에서 여행은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69억 명의 인생을 관람하거나 그들의 삶에 입장할 수 있는 낯설고도 붙임성 좋은 티켓이다. 중요한 건,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든 관람차를 타든 내가 그 티켓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121쪽)” 저자가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서 근거가 분명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작가의 생각에 딴죽을 걸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클래식에 눈물 흘리다’에서 저의 못된 버릇이 튀어나옵니다. 클래식이나 구성진 판소리에 귀가 꽂히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적었는데, 제 생각에는 이미자씨의 노래가 귀에 착 감기는 나이가 돼야 진정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자씨의 팬이었던 저는 애늙은이였던 모양입니다.

 

재미있고 느낌 나는 사진들에 넉넉한 여백으로 마음에 여유까지 생기는 편집이 눈을 끄는 이애경작가님의 마음까지 끄는 생각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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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기의 시대 - G1으로 향하는 중국몽
김태일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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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중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를 포함한 동중국해 일대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으로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가상적국이 점령한 섬을 탈환하는 작전을 전개한 것과 관련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방공식별구역은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통상 영토와 영해의 직접적인 상부 공간에 국한하는 영공의 범위보다 넓게 설정하는데, 이는 속력이 빠른 항공기가 영공을 침범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방공식별구역 운영규칙에 따르면, 방공식별구역을 지나는 항공기는 사전에 중국 외교부나 민간 항공국에 비행 계획을 통보하고, 방공식별구역 관리기구의 통제에 따라야 하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무장력을 동원해 ‘방어적 긴급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합니다.(연합뉴스 11월 23일자 기사, “중국, 동중국해 상공에 ‘방공식별구역’ 설치”)

 

동중국해의 해양을 두고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의 국가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위치가 격상되어온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위치하여 오랜 세월을 이들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지난 세기에 겪었던 불행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중국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중국의 변모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반응까지도 살펴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근세 이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힘의 흐름은 중국을 중심으로 밖으로 흘러나가는 구조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힘의 흐름 속에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힘에 눌려 사라져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주권구조의 부침은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중국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세기에 일본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잃었던 것은 이때까지의 힘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역방향으로 흐르게 된 힘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기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은 겁박하여 한 몫을 챙기려는 열강의 표적으로 관심을 받았지만, 불과 한 세기만에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대로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조 베넷의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http://blog.yes24.com/document/7446584>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베넷은 중국이 무한에 가까운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전 세계 경쟁자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 오늘날의 중국의 번영이 가능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나아가 “이제 중국은 21세기를 지배할 준비를 완료한 것 같다. 일단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나면,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그 지배는 계속될 것이다. 규모가 워낙 엄청나서 대적할 나라도 없다. 인도라면 그나마 상대가 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조 베넷 지음,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10쪽)”라는 전망까지 내놓았습니다. 베넷의 전망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나친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중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 저의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최근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중국알기에 도움이 될 책을 소개합니다. 현재 중국경제정보분석(CEIA) 수석분석가로 재직하고 있는 김태일님의 <굴기의 시대>입니다. 저자는 중국 상해재경대학원에서 중국주식 분야를 연구하고, ‘중국의 세계금융중심 건설 전략’이라는 주제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굴기(崛起)란 ① 산이 불쑥 솟음, ② ‘기울어진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남’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세계만방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젖어왔던 중국으로서 지난 세기는 치욕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중국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제사회로서는 오늘날의 중국이 새롭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전적 의미대로 오늘의 중국은 분명 굴기의 시대를 맞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굴기의 시대>에서 저자는 중국이 세계만방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다시 세우려하고 있다는 ‘중화굴기’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 문화, 경제, 금융, 소비, 산업, 자원, 군사, 해양, 우주분야 등 전방위적으로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을 다루게 된 이유는, “본서의 목적은 중국의 앞날을 예언하고 그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중국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변수를 추상적 모형의 틀 속에 가두고 그 경로를 탐색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라고 적은 머리말의 첫 구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G1으로 향하는 중국몽(中國夢)’이라는 부제를 달아 언젠가 미래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글로벌 선두에 서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면서도 ‘21세기에는 이전 세기처럼 단독으로 한 국가가 다른 강대국들을 압도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 같다.’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G7국가들이 주도하던 글로벌 아젠다는 최근 들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국가와 중남미(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유럽(러시아, 터키, 호주, EU)에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더해져 확대된 G20국가들이 논의하여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주도하던 지난 세기말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자원에 의존하여 부상했다가 몰락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남미국가들의 사례에 비추어볼 때 자만이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굴기의 시대>에 담은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만천하에 고하노라’는 글로 1부 ‘중화굴기’를 시작합니다. 중화주의는 유일한 문명국인 화하족(華夏族)의 나라를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그리고 북적(北狄) 등 네 이족(夷族)이 중국화된다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은 천하의 질서가 중화와 이적 사이의 조공과 책봉관계로 유지되고 이적이 중화를 거부하며 중국을 침범하는 일은 천하의 질서를 흩트리는 불의한 일로 여겼다. 따라서 중화가 이적 위에서 천하를 조율할 때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고 황제의 권위는 이적들의 분쟁을 진정시키고 천하의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보장받는다고 생각했다.(26쪽)”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하(夏)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였다고 하는데서 부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등 이적(夷狄)이 중화를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밀레니엄에 해당하는 서기 1,000년부터 1,900년의 시기의 대부분은 이적(夷狄) 출신의 이들 국가가 중국을 지배했을 뿐, 화하족(華夏族)으로는 오직 명나라(서기 1368~1644)만이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본다면 중화주의에 지나치게 방점을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글을 여는 “패도(覇道) 없는 왕도(王道)는 분열을 낳고 왕도(王道) 없는 패도(覇道)는 단명한다. 그래서 패도와 왕도를 두 손에 움켜쥔 국가만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37쪽)”라는 말은 주(周)나라가 쇠약해진 춘추시대에 배경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인덕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사상인 왕도와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패도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저자는 중국이 21세기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근거로 과학, 기술, 산업 등 물질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 사회, 문화, 도덕의 영역으로 진보가 확대되고 있는데, 정책 일관성, 명확한 지표, 주체적 판단 그리고 개방적 사고라는 4가지 동력이 중국의 진보를 견인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을 마무리하면서 브레진스키가 최근에 쓴 <전략적 비전>에서 미국의 글로벌 파워가 줄어들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8개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가장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예견을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공약이 덜 믿을 만할 때는 한국은 혼자 힘으로 군사 또는 정치적 위협에 직면해야 한다.”라는 조언에 대하여 “이대로 반세기만 흐른다면 한반도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두 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도 가끔 떠오른다. 다가올 2050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계속 존속하리라 장담하지 마라.”라고 불안한 내심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것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면 살길을 찾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번속국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살펴보면 중화주의를 앞세웠던 중국이 조선만큼은 소중화로 대접하였던 것은 수와 당의 군사적 침략을 물리친 것으로부터 중국의 통치이념의 바탕이 되었던 학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문화가 중국과 견줄만하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가 이 책의 주제로 삼고 있는 굴기하는 국가의 모습은 이미 우리나라가 중국에 한발 앞서 경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은 우리나라의 굴기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화굴기에 이어지는 경제, 금융, 소비, 산업, 자원, 군사, 해양, 우주분야 등에서 중국이 굴기해온 모습을 저자는 다양한 수치와 표 등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인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이라는 제목을 보면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해지는데, “중국이 소비하면 모든 것이 부족해지고 비싸진다.(272쪽)”라는 답이 곧바로 나옵니다. 덧붙여 “중국 소비는 세계 경기의 풍향계 역할을 하며 그 속에서 투기는 기승을 부린다. 중국은 지금 글로벌 소비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이 이럴진대 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에서부터 산업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의 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과 경쟁을 벌어야 하는 일은 치열하다는 말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심상치 않은 북한의 동향을 보면서 군사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됩니다. 지난 18일 미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관련하여,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헌법 해석 변경을 선택하면 한·미·일이 (동북아에서) 직면한 위협에 대한 강력한 억지력이 될 것”이라며 “이 위협에는 북한의 위협도 포함된다.”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했습니다.(조선일보 11월 21일자 기사, “美 "日집단자위권 대상에 한반도 포함”) 한반도에서 전쟁 상황이 발생하면 일본은 자위대를 투입하여 납북 일본인을 구축하는 특별조치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뜬금없는 주장이 연초에 나왔던 것도 면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 역시 일본의 이러한 전략적 발언에 대하여 “자신의 입지를 좁히는 것을 넘어 이제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마저 방해한다.(405쪽)”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군사전략은 한반도의 대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단지 햄버거 크기가 변할 뿐’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으로 한반도에 관심을 쏟고 있는 국가들의 이해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햄버거 크기’라는 비유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누구도 한입에 먹을 수 없도록 햄버거의 크기를 키워야 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안정이 글로벌 국가들의 이익과 직결된다면 이들 모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한반도에 이해가 걸린 여러 나라들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현실을 진단할 때는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금물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옛말은 세월이 변해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냉정하게 우리의 좌표를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중국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굴기의 시대>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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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 문학과 문화학의 교차점
최문규 외 지음 / 책세상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기억’은 제가 뒤쫓고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기억이 만들어지는 기전이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기억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은 ‘문화개념’이라는 색다른 관점에서 기억을 다루고 있어 흥미를 끌었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문화개념은 결코 투명하지 않고 매우 복잡한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자체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다른 주제와 연관시켜 간접적으로나 조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문화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기억과 망각>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가 기억과 망각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문화적 역할을 정리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일곱 분의 필자들이 모두 독일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면, 1장에서는 문화의 기원, 문화학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전반적으로 조명하고, 2장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문화적 기억과 문자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서는 문화 전승의 구술성과 기록성의 측면에서 기억에 의지하여 구술로 전승되던 문화가 문자라고 하는 기록문화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변형을 살폈습니다. 4장에서는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기억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과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과 구성으로서의 역사가 사회적 기억으로 상승될 수 있는 한편 부정적인 차원에서 완화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5장에서는 개인의 정신영역에서 나타나는 기억과 망각 현상을 논하면서 서사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망각의 의미를 짚고 있습니다. 또한 기억이 핵심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문화에서 망각이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문화학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현대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카프카의 텍스트와 글쓰기를 고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글자 매체와 기술 매체와 관련하여 기억과 망각의 특징을 조명했습니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화학적 주제를 인문학적 차원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이 하필이면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은 독일문화학자 아스만의 설명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엄청난 저장 능력, 이른바 ‘인공 기억’능력을 갖춘 새로운 전자 매체의 등장, 두 번째는 무엇인가 지나갔다는 의식 때문에 그 기나간 것이 기억의 새로운 대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 세 번째는 유럽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의사소통적 기억이 문화적 기억의 장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저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꼽고 있는 파시즘적 만행을 겪은 산증인 들이 사라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에 대한 의사소통적 회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며 기억에 의존하는 문화의 전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저자들의 인용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서 주장하는 문자 또는 쓰기에 대한 비판입니다. 첫째, 쓰기는 현실적으로 정신에 속한 것을 정신의 밖에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며, 하나의 사물이자 만들어낸 제품에 불과하다. 둘째, 쓰기는 기억을 파괴한다. 쓰기는 내적 수단 대신 외적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망각되기 쉽다. 셋째, 씌어진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설명에 대한 요구에 대답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리석은 말만 되풀이되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구술되는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나 씌어진 말은 그럴 수 없다. 실제의 말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실제 인간끼리 주고받는 맥락 안에 존재하는 데 비해 쓰기는 그러한 맥락을 떠나 비현실적․비자연적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73쪽) 기억을 문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기록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겠으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로 전달되는 것 역시 기억의 퇴화와 전달자의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문화의 전달 매체로서의 문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꼼꼼하게 논의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시각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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