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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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전평론가 고미숙박사님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책꽂이에 넣고서 참 오랫동안 묵혀두었습니다. 한의학의 본산이라 할 동의보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해볼 요량이었는데, 의학과는 기본틀이 다른 한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자칫 길을 잘 못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의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부정적으로 이해한 적도 있습니다만, 앎이 늘어가면서 점점 중도적 위치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책을 읽은 소감을 한 줄로 정리하면 종합의학서라고 할 <동의보감>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해석한데 그치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인트로(책을 읽으면서 처음 만나는 단어입니다. 재즈나 댄스음악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말로는 서주(序奏)라고 번역되는 단어를 동의보감이라는 고전을 해석하는 책에서 굳이 영어로 적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형장부도’를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말과 사물>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과 연결하는 것도 의서인 <동의보감>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읽히는 듯 합니다. 새로운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무래도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 학습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저자가 전통의학이나 현대의학에 관한 글에서 읽은 지식들을 바탕으로 동의보감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직접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요즘으로 치면 임상의가 있었는가 하면, 유의(儒醫) 즉 학문적 관심으로 의학을 공부한 유학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의학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의서를 탐구하여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의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유의는 돈을 받고 진료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의원에서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동의보감에 담긴 내용을 살펴 이해하기에 이르렀다면 그 내용을 두고 충분히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게다가 저자는 한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셨는데, 허준이 동의보감에 담은 한의학적 사상을 어디까지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의학이 국가가 공인하는 전문가의 몫으로 폐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자기가 왜, 어떻게 아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질병에 관한 정보가 책이나 미디어, 심지어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넘쳐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이 의학분야의 책을 읽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정통한 정보인양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인의 건강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의학분야에 대하여 국가가 면허제도를 통해서 관리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다만 자신과 관련되었을 때, 충분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폐쇄적이고 기술적인 반면 한의학을 포함한 동양의학은 기술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어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동의보감>이 술술 읽혀 별 거리낌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조께서 허준에게 명하신 의서편찬의 방향 가운데 세 번째,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39쪽)”는 말씀을 새겨보면 <동의보감>이 대중을 위한 의학백과사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문가를 위한 깊이 있는 의학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문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은 편찬 이래 중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죽은 의학서라는 것이지요. 박물관에 가야 할 옛날 의서에 목을 메고 있는 한의학계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단편적인 앎은 생각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마련입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시체를 해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게 없다. 해부학은 진정한 자연과 자연의 본질, 특징, 존재,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 참된 해부학은 … 살아 있는 인체이다.(28쪽)”라는 16세기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16세기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기술은 아주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게다가 파라셀수스는 “모든 독은 약이다, 다만 용량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약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입니다. 해부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의보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저의 기대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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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고대 그리스에서 21세기 현대까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 불안의 역사
앨런 호위츠 지음, 이은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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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수산업계는 난데없는 불황으로 한숨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파괴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오염수가 태평양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일본총리는 ‘방사능오염수는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는 망언을 반복하고 있어 일본 국민들조차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산물에 대한 불안이 커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폐수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사실상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된 상황에서 지금까지 사고와 관련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고조되고 있는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하여 우리가 일상 먹고 있는 생선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례를 인용하였습니다만, 불안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정서가 아니라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다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보다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의 정체와 역사 그리고 불안에 대한 대응방법이 변해온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불안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이며 정신건강 분야를 연구하는 러트거스대학의 앨런 호위츠교수의 <불안의 시대>를 읽으면 불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존스홉킨스 의대의 ‘질병의 역사’ 시리즈 편집위원인 찰스 E. 로젠버그교수는 <불안의 시대>의 서문에서 불안과 불안장애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불안과 불안장애는 편도체, 전두엽, 해마 등 두려움을 인지하는 뇌 영역과 감마 아미노산(GABA), 에피네프린,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신경화학물질과 관련이 있다.(16쪽)”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불안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과거에 비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겠지만, 서로 다른 시간, 문화에서는 각기 다른 다양한 요소들에 의하여 불안이 정의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풀어야할 문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불안연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즉 불안 연구는 생물학적 특성을 밝히고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옛날 아주 옛날에는 뱀도 전갈도 하이에나도 사자도 들개도 늑대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고 인간은 겁낼 것이 없었네.(36쪽)”라고 기원전 4,000년에 새겨진 수메르 석판의 글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귀를 새긴 시점에는 두려워할 무엇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시각, 또는 불안을 도덕적 결함이나 영적 불완전함의 결과로 인식하던 시각은 시대에 따라 불안을 정의하는 기준에 포함되었다가 배제되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불안과 불안장애에 대한 개념의 뿌리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 고대 그리스 문명의 출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대의 의학적, 철학적 기록은 신화와 종교에서 벗어나 인간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새로이 정립했고, 건강과 질병에 대한 연구에 경험적이고 관찰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의학에서는 착란증, 광증 그리고 울병 등 기본적인 종류의 정신질환만 독립적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을 뿐 불안은 울병의 필수적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즉 불안 증세는 이유 없는 두려움, 침울함이나 자살 충동, 또는 지나친 의심과 같은 편집증적인 증세와 더불어 울병의 특징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 의학에서는 불안 치료를 위하여 특별한 처방을 내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방침이었지만, 술과 아편을 사용했다거나 신화적 대모신을 섬기는 코리반트라는 집단이 춤과 음악을 통한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세계관은 불안을 비롯한 정신질환에 대한 경험적 개념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시대에 의학적으로 접근하던 불안을 종교적으로 대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불안을 다스리는 수단을 제공하는 동시에 죄의식, 영생, 구원에 대한 걱정 등 불안의 근원도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중세 프란체스코교회 수도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1239년 일식이 일어났다. 한낮의 빛은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어두워졌고 곧 별들이 보이자 밤이 온 것만 같았다. 모든 남녀가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두려움과 슬픔에 벌벌 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고백했고, 이를 통해 곧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33쪽)”라고 적어, 종교적 믿음으로 불안을 제거할 수 있었던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타이거교수와 맥과이어교수는 최근에 개발한 뇌기능검사장비를 활용하여 ‘종교적 경험과 행동은 많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고 신도와 종교 당국 간의 우호적 분위기는 뇌를 편안하게 해준다.(라이오넬 타이거, 마이클 맥과이어 지음, <신의 뇌; http://blog.joins.com/yang412/13285467>, 197쪽)”는 점을 확인하고, 종교를 통한 교류, 의식 그리고 믿음이라는 종교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가 신앙인들의 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동안에는 감정, 행동을 통제하는 전두엽과 사고, 연상, 인식기능을 하는 하두정엽이 활성화되는데, 기도는 신을 만나는 행위이기 이전에 자신의 뇌와 마음을 달래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5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 사이에 질병에 대한 개념이 경험적 관점에서 영적인 관점으로 대체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의학에 대한 인식은 종교나 마법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적 연구기법이 자리를 잡으면서 정신질환 역시 종교적 관점에서 의학적 관점으로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을 개별정신질환으로 처음 정의한 것은 영국의 윌리엄 배티입니다. 그는 1758년 출간한 <광증에 대한 논고>에서 “불안은 열병, 두통, 염증, 나병과 마찬가지로 광증과 반드시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 불안은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괴롭지만 유용한 이 경고가 없다면 몇몇 종은 빠르게 멸종되고 말 것이다.(95쪽)”라고 적어 불안을 광증과 구별되는 기능을 설명하였습니다. 불안을 마음의 병에서 몸의 병으로 인식하게 되는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정신질환 전반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기 때문에 불안은 여전히 정신질환의 범위에 포괄적으로 섞여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19세기 말에 들어서 불안과 불안장애는 세분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신경쇠약과 히스테리라는 포괄적 분류에서 ‘히스테리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의식, 감각, 행동에 생기는 이상으로, 다른 병적인 증상으로 전이되어 나타나며, 정신쇠약은 불안, 공포증, 강박증, 탈력, 우울 등 증상의 집합으로 정의한 것’은 1903년 피에르 자네에 의해서입니다.

 

20세기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불안과 불안장애에 대한 인식이 커다란 변환을 맞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서로 다른 질환으로 정의되던 신체적, 정신적 증상들을 불안장애라는 커다란 틀로 통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은 상당한 변화를 보여 불안에 대한 인식을 신체적 관점에서 심리적 관점으로 이동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은 불안이 본능적이거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환경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정신의학자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여 창시된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으로 대체되는데,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은 전쟁과 더불어 성장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은 병사들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심각한 심리적 이상을 겪는 참전군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전공자들이 확대된 것은 정신질환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주류를 이루던 정신분석 치료법인 후반기에는 인지적 접근법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방식의 차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역학적 접근과는 달리 인지행동치료법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집중했다. 이 문제들은 무의식의 안쪽에 숨어 있는 것들이 아니라, 의식적인 생각을 통해 접근 가능한 것들이었다.(187쪽)” 20세기를 통하여 불안이 서구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비중이 커지게 된 데는 대중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한 프로이트 덕분이기도 하며,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등과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진보적인 이론가들의 중심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끔찍함이나 핵무기의 위협이 급증하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인구의 가파른 증가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조 등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약물치료가 성공을 거두면서 제약산업계가 초미의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한 몫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제약산업이 기여했다는 생각은 “특별한 병리증상이 보이지 않는 이런 환자들에게는 발리움이 유용합니다.(200쪽)"라는 발리움의 광고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또한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1920년대 후반 언론매체들이 정신분석을 실험적인 형태의 심리치료로 간주하면서 ‘확산되는 불안, 정체성 상실, 창조성 상실, 불행’을 토론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는데서 얻은 것인데,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학 역시 연구대상이 축소되는 분야는 존재의 의미도 같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야 하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불안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정신분석 혹은 심리분석을 통하여 얻은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이 확산되는데 일부 전문가들이 대중의 불안심리를 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2008년 당시 광우병이나 인간광우병과 관련된 모든 지표들은 유행의 절정을 지난 지 오래되어 소멸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수사적 표현으로 사실을 감추고 위험을 부풀리는 작업을 벌였던 것이고, 과학적 혹은 사회학적 데이터가 이미 통제단계에 들어서 대중적 위험 가능성은 의미를 둘 수 없는 단계라는 점을 설명하는 전문가들을 사기꾼으로 몰아치는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번 불붙으면 쉽게 진화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제대로 꼬드겨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표면상으로는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하게 된 것을 순수하게 걱정한 아이들이 시작한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지만, 내막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세력들이 쟁점화에 성공한 사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현대 불안의 뿌리가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보편성이 아니라 각 사회의 특수한 조건에 있다고 본 에릭 프롬의 시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안’은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처음 발표한 이래 개정을 거듭하고 있는 정신질환 진단통계편람(DSM)의 분류체계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불안장애는 전염병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사회공포증의 첫 증상은 다른 증상의 추가적인 발생을 예고한다.(222쪽)’라는 사실을 전염병학자 로널드 케슬러가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불안장애가 발생하면 그 증상이 낮은 학습과 업무 성과, 청소년 임신, 이혼 등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부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진다는 추측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알면 휘둘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불안도 그 정체를 알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대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불안’을 걱정하지 않기 위하여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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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낯선 시간들에 대한 진실
애덤 풀스 지음, 김현우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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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된 사람과 시나브로 엮어들어 서로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3자의 눈으로 지켜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낯선 시간들에 대한 진실>은 정말 볼 일 없어 보이는 한 남자가 우연히 한 가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애덤 풀스는 이 작품에서 관심을 주는 사람이 별로 없이 외롭게 살던 스물여덟살 젊은이 하워드와 뛰어난 암기력으로 기억력 챔피언전에 도전하는 열 살짜리 천재 소년의 솔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공감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는데, 특히 시합에 임해서 갑작스럽게 패닉상태에 빠진 솔을 시합장에서 빼돌려 파국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지만, 솔의 부모는 시합을 망쳤다면서 하워드를 원망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특히 기억력이 뛰어난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읽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삶을 다룬 몇 가지 책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3189206>에서는 타고난 기억능력을 가진 질 프라이스의 기억능력을 설명하고 있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공감각적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그런 능력을 토대로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사진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변환시켜 머릿속에 간직했다가, 언제든 필요할 때에는 다시 떠올릴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남자 솔로몬 셰르솁스키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낯선 시간들에 대한 진실>의 주인공 솔은 셰르솁스키과 흡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상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변환시켜 기억하는 방식인데, 솔의 경우는 훈련을 통하여 기억능력을 보강하지만, 나이 탓인지 시합이 주는 중압감을 털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주인공 하워드의 경우 헬스센터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데, 시간관념이나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 등에서 문제가 있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결국은 직장에서 쫓겨나는데, 그래도 그의 장점을 알아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사람들이 큰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헬스센터 회원 도슨부인이 갑자기 쓰러지는 순간 하워드의 응급처치로 죽음은 면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고 마는데, 아들도 찾아오지 않는 도슨부인의 병상을 매일 같이 찾아 깨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하워드가 도슨 부인을 찾는 이유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 몸 안 어딘가에서 도슨 부인이 잠을 자고 몰래 숨어서, 살금살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동굴 안의 결정처럼 숨어 있었다. 그래서 한바탕 경련을 일으키고는 순식간에 떠난 어머니와 달리, 도슨 부인은 남들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하나의 단계라는 듯 세상을 떠나기 위한 절차를 차곡차곡 밟으며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시간에 대한 희망, 계속 가슴 졸이며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아무도 죽지 않고, 도슨 부이도 결국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43쪽)”

 

이야기는 도슨 부인이 쓰러진 12월 14일에서 3개월을 훌쩍 건너뛴 3월 12일 헬스센터에서 해고된 하워드는 매일 밥을 먹는 식당주인 알프의 제안으로 식당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끓는 기름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무렵 도슨 부인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도슨 부인이 죽음을 맞은 뒤에야 찾아온 아들 내외는 그동안 어머니를 돌봐온 하워드로부터 묘하게 끌리는 점을 발견하고 시험을 앞두고 있는 솔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같이 지낼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도슨 부인의 며느리 바바라는 “아이와 아이 아버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면서 레스의 긴장이 전해져 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을 막아 주고 있었다.(93쪽)”라고 느꼈기 때문에 남편 레스의 제안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하워드나 도슨씨 가족과는 달리 러시아인 바리아는 물건을 훔치고 하워드를 이용해서 러시아 친구를 영국으로 들어오도록 꼼수를 부리는 등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기억력대회 첫날 시험을 망친 솔이 이튿날 시합이 시작되면서 장기에 속하는 카드순서 맞추기에서 암기조차 되지 않아 혼란에 빠지는 순간, 하워드가 솔을 이끌고 시합장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워드는 바리아의 집을 거쳐서 알프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로 솔을 이끌고 가는데, 솔의 부모의 신고로 두 사람을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이들의 여행은 어릴 적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아들은 안 그래. 걔는 달라.’ 이렇게 말이다. 아이한테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뭣 때문에 도망을 친거냐?”라는 아버지 말씀은 오랜 세월 하워드의 마음 한 켠에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하워드와 솔 두 사람은 여행을 통하여 자신을 이해하고 주변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옮긴이는 과거의 매듭을 푸는 것은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용기라는 점, “그 용기를 갖게 하는 건 나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타인 혹은 나의 외로움을 알아봐 주는 소중한 타인의 존재라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엔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그들의 여정에서 발견한 ‘낯선 시간’을 통해 찾아낸 하나의 진실일 것(493쪽)”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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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12-0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뵈어요^^

처음처럼 2013-12-09 09:58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
그렇게혜윰님 활동하시는 곳이 넓으시네요..
 
철학직설 - 세상과 맞서는 당당한 청춘의 힘
김창호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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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사회에 접어들면서 특히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을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안으로 철학공부를 권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깁창호교수님이 엮은 <철학직설>입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은 스펙쌓기에 열중하고, 그 과정에서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힐링 프로그램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답은 철학에 있다는 것인데, 돌이켜 보면 저도 이 나이가 되도록 철학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기초교육이 뭔가 잘 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편저자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권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철학은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기존의 모든 인식과 체제에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물음이 없는 곳에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나아가 ‘사회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심지어는 ‘인간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처럼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앞가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직설>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화두를 정하고 각각 네 꼭지의 글을 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의 화두는 ‘진리와 상식’, ‘역사와 진실’,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그리고 ‘경제와 사회’입니다. 모두 열여덟분의 필진이 스무 꼭지의 글을 쓰셨는데, 사전에 형식을 협의하셨던가 봅니다. 글머리에서 고사를 인용하거나,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을 패러디하여 읽는이가 주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문성원교수님께서 쓰신 ‘진리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글에서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들 스스로가 감시할 수 있는 감옥, 즉 파놉티콘을 1791년 처음 설계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과 1975년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하여 파놉티콘의 감시체계원리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 해석하여 주목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의 가상의 대화로 이야기를 열고 있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을 찾았을 때 최소한의 인원으로 옥사를 감시할 수 있도록 방사형으로 복도를 설계한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던 생각이 났습니다.

 

이 글의 필자는 한 사회의 권력의 형태로 종교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는데, 당시 진리는 신의 말씀이었고, 신앙은 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를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표현했고 이 말은 믿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알 듯 말 듯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종교의 권위를 지탱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것인데, 그 믿음이 만들어진 과정은 <신의 뇌; http://blog.joins.com/yang412/13285467>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진화론과 우주의 생성에 관한 이론 등을 통하여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창조론과 대립하고 있는 과학계 사이의 갈등을 정리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어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생각을 정리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인용해보면, “종교와 과학이 다루고 있는 실재의 본성은 서로 다를 뿐이며, 서로 환원될 수 없고 두 실재 모두 동시에 진실이다. 그것은 종교언어와 과학 언어의 특수성에 기인한다.(64쪽)”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 그 둘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해야 할 당위 앞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67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는데, 종교계와 과학계 어느 한편의 시각을 고집한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절묘한 중재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어정쩡하게 봉합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밖에도 역사의 주체는 엘리트일까 민중일까 하는 의문이라던가, 공동체주의가 유효할 것인가 하는 의문,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민족주의가 옳은 것인가, 성장과 분배의 문제, 신자유주의가 옳은 길인가 하는 문제 등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들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오늘날 한국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모습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현상을 직시하고 나아갈 바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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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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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헌님이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공부법; http://blog.joins.com/yang412/13062938>에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역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현실사회의 개연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소설의 경우는 별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읽는 편입니다만,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읽는다면 책을 고르는 재미에 더하여 책을 읽으면서도 집중하는 관점이 생겨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온통 회색빛 하나로만 되어 있는 세상에서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어도 무언가 다른 점이 있고, 희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말에서 강신주박사는 감정이 없다면 삶의 희열도, 삶의 추억도, 그리고 삶의 설렘도 없을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색깔로 덧칠해진 추억을 꺼내 들며 행복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소설을 재료로 삼아서 인간의 감정에 대하여 공부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감정은 비루함, 자긍심, 경탄, 등 모두 48가지입니다. 저자는 48가지의 감정을 무슨 근거로 뽑았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매장 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주제에 맞는 글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긍심(aca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40쪽)”라는 글귀에서 자긍심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추출해냈고, 그 자긍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http://blog.joins.com/yang412/12822675>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을 시험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읽어냈습니다만, 저자는 ‘자긍심’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토커의 편지, 그러니까 장마르크의 편지는 샹탈로 하여금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스포트라이트가 샹탈에게 엄청난 자기만족, 혹은 자긍심이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40쪽)” 책을 읽는 사람마다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48개의 주제에 대하여 각각의 주제에 맞게 해석되는 48개의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주제를 설명하고, 주제에 관한 스피노자의 설명을 <에티카>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에티카>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대표적 저작으로 신, 정신과 정서, 인간과 자유 등의 주제를 통해 현대 철학의 쟁점인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학의 핵심 문제를 다뤄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에티카> 제3부의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에서 골라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어서 주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림이 나오고, 주제를 짧게 요악하는 글을 붙이고 있습니다. ‘자긍심’에는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42쪽)” 그 다음에는 작가소개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참 절묘하게도 작가 소개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는 주제를 잘 축약하여 한쪽을 넘기지 않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점입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 48권의 책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작품들은 바로 이 책을 기획한 편집자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고 합니다. 저는 주제에 맞게 새로 그린 그림일까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그림 역시 그녀가 골랐다고 하는데, 그림에 대한 설명까지도 덧붙였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8가지나 되는 소설 가운데 제가 읽은 것은 불과 6가지 밖에 되지 않고 영화화된 것 까지 해도 8가지 밖에 되지 않아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만, 강신주박사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작품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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