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뇌 - 당신의 위장이 스스로 생각한다
마이클 D. 거숀 지음, 김홍표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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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라니, 머리 안에 담겨 있는 뇌 말고도, 우리 인간은 모두가 제2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2의 뇌는 우리 몸의 소화 기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의의 소화기관이라고 한다면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입에서부터 소화가 다되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항문에 이르는 경로를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소화 기관을 따라 약 100미터에 이르는 신경계가 존재하고 위장관을 조절하는 신경계는 제2의 뇌라고 부를만하다는 것이 <제2의 뇌>를 쓴 마이클 거숀교수입니다. 거숀교수는 컬럼비아대학 해부학과에 재직하면서 신경생물학을 전공하고, 특히 신경위장관학의 대부로 통한다고 합니다.

 

먼저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1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가 제2의 뇌라고 할 만하다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그동안의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적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와서 소화되고 배설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사실상 신체의 외부환경이라고 할 위장관 내부에서 우리 몸을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3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는 신경계통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질병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미경검사를 통하여 질병을 진단하는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흔히 만나는 위장관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적지 않은 신경조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위장관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층의 사이에 아우어바흐 신경총과 점막 바로 아래 있는 마이스너 신경총이 있습니다. 위장에 음식물이 들어오면 우선 잘게 부수는 작업을 마쳐서 소장으로 넘어가는데, 소장에서는 간에서 만드는 담즙과 췌장에서 만드는 소화액과 잘 섞이도록 하면서 흡수가 일어나도록 아래쪽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바로 연동운동입니다. 연동운동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전체 장이 꼬임이 없이 율동적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이러한 운동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위장관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들인 것입니다.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에는 뇌와 척수로부터 나오는 말초신경이 연결되고 있습니다만, 수술 등으로 인하여 절단이 되더라고 위장관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뇌의 통제를 받지 않더라도 자율적인 운동이 일어나도록 통제하는 위장관의 신경계통의 역할을 ‘생각하는 소화기관’이라는 설명을 달아서 ‘제2의 뇌’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몸을 총괄하는 뇌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추신경계에 속하는 뇌와 척수에 들어있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수용하여 분석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자극들을 기억하고 통합하는 높은 수준의 의식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위장관계통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이 전체 위장관의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조정하는 기능까지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범위는 위장관 그리고 위장관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담낭이나 췌장 등 일부 기관과 연계하고 있는 정도일 것이라는 짐작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위장관 신경계) 그들은 뇌의 노예가 아니고, 종속되지도 않았으며, 독립적인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신경계의 독자적인 영역이다. 말초신경계 무리에서 그들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반란군이다.(21쪽)”라는 근거가 입증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2의 뇌>를 요약하면 위장관신경계에 관한 저자가 이룩해온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의 이름까지도 거론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으나, 사족처럼 읽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신경과학은 아무래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용어에서부터 연구방법 등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의 수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분명하기 않습니다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적지 않게 어려울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했던 파킨슨병과 관련하여, ‘대뇌에서 볼 수 있는 레비소체(Lewy body)가 소화기관의 신경세포에서도 볼 수 있다.(323쪽)’는 언급은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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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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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Ermita)”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이 말에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 처럼 쓸쓸함과 연관되는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속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제목에 곁들인 부제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는 순례자들의 쉼터에서 그들의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사진작가와 작가의 환상적인 팀웍이 만들어낼 스토리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어쩌면‘에르미타에 매료되어 7년째 에르미타를 찍어온 벨기에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tyser)와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작가 지은경이 에르미타를 찾아 스페인 북부에서 보낸 4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흘려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슈티제가 에르미타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파비올라 여왕 재단의 후원으로 스페인 북부에 흩어져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에르미타들을 찍고 있다.(221쪽)”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재단에서는 산재해있는 에르미타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의도에서 후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에르미타라는 독특한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보존하려고 한다면 사진작가가 아니라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슈티제는 오로지 청명한 계절은 다 제켜두고 겨울철에만 그것도 핀홀 카메라를 가지고 에르미타를 찍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자를 위한 교회, 에르미타를 담아내기에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켜주는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이 제격인데,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22쪽) 게다가 고요한 빛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핀홀 카메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진기로 몽롱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내지만 에르미타의 외로움이 가진 모든 디테일을 정성스럽게 세세히 담아내는 재주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는 몽롱하게 보이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에서 기록한 ‘기억의 등불’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0쪽)”

 

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에르미타의 건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데, 에르미타는 그 지방의 흙과 돌로 지어져 경관을 해치는 일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빨간 흙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빨간 흙으로, 검은 돌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검은 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86쪽) 기본적인 모습이 비슷한 우리네 암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절벽 위에 홀로 세워져 있는 코르사의 마레 데 데우 데 라 페르투사 에르미타가 절벽의 지형에 의지하여 쌓아올린 것을 보면, 절벽 위의 지형을 살려서 세워졌다는 죽서루가 연상됩니다.(이희봉 지음,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http://blog.joins.com/yang412/13210699)

슈티제가 담은 몽환적 분위기의 에르미타들이나, 그곳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사진과 에르미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은 그들의 여정에 함께 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은경작가가 정리한 에르미타로 가는 여정, 사진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지키며 묵묵히 자연 속에 몸을 내맡겨온 에르미타의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쇠락해가고 있는 에르미타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여행이 점점 고달파지자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또 애초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엉뚱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은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삶에 대해 다른 비전을 가졌던 수도자들과 은둔자들에 관한 이야기(7쪽)’라는 요약에 충실한 내용이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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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읽기 밀란 쿤데라 전집
박성창 외 지음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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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름, 홍대 앞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열린 북콘서트 참석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날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같이 진행하신 북콘서트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를 다루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47499). 오래 전에 읽은 듯 하면서도 생각나는 대목이 별로 없어 북콘서트에 가기 전에 새로 읽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깨닫는 점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진행하신 분들의 전공을 살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바탕으로 1989년에 만든 영화 <프라하의 봄>의 한 장면을 소개하기도 하고 쿤데라의 작품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낭독하기도 하면서, 무대는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들로 끊임없이 채워졌습니다. 덕분에 책을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 읽기는 민음사의 전작출판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번 번역출판 기획에는 희곡 <열쇠의 주인들>과 에세이집 <저 아래에서부터 당신은 장미 향기를 맡을 것이다>를 넣지 말아달라는 요구가 있어 빠지게 되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그의 전작을 다 읽은 것은 아닙니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어떤 작가의 작품세계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경험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을 모두 읽은 것과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헤밍웨이전집을 통독한 기억 정도입니다.

 

쿤데라의 작품을 읽은 분들은 대뜸 그의 작품들은 너무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작품 말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제나 작품해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책읽는 이가 온전히 혼자서만 느껴야 만하는 것도 크게 한 몫을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쿤데라 전작출판을 기획하신 방미경님은 “쿤데라 처럼 본인의 작품에 해설이 실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잘못된 설명이나 사견이 개입되어 자신의 소설이 곡해되는 것을 싫어하기 작가(박성창 외 지음, 밀란 쿤데라 읽기, 192쪽)”라면 상대하는 것이 참 무섭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해 오신 이난아교수님께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들을 분석한 글을 담은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을 읽고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저의 경험에서 본다면 말씀입니다.

 

<밀란 쿤데라 읽기>는 크게 작가에 대한 글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연경, 정여울, 정혜윤, 김미래 님들이 쿤데라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쓰셨고, 두 편의 대담을 기록한 글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담의 하나는 예술의 구성에 대한 살몽과 쿤데라의 대담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박성창교수님과 쿤데라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번 전작시리즈의 번역을 맡아주셨던 분들께서 쓰셨다는데, 꼭 한 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정체성>을 번역하신 이재룡교수님을 대신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크베토슬라프 흐바틱의 글을 박진곤님의 번역으로, <정체성>은 김병욱님께서 쓰신 글을 싣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기획한 밀란 쿤데라 전집은 <농담>에서 <향수>까지 열권의 장편과 단편집에 이어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소설작품들을 분석하신 김영경교수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쿤데라의 전집으로 나온 책들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라는 작가소개말이 전부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김영경교수님께서는 “아무리 문학 작품의 독자성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인색한, 심지어 무례한 소개가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저 두 줄에 소설가 쿤데라의 정체성이 압축된 셈(32쪽)”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프랑수와 리카르는 쿤데라의 창작도정을 세 개의 사이클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 <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종래의 국가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적 독자를 겨냥하여 작품을 쓴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4)>,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그가 애용해온 7부 구성 형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쓴 시기다. 중간 사이클이 끝난 시기, 즉 <불멸> 이후 일정 시기가 그의 문학적 위기의 시기로 언급되곤 한다.(164쪽)” 작품들이 작가의 삶의 여정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본다면 그의 작품의 방향은 그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쿤데라의 삶을 보면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구나 싶습니다. 학업에 정진할 무렵에는 <농담>을 통해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반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것이 첫 번째 겪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입당과 탈당을 반복하였고,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려는 순간 소련군의 침공으로 다시 위축되고 말았으며, 결국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하는 그야말로 보헤미아적 운명에 몸을 맡겨야만 했으니, 그의 삶은 언제나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로 이주한 초기에는 마치 비탈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다! 눈길을 아래쪽으로 급전직하 하고 손은 위를 향하여 내뻗는 비탈.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이중의 의지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 눈길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라가고 내 손은 심연을 붙든 채 그 위에 몸을 지탱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것이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53쪽, 민음사, 2004년)”

 

살몽과의 대담에서 그의 작품의 뼈대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부분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쇤베르크의 ‘음표들의 시리즈’와 유사하게 몇몇 기본 단어에 기초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는 망각, 웃음, 천사, ‘리토스트’, 경계선 같은 주된 다섯 단어들이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어 정의되면서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처럼 이와 같은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건축학적 구상’이라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작품이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수학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 역시 <밀란 쿤데라 읽기>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체코의 한 비평가가 ‘<농담>의 기하학’이라는 글을 통하여 분석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쿤데라는 “저는 소설을 부로 나누고, 부를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단락으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의 분할을 명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일곱 부는 각기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입니다. 각각의 것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서술 유형에 따라 특징지어지죠. (…) 또한 각기 고유한 길이가 있지요.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66쪽)”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특성을 베토벤의 사중주곡 <op. 131>과 비교해보이기도 합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음악적 재능이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던 키치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습니다. 쿤데라는 이 부분을 ‘건축학적 균형의 비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스토리 차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에세이(키치에 대한 에세이) 차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겁니다. 인물들의 단편적인 삶들은 하나의 ‘예(例)’, ‘분석되어야 할 상황’으로 이 에세이 속에 삽입된 것(57쪽)”이라고 말입니다.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의 성격에 대하여 김영경교수님은 다음처럼 정리하였습니다. “대체로 그의 소설 관련 에세이는 르네상스와 18세기(세르반테스, 라블레, 스턴), 19세기-근대(발자크, 플로베르, 톨스토이, 도스토엡스키), 끝으로 그의 스승-선배격 거장들(프루스트, 카프카, 무질, 브로흐)을 아우르며 어지간한 소설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정치하다. 이른바 쿤데라 사전이 정의하는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다. 인간 존재의 네 영역 혹은 요구(‘유희’, ‘꿈’, ‘사고’, ‘시간’)을 담아내는 장르이기도 하다.(34쪽)” 그의 에세이에 담긴 이런 힘은 어쩌면 학부에서 공부한 미학의 내공이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일단 그가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을 일독이라도 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성창교수님은 쿤데라와 대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향수>를 대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향수>에서는 프라하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향수>에서는 <농담>과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주제가 되었던 기억과 망각을 다루게 된 동기를 물었습니다. 쿤데라는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의 능력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기억 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는 아닐까 하는 점을 짚어보려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박교수님은 프루스트의 시도와의 차이점을 다시 물었고,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기억을 통해 되찾은 삶의 행복과 희열을 노래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 속에 떠올리는 것은 생생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환영(illusion)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번 소설에서 조제프라는 인물을 통해 주로 이러한 부재, 실재의 환영, 그리고 이러한 ‘환’의 ‘멸’, 즉 환멸(dés-illusion)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86쪽)”

 

프루스트는 오감의 촉발에 의하여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무자의적 기억은 자의적 기억과는 달리 진실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즉 과자냄새, 수저가 접시에 부딪혀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자동차의 휘발유 냄새 등을 통해 촉발되는 무자의적인 기억이 등장인물들을 저 멀리 과거로 이끌어가는 안내자가 되고, 등장인물들은 과거에 대한 의식에서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조각의 삶의 체험은 오랜 시간의 망각 속에서 숙성되어 그로부터 무자의적인 기억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져 변화된 상태로 기억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작의적인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조경식, 망각의 담론, 기능 그리고 역사; 최문규 등 지음, 기억과 망각, 274쪽, 책세상, 2003년)

 

정혜윤PD님은 “쿤데라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비합리적인 면, 감상적인 면, 나의 취약한 면, 나의 안일한 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과도 같다. 그는 시시한 것은 시시하다고 알려 주고 하찮은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든지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44쪽)”라고 적었습니다.

 

아무리 처음 가보는 곳이라도 상세한 지도와 안내서가 있으면 문제없이 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밀란 쿤데라 읽기>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안내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책을 먼저 읽고 작품해설을 읽는 편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출발해서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을 읽은 다음에 <농담>에서 <향수>까지 소설들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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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 우리가 읽고 싶어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위대한 책들의 역사
스튜어트 켈리 지음, 정규환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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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에 읽은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3273020>에서는 사회적 여건으로 배포되었던 책을 거두어 태워버리거나, 추가 배포가 금지된 책들과, 혹은 저자가 작성한 원고를 다양한 이유로 출판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여건으로 금서목록에 올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여건의 변화로 금서목록에서 해제되어 지금은 많은 독자들을 만나는 책에 대한 사연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금서목록에 있다는 것은 어디엔가 책이 보관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겠습니다만, 언젠가 존재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현존하지 않는 책들의 경우는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에딘버러의 독서광 스튜어트 켈리는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책들의 흔적을 조사하여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The Book of Lost Books>으로 정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전 그리스 극작품에 빠져들었던 스튜어트 켈리(Stuart Kelly)는 펭귄 판으로 나온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을 모두 모았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스퀼로스는 생전에 여든 편이나 되는 극작품을 썼다는 것이고, 소포클레스의 극은 달랑 두 권이 아니라 서른세 권, 더욱 놀라운 것은 “당대 최고의 평판을 누린 비극 작가였던” 아가톤의 작품은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시작한 작업이 유실된 고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걸작, 대작이 될 뻔한 미완성 원고 등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대한 작품들에 얽힌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었고, 그 성과가 바로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 혹은 주목을 받았을 작품들이 현세에 전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고 합니다. 원고쓰기를 마친 작가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원고를 없애기도 하고, <금서의 역사>에서 읽은 것처럼 권력을 쥔 사람이 세상의 모든 책을 거둬들여 없애버리기도 하며,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작가가 세상을 뜨는 경우에는 미완성으로 남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경우는 작가가 출판사에 보낸 단 한부의 원고가 세상에 빛을 보기도 전에 화재 등 사고로 망실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아이스퀼로스의 작품들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지은 도서관에는 20만개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때 프톨레마이오스는 엄청난 돈을 아테나이에 지불하고 아이스퀼로스의 전작집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면서 640년 이곳을 지배하던 자가 “하느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것들은 불경스럽거니와, 일치한다 해도 굳이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라는 이유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두루마리들과 함께 아이스퀼로스의 원본도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책을 만든 것도 사라이고, 책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사람인 셈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로부터 중국의 공자와 마호메트의 전기를 쓴 아라비아의 무슬림학자 이스하크까지, 서양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로부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자연주의 작가들을 거쳐 카프카, 엘리엇, 헤밍웨이, 비트 세대인 윌리엄 버로즈와 조르주 페레크까지 시대별로 구분하여 유명작가들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작품들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남긴 모든 기록을 한 장도 읽지 말고 불살라 달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받은 친구 브로트가 카프카의 소원대로 해주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브로트는 “카프카는 자신이 붙좇기를 거절할 것란 사실을 늘 알고 있었고, 또한 자기한테 그런 지시를 전달함으로써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들을 잘 보전해 줄 거로 아는 유일한 인물에게 맡겨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457쪽)”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읽을거리입니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책을 옮긴 정규환교수님께서 앞서 적은 ‘붙좇다’와 같이 쉽게 만날 수 없는 우리말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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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 논어 2 -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2
심경호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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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교수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논어>의 2권에는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의 의미는 공자님께서 제자들과 주고받은 말씀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한(子罕)편 제7장을 보면, 有鄙夫問於我空孔如也我叩其兩端而竭焉(유비부문어아하되 공공여야라도 아고기양단이갈언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내게 물어오면 그가 아무리 무지할지라도 나는 시종과 본말을 다 말해준다.(28쪽)’라고 해설하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물어오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야 오죽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스승의 표상으로 받들만하다고 하겠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누구나의 꿈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던 공자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자기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가 많이 다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도 잘 어울리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논어>의 2권에서는 특히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눈에 들어온 안연(顔淵) 제11장을 보면, 齊景公問政於孔子孔子對曰君君臣臣夫夫子子(제경공문정어공자한대 공자대왈 군군, 신신, 부부, 자자니이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묻자, 공자께서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라고 풀어 쓰셨습니다. 요즈음 세태에 새겨들을 법한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세태하니 생각나는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안연(顔淵)편의 제12장입니다. 子曰片言可以折獄者其由也與子路無宿諾(자왈, 편언가이절옥자기유야여인저 자로무숙낙이러라)로 “공자께서는 ‘한마디 말로 송사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자로는 승낙한 일을 미루지 않았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재판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마디 말로 공정한 판결을 내려 옥사를 마감하는 편언절옥(片言折獄)이 아쉽다.(142쪽)”라는 저자의 설명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저자께서 ‘송사 당사자의 한쪽 말’로 본다는 편언에 대한 옛 주석을 ‘진실없는 자의 한쪽 말’이라고 새긴 정약용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원고나 피고의 한쪽 말만 듣고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님을 꿰뚫어 송사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일 것이다.(143쪽)”라고 풀어낸 구절에 이르러서야 고개가 끄덕여짐을 알겠습니다. 즉, 자로(子路)는 원고나 피고의 한마디 말만 듣고도 송사를 판결할 수 있을 만큼 남의 말을 잘 파악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낙한 일을 미루지 않은 신실함을 지킬 수있었다는 것인데, 우리 사법부에 소속되어 있는 재판관들께서 새겨둘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말 한마디를 신중하게 함으로써 재판관의 입을 바라보는 일반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요즈음 재판관들은 참으로 부박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여자연예인이 새겼더라면 좋았을 대목도 있습니다. 역시 안연(顔淵)편의 제21장 一朝之忿忘其身以及其親非惑與(일조지분으로 망기신하여 이급기친비혹여아).라는 말씀입니다. 해(解)를 보면,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재앙이 부모에게까지 미친다면 미혹이 아니겠는가?(162쪽)” 그 분의 공분이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떠나서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분명 재앙일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 문제였을 터,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듯합니다. 안연(顔淵)편의 제3장에서도 仁者其言也訒(인자기언야인이니라; ‘어진 사람은 말을 참아서 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 <논어>의 본래 맥락을 음미할 수도 있고, 내키는 대로 책을 펼쳐 해당 강의의 주제를 자신의 처지와 연관 지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 책은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 숨가뿐 현대의 일상 속에서 이 책은 일종의 멘토가 되어 고전의 가르침을 일상적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단 차례로 읽어 전체를 개관하고, 일상에 잘 부합하는 대목을 다시 새겨보는 방식으로 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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