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숑 씨의 여행 지만지 희곡선집
외젠 라비슈 지음, 장인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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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이탈리아 밀짚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239060>를 쓴 희곡작가 외젠 라비슈(1815~1888)의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밀짚모자>가 결혼식날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페리숑 씨의 여행>은 두 젊은이가 구혼자로 나서 경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비슈가 정통 프랑스 연극에서 벗어난 대중가요를 바탕으로 한 가벼운 뮤지컬 형태고 발전한 ‘보드빌’연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통연극하면 역시 몰리에르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몰리에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장 바티스트 포클랭 (Jean-Baptiste Poquelin; 1622~1673)는 라비슈보다 200년 먼저 활동하였는데, 몰리에르 역시 전통 프랑스 희극에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는데 성공한 희곡작가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백과사전에는 그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희극양식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 이중적 시각에 기초한 것으로, 예컨대 그럴싸한 것과 진실한 것, 현학적인 것과 지혜로운 것 등의 대비가 그 희극적 원천이다. 배우이기도 했던 몰리에르는 어떤 상황을 다루더라도 그것을 생동감있게, 때로는 비현실적일 만큼 극적으로 만들어, 비록 이성의 시대에 살기는 했지만 그의 양식은 부조리한 것을 합리화하지 않고 거기에 생기를 부여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연극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출판사에서 요약해놓은 줄거리입니다.

(제1막)페리숑은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역에 도착한다. 서로 친구인 아르망과 다니엘도 한곳에서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 모두 페리숑의 딸인 앙리에트에게 구혼할 생각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며 페리숑 일가의 여행에 동행한다.

(제2막) 페리숑이 여행지에서 말을 타고 산에 오르다 부상을 당한다. 아르망이 그를 구해 주면서 구혼자로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다니엘은 페리숑의 오만하고 허영에 찬 인간성을 꿰뚫어보고 꾀를 내어 오히려 위험에 처한 자신을 페리숑으로 하여금 구하게 한다.

(제3막) 상황이 역전되어 페리숑은 이제 아르망이 아니라 다니엘을 사위로 낙점한다. 그러나 앙리에트의 마음은 아르망에게 가 있다. 애정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가는 중에 페리숑은 진짜 위기를 맞게 되는데, 여행지 숙소에서 썼던 방명록이 화근이 되었다. 페리숑은 허영 때문에 결국 노련하고 성미 급한 사령관과 결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제4막) 결투가 걱정된 앙리에트는 페리숑과 다니엘이 은밀히 경찰에 손써 놓은 줄도 모르고 아르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르망은 결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령관을 횡령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고 사령관이 혐의를 벗으면서 의도치 않게 결투 시간과 장소가 바뀌게 된다. 아르망에 대한 페리숑의 불만이 극에 달한다. 그러다가 아르망과 다니엘의 이야기를 엿듣고 다니엘이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짓을 알게 된다. 페리숑은 자신의 허물을 깨끗이 인정하고 딸과 아르망을 결혼시키기로 한다.

 

줄거리는 간략하지만,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 절정과 반전에는 웃음과 씁쓸함이 섞여드는 묘한 느낌이 남습니다. 간략하면서 주고받는 대사를 읽다보면 무대에서 벌어질 상황이 절로 연상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앙리에트를 둘러싼 아르망과 다니엘의 구혼과정에서 아르망의 순수한 면모와 다니엘의 비열한 전략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사실 다니엘 역시 순수한 면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자신이 썼던 전략을 친구 아르망에게 누설하고, 그 광경을 페리숑씨가 엿듣는 바람에 들통이 나는 구조인데, 요즈음 우리 드라마에서는 너무 자주 써먹는 바람에 식상하다 못해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르망을 위한 장치로 삽입되는 마티에 사령관의 애정행각은 당시의 사회풍조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짧은 대사로 구성되어 있어 경쾌하게 진행될 수 있는 구조의 희곡입니다. 여기에 요즈음의 언어로 적당하게 각색을 한다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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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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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지옥편>에서 죄는 차치하더라고 그들이 받고 있는 형벌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죄를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지옥의 형벌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처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지옥에 비하면 연옥은 죄질이 크지 않아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질에 따라서 더 깊은 땅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깔대기 모양의 지옥과는 달리 바다에 떠있는 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단계별로 상승하여 마침내는 천국으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연옥에 갇힌 영혼들은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단테가 신기해보일 법도 한데, 자신의 죄를 씻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우려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그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빌어주는 기도가 그들의 죄업을 씻어 형벌기간을 단축해줄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옥과는 달리 연옥은 아래서 시작할 때가 가장 힘들고 위로 오를수록 쉬워진다는 점입니다. 지형도 그렇지만 죄를 씻어냄에 따라서 영혼이 가벼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연옥에서 단테가 만나는 영혼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있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을 지으려는 구조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는 연옥의 구조적 특성이 반영된 것인지 무거운 바위를 등에 얹고 묵묵히 오르는 형벌을 받는 영혼을 만나기도 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지붕을 머리에 얹고 있는 조각상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제 가슴을 무릎에 의지하는 인간 형상의 기둥이 지붕이나 천장의 무게를 받치는 것을 본다. 이는 그저 기둥일 뿐이지만 보는 사람에게 생생한 괴로움을 일으키니, 저 영혼이 보인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연옥편 10곡, 99쪽)”

 

지옥을 거쳐 연옥을 여행하는 동안 단테가 가지고 의문은 ‘세상에서 미덕은 싹이 말라 버려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악함으로 뒤덮여 더욱 무성해지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테의 궁금증에 대하여 생전에 관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는 베네치아의 기사 마르코는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떤 예정된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모든 원인을 하늘로 돌리려고 하오만, (…) 하늘이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오. (…)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요. (…) 원인은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연옥편 148쪽)”라고 설명해줍니다. 모든 것이 누군가의 통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에서 영혼이 거처하는 곳에 대한 당시의 견해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뇌의 조직이 태아에서 완전해지면 곧 부동의 원동자께서 자연의 그런 기술에 대해 기뻐하시며 힘을 지닌 새 영혼을 그 뇌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능동적인 것으로 동화되어 하나의 단일 영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자체로서 살고 느끼며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연옥편, 223쪽)” 그 부동의 원동자께서 단테로 하여금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당을 여행하도록 허락한 배경도 연옥편에서 나옵니다. “이제 그대 세상의 죄인들을 돕기 위해 지금부터 저 전차를 잘 봐두었다가 돌아가서 그대가 본 것을 글로 쓰세요.(연옥편, 288쪽)”

 

연옥편에서 단테의 여행을 안내하는 새로운 길잡이가 등장하게 됩니다. 연옥편 21곡에 등장하는 로마 시인 스타티우스입니다. 스타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로(이성과 고전문화)부터 베아트리체(은총과 계시)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미주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안내할 길잡이 베아트리체는 연옥편의 30곡에서 등장합니다. 단테는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그녀를 온전히 볼 수 없었던 나의 영혼은 순식간에 그녀의 신비와 권능에 압도되어 전부터 지속되어 온 사랑의 힘을 다시 느꼈다.(연옥편, 269쪽)”

 

민음사판 <신곡>에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년에 단테의 <코메디아; 신곡>에 심취하여 그렸다는 102점의 그림을 삽입하여 읽는 느낌을 더하게 합니다. 블레이크의 그림과 단테의 글이 시간적 영속성을 뛰어넘어 서로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기획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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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사 - 대한민국 의료 상업화 보고서
김기태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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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두고 불거진 철도민영화 논란은 KORAIL의 운영현황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등을 돌리면서 수습국면에 접어든 모양새입니다. 사측이나 노측이나 확전을 원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동안 드러난 정황만으로 보면 KORAIL의 민영화만이 방만한 경영으로 인하여 폭증하고 있는 적자를 줄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철도민영화가 수습되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슈가 의료민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건강보험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공영의료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이 시점에서 민영화가 거론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도 대한의사협회가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나서서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생각에서 읽은 <병원장사>입니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병원을 사고파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 같은 착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대한민국 의료상업화 보고서’라는 부제를 보면 병의원에서 환자를 상업적으로 치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신 기자입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잉시술과 과잉진료, 불법시술의 정황을 환자로 가장하여 확인한 내용을 시작으로, 사무장병원의 폐해, 고사상태에 빠지고 있는 동네의원 문제, 대형병원들의 무한경쟁, 건강검진의 문제점, 공공의료기관의 행태를 짚고, 이어서 돈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의 현주소, 수익의 극대화에 대한 부작용으로 드러나는 의료사고, 전공의 문제, 의학교육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의산복합체라는 생소한 개념 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의료현장의 문제를 생생하게 짚고 있습니다.

 

저자도 고백했습니다만, 의료상업화의 현장을 보이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추구하는 작업이 미흡했고, 나아가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달라는 부탁이 전제되었습니다. 머리말의 말미에 적은 “우리나라의 의료는 지금 공공에서 시장으로 난폭하게 떠밀리고 있다. 한국의 의료가 건전한 중심을 잡는 데 이 책이 작은 힘이라도 보탰으면 좋겠다.(11쪽)”는 말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현대의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이전에 전통의학에서도 의료는 공공의료와 상업의료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된 이후 사회적 여건이 의학교육에서부터 의료전반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가운에 우리나라의 의학은 민간부문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해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료를 공공의료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리법인 허용이라는 문제가 의료민영화라는 수사적 표현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자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2004년 1월, 노무현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의료 같은 지식산업도 집중 육성하겠다.(47쪽)”라는 말로 의료가 다음 세대에 우리국민을 먹여 살릴 화수분이 될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무렵 고위공무원 연수교육에서 제가 발표한 아이디어와 흡사한 내용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최상위 그룹이 의과대학으로 진학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전에는 공대 화공-기계-조선-전자-재료 등으로 변해왔는데, 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내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과대학에 진학한 대한민국 수재들에게 다음 세대의 국민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정책을 다루는 쪽에 제안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재들이 개업해서 저 먹고 사는데 목을 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의료는 그야말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고용창출효과가 큰 영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연계된 산업분야가 많아서 파급효과가 큰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환자를 진료하는 분야에 국한해서는 의료산업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만을 대상으로 진료를 한다면 굳이 산업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만, ‘의료상업화’라는 화두가 제시되게 된 원인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책 말미에 붙어 있는 추천사에서 대한의사협회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추악하고 불편한 진실의 원인은 (…) ‘잘못된 의료제도’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제가 어려운 시절, 병의원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선택했던 ‘저수가 제도’입니다.(300쪽)” 저수가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입자의 부담을 최소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담은 낮은 보장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정리하면, ‘저부담-저수가-저보장’입니다. 세월이 흘러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담을 늘리려는 정부의 시도는 번번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의료서비스는 선진국 수준으로 받기를 원하면서 비용은 낼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책에서는 대한민국의 의료현장의 문제점을 짚어내는데는 충실했지만, 의료현장의 전반적인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나 싶습니다. 역시 원인분석과 대안제시가 미흡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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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디아나
조르주 상드 지음, 염승섭 옮김 / 시와진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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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디아나>는 죠르주 상드가 G. Sand라는 필명으로 1832년에 발표한 첫 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때문입니다. 마르셀의 할머니께서 주인공의 생일선물로 뮈세의 시집과 루소의 작품 한 권과 함께 고른 책이었는데, 할머니께서 이 책들을 고른 이유는 “좋지 않은 책을 읽는 것은 사탕이나 과자처럼 건강에 해롭지만, 천재의 위대한 숨결이 담긴 책은 어린아이의 정신에 대기나 바닷바람이 몸에 끼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지도 않고 아이의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마르셀 푸르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 쪽으로 1, 70쪽, 민음사, 2012년)”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책 이름을 듣고는 할머니를 거의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는 바람에 조르주 상드의 전원 소설 네 권으로 바꿔 오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각주에 보면, <앵디아나>가 조르주 상드의 다른 전원 소설과는 달리 정념과 간통과 자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1952년에 쓴 소개의 글을 통하여 “이는 나의 첫 소설로, 이것을 어떤 계획이나 또는 어떤 예술 내지는 철학의 이론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집필했다.(7쪽)”라고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2년판 서문에서 “등장인물들이 사회적 폐단으로 인해 겪는 고통의 울부짖음을 표현하게 되었다면, 만약 그가 더 나은 삶을 향한 그들의 갈망들을 기록함에 주저하지 않았다면, 사회가 그 불평등에 대해, 운명이 그 변덕에 대해,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11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 책의 집필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앵디아나>는 부도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도 어린 마르셀이 읽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앵디아나>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파리 동쪽의 시골 마을 브리를 무대로 세 명의 남자와 여자 주인공 앵디아나(Indiana) 사이에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작가가 제목에서 암시한 것처럼 열 아홉 살인 앵디아나는 인도양에 있는 프랑스령 부르봉섬에서 성장해서 퇴역한 델마르 대령과 결혼해서 브리로 이주해 온 것입니다. 델마르 대령은 이웃에와서 살고 있는 앵디아나의 사촌오빠 랄프와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젊은 아내를 둔 늙은 남편의 안타까운 몸부림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랄프는 그야말로 앵디아나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더도 덜도 아닌 위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고통스럽게 성장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앵디아나는 남편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앵디아나에게 전혀 새로운 성향을 가진 레이몽과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레이몽이라는 인물을 눈앞에 이익을 뒤쫓는 단순한 성격입니다. 즉흥적이면서도 집요하기도 하지만 갑작스럽게 마음이 바뀌는 요즈음 말로 하면 B형남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이몽은 앵디아나를 따라온 부르봉출신 하녀 누운과 밀회를 즐기기 위하여 담을 넘다가 델마르 대령의 총격에 놀라 부상을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앵디아나에 빠져들면서 누운을 버리게 되는데, 결국은 누운은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게 됩니다.

 

델마르씨가 출타한 틈을 타서 앵디아나의 방까지 잠입할 정도의 대담성을 보이는 레이몽은 임신한 누운의 죽음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철면피한 일면도 있습니다. 결국은 앵디아나의 마음을 거의 움켜쥐기에 이르렀다가 랄프의 경고를 받기도 합니다. 사단은 델마르 대령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프랑스에서의 살림을 정리해서 부르봉섬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앵디아나는 대령을 버리고 레이몽과의 결합까지 고려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비겁한 레이몽이 앵디아나를 거절하면서 앵디아나는 부르봉섬으로 돌아갑니다. 마음 한 켠에 남은 미련이 늘 문제가 되는 것처럼, 레이몽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앵디아나를 부추겨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향하지만 잠시 앵디아나 쪽으로 움직였던 레이몽은 그 사이 새로 등장한 드 낭지 양과 결혼하고 맙니다. 상심한 끝에 죽음을 생각하는 앵디아나 앞에 영원한 수호신 랄프가 나타나 델마르 대령의 죽음을 알리면서 부르봉섬의 폭포에서 같이 생을 마감하기를 권합니다. 두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는 배경이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 느낌이 있었는데, 결국은 두 사람은 죽음 대신에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앵디아나가 레이몽과의 관계를 두고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그녀가 불과 열아홉 살 밖에 되지 않는 점을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사랑에 빠진 그녀가 레이몽과 깊은 관계를 맺지 말라는 랄프의 충고를 외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작가의 말처럼 문제가 있는 결혼생활을 정리하려는 앵디아나의 선택을 두고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혼인의 관계 이외의 정부(情夫)-정부(情婦)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서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남편으로부터 학대받는 앵디아나에게 많은 응원의 목소리가 쏟아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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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 논어 세트 - 전3권 - 옛글을 읽으며 새로이 태어난다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심경호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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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甲午)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에게는 육십갑자(六十甲子)가 일주하여 본디의 띠를 다시 맞는 의미가 큰 해이기도 합니다.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천운을 타고 태어나지 않고서야 본디의 띠를 두 번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언제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산날이 살날보다 많아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부터 앞날을 내다보는 시간보다는 지나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예과 때 학보사에 다니는 친구를 둔 덕분에 여름방학에 대한 단상(斷想)을 학보에 싣는 행운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제를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잡아 글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동양철학에 마음이 쏠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한문교육의 틈새를 묘하게 빠져나온 세대인지라 한문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귀동냥으로 배웠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고전은 ‘그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 아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해왔습니다. 언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기회가 되지 않던 터에 심경호교수님의 <논어(論語)>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경호교수님께서 “우리는 왜 『논어』를 읽는가?”라는 질문을 내고, “나를 세우고 남을 열어 주며 세상을 밝힌다”라고 답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논어는 학이(學而)편으로 시작하여 모두 20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학이편을 가장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의 생각과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공부는 학생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해야 한다는 평생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익히 알고 있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렇습니다. 배운다는 것을 스트레스로 생각하지 말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일러두기를 챙겨 읽어봅니다. 심경호교수님은 <논어> 20편 498장 가운데 현대에도 특별히 의미가 있는 장을 선별하여 3권에 나누어 담았다고 합니다. 1권은 ‘옛글을 읽으며 새로이 태어난다’라는 부제로 <논어>의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理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편)을 수록하였고, 2권에는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로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편을 수록하였으며, 3권에는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라는 부제로,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편을 수록하였습니다. 각 글은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원문 및 주석’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역 및 주석과 해설은 주희의 신주(新注), 즉 <논어집주>와 한나라․당나라 때 이루어진 주소(注疏), 즉 <논어주소> 그리고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와 현대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하였다고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학이(學而)편의 한 구절처럼 살아오면서 흔히 듣고 뜻을 익히고 있는 구절을 만나면 반갑다는 느낌이 들어 쉽게 넘어갑니다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는 구절들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뜻을 새기다보면 책읽는 호흡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연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면, 2008년에 제2차 광우병파동을 겪으면서 일부 전문가들이 보여준 이상한 행태와 연관시켜 이해한 앎에 관한 구절들입니다. 먼저 위정편의 17장입니다. “由(유)아 誨女知之乎(회여지지호)인저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오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이 是知也(시지야)니라”라고 적고, “유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 주겠노라.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1권, 80쪽)”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술이편의 27장입니다. “多聞(다문)하여 擇其善者而從之(택기선자이종지)하며 多見而識之(다견이지지)가 知之次也(지지차야)니라”인데, “많이 듣고서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면 완전한 지식의 버금은 될 것이다.(1권, 254쪽)”라고 해석합니다. 전자에 대하여 저자는 주희의 풀이를 인용하였습니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비록 앎이 완전하지는 않다 해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폐단은 없을 것이므로 앎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으로 앎을 추구한다면 앞으로 알아 나갈 방도가 생길 것이다.(1권, 80쪽)” 후자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조선 인조 때 장유(張維)는 당시의 옹졸한 지식인들이 자기 소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체를 거짓으로 여기며 무시한다고 비판했다.”고 소개하면서 “다문다견을 통해 학문의 고착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두 개의 구절을 연관지어보면, 다양한 주장들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아예 검토대상에서 빼버린다면 그 앎은 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심경호교수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제2권에는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편을 다루었습니다.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의 의미는 공자님께서 제자들과 주고받은 말씀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한(子罕)편 제7장을 보면, “有鄙夫(유비부)가 問於我(문어아)하되 空孔如也(공공여야)라도 我叩其兩端而竭焉(아고기양단이갈언)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내게 물어오면 그가 아무리 무지할지라도 나는 시종과 본말을 다 말해준다.(28쪽)’라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물어오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야 오죽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스승의 표상으로 받들만하다고 하겠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누구나의 꿈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던 공자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자기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가 많이 다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도 잘 어울리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의 우리나라의 사회현상과 비교해서 읽는 예로, 안연(顔淵) 제11장을 들 수 있습니다. “齊景公(제경공)이 問政於孔子(문정어공자)한대 孔子對曰(공자대왈) 君君臣臣夫夫子子(군군, 신신, 부부, 자자니)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묻자, 공자께서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2권, 140쪽)”라고 풀어 쓰신 것처럼 각자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설화를 자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안연(顔淵)편의 제21장을 꼭 새겨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一朝之忿(일조지분)으로 忘其身(망기신)하여 以及其親(이급기친)이 非惑與(비혹여)”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재앙이 부모에게까지 미친다면 미혹이 아니겠는가?(2권, 162쪽)”라고 해(解)하고 있습니다. 한때의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떠나서,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분명 재앙일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듯합니다.

 

심경호교수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논어>의 3권에는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라는 부제는 격동기를 살아내는 군자로서 지켜야할 덕목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군자라고 하면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고답적이고 고루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만, 세상사는 이치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면 품격 있는 신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위령공(衛靈公)편의 제18장을 보면, “君子(군자)는 病無能焉(병무능언)이오 不病人之不己知也(불병인지불기지야)니라”라고 했습니다. 해(解)를 보면,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기 않는다.(3권, 58쪽)”라고 했고, 역시 위령공(衛靈公)편의 제20장을 보면, “君子(군자)는 求諸己(구제기)오 小人(소인)은 求諸人(구제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3권, 62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제22장에 나오는 “君子(군자)는 不以言擧人(불이언거인)하며 不以人廢言(불이인폐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사람이 나쁘다고 해서 그의 좋은 말을 버리지 않는다.(3권, 66쪽)”라는 대목은 요즈음 신사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위정자 혹은 지도자를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양화(陽貨)편의 제6장에서 “恭則不侮(공즉불모)하고 寬則得衆(관즉득중)하고 信則人任焉(신즉인임언)하고 敏則有功(민즉유공)하고 惠則足以使人(혜즉족이사인)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공손하면 모욕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실하면 남이 나를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적을 세우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160쪽)”라고 해설하셨습니다. 따로 토를 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는 자한(子罕) 12장의 한 구절처럼 “나는 제값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2권, 37쪽)”라고 하신 대목이나, 양화(陽貨)편 제5장에서 “子曰(자)왈 夫召我者(부소아자)는 而豈徒哉(이기도재)리오 如有用我者(여유용아자)인댄 吾其爲東周乎(오기위동주호)인저”라고 해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공연히 하는 일이겠느냐?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158쪽)”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가슴에 품은 포부는 큰데 불러서 써주는 곳을 찾지 못해 답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꽤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예를 바탕으로 하고 실무를 중시하는 조직관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마침 양화(陽貨)편의 제4장의 대목이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子之武城(자지무성)하사 聞弦歌之聲(문현가지성)하시다 夫子莞爾而笑曰(부자완이이소왈) 割鷄(할계)에 焉用牛刀(언용우도)리오”라는 대목으로, “공자께서 무성에 가시어 현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3권, 154쪽)”라는 대목입니다. 공자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유가 맡아 다스리는 무성에 갔는데, 큰 정치의 도구라고 할 예악으로 작은 고을 무성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농담을 하신 것입니다. 조직을 다스리는 원리는 조직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악은 어느 조직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 <논어>의 본래 맥락을 음미할 수도 있고, 내키는 대로 책을 펼쳐 해당 강의의 주제를 자신의 처지와 연관 지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 책은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 바쁜 현대의 삶 속에서 이 책은 일종의 멘토가 되어 고전의 가르침을 일상적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단 차례로 읽어 전체를 개관하고, 일상에 잘 부합하는 대목을 다시 새겨보는 방식으로 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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