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 사이 2 밤과 낮 사이 2
빌 프론지니 외 지음, 이지연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과 낮 사이> 1권에서는 16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만, 2권에서는 12편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2권에 나오는 단편들은 무대가 국제화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특히 서울 근처 팔당 기지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마틴 리먼의 「오양의 정반대」도 있어 반갑기도 하면서 왠지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다시는 그 둘이 만날 일 없으리(309쪽)”라는 현자의 말이 동서양을 두고 한 말이라고 적었습니다만, 정말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작가의 장담에 저도 한 표를 던집니다.

 

질투의 힘은 참 무섭습니다. 기지촌의 스타 오양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던 미군이 혐의를 받게 되면서 미군 조사관이 투입되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단서가 애매한 상황인데 두 조사관은 진범을 추리하여 압박해 들어가는 과정이 조금은 긴박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도 진범이 공개된 장소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군용대검으로 노인을 위협하다가 몰려든 군중에 몰매를 맞아 숨지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 같습니다. 어쩌면, “지역 주민들이 무리 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에서 연장자는 고이 받들어지지 이렇게 학대당하는 법이 없다. 군중으로부터 웅성웅성 욕설들이 일어났다.(343~344쪽)” 우 고유의 경로사상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만, 아무리 군중이라도 흉기를 들고 있는 범인에게 다가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경로사상이라는 우리의 풍습을 되새기게 된 것 같습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출생한 파리의 벨르빌 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도미니크 메나르의 「장밋빛 인생」은 두 가지 관점에서 흥미를 끌었습니다. 첫 번째는 누구나 에디트 피아프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피아프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레일라는 피아프처럼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만 세상이 녹록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레일라의 재능이 부족한 탓인지 제대로 된 기회를 붙들지 못한 채 어느날 살해된 채로 발견됩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흥미롭게도 수사관이 아니라 글쓰기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지망생 아르노입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살인현장에 끌려가서 등 떼미는 친구 덕분에 우연히 만나게 된 목격자로부터 죽은 여자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르노는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146쪽)”라고 당부를 하는데, 정작 노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무 말 하지 말라고요? 왜지요?” 이 장면에서 얼핏 ‘이 노인이 왜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선생이 거기 서서 나에게 하는 그 말, 그 말은 내 야이기가 아니에요. 나는 선생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147쪽)”라면서 아르노를 처음 본 듯 자꾸만 뜯어보았는데, 마치 자기 집 주방에 어쩌다 이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있는 건지, 어쩌다 사이에 커피포트를 놓고 마주 앉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을 빼꼼히 열고 아르노를 집으로 끌어들인 것은 노인이었거든요. 그런 노인이 “가세요, 선생. 가요, 부탁이니까”라고 아르노를 밀어냈다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 떠올린 소설이 바로 치매환자가 저질렀다는 살인사건을 다룬 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http://blog.joins.com/yang412/13208200>입니다. 그책의 리뷰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치매환자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많이 있어도 치매환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건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치밀한 사고체계가 필요한 살인사건을 치매환자가 저지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억들이 손상되어가고 있는 치매환자가 「장밋빛 인생」처럼 우발적 상황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습니다.

 

두 편의 이야기 말고도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 열편이나 더 있습니다. 뉴욕시의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뉴욕시의 옛모습을 알게 된다거나, 전편에 등장했던 마녀 이야기에 이어서 늑대인간이 벌이는 살인사건의 이야기는 공연히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다별님께서 댓글에 적으신 것처럼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한 단편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과 낮 사이 1 밤과 낮 사이 1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에 빠져 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혼자 근무하는 것이라서 남아도는 시간을 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으로 고른 것이 가벼운 책읽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법의부검을 맡아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익숙한 이름을 볼 수 없었습니다만, 이름만으로도 쟁쟁하다는 영미권 장르문학 대표주자 28인의 단편소설들을 묶은 <밤과 낮 사이>를 읽으면서 지방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권에는 모두 18편의 장르단편소설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공황시절을 뚫고 살아남은 가족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다룬 패트리샤 애보트의 <그들 욕망의 도구>를 비롯하여, 스토커에 쫓겨 뉴욕을 떠나 서부에 정착하여 글을 쓰고 있는 주인공이 조종불능상태로 떠가는 열기구를 붙들었다가 은행강도의 협박을 받게 되는 톰 피치릴리의 <밤과 낮 사이> 등은 설마 저런 상황과 마주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간혹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보니, 우연히라도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일을 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르소설이라고 해서 끔찍한 범죄 스토리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틴 에드워즈의 <책 제본가의 도제>는 장래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된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서적애호가의 격려로 책제본 일을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졸리는 “기꺼이 온몸을 바칠 만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77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평생을 바칠 직업을 결정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인데, 저를 포함해서 그런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참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낸시 피커드의 <심술 생크스 여사 유감>이나 메건 애보트의 <즐거운 응원단>이라는 단편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한이 맺힐 정도로 부딪히며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남을 아프게 하는 만큼 그 아픔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첫남편>이나, 피터 로빈슨의 <개 산책시키기>처럼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여름에 밀폐된 차 속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아버지날>에서는 완전범죄는 없다는 사실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제레미아 힐리의 <모자 족인>도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수사기법이 날로 발전하고, 최근에 발전된 IT기술을 기반으로 한 CCTV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깔려있는지 안다면 섣부르게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입니다.

 

일단은 강력사건을 다룬 소설들이 많은 편입니다만, 살레인 해리스의 <운이 좋아>처럼 마법사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옆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입대할 당시 100km행군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출발할 때는 대오를 갖추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오가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한밤중에는 앞에 가는 사람이나 뒤에 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면 옆에서 도란거리면서 같이 가는 동료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던 경험을 보면, 이런 장르의 스토리가 먹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이 책에 담은 단편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습니다. 짧지만 기승전결이 갖추어져 있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고, 짧기 때문에 책 읽는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좋은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알랭 드 보통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도 소개해드린 바 있는,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com/yang412/13086857>을 통하여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중심으로 프루스트의 편지와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뽑아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홉 가지나 말입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는 방법을 제외하고서도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입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보통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하다고 합니다. 스물세 살에 쓴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계기로 일상적인 주제를 철학적으로 풀어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목록을 훑어보면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장소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행이면 여행(여행의 기술, 공항에서 일주일을), 건축이면 건축(행복의 건축), 인간의 불안한 심리(불안, 철학의 위안), 사랑과 섹스(사랑의 기초 한 남자, 인생학교 섹스, 너를 사랑한다는 것), 일(일의 기쁨과 슬픔) 등등.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예술을 이야기 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이렇게 늦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과 이 주제를 두고 나눈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보통이 집필했다고 합니다. 우리말 제목은 <영혼의 미술관>이라고 옮겼습니다만, 원제는 입니다. ‘치유로서의 예술’정도로 직역을 한다면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을 주지만,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라는 부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담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 제목을 보면 미술관에 걸린 미술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미술작품을 주로 인용하고 있지만, 때로는 건축물에서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고 있어, 미술의 영역을 넘어 예술로 범위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화두를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거창한 질문으로 말입니다. 인류가 처음 남긴 역사의 기록은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들은 왜 그림을 남겼을까요? 단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낀 점을 남겨두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술을 위한 예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요? 저자들은 신비한 영역으로 물러나려고 하는 예술의 지위에 강한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즉 “예술은 도구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5쪽)”고 주장합니다. 더하여 예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도구들처럼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이 경우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심리적 결함이라 칭할 수 있는 약점들을 보완해준다.(5쪽)”고 단정하고,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체”라고 제언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매체로서의 예술의 기능을 ‘방법론’에서 논하고 이어서 사랑에 관련된 예술의 치유능력을 ‘사랑’에서, 자연을 마주할 때 알게 되는 심리적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기능을 ‘자연’에서,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로서의 예술의 역할을 ‘돈’에서, 그리고 ‘정치’에서는 정치목적으로 이용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먼저 치유 매체로서의 예술은 일곱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그리고 감상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출발점은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데 서툴다.(8쪽)”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는데 서툰 이유를 아십니까? 탈리 샤롯은 <설계된 망각;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에서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즉 망각이라는 편리한 기능이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제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인데, “글쓰기는 분명 망각의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고, 미술은 그다음으로 중요한 방편이다.(8쪽)”라는 보통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보통은 하자 많은 인간의 기억을 보완해주는 기능으로서의 미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하여 장바티스트 르노의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다부타데스, 1786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이 햇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했을까 싶습니다.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림보다는 사진이 더 우수한 매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보면 그 장면에서 제대로의 느낌을 얻을 수 없어 기억에 새겨진 것이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사진을 보더라도 별다른 감동이 이끌어내어지지 않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장면에서 특히 눈길을 끈 포인트를 추출해서 그려내는 것이 그림입니다. 따라서 그림과 사진은 분명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림그리기를 추천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김한민 지음, 그림여행을 권함, 민음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245018)

 

예술의 두 번째 기능 ‘희망’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예술이 가진 독특한 힘을 “만일 세상이 좀더 따듯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이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괴롭거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16쪽)”라고 적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꼭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볼 때 눈물이 터지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눈물의 원인을 추적하는 한편, 역사를 되짚어 눈물이 마르게 된 다양한 계기를 찾아 정리한 제임스 엘킨스 교수는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사람들이 그저 ‘아름답다’는 등 애매한 이유로 울었다고 전했습니다만, 치유의 매체로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조이한교수님의 경우를 보면 딱히나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조이한 지음, 그림 눈물을 닦다, 추수밭, 2012년; http://blog.joins.com/yang412/12868341)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예술이 균형을 회복시켜주고 열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이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저자는 “도덕적 메시지, 다시 말해 보다 나은 자아로 거듭나라는 메시지는 애초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예술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42쪽)”라는 주장에서 “이 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점 외에도,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라고 평가와 함께 조선왕조 시대의 백자 달항아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표면에 작은 흠이 흩어져 있고, 유약이 잘 발라지지 않아 표면이 얼룩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항아리를 겸손하다고 본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남다른 시각과 표현방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보면, 학교수업 이외에도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핵심을 잘 요약해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 역시 핵심요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키워드에 따라서 인간의 취약점을 잘 요약하고 그러한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도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2. 희망의 조달자,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4. 균형추,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등입니다. 또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기술적 해석, 정치적 해석, 역사적 해석, 충격가치적 해석, 그리고 치유적 해석 등이 있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치유적 해석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보통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사랑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도 모색해본 끝에, 예술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로 툭 튀어나오는 법이 없고, 연습을 하지 않으면 도움이 안되는 자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 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키워드를 역시 다양한 미술작품과 건축작품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보통은 긍정적 사고를 가진 철학자라고 하겠습니다. 니콜라 푸생의 <겨울(대홍수), 1660~1664년)>라는 작품에서 그는 “인생은 대개 이런 모습으로 흘러간다. 난파선에 매달리고, 아무것도 없는 바위일망정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순간의 안전을 구한다. 따라서 관계의 파탄, 그로 인한 상심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아니다.(119쪽)”라는 메시지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며,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을 찾았을 때 명작을 모사하는 분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답을 얻었습니다. “처음에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개성과 상상력이라곤 없는 방식으로 그저 충실하게 영웅의 그림들을 모사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자신의 감탄을 비판적인 눈으로 분석할 줄 알게 되었다. (…) 터너는 존경하는 선배의 작품에서 그를 진정으로 흥분시켰던 측면을 연구할 줄 아는 현명함과, 그에 기초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킬 줄 아는  용기를 겸비하고 있었다.(188쪽)” 그렇습니다. 요즈음 케이블에서 선배가수의 노래를 얼마나 근사하게 카피하는가를 평가하는 오락프로그램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출연하시는 분들 가운데 가수를 꿈꾸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던데, 그들이 선배의 기교를 카피하는 재주에 만족하고 자신만의 노래 부르기를 게을리 한다면 오히려 재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화두는 정치미술입니다. 저자가 정치미술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잘못 이용당할 수도 있지만, 선을 위한 정치미술의 잠재력은 이론 영역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현실 영역에서 활용법을 찾아야 할 것이며, 예술이 개인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회를 치유하는 힘도 유용하게 쓰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이 늘 아쉬운 저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반복이 중요하다. 어떤 것의 정신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려면 그것을 꾸준히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없다. (…) 일년에 한두 번 미술관을 찾는 것으로는 예술이 약속하는 근원적인 충족을 얻기에 부족하다.(21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티븐 호킹박사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박사의 <위대한 설계>는 스티븐 호킹의 <나, 스티븐 호킹; >을 읽으면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주는 느낌은 지적설계자 개념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줍니다만, ‘존재의 수수께기’라는 제목의 첫 번째 장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속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주는 어떻게 작동할까? 실재(實在)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주는 창조자가 필요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변을 담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현대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 역시 그 뿌리를 철학에 두고 있다고 본다면 여전히 과학으로 진화한 철학적 답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존재의 근원은 우주의 시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모형으로부터 뉴턴의 중력에 관한 고전이론을 거쳐 현대의 양자이론, 그리고 우주의 시원에 관한 끈이론과 M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고급 물리학에 관한 이론들이 전개되어 온 과정 등, 저자들은 그러한 과학의 역사를 쉽게 요약해서 과학의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일반인이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과학은 법칙들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밝혀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에 대하여 1. 법칙들의 기원은 무엇일까? 2. 법칙의 예외, 이를테면 기적은 존재할까? 3. 가능한 법칙들의 집합은 오직 하나뿐일까? 라는 질문이 제기되어 왔는데,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법칙들이 신의 작품이라는 이제까지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여호수아서에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 아모리 족과 싸우는 중에 전투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해와 달을 멈추어달라는 기도를 한 결과 대략 하루 동안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합니다(110쪽). 세상에 해와 달이 움직임을 멈춘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현대 물리학에 이르기 전까지 우주의 시원에 관한 문제는 그저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하거나, 신이 창조하였다고 믿어왔습니다. 모든 사물은 시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작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창조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들은 현재 우주의 다양한 가능 상태들에 대응하는 다양한 역사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은 “우리는 우주론과 인과관계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파인만 합에 기여하는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해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177쪽)”라는 것입니다.

 

우주가 관찰자에 대하여 독립적이고 유일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생각은 가능한 우주로 이루어진 광활한 풍경이 존재한다는 다중우주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우주의 풍경; >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저자는 우리와 유사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우주는 드물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역시 조금만이라도 조건이 달라졌더라면 우리와 같은 존재들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주가 초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가는 중에도 창조자가 우주를 설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들이 위대한 설계라고 부르는 우주의 정밀한 조정현상은 창조자의 지적설계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제5장 ‘만물의 이론’에서 저자들은 다섯 가지 끈이론들과 초중력이론을 근사이론들로 거느렸다고 생각되는 더 근본적인 M이론이 우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M이론은 이름만큼이나 기적적이거나 미스테리한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고나면 리뷰를 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막상 글로 옮기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입니다. 김려령 작가님의 <너를 봤어>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구 뒤섞은 듯한 색깔 때문일까요? 하드보일드해보이면서도 19금 냄새도 나면서도 문학계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는 느낌도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면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사정 때문에 폭력성이 은밀하게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제목 <너를 봤어>는 주로 살인을 주재로 한 소설을 쓰는 젊은 여성작가 ‘서영재’와 19금 소설을 주로 쓰는 젊은 남성작가 ‘도하’를 엮어 연작소설을 쓰도록 한 것은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고 있는 중견 소설가이자 편집자인 ‘정수연’입니다. 1부를 서연재가 맡고, 도하가 2부를 이어가고 수연이 마무리하기로 하는데, 어디선가 그 책의 제목을 <너를 봤어>로 했다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왜 ‘너를 봤어’일까? 그리고 보면 수연의 주변에는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어난 강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아버지, 형은 수연이 죽였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수연의 아내이자 잘나가는 작가 유지연도 있습니다. ‘너를 봤어’는 누군가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 의미일까요? 세 건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연이 죽기 전에는 그저 눈길이 가는 후배작가의 수준으로 흘러가던 영재와 수연의 관계는 수연을 지켜보아왔던 영재에게 수연 역시 관심이 쏠리게 되고, 아내의 죽음 이후에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하는데, 정작 영재는 수연에게 “사람 죽였어요?(94쪽)”라고 대놓고 물어봅니다. 수연은 “사람 죽인 사람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너 죽어”라고 에둘러 대답하는데 영재는 그 의미를 알아챘을까요? 피가 튀는 소설을 주로 쓰는 영재가 귀신을 되게 무서워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부검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부검을 한 날에는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온 집안에 불을 휘황하게 켜놓고서 자곤 했습니다. 그 기억이 엷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역시 부검을 하는 여자 후배로부터 부검을 통해서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특히 타살의 경우는 범인을 잡는데 부검이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도 부검하는 사람을 보호해줄 것 아니냐는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영재와의 사랑으로 과거사를 지워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수연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안고 사는 어머니와 만나던 날 무엇엔가 쓰여서 영재를 만나려 한 것이 반전의 꼬투리가 됩니다.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묘한 버릇이 있다고들 하는데, 영재는 작품을 쓸 때는 휴대전화도 꺼두고 누구로부터의 방해도 피하는 버릇이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허해진 수연이 영재를 보고 싶었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지요. 결국 영재의 집을 찾아갔던 수연은 영재로부터 거부의 몸짓을 보고 갑작스럽게 폭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연은 다중인격을 가졌던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영이 빙의되어 폭력을 휘두른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수영이 상황을 수습하는 방법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이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에필로그에 이르러 영재와 도하의 연작소설의 제목은 <연가>에서 <너를 봤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목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결국 세 사람이 나누어 쓰기로 했던 연작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서 <너를 봤어>로 새롭게 정리된 셈입니다. 김려령작가의 소설로 탄생한 셈인데, “나와 직접 관련이 있든 없든,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죽여야 했다. 미운 놈을 처치하고 일생을 피 말리며 살 수 없느니 펜을 사용했다.(203쪽)”는 것이 김작가께서 처음 소설을 쓴 동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세상이 많이 무서워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