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인간
변현단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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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꿈꾸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친께서도 은퇴를 앞두시고 시골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시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다고 합니다. 농사일을 해보신 어머니께서는 그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이 먹었다.’는 자기반성을 붙인 귀농안내서가 나왔습니다. ‘알맞게 욕구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자립인간>입니다.

 

이 책을 쓰신 변현단님은 ‘낮에는 농사를 짓는 농부, 밤에는 글을 짓는 작가.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사람이든 생활이든 틀에 박힌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대에는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를 꿈꾸며 정치사회운동을 하였다. 30대에는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해외 배낭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회문화를 접했다. 2000년대 민주노동당 환경정책을 만들고, 2002년 인도에서 생태운동가인 반다나 쉬바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40대 들어, 경기도 시흥에서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자활공동체인 <연두농장>을 꾸렸지만, 도시에서는 온전한 자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해체하였다고 하는데, 결국은 ‘개인의 자립’을 우선순위에 두고, 곡성 산골로 터를 옮겨 특별한 작위적 공동체가 아닌 ‘자립적 개인의 협력’으로 꾸려나가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농사를 지어라. 자유롭고 싶거든 농사를 지어라. 농사를 짓되 시골에서 지어라.’고 하는 그녀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농사짓겠다고 시골로 몰려드는 상황이 되면, 그녀가 꿈꾸는 이상향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그녀는 돈과 소비의 순환에 볼모로 잡혀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탈출하려면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것인데,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나 행복할까요?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은 없을까요? ‘결혼이란 서로 좋아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적이고 공식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억압적으로 강제되는 일(55쪽)“이라고 정의하는 그녀의 생각이 옳을까요? 그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제공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녀의 생각은 간혹 아주 위험천만한 것도 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만, “갑자기 중풍 증상이 있으면 향유나 생강즙을 복용한다. 중풍으로 이미 쓰러졌을 때는 인중에 침을 놓거나 급히 엄지손가락과 인중혈을 세게 누르면 차도가 있다.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의 경우, 석회를 섞어 붙이는데 왼쪽이 삐뚤어졌으면 오른쪽에 붙여서 치료하고 깨끗이 씻어준다.(234쪽)”라는 처방은 한의학적 상식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사지에 마비가 오는 증상으로 뇌졸중이 의심되는 경우는 만사를 제쳐두고 응급실을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아 적절하게 치료를 받아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도 중풍의 급성기에는 현대의학적 치료를 받도록 권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석회를 붙인다는 구안와사도 최근에는 바이러스에 의하여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초기에 항바이러스제제로 치료를 해야 빨리 회복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60년 이후부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먹고 육식하는 것이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2013년 들어 최근에는 ‘소식(小食)’이 건강에 좋다는 임상실험들이 발표되었다.(79쪽)”는 대목만 해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20년 전에 이미 동물실험을 통하여 소식이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뭄과 흉년이라는 자연재해나 전쟁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이 얻은 벽곡방과 구황방이 검증된 식량체계이므로, 반문명, 저에너지, 적은 노동력을 들이고 자연적이라는 점에서 오늘에 재현할 가치가 높다는 주장입니다. 요약해보면 인류의 문명이 발전해온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퇴행적 선택으로 행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피와 땀을 쏟아야 가능한 일이라는 농사를 슬렁슬렁 지어도 되는 것인지도 말입니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잘 못된 정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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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낫게 한다 - 깨우고, 바라보고, 두드리는 6단계 셀프 명상 치유법
정수지 지음 / 시공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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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와 명상으로 힐링을 얻는다는 요법을 안내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미국 보스턴에서 심신통합치유에 관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정수지씨의 <내가 나를 낫게 한다>입니다. 한때 보완대체의학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암이나 만성질환을 치료하기에는 현대의학이 한계에 부딪혔다면서 해답은 보완대체의학에 있다고 주장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름그대로 보완대체의학은 현대의학의 치료과정은 보완하는 것이지 그들의 말대로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제시되고 있는 보완대체의학요법 가운데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보완요법을 통하여 효과를 얻은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는 특별하게 그 요법에 잘 어울리는 요인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에서도 꼭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재현효과가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정수지씨가 주장하는 6단계 셀프 명상 치유법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방법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6단계 셀프 명상 치유법의 근본은 동양의학의 기철학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간단하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1부 ‘명상이 당신을 낫게 한다’에서는 저자가 주장하는 힐링 명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명상으로 치유가 일어나는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2부 ‘치유가 시작되는 액티브 명상법’은 6단계로 되어 있는 힐링명상을 수행하는 과정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수행과정에서 응용할 수 있는 방법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3부 ‘또 하나의 힐링명상’은 힐링명상과 관련이 있거나, 힐링명상을 응용하여 발전시킨 요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신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어왔습니다만, 저자는 여기에 더하여 에너지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즉 슬픔, 분노, 기쁨, 절망, 좌절 등을 두 번째 몸이라고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신체와 에너지 그리고 영혼의 부조화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 모두 여섯 단계에 걸쳐 의식과 에너지가 제대로 순환하도록 한다는 개념입니다. 1단계에서는 내 몸의 감각을 깨우는데, 여기에서는 몸을 두드리고, 요가자세를 응용한 스트레칭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2단계에서는 몸과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그대로 느끼며, 3단계에서는 그 느낌을 그대로 바라본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2단계와 3단계는 명상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4단계는 소유하기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단계인데 이를 통해서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5단계는 가슴으로 선택하기인데, 자신감과 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은지 선택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6단계에서 행동으로 옮기면 힐링명상의 여섯단계가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한 암을 과거에 대한 용서와 자연식, 심리치료, 마사지와 같은 다양한 방버으로 극복하고 영성과 자기계발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사례를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와 같은 치료법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치료의 적기를 놓치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들어가는 말을 읽다보면, 중고등학교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는 저자의 특히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3 무렵 폐결핵으로 진단받고 약물치료를 6개월동안 받았다고 하는데, 그리고 보니 저 역시 재수할 때 기침이 이어지는 바람에 찾아갔던 약국에서 결핵약을 권하는 바람에 정말 약을 한웅큼씩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병원을 찾아 진찰을 받고 약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기침이 재발하여 폐결핵이 재발하였다고 해서 조직배양검사를 권했다고 하는데, 그 검사가 꼭 필요했는지 저 역시도 의문입니다. 저자 역시 의심이 들어 명상요법을 찾게 되었다고 하는데 자신에 맞는 요법을 찾을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의사, 약, 음식, 그 어느 것도 나를 낫게 할 수 없었다!”라는 카피를 두었습니다만, 어쩌면 이 카피가 모든 환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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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의 역사와 한반도의 발견 살림지식총서 138
김상근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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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씬이 화려한 역사극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만, 지도는 일국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를 일구는데 핵심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는 국가의 기밀 중의 기밀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지도의 역사가 갑자기 화제에 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민음 한국사] 시리즈의 첫 번째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http://blog.joins.com/yang412/13342028>에서도 1402년(태종 2년)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인용하여 조선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원나라에서 들여온 자료를 참고하여 동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에 이슬람지역의 지식까지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현존 지도 가운데 조선을 표현한 최초의 지도이고 아시아에서 만든 지도로는 처음으로 유럽을 표시한 지도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지도에 숨겨진 당대 제작자와 사용자의 욕망을 파헤치며 인류의 세계관을 풀어낸 제리 브로턴의 <욕망하는 지도>가 뽑은 열두 점의 세계지도에 당당히 올라 있다는데서 그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연세대학교의 김상근교수님께서는 <세계지도의 역사와 한반도의 발견>에서 역시 지도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 궁금증에 답을 제시하였습니다. 먼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지도의 역사를 보면,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는 동굴벽화에 지도라고 할 그림이 남아 있다고 하고, 기원전 6세기경,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하여 실제로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사본이기는 하지만 기원후 150년경에 제작된 프톨레미의 <지리학>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최고(最古)의 지도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미의 지도는 14세기 말에서야 그 존재가 유럽에 알려져 재발견되면서 여기에 당시에 알려져 있던 지리적 정보가 추가되는 형태로 복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1477년 발간된 프톨레미 <지리학>에는 중국와 인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왜곡된 형태로나마 표시되어 있지만, 한반도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라시아대륙의 귀퉁이에 숨어있는 한반도이지만 가까이는 일본과 중국을 넘어 신라시대에는 인도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고려 말에 개경에는 동남아시아를 벗어나는 지역과도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존재가 유럽에까지 알려진 것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지시로 1254년 원나라 헌종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선교단 소속 루브룩의 윌리엄이라고 합니다. 당시 그는 우연히 만난 유럽인 윌리엄으로부터 중국 국경 너머에 있는 ‘카울레(Caule)’라는 나라의 사신을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선교보고서에 기록했던 것이고, 이 기록이 한반도의 존재를 유럽에 알린 최초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그 나라로 들어가면 입국했을 때의 나이가 그대로 멈춰 서게 되고 더 이상 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7쪽)”라고 적어 신비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지도의 역사와 한반도의 발견>은 유럽에서 발전해온 지리학적 성과를 지도제작에 명확하게 반영하기에 이르는 지도제작의 발전과정을 요약하는 한편 유럽의 지도제작자들이 한반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즉 인식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섬나라로 묘사했던 윌리엄과 달리 반도국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1602년판 <곤여만국전도>에 조선을 섬나라가 아닌 반도국으로 정확하게 그려넣은 마테오 리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이 섬나라이거나 오이처럼 기름한 모습으로 알려졌는데, 1653년 오스트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비엔나에서 출간한 <신중국지도 총람>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미 8세기 무렵 아랍상인들은 신라의 존재를 알고 교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한반도의 존재를 그들의 지도에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나 이런 정보가 담긴 아랍의 지도가 유럽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한 것이 오랜 세월 동아시아 지역이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땅으로 남게 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한국의 뛰어난 지도제작기술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면서 앞서 소개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세계지도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옛 자료가 당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겠고, 우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 책읽기였습니다. 쪽수가 많지 않은 것처럼 잘 요약하였을 뿐 아니라 쉽게 설명되어 있어 학생들에게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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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신 희곡선 프랑스 고전극 시리즈 2
장 라신 지음, 장성중 외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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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책읽기입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쪽으로(김희영 옮김, 민음사 펴냄, 2012년 ;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을 보면, “사악한 자의 행복은 급류처럼 흘러가나니(194쪽)”라는 라신의 희곡 <아탈리> 2막 7장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그때 나는 헛된 장식에 무겁게 짓눌리는 비극 속 여주인공처럼, 내 이마에 머리카락을 모으려고 온갖 매듭을 만들며 공을 들였던 그 성가신 손에게는 불경하게도, 파마하려고 붙인 종이를 떼고는 새 모자와 함께 발로 짓밟고 있었다.(254쪽)”라는 구절처럼 라신의 희곡 <파이드라>의 한 대사를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는 것처럼 프루스트는 라신의 희곡 작품, 특히 <파이드라>, <아달랴>, <에스더> 등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의미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라신은 모두 열한편의 희곡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999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라신 희곡선집>에서 다섯 편을 소개한 바 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서 2008년에 중복되지 않는 다섯편의 희곡을 번역하여 <라신희곡선>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라신의 희곡작품 가운데 로마의 역사를 토대로 한 <베레네케>와 <미트리다테스>, 희랍신화를 토대로 한 <이피게네이아>와 <파이드라>, 그리고 구약성서를 토대로 한 <에스더> 등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비극은 라신의 후기작품들로서 옮긴이들은 머리말에서 “라신의 비극에 일관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사랑이다. 라신의 사랑은 코르네유의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을 선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유도하려는 원동력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외부로부터 역습해오는 정념이다.(5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작품 <베레네케>는 팔레스타인의 여왕 베레네케를 사이에 두고 로마황제 티투스와 코마네케의 왕 안티오쿠스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동방을 정벌하러 갔을 때 베레네케를 보고서 한눈에 사랑에 빠져 로마로 데려오지만 황제는 이국의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베레네케를 추방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안티오쿠스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일이 꼬이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티투스와 베레네케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라고 하며, 라신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안티오쿠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비극이라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이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 희곡에서는 세 사람이 죽음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베레네케가 두 남성을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미트리다테스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4각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역시 폰투스 등을 포괄하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미트리다테스왕이 동방에서 데려온 약혼녀 모니메를 두고 왕의 배다른 아들들, 파르나케스와 크리파레스가 동시에 모니메에게 연정을 품게 된 복잡한 상황입니다. 미트리다테스왕은 로마로부터 끊임없이 받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로마로 진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 크리파레스는 로마와 내통한 어머니의 죄 때문에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반면, 파르나케스는 로마와 내통하여 왕국을 안정화시키려고 합니다. 미트리다테스왕이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어 로마를 교란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파르타케스와 크리파레스는 모니메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부왕이 생존해있다는 전갈을 받고서 황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라타케스의 모함으로 크리파레스와 모니메를 죽이려던 미트리다테스는 파르타케스가 끌어들인 로마군과 전투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거두지만, 크리파레스의 용전으로 로마군과 파르타케스를 패퇴시키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다른 결말을 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http://blog.joins.com/yang412/13137059>에서 잠깐 등장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출정에 나서면서 신탁을 집행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고, 그 때문에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신은 아킬레우스와의 결혼을 빙자해서 끌어들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려는 오뒷세이아의 음모에 끌려들지 않은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살리려 하는 등 상황을 엮어가다가 결국은 에리필레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결말을 선택합니다. 라신의 의도대로라면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 셈이니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극은 극일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파이드라>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재이기도 합니다. 아테나이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와 아마존의 여왕 안티오페 사이에서 얻은 휩폴뤼토스를 처음 본 순간 생긴 사랑을 억누르기 위하여 휩폴뤼토스를 밖으로 나돌게 합니다만, 결국에는 휩폴리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오고, 아리키아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휩폴리토스가 파이드라의 고백을 거절하게 되자 앙심을 품고 테세우스에게 휩폴뤼토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자질하기에 이릅니다. 분노한 테세우스의 명령으로 휩폴뤼토스는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되고,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의 이간질 때문에 아들이 죽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파이드라 역시 곁에서 일을 꾸미던 오이노네가 죽은 다음에 자신이 꾸민일이라고 테세우스에게 고백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이 작품은 라신이 새로운 해석으로 탄생한 <이피게네이아>와는 달리 그리스 신화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희곡 <베레네케>의 첫머리에 당시 국무장관에 임명된 콜베르에 대한 라신의 헌정사가 나오는 점입니다. 궁정작가로 활동한 라신의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 작품마다 작가가 쓴 머리말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베레네케>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제 주제가 매우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 물론 혹자는 제가 특히 정성을 기울인 앞서 언급한 단순성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줄거리가 이렇게 단순한 비극은 연극의 규칙상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 가장 중요한 규칙은 관객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14~15쪽)”라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하여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희곡의 일부를 수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연이 거듭되면서 희곡 자체가 진화하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판본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무대에 올려진 극을 보는 것은 연출이 해석하고 배우에 의하여 표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곡은 작가의 집필의도를 읽어가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에 따라 무대에서 극이 진행되도록 상상하면서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극의 줄거리를 요약하다보니 제 느낌을 적을 공간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하여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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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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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9년 가족들의 요구로 진행된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할머니에게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연명치료의 중단은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파장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을 계기로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과거 진료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연명치료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법원이 김할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하는 판단을 내린 것이 판례가 되어 연명치료를 중단을 결정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법적 뒷받침이 없다면 의료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연명치료의 중단을 법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진료현장에서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의료계의 문제제기가 지속되었고, 결국은 의학, 법학, 윤리학 등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명치료에 관한 제도의 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노력의 성과로 지난 해 말에는 보라매사건이 일어난 지 16년 만에 ‘연명의료의 환자결정권 제도화를 위한 관련법안’의 초안이 마련되기에 이르렀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84045).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자의 결심을 의료진이 뒤집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어, 보완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하여 전향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설작품을 읽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입니다. 영국에서는 허용이 되지 않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해보자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책입니다. 작가는 2008년 12월 10일 스카이 리얼 라이브즈 채널을 통해 방영된 다큐멘터리 ‘죽을 권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서울신문 2008년 12월 10일자 기사. “영국에서 안락사 장면 TV방영 논란”; http://blog.joins.com/yang412/10315959).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운동신경세포병으로 투병하던 전직 대학교수 그레이그 유어트가 2006년 9월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안락사 지원병원 디그니타스를 방문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합니다.

 

뉴스는 “그가 ‘온몸이 마비되고, 말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눈조차 움직이지 못할 때 어떻게 당신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겠는가’라며 인생의 나머지를 ‘살아 있는 무덤’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스위스행을 택했다”고 말했고, 남편이 죽음을 선택하는 현장에 참여한 아내는 “‘언젠가 당신을 만날 것’이라며 편안한 여행을 하기를 바란다고 기원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미 비포 유>로 돌아가서, 프롤로그에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맹수들의 싸움터 같은 M&A의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던 젊은 사업가 윌 트레이너가 애인과의 달콤한 밤을 보내는 사이에 밀린 사업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급히 사무실로 나가던 길에 오코바이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빨리 택시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과 동료와 사업상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블랙베리에 정신이 팔린 윌과 쏟아지는 비에 시야를 빼앗긴 오토바이 운전자와의 불운이 겹치는 바람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삶을 잿빛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는 2년 뒤로 훌쩍 뛰어 우리의 또 다른 주인공, 사랑스러운 루이자 클라크가 운명적으로 윌 트레이너와 만나게 되기까지를 짧게 설명합니다. 그리고서는 무려 500여 쪽이 넘어가도록 루이자와 윌 사이에 벌어지는 달콤 살벌한 로맨스 스토리를 깨알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은 이랬습니다. “우리가 방안에 들어가자, 휠체어를 탄 남자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밑에서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이 내 시선과 마주쳤고, 잠시 무서운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피마저 얼어붙게 만들 듯 소름끼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한 번 더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 아 하나님, 나는 생각했다. 저 이 일 못 해요. 못 하겠어요. 꿀꺽, 세게 침을 삼켰다. 남자는 아직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도 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저, 저는 루라고 해요.’ 어울리지 않게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손을 내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잡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나서 그냥 힘없이 흔들기만 했다. ‘루이자를 줄인 애칭이죠.’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머리도 어깨 위에 반듯이 자리를 잡았다.(45~46쪽)” 운명의 실타래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를 하나로 엮는 순간입니다.

 

사고로부터 두 사람이 만나는 2년의 시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조금씩 섞어 설명합니다만, 대체적으로 회복가능성이 떨어지는 불치의 병을 앓게 되는 환자가 겪는 심리적 변화를 고스란히 겪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연구한 퀴블러 로스박사도 69세에 생긴 뇌졸중으로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면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녀 역시 자신의 환자들처럼 분노와 용서와 화해과정을 경험하였고, 종국에는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난 진정한 삶을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인생수업, 이레 펴냄, 2006년; http://blog.joins.com/yang412/92287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의 자살시도 끝에 결국에는 유예기간을 둔 다음에 안락사를 받아드리기로 가족들과 합의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아, 윌은 자신의 미래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질병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제롬 그루프먼박사와는 달리 윌을 치료한 의료진이 그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제롬 그루프먼 지음, 희망의 힘, 넥서스 펴냄, 2005년; http://blog.joins.com/yang412/4861986)

 

참고로 윌이 교통사로로 목 부위의 척수에 심각한 외상을 입고 사지마비에 빠졌고, 사고 이후로 1년 정도 받은 재활치료로 경과에 진전이 있었지만, 이후에 별 차도가 없자 치료를 포기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던 모양입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저도 잘 알고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신경과교수님은 디스크파열에 의한 척수외상으로 온 전신마비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부상이 추가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루도록 요청하여 응급수술을 받았고, 이후 재활치료에 전념한 결과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환자진료에 복귀했다는 점입니다.(전범석 지음, 나는 서있다. 예담,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1265830) 전교수님의 재활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수기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치료에 참여한 의료진과 환자 스스로의 간절한 소망이 하나가 된 결과일 것입니다.

 

윌의 어머니 카밀라 트레이너가 면담을 통하여 루이자를 간병인으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간병을 넘어 윌의 결심을 번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루이자에게 윌의 간병을 부탁하면서 윌과 가족들 간에 6개월 뒤에 안락사 시술을 받기로 합의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바람에 루이자가 혼란에 빠지기도 하지만, 6개월은 루이자와 윌 사이에 환자와 간병인 관계를 뛰어 넘는 감정이 생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내가 맡은 일은 사실상 자살을 못하게 감시하는 일이라고, 처음부터 말해주셨다면 공평했을 텐데요.(170쪽)”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루이자에게 “그 애가 뭔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면 이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요. 그 애가 계획했던 삶은 아니더라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는 카밀라의 답변에서 가족들의 답답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루이자는 사지마비환자를 간병하는 단순한 일에서 죽음을 꿈꾸는 한 젊은 남성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로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릅니다.

 

루이자가 파악한 윌은 사고로 희망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이후 세워놓은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남자였는데, 윌이 파악한 루이자 역시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고 애쓰는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많은 배려를 하게 됩니다. 루이자는 윌이 비록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담아주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그 희망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즉 윌을 사랑하게 된 자신을 깨닫고 자신의 사랑이 윌에게 희망이 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한편 윌은 루이자가 마음속에 꽁꽁 숨겨둔 상처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자신의 울타리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그녀가 넓은 세상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도록 자신이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윌은 루이자에게 “인생은 한 번밖에 못하는 거요. 한번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보내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요.(277쪽)”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윌 역시도 자신의 삶에서 희망이라고 할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루이자는 인터넷을 통하여 사지마비로 투병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처음 윌을 맡았을 때부터 시작했더라면 효율적인 대응방안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지마비로 고통받는 환자 가운데 완전 기분이 축축 처진다는 이유로 <잠수종과 나비>를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하더라고 적은 것을 보고서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수종과 나비; http://blog.joins.com/yang412/11690966>는 갑자기 찾아온 잠김증후군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된 장-도가 처음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지내다가 눈깜박임을 통하여 외부와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오랜 훈련을 통하여 사고를 당하기 전에 기획하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영화를 통하여 윌이 힘든 삶에서도 희망을 둘만한 무엇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루이자는 삶에 대한 기대를 접은 이후로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 윌을 집밖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나아가서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서 스카이다이빙과 번지점프, 그리고 승마와 수영까지도 시도하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출발을 앞두고 윌이 갑작스럽게 폐렴을 앓는 바람에 모든 잉ㄹ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폐렴을 치료하고 나서는 모리셔스 제도의 리조트에 가서 다양한 실외활동을 경험하고 종국에는 둘이서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날 루이자는 윌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온갖 일들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 보통 흔하게들 하는 사랑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심지어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어서는 안될 이유들도 숱하게 많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 당신이 아무리 지독하게 못되게 굴어도, 나 당신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요. 당신은 자신이 초라하게 쭈그러들었다고 느낄지 몰라도, 난 세상 그 누구보다 그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470~471쪽)”

 

하지만 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 역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자신이 겪어온 과정을 그대로 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통보받은 환자들이 겪게 되는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의 다섯 단계의 심리적 과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겪는 상실의 경험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건너뛰는 단계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상실수업, 이레 펴냄, 2007년; http://blog.joins.com/yang412/9264552). 윌은 자신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받을 고통의 크기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루이자의 사랑이 윌의 결심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내 곁에서 그냥 살아주면 안되나요?”라는 루이자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윌의 답변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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