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살림지식총서 476
박인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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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새로운 방법론이라 할 현상학을 창시한 것으로 알고 있는 에드문트 후설을 공부하러 선뜻 나서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후설의 철학은 난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설의 철학을 전공하신 박인철교수님께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후설의 철학을 이해시켜 보자는 취지로 ‘좀 더 쉽게 풀어보자’라고 시작한 <에드문트 후설>을 읽고 난 느낌은 역시 ‘후설의 철학은 어렵다’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살았던 독일에서도 후설은 그의 제자 하이데거보다도 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후설은 버트런드 러셀처럼 수학자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학이 지니는 학문적 엄밀성과 정밀성의 영향을 받은 그의 철학적 사유는 이 책을 지은 저자가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이라는 부제로 잘 요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수학자 후설이 철학자로 방향을 바꾼 것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대학에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듣고, 철학도 수학처럼 하나의 엄밀한 학문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이 엄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편견이나 사심에 의해 이끌림 없이, 또한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이른바 ‘무전제성의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7쪽)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철학의 오랜 전통이 되어온 객관주의가 일종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데,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주의에 물든 전통철학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철학의 진정한 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에 다름 아니다.(15쪽)”라고 한 브렌타노의 영향과 당시에 막 등장한 심리학에 눈을 뜬 후설은 수학적 개념을 심리적인 작용에 근거해 심리학적으로 해명하고자 시도하였고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지만, 심리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01년에 쓴 <논리연구 II>에서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기술적 심리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이미 1764년 람베르트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후설은 현상학의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현상학은 기술심리학이다. 따라서 인식비판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이거나 최소한 오직 심리학의 토대위에 구축되어야만 한다.(…) 일체의 이론적-심리학적인 관심을 떠나 인식체험을 단지 순수하게 기술하면서 탐구한 것을 경험적 해명과 발생을 지향하는 본래적인 심리학적인 탐구와 구분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체험에 대한 순수 기술적 탐구를 기술적 심리학 대신 현상학이라고 말하면 좋을 것이다.(19~20쪽)”

 

<논리연구 II>를 통하여 후설은 현상학의 성격과 이념을 규정하게 될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현상학적 태도와 관련해 현상학은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열린 태도의 성격을 보여주고, 둘째는, 현상학의 출발점이자 주된 탐구대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데, 바로 의식체험의 현상학의 주된 탐구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후설의 현상학은 인식론적 탐구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21~22쪽)

 

그런데 후설은 1913년에 출간된 <이념들 I>에서는 <논리연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식개념, 즉 ‘절대적 초월론적 의식’개념을 등장시키면서 이 의식이 외적 세계에 대해 독립적임과 동시에 근원적이라는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의식의 우선성 주장을 바탕으로 초월론적 의식에 의해 세계가 규정된다는, 이른바 ‘관념론적’ 세계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이를 강화해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심리학적인 혹은 객관주의적 색채를 가지던 그의 사유가 극단화된 주관주의적 차원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에 대한 후설의 근본적 대도와 방향성은 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후설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자칫 존재론적, 실체적인 관점에서 의식을 신격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의식이 세계의 창조자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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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 확실한 지식을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475
박병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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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의 책을 읽으면서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특히 철학분야의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참이라서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철학분야의 책을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혀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을 먼저 고른 이유는 지난 해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28465>를 통해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논하면서 “철학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지식과 다르지 않다. 철학에는 열려 있으나 과학에는 열려지지 않는 지혜의 특별한 원천은 없으며 철학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과학으로부터 획득된 결과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철학을 과학과 다른 학문으로 만드는 철학의 본질적 특징은 <비판>이다.(버트런드 러셀 지음, 철학이란 무엇인가, 176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지식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박병철교수님의 <버트런드 러셀>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요,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정치인이면서 평화운동가라는 다양한 수식어로 설명되는 그의 다채로운 삶은 물론 그의 철학적 사유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지식에 대한 탐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등 세 가지의 열정이 자신의 삶을 지배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러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러셀의 삶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색깔을 달리한다고 합니다. 열 한 살 되던 해에 형으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웠던 것이 ‘첫사랑처럼 눈부신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였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수학은 그의 젊은 시절의 화두였다는 것입니다.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 스승 화이트헤드와 공저로 <수학의 원리>라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수학의 원리>에 담은 그의 사상은 ‘수학의 기초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로 시작하여 모든 수학은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을 기본틀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수학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논리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면서 기존의 철학에서 사용하던 문장들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철학적 접근방식은 오늘날 철학의 흐름인 분석적 전통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러셀은 할아버지가 두 차례나 영국의 총리를 지낸, 명망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까닭에 일찍부터 사회나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20대에는 독일에 머물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였고, 1907년에는 노동당 후보로 하원의원직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러셀이 내면적으로 현실 사회문제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윤리학에 대하여 러셀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윤리학의 목표가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에 관한 참인 명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러셀은 윤리학에서 다루는 가치의 문제가 마치 과학이 그러하듯 사람에 따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지닌 것(68쪽)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년에는 다시 윤리학에 객관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는데, 그만큼 윤리의 문제는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러셀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자폭탄공격에 분노하였다고 합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여 생각한다면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나치의 경우와는 다른 측면, 즉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일본이 저지른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무너뜨린 행동 역시 나치의 경우처럼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의 투하로 인하여 피해를 받은 국가라는 왜곡된 이미지로 일본의 전쟁범죄까지 덮으려는 것은 분명 잘 못된 일일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적 시각에서 본 종교’라는 제목의 글에는 종교에 대한 러셀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러셀이 생애를 통하여 꾸준하게 다루었던 주제였다고 합니다. 열다섯 살까지는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을 지녔던 러셀이었지만, 수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그의 의문의 대상은 기하학의 공리를 넘어 종교에 이르게 되어 열여덟에는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확실성을 지니지 않ㅅ은 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러셀은 신의 존재와 같은 경우 이성적으로 확인 가능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렸던 것입니다. 러셀은 자신을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라고 주장했고, 역사적으로 교회에 의해 제도화된 기독교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수많은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는데, 과거에는 종교가 안내하는 도그마적인 믿음을 통하여 가능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그마적 믿음없이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림으로써 무한성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즉,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무한성에 이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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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고 동남아시아 (2011~2012) :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 자유여행자를 위한 map&photo 가이드북 저스트 고 Just go 해외편 58
시공사 편집부 엮음 / 시공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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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드디어 하롱베이와 앙코르와트를 묶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코스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았지만, 대부분 사진 중심의 간략한 여행기들만 볼 수 있어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책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여행사의 상품기획자의 시선으로 앙코르와트 투어를 정리한 <앙코르와트, 지금 이 순간; http://blog.joins.com/yang412/13356016>과 함께 고른 책이 <저스트고 동남아시아>였습니다. 이 책은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4개국의 주요 여행지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어, 일단은 제가 필요한 부분만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는 출판사에서 요약한 서지정보와 함께 먼저 읽은 분들의 느낌도 참고자료로 활용하기 마련입니다. 이 책은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이용하신 분들은 여행사의 상품을 이용했던 저와는 달리, 모두 자유여행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제가 필요로 했던 하롱베이와 앙코로와트에 관한 설명자료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여행사 상품을 통하여 여행을 하는 경우에는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상품설명과 함께 현지가이드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별도자료를 충분히 조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여행이 되었든 여행사상품이 되었던 이용하는 분들의 눈높이에 따라서 여행안내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현지 가이드의 이야기를 참고해보면,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의 경우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여행안내서나 먼저 여행하신 분들의 말씀과 달라진 부분들이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현지가이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암시를 행간에 담고 있다고 해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2011년에 나온 이 책에서는 베트남 입국절차에는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별도로 신고서식을 작성하는 것은 없었고, 무뚝뚝한 표정의 심사관에게 여권을 제시하는 것으로 입국심사가 종료되는 것으로 변한 것이 대표적인 변화였습니다.

 

여행사의 상품으로 다녀온 제 경우는 맛집이나 숙소 등에 관한 정보라던가 입출국 절차나 현지에서의 이동수단 등을 현지가이드가 대부분 맡아서 처리해주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현지에서 제가 보고 즐길 장소에 대한 역사적 유래라거나 놓치지 말아야 할 포토존, 타이밍 등에 관한 정보는 충분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현지 가이드가 짜놓은 일정과 코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어서 볼 수 없는 명소도 많아서 안타깝기는 했습니다만, 이번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자유여행으로 찾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때는 이 책이 보다 더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저도 몇 가지 짚어보겠습니다. 일단은 동남아시아 4개국의 여행지를 하나로 묶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진이 너무 작고 종이도 얇아서 뒷면의 내용이 비쳐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4개국을 모두 돌아보는 여행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일부 국가들만 돌아볼 것으로 생각되어서 2권 정도로 나누고 지면을 좀 더 넉넉하게 구성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개 외국에 나가면 제일 아쉬운 것이 지도 구하기였던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지도를 별도로 넣어두고 있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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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암 판정을 받으면 당장 해야 할 것들
주정미 지음 / 팬덤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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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부터 연초에 이르기까지 제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무려 세분이나 유방암치료를 받게 되셨습니다. 그만큼 유방암이 흔해졌다는 생각도 들면서, 수술과 항암,방사선치료 등 치료하는 방법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어서 생존율이 아주 높은 대표적인 암질환이 바로 유방암이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세분처럼 암과 같이 어려운 병으로 진단받게 되면, 제일 먼저 느끼는 곤란한 점이 마땅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당 질환을 진료하시는 전문가들이 진단과 치료방법 등을 쉽게 안내하는 책이나 먼저 앓은 환자분들의 투병기를 담은 책이 좋은 투병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유방암 투병기를 담은 책으로 내과를 전공하는 수련의사 선생님이 유방암으로 진단받고 치료받는 과정을 환자의 주치의와 함께 써내려간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 http://blog.joins.com/yang412/11699394>를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 캄보디아를 여행길에 또 다른 유방암 투병기를 담은 책을 읽었습니다. 보건복지부 주정미국장님의 <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입니다. 제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누구라도 바쁜 일상에 파묻혀 신체가 보내는 경고음을 일찍 알아채지 못하고 초기를 넘어간 암진단을 받아들게 되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심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이 올바른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주국장님의 투병기도 유방암을 앓는 환자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접한 경험과 정보를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환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12쪽)”을 담아 책을 써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는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점들을 담았습니다. 어떤 의사에게 치료를 맡길 것인가? 부작용이 심하다는데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를 해야 하는지,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잘 먹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병에 대하여 상세하게 공부하는 것이라는 점을 자신의 투병과정을 통하여 정리하고 있고, 핵심사항은 별도로 박스로 묶어서 쉽게 눈에 들어오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암치료에 있어 아주 중요한 점 두 가지를 짚었습니다. “환자 본인이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을 신뢰하면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31쪽)”라는 것과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현대의학의 표준화된 치료법과 항암제만큼 검증되고 높은 치료율을 보인 것은 없다.(35쪽)”라는 것입니다.

 

2부에는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암치료를 도와주는 보완요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다양한 방법과 림프부종과 같은 합병증을 다스리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금 아쉽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내용 가운데는 조금 미심쩍은 점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암환자에게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는 요양병원’을 이용하셨다는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요양병원에서는 특정질환을 전문적으로 진료한다고 표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요양병원이 혈액투성 혹은 암치료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특히 요양병원에서 많이 추천하고 있다는 해독요법도 의학적 타당성이 증명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3부는 바로 ‘마음 내려놓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가 “암 환자들은 암 판정을 받았을 때의 충격과 불안, 우울, 자책, 고독과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워한다.(172쪽)”라고 적은 것처럼 암판정으로 받은 심리적 충격을 일찍 수습하고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빛나는 부분은 바로 “암치료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병원 치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끝이 나지만, 그 다음의 치유과정은 본인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169쪽)”라고 시작하는 ‘마음 다스리기’라는 작은 제목의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 치유의 과정을 넘어왔는지를 살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부는 치료과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 열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유방암으로 투병하고 계신 환우들이 질환과 마음을 다스리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투병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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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 공간 -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오근재 지음 / 민음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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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전공을 살려 봉사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다면, 저개발국가에서 무급으로라도 봉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퇴직 후에 받는 연금이면 그런 나라에서 생활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사전준비도 필요할 것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비가 충분하지 못한 분들은 여전히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기 위하여 방황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태어난 해의 간지를 다시 맞게 되니 아무래도 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전철을 타고 천안이나 춘천을 다녀오는 분들 이야기에도 귀가 솔깃해지는 저를 보게 됩니다. <퇴적공간>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이 책을 쓰신 오근재교수님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시고,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교수로 근무하시면서 학장까지 역임하셨고, 전공이신 디자인 분야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저술활동을 왕성하게 해오셨다고 분이라고 합니다. 은퇴하신 다음에도 전공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하셨기 때문인지 일흔이 되던 해에 들어서야 자신이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위치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고, 주변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느낀 점을 모아 엮은 생각들을 <퇴적공간>에 담아내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대학을 퇴임하고서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하셨다고 하는데, 마음에 고인 질문을 해석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합니다. 종묘시민공원은 조금 멀지만 탑골공원 일대는 저에게도 아주 친숙한 공간입니다. 1970년 초반에 다녔던 대학이 탑골공원 뒤 경운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안국동에서 종로3가에 이르기까지 골목의 구석구석까지도 소상하게 꿰고 다녔습니다. 1980년 중반 대학이 고속버스 터미널 남쪽으로 이전하게 되면서는 가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인지 얼마 전에 우연히 찾아본 이 동네는 그야말로 상전벽해란 비유가 딱 들어맞는다 싶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오랫동안 관심을 두어오기도 했지만, 머지않은 저의 미래였기 때문인지 <퇴적공간>을 나름대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먼저 이 책의 제목부터 시작해보면, ‘퇴적공간’이란 도시의 인위성에 밀리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 하구의 삼각주에 쌓여 가는 모래섬처럼 몰려드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저자가 만든 조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각주는 낙동강이 남해바다로 들어가는 부근에서 볼 수 있었는데, 하구언을 건설하는 바람에 지금은 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일강 삼각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아스완댐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매년 홍수가 끝난 다음에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쌓인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농산물을 풍성하게 거둘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일강의 사례를 보더라도 퇴적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이해하고 사용할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하구에 쌓이는 모래가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모래 보다도 건축자재로 귀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도 빠트릴 수 없는 일입니다.

 

퇴적은 그렇다 치고, 종로3가 전철역을 중심으로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등에는 하루 3,000여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하루를 보낸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정이라는 집단에서의 1차적 추방과 사회적 변화에 따른 2차적 추방이 교차하면서 흘러들고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서울시 인구는 1천 44만 명인데, 이중 65세 이상 인구는 110만 명으로 10.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인인구 110만 명 가운데 0.3% 정도를 차지하는 3천 여 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노인에 관한 사회적 현상을 일반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싶기도 합니다. 즉, 종로3가역 일대에 모여드는 노인들 말고도 서울에서 살고 있는 더 많은 노인들의 삶이 어떤지도 살펴 비교해보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우선 저자만하더라도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의 모이는 노인들과 어울렸다고는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퇴적공간>을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저자는 ‘노화’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로 유기체의 퇴행과 감퇴만을 의미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기 어렵고 상품시장에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기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0년대 이전까지는 사회학적 노화를 견뎌낼 수 있는 장치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지만, 개발독재시대 이후 세계화 시장경제체계가 도입된 이후 경작할 토지를 잃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경작하던 토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금액의 토지 보상금이 제공되었고, 이렇게 손에 넣은 보상금은 예금 혹은 다른 형태의 부동산에 투자되어 수익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명승지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국립공원을 비롯한 그들의 명승지에서 만나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청년층은 고사하고 장년층도 만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인들이 보유한 개인자산의 대부분은 노인층에 몰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명승지를 돌아볼 시간과 돈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의 데이터는 아닙니다만, 일본의 경우는 전체 개인금융자산 중 75%를 60세 이상 노인들이 보유할 정도로 부자 노인이 많다고 합니다. 오래 전부터 연금제도와 저축 등 은퇴를 대비한 준비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노인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전체 개인금융자산의 2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노후의 삶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최근에서야 마련된 탓도 있겠고, 여기에 더하여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은퇴자금까지도 빼줄 정도로 무모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광복 직전 남자 45세, 여자 49세이던 평균수명이 1980년에는 남자 61.8세, 여자 70세, 그리고 2010년에는 남자 80.7세 그리고 여자 84.1세로 나타나, 불과 60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된 것을 두고 저자는 ‘죽음을 원치 않는 개개인에게는 축복이겠지만 시장 가치를 상실한 인적자원을 보호하는 무의미한 일에 사회적 자원을 소비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로 보면 재앙일 수 있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진보정권시절 정밀한 시뮬레이션 없이 도입된 복지정책의 단맛에 길들여진 우리 국민들은 개인의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극대화된 복지서비스를 요구하는데 익숙해져있고, 그런 국민적 요구에 정치권이 휘둘려 국정운영의 전반이 혼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수명연장의 배경에는 바이오테크놀로지 분야의 종사자들은 기술을 개발하고 의사는 기술을 제공하여 환자는 기술의 수혜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개발이 마치 특정집단의 이익추구의 방편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남습니다. 보건의료기술개발은 국가 간에 경쟁이 치열한 분야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 이 분야를 소홀하게 다룰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조각, 미술 등 예술작품과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인용하여 주제를 펼치고 있어 저자의 인문학적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간혹은 논점을 잘 못 이끌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을 때 스치듯 지나치는 바람에 본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광인들의 배>라는 그림을 인용한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9772557>는 광인 혹은 광기라는 질환에 대한 역사적인 변천사를 살펴보면서 광인을 수용하는 시설의 변천과정을 짚어나가고 종국에는 수용하고 있는 광인을 병원에서 해방시키는 단계까지를 살펴보고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푸코가, 광기란 다만 이성 중심의 문화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적 인식과 특성의 한 요소일 뿐 결코 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54쪽)”라고 정리하고 있어 저와는 다소 포인트에 무게를 두신 것 같아 다시 확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탑골공원이나 종묘시민공원에 모여드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간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환골탈태한 모습의 서울 난지도의 옛날 모습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아브젝시옹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난지도가 어떤 곳인지는 다들 아실 것이라 생각해서 생략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하기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조각한 거대한 대리석은 토스카나 지역에서 캐온 카라라 대리석이라고 합니다. 원래 15세기 초반 활동한 조각가 다두치오가 거대한 예언자 조각상을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는데, 이 대리석 덩어리는 다두치오로부터 로셀리노, 도나텔로를 거쳐 미켈란젤로 앞에 놓이기까지 40년간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관 스물여섯의 미켈란젤로는 대가들이 포기한 이 대리석을 가지고 높이 5미터의 소년 다비드상을 조각해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미 조각상은 대리석 안에 들어 있었다. 다만 나는 필요 없는 부분을 깍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주었을 뿐이다.”(민혜련 지음, 장인을 생각한다 이탈리아, 138쪽; http://blog.joins.com/yang412/13353365)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처럼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정신분석가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했다는데,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함’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저자는 종로3가 일대의 공간을 ‘디자인 캐피털 시티 서울’의 아브젝트적 집적지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가게 앞 빙판에서 사람이 다치면 가게의 소유주에게 배상책임을 묻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요즘도 한겨울에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 같으면 연탄재 하나 던져두면 해결될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난지도 역시 당시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던 연탄재가 없었더라면 막대한 양의 토사를 따로 퍼다 넣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의 한 구절,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한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대목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소용되는 점이 있는 대상으로 종로3가에 모여드는 노인들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즉 죽은 자의 공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보르헤스의 <알레프; http://blog.joins.com/yang412/12879477>에 실린 단편 ‘죽지 않는 사람’을 인용하여 종묘시민공원을 ‘죽지 않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 반면,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그리고 각각의 생각)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과거에 그 행동이나 생각보다 먼저 일어났던 다른 행동이나 생각의 메아리로, 미래에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될 또 다른 행동이나 사고의 정확한 예언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알레프, 27쪽, 2012년) 저자는 종묘시민공원에 모여드는 노인들이 대부분 머지않은 죽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일상이란 것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고 있음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보르헤스를 인용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사진과 함께 들어 있는 삽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에 눈이 가게 됩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파란셔츠의 남성인데, 검은 머리때문인지 저자인지 아니면 책에 삽입된 사진을 찍어주셨다는 박성현님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분이 저자라면, 저자는 종로3가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노인들을 관찰하는 제3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을 공감했다기보다 그들을 관찰한 주관적 기록을 남긴 것이라는 느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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