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와 덕이 실현된 삶 살림지식총서 467
임헌규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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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의 이벤트 덕분에 오강남교수의 해제로 된 노자의 <도덕경; http://blog.joins.com/yang412/11957739>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도덕경>은 모두 81편으로 이뤄진 책으로, 37편까지는 주로 도(道)에 관하여 그리고 38편부터는 주로 덕(德)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책이름은 <도덕경>이 아니라 <노자>였는데, 도와 덕에 대해 쓰여진 책이라는 이유로 '도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고, 그 내용에 대한 후세 학자들의 경외가 더해져 <도덕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경>을 저술한 노자의 삶과 그의 사상을 정리한 임헌규교수님의 <노자>를 읽게 된 것은 <도덕경>의 이해를 보다 더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읽게 되었습니다.

 

공자와 달리 노자의 삶의 궤적은 분명치 않다고 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노자열전」에 나오는 기록과 1972년 중국 장사 마왕퇴한묘에서 발굴된 다량의 백서(帛書) 가운데 포함된 두 종류의 <노자> 사본을 조사한 결과,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실존 인물이며, <노자>는 그의 저서라고 보이며, 다만 전국시대에 들어 후계자들에 의하여 가필되거나 첨삭되고, 주요 개념어가 변형되어 현존하는 통행본 <노자>로 이어져왔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삶이 분명치 않은 것은 주나라가 쇠퇴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기독교의 성서와 더불어 인류에게 가장 많이 읽힌 저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노자와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중국의 사회상을 보면 한마디로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주도하던 혼란기였던 까닭에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상적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 역시 혼란기의 사회와 위정자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노자> 18장을 인용하여 이런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대도가 행해지지 않다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20쪽)” 노자는 제자백가들처럼 사회를 평온하게 만들어 백성을 인간답게 살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뉴스는 “남극에 설치한 망원경 ‘바이셉(BICEP)2’를 이용해 우주가 급팽창할 때 생긴 중력파(gravitational wave)의 패턴을 발견했다”라고 전해 우주물리학이 빅뱅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흥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3월 19일자 기사, 138억년 전 '빅뱅' 비밀 … 남극 망원경이 풀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66697). 그런데 놀랍게도 노자는 ‘도’를 설명하는 가운데 우주만물의 시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해제한 <노자> 21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황홀할 따름이다. 홀하고 황하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 황하고 홀하다! 그 가운데 무엇이 있다. 그윽하고 아득하여라, 그 가운데 알맹이가 있다. 그 알맹이는 심히 참되니 그 가운데 믿음직스러움을 갖추고 있다. 예로부터 지금가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뭇 존재의 창시를 본다. 나는 무엇으로 ant 존재의 창시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에 의해서니라.(39쪽)” 저자에 따르면 우주발생론적 차원에서 도의 작용을 상호 모순되지만, 같은 곳에서 나온 다른 이름인 무와 유의 개념을 가지고 다음처럼 규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무(無, 無名)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며, 유(有, 有名)는 만물의 모태다.(42쪽)”

 

노자의 사상에서 주목할 점은 “형상 없는 도(道)가 작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도는 천하에 존재하는 만물의 어머니이므로, 도와 만물을 같이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도를 체득하는 이념에 대하여 노자는 인위적인 유위정치를 부정하고 도에 의한 무위정치를 역설하였던 것인데, 도에 이르기 위하여 덕을 거듭 쌓다보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허정(虛靜)하게 하여 검약함을 견지하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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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리고 전쟁 : 게412
문창범 지음 / 중앙생활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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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세상사가 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연말 즈음해서 주변에서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분이 몇 분 계셔서 진료에 도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방암으로 꽤 긴 세월을 투병하신 끝에 다시 일자리로 돌아오신 보건복지부 주정미국장님께서 투병과정을 담은 <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http://blog.joins.com/yang412/13362478>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리뷰에는 암환자가 늘고 있는 현실에서 전문가들이 내놓는 책에서는 읽을 없는 내용을 담은 책들도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암과 싸워 이긴 분들의 경험담을 비롯해서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를 간병하는 분의 경험들이 암으로 진단받고서 황망한 상황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핵물리학실험을 전공하신 문창범교수님이 유방암으로 투병하시는 아내와 함께 하는 암과의 전쟁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하신 <암 그리고 전쟁>은 역시 소중한 유방암 투병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암과 투병하고 있는 분과 가장 가까운 남편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작은 제목을 ‘남편이 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쓴 320여 일간의 투병 일기’라고 뽑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암으로 투병하느라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암선고를 받던 순간의 황망한 느낌으로부터 투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까지도 담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평소에 일기를 꾸준하게 써오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내와 함께하는 암과의 전쟁 뿐 아니라 사회의 암적 요소들에 대한 강렬한 투지를 보여주고 계신 점도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께서 한시를 자주 인용하고 계신 것을 보면, 핵물리학을 전공하시는 한편 한시에도 조예가 깊은 것 같습니다. 암을 의미하는 cancer라는 영어단어는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쓰던 ‘게’를 뜻하는 그리스어 카르키노시스(karkinosi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저자는 그 의미에다가 아내가 처음 암진단을 통고받은 4월 12일을 조합하여 만든 ‘게412’라는 부제를 달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히포크라테스가 부푼 혈관들에 움켜쥐듯이 둘러싸인 종양을 보고, 모래 구멍에서 다리를 원형으로 펼치고 있는 게를 떠올렸다고 적었습니다만, 사실은 혈관들이 암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커가는 암종이 살아남기 위하여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을 새로 만들어내도록 유도한 결과로 암종 주변에 굵직한 혈관들이 많아진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만...

 

저자의 투병일지를 읽으면서 뭔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은 환자를 진료하시는 의료진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질병에 대하여, 그리고 치료방향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구나 하는 점입니다. 마침 각급 병원에서 하고 있는 유방암 진료의 질에 대한 평가를 제가 맡고 있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평가항목에 들어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의 아내가 이용한 병원은 치료는 잘하는 병원일지 모르지만 문제가 있는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결과에 대해 언급을 피하는 것은 ‘전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당사자마저도 알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99쪽)”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유방암을 치료하고 있는 전국의 병원들을 평가해보았더니 지방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병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아내는 치료를 받기 위하여 서울로 왕래하는 수고를 더 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노력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기록에는 아내의 모습과 아내와 함께 가꾸는 텃밭, 그리고 산책하는 모습들을 담은 사진자료들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단조로울 수도 있는 책읽기에 변화를 준 것도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꼼꼼하게 기록했다 싶은 대목은 아내와 혹은 아이들과 어디서 밥을 먹었다는 것까지도 적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애들이 오니 엄마인 ‘인숙’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가족의 존재가 곧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79쪽)”라는 대목에서 역시 가족의 뭉쳐진 힘은 투병하는 환자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유방암 환자를 두고 있는 가족, 특히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지 길안내 하는 좋은 책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린다면 유방암은 다른 암과는 다른 면이 있어 재발이나 전이여부를 오랫동안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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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교회 잔혹사
옥성호 지음 / 박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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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간지에서 목회자 아들의 교회세습에 관한 생각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자식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이어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개신교 목사님들 역시 아들이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목사님이 맡고 있는 중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경우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 세습도 문제가 되는 세상인데, 기업이 아닌 교회를 ‘지상의 왕국’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동아일보 3월 21일자 기사, [김갑식 기자의 뫔길]축복일까 특혜일까… 목회자 아들의 교회세습)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종교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언론에 보도되는 정도를 스치듯 읽고 마는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무슨 일일까?’싶은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옥성호작가님의 <서초교회 잔혹사>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가상의 스토리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우리나라 교회에 배태되어 있을 수 있는 현실들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버무려넣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침 작가님이 사랑의 교회 설립자인 옥한음목사님의 장남이라 하셔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저의 직장이 있는 서초구에 ‘서초교회’라는 가상의 성전을 무대로 일어난, 한 마디로 사기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한편의 황당사건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서초교회를 수만명의 신도가 모인 회상으로 키워낸 정지만목사님이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김건축목사님을 영입하여 물려준 것 까지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세습이라는 꼴불견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낼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지만 목사에 이어서 서초교회를 담임하게 된 김건축목사의 인품이 제대로 검증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은 김건축목사님을 선정한 정지만 목사님에게 귀책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만,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교회가 신도를 확대하고 수익의 창출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세기목사님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대학에 다니면서 인연을 맺은 서초교회에서 간사를 맡았다가 새로 부임한 청년부 담당목사와 갈등을 빚으면서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다음에 서초교회 청년부를 담당하게 된 것인데, 내세울 것이 없는 장세기 목사의 순수함을 주목하여 발탁해준 교역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타협하여 김건축목사님의 사기극에 빠져드는 그에게서 인간의 나약함을 봐야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의 김건축 목사가 개인의 야심을 쫓는 사기꾼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방식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떠나 현대적 감각을 입힌 신지식인인지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수익사업을 벌이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절차나 방식에서 거짓과 속임, 모략과 배신, 협박과 폭력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용서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팩트에 기반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도 수 늘리기에 급급한 일부 대형교회와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위선적 태도를 비유적으로 성토하고 금기와 성역으로 무장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도전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의 사역자들이나 신도들 가운데 공감하시는 분들도 있는 반면, 반발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께서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단 한순간이라도 도대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란다.”라고 적었습니다만, 작가가 창조한 인물 장세기 목사처럼 종교란 나약한 인간이 마음을 의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문화적 소산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교회에 다닌다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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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3-2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교회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처음처럼 2014-03-22 13:20   좋아요 0 | URL
정말 교회에 대하여 무언가 생각을 하는 책 맞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살림지식총서 472
이강룡 지음 / 살림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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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개설해서 벌써 10년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물론 블로그를 자료를 스크랩해서 참고자료로 활용하기도 하고, 관심있는 분들과 공유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 저의 생각을 정리라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네티즌들이 호응이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글쓰기를 전문으로하는 분이 아닌 대중이 종이매체에 쓴 글을 통하여 타인과 교감할 기회를 마련하기란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혹은 트위터와 같은 인터넷 매체가 활성화되면서 글쓰기을 통하여 타인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무한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는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서,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이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에 글쓰기’에서 꼭 새겨두어야 할 내용을 담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특히 디지털 매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쓴 이강룡님은 웹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강좌와 책을 써내셨습니다. 특히 디지털매체애서 글쓰기에 대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짚어주고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소통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전하는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살피고, 사용자들에게 그 특성을 감안해 특히 어떤 점들을 유의해야 하는지 짚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지털 매체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 필요한 글쓰기 원칙을 제시하고, ‘글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블로그를 개설하였을 때는 온라인이기 때문에 얼굴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활동에 이력이 붙어가다 보니, 온라인상에서 티격태격하다고 법정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등, 온라인 커뮤니티 역시 사람사는 동네더라는 것입니다. 즉 인터넷은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지켜야 할 에티켓도 있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성한 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에서 쓰는 글도 피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디지털 매체에 넘쳐나고 있는 정보들 가운데는 출처가 있음에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의도적이거나 의도치 않게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는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모아서 검증을 하고 이를 정리하게 됩니다. 저자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자료들 가운데 근거가 뚜렷하고 질도 높은 자료는 극히 일부다.(39쪽)’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를 확인하고 추려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되면 유용한 정보로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평소에 근거를 확보하여 잘 요약하는 습관을 들여 두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을 갖추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요약된 자료들을 글로 옮길 때는 예시를 든다거나 비유를 통하여 글쓰기의 기본틀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원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쓸 때 신중하게 생각하고,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쓰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자. 독자에게 설명하기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근거를 충분히 주자(50쪽)” 그리고 지켜야 할 중요한 점으로는 원칙에 위배되는 불필요한 표현을 쓰거나 새로 만들지 않아야 하고, 쓸데없는 꾸밈말을 쓰지 말아야 하고, 쓸데없이 문장부호를 남용하면 안된다고 적었습니다. 저자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얻은 사례들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매체별로 글쓰기 전략’과 ‘문서의 신뢰도 높이기’의 마지막 두 장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식과 행동이 한결같이 서로 맞음”이라고 설명되는 사자성어입니다. 저자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라는 화두에 대하여 제안하고 있는 지행합일의 길 두 가지는 ‘출처를 정확히 표기하자.’와 ‘그 일을 한결 같이 하자’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타인의 생각을 인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까지도 안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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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기 - 삶의 속도를 늦추는 독서의 기술
데이비드 미킥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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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천권의 책을 읽었다는 독서가께서 적어도 삼년에 천권의 책을 읽어내라고 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권유가 마음 어디에 남아 있었던지 지난 한 해 동안 300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9년의 세월이 걸리기는 했지만 천권의 책을 읽고, 천개의 독후감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독서량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서는 속독하는 법을 익혔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빠르게 읽기 위하여 책을 대각선으로 읽어내면서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아직 따로 속독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고, 대각선으로 책을 읽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책을 빠르게 읽는 속독법도 꾸준하게 익혀 가능한 일종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습니다. 결국 제가 책을 읽는 속도는 조금 빠른 편입니다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지면 책읽는 시간을 더 내는 수밖에는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책을 느리게 읽는 기술을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독서의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데이비드 미킥스의 <느리게 읽기>입니다. 문학을 전공하고 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는 영화에서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하는 틀에 박힌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역시 틀에 박힌 답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하지만 빠듯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낸다는 것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은 넘쳐나면서도 말입니다. 저자는 ‘얼마나 많이 읽느냐보다는 어떻게 읽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7쪽)’고 말합니다. 온 마음을 쏟아서 책을 읽고, 거기에서 즐거움과 정신적 풍요를 얻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좋은 책뿐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인터넷이나 신문기사를 통하여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신문기사, 트위터, 블로그 같은 것들은 제대로 된 읽기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 근거로 사람들이 블로그, 페이스북, 뉴스 기사 등의 온라인 텍스트를 F 패턴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밝혀 낸 연구를 들었습니다. 앞서도 대각선으로 책읽는 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자가 말하는 F패턴과 비슷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글의 첫줄 혹은 첫 몇 줄을 옆으로 쭉 읽는다(F의 맨 위쪽 가로획). 그런 다음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머지 줄들은 앞부분만 훑어보는 식으로 읽는다(F의 더 짧은 가로획). 그러다가 부제(副題)나 중요 항목이 나오면 또 가로읽기를 하는데, F 패턴에 맞추기 위해 그런 부제들은 주 제목보다 짧은 경향이 있다. 결국 글의 중간쯤 이르면 독자의 시선은 페이지의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직선으로 내려가기 시작해서 F의 수직선 부분을 쭉 따라가, 글의 대부분을 읽지 않은 채 텍스트를 ‘끝내 버린다.’ 시간에 쫓기는 독자는 훨씬 더 빨리 글의 끝을 향해 시선을 뚝 떨어뜨린다.(31쪽)”

 

읽다보니 가슴이 뜨끔해지는 대목입니다. 제가 바로 그렇거든요. 그래서 저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쓸때 아무리 길어도 A4용지 한 장 분량을 넘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포르시안에 연재하는 [양기화의 북소리]는 예외적으로 A4용지 석장 분량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소리]에서 소개하는 책을 신중하게 고르다보니 리뷰에서 빠트리면 안 될 주제가 많더라는 것과, [북소리]를 즐겨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믿을만 하다는 저의 근거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변명을 드립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구성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디지털 시대에 진지한 독자가 처할 수 있는 절박한 위험을 이야기해볼 생각이라고 합니다. 제1장 ‘무엇이 느리게 읽기를 방해하는가’에서는 인터넷이 몇몇 유익한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책을 진지하게 천천히 제대로 읽는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는 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제2장 ‘느리게 읽기에 필요한 것들’에서는 독서와 관련된 모든 측면을 급격하게 바꾸어 버린 디지털 혁명의 본모습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3장 ‘느리게 읽기의 규칙’에서는 난해한 책을 읽을 때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네 가지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을 익히게 되면 좀 더 요령 좋고 신중한 독자가 될 수 있고, 책을 펼칠 때 뭘 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합니다. 4장부터 8장까지는 단편 소설, 장편 소설, 시, 희곡, 에세이 등 문학의 다섯 가지 주요 장르별로 저자가 선별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여 앞서 제시한 독서규칙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안내하고 있습니다.

 

머리말의 끝에는 저자가 모두(冒頭)에서 내놓았던 질문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국의 문학 비평가 헤럴드 블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독서를 하면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과 운명, 행복과 비애를 훨씬 더 강렬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창조해 낸 우주는 통렬한 변주, 아름다움과 암흑, 찬탄할 만한 진기함을 추구하며, 글의 무한한 에너지를 통해 가장 귀한 선물인 놀라움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그리고 그 우주는 매 순간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13쪽)”

 

고등학교 다닐 때, 독후감쓰기를 과제로 낸 적이 있습니다. 2년 정도 하다가 입시준비 때문에 접은 뒤로는 책을 읽되 느낌을 따로 정리하지는 않았는데, 9년 전에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면서 책을 읽은 느낌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글이 인터넷 공간에 공개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타인의 시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광우병파동 때 제가 쓴 글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쓴 거친 댓글홍수를 경험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516120). 저처럼 인터넷 독자들이 때로는 거친 반응도 불사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아무래도 글쓰기가 신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오랜 시간을 힘들여 글을 쓰고 책으로 묶어 낸 작가를 생각하면 리뷰에서 날선 비판을 자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의 독자 서평은 과격한 욕보다는 미지근한 칭찬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38쪽)”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제가 쓴 리뷰를 읽고서 책을 사게 되는 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름대로 느낀 문제점을 행간에 심어두기도 합니다.

 

저 역시 몇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저자가 책에 담은 생각이 오롯하게 독자에게 전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자들마다의 생각이 달라 나름대로 해석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면 그때부터는 독자들의 몫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서는 작가와의 대화이다.(38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미킥스 교수는 독자들이 책을 통하여 저자와 교감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책에 담은 생각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독자는 작가의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좋은 책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는데 그 시각이 작가의 선입관이나 편견처럼 느껴져 신경에 거슬린다면, 작가의 의도를 깊이 파고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선은 책에 담겨 있는 견해에 공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 가슴 설레면서 읽었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http://blog.joins.com/yang412/12832807>을 년전에 다시 읽었습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를 드린 작품입니다만, 독일의 의사이자 작가인 한스 카로사가 의과대학을 입학할 무렵의 삶을 그린 작품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는데도 그때의 울림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믹키스교수는 이처럼 다시읽기를 최대한 많이 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간혹 실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책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내가 왜 그 책에 그토록 공감했는지 깨달을 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뭔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패트리샤 스팩스의 <리리딩(On Rereading)>에서 “책을 다시 읽으면 과거의 나 또는 더 많은 나와 이어질 수 있다.”라는 대목과 소설가 로버트 데이비스가 “진정 위대한 책은 청년기에 한 번, 장년기에 또 한 번, 그리고 노년기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좋은 건물을 아침 빛에, 정오에, 그리고 달빛에 보아야 하듯이 말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다시읽기의 의미를 분명하게 새기고 있습니다(67쪽). 저도 요즈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번역판으로 다시읽기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 마치 싸우듯 읽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느리게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 있다고 주문합니다. 노트북, 텔레비전, 그리고 가능하면 전화까지 꺼두라는 것입니다. 녹초가 되어 집중력이 떨어지는 늦은 밤은 피하는 것이 좋고, 눈 내리는 날이나 비행기 여행과 같이 짬짬이 어렵게 훔친 시간이 가장 달콤하다고 합니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 가운데 역사책을 읽는 분을 기억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미즈키 아키코 지음,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중앙북스 펴냄; http://blog.joins.com/yang412/13219457) 비행기에 탑승하면 오롯하게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옛날에는 주로 영화보기로 시간을 보냈지만, 본격적으로 책읽기를 시작한 이후로는 주로 인문교양서를 중심으로 한번 여행에 서너권 정도를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각자 선호하는 장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책읽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 커피숍, 공원벤치와 같은 곳이 역시 좋겠지만, 버스나 지하철도 책읽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물론 책읽기에 몰입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익숙해지면 책을 꺼내들자마자 바로 책속에 풍덩 빠질 수 있습니다.

 

저자가 나름의 경험을 통하여 정리한 인내심을 가져라, 이정표를 찾아라, 작가의 기본 사상을 발견하라 등 ‘열네 가지의 느리게 읽기의 규칙’들은 독자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작품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인내심을 가져라’를 첫 번째 규칙으로 내세운 것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책을 읽는데 인내심이 필요한 이유도 다양할 것 같습니다. 우선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처럼 방대한 분량에 우선 압도되는 경우나 카프카처럼 난해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가 될 것입니다. 제 경우는 책을 들었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던져둔 유일한 책이 카프카의 <변신>이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도전해보려고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난해한 부분을 만나면 주눅 들지 말고, 좀 더 고민할 것인가 그냥 넘어갈 것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권합니다.

 

의학서적을 읽다보면 앞에 총론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고, 개별 분야를 다룬 각론이 이어지는 것처럼, 이 책에서도 총론부분에서는 책을 느리게 읽어야 하는 이유와 느리게 읽기의 규칙을 설명하고, 이어서 사례를 들어서 그 규칙을 활용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각론 부분이 이어집니다. 제가 특히 어려워하는 시와 단편소설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방법을 체득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말씀을 끝으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총론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각론 역시 읽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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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4-03-21 12:2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드림님...
알라딘에서도 활동하시네요...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