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알 때까지 걸어가라 - 최갑수 여행에세이 1998~2012
최갑수 지음 / 상상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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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개정판으로 증보하여 내놓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http://blog.joins.com/yang412/13161643>에서 처음 만났으니, 저자와의 두 번째 만남입니다. 그때도 방금 마친 여행을 통해서 얻은 느낌을 써 내려갔다기보다는 오래된 사진 앨범을 들춰보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사랑을 알 때까지 걸어가라> 역시 그런 느낌이 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내 사랑, 당신 사랑>에서는 글보다 사진에 눈길이 더 끌렸다고... 그만큼 사진에서 무언가 사연이 읽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만, <사랑을 알 때까지 걸어가라>에서는 사진이 주는 느낌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토에세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 탓인지 양면을 통하여 실은 한 컷의 사진 귀퉁이에 숨겨놓은 듯 적힌 짧은 글이 사진이 주는 느낌과 서로 통하지 않는 듯한 느낌도 남습니다. “저자가 1998년부터 2012년까지 32개 나라 120여 개 도시를 여행하며 남긴 찰나의 기록이자 영혼의 기록이다.”라고 한 출판사의 책소개글을 보면 역시 그동안의 여행사진첩에서 고른 사진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편적인 느낌을 적어 내려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 뚜렷한 목적이나 계산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길 위에 머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재생시킨다.”라는 구절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저 의미가 애매한 단어들을 통하여 일상에 지쳐있을 독자들에게 낯선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려는 것은 아닌지....

 

“길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가늠한다. 그래서 여행은 당신을 여행을 떠나기 전의 당신과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008)”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기 위한 여행을 굳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이국적 풍광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국내에서도 좋은 장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일을 빈둥거리는 일은 꼭 말레이시아 랑카위 해안까지 가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는 글(#022)에 “당신은 나의 도피 / 때로는 절해고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시니피앙”라고 적은 것처럼 저자는 그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없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현지에 도착해서야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성격 탓일까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일단 결정을 하고 저질러버려라.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고 나면 모든 것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다음 할 수 있는 건 성공을 기원하는 자신만의 주문을 외우는 일(#36)”이라고 적은 저자의 권유대로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행은 떠나기에 앞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고 일정을 짜고, 현지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을 고려한 여유 시간을 두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전체 여행일정이 망가지는 불상사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죠,. 여행 첫날 먹은 음식 때문에 생긴 복통과 설사로 밤새 위아래로 쏟은 끝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봐야 여행지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챙기게 되는 것이지요.

 

제 경우는 서로 모르는 사람을 클로즈업해서 사진을 찍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저자가 정리하고 있는 좋은 여행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일 것 같습니다. “좋은 여행은 현지인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다른 여행자들과 자연을 배려하는 일.(#062)” 그리고 이런 글은 읽어내는데 인내심이 필요했다는 점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딱히...... 어디 갈 데가 있어 가는 게 아니야...... 그냥 여기를 못 견디겠어...... 산다는게 어쩌면...... 시간 때우기인지도 몰라...... 그러니, 이왕 태어났으니 저긴 한번 가봐야지, 저건 한번 타봐야지, 저건 한번 먹어봐야지...... 뭐,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가는거야...... 거창한 이유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어......(#107)” 그리고 블로그를 찾는 이가 던지는 질문에 시원한 답을 줄 수 없다면 아예 댓글을 금지하거나 아예 블로그를 닫아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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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문명을 따라서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18
정혜주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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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는 세계 많은 지역에서 식량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오랫동안 쌀을 주식으로 해온 우리나라에서는 식량보다는 가축사료로서 혹은 산업원료로 많이 이용하고 있는데,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바이오연료로서 대체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여름을 지나면서 간식으로 만나게 됩니다만, 옥수수에 대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때 미국의 원조물품으로 들여온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급식으로 받았던 것하고, 의대시절 강원도 지역으로 하계진료봉사를 나가면 옥수수를 한보따리 싸주셔서 쪄 먹었던 것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옥수수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기억들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도 제가 살던 미네소타 주 남쪽에 있는 아이오와주가 옥수수재배로 유명해서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을 가로지르던 추억도 있기는 합니다.

 

별 생각없이 먹던 옥수수의 기원을 정리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정혜주교수님의 <옥수수 문명을 따라서>입니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중남미지역원의 연구성과물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옥수수의 형태와 이름, 종류와 진화에서부터 옥수수를 재배하던 문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이 지역에서의 옥수수 문화 그리고 옥수수로 만드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옥수수에 관한 알파에서부터 오메가까지를 샅샅이 살피고 있습니다. 핵심은 옥수수는 마야문명의 고장인 메소아메리카가 원산지로, 마야문명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옥수수의 원산지는 멕시코이고, 기원은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옥수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이 사용하던 나우아뜰에는 옥수수와 관련된 다양한 언어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흔하게 사용되는 말로는 다 익은 싱싱한 옥수수를 지칭하는 엘로떼(elote)와 다 익어 건조시킨 옥수수를 말하는 마조르까(mazorca)가 있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 옥수수는 문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옥수수는 끄리오요(criollo) 종이지만, 대략 40여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합니다. 원주민들이 옥수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떼오신떼(teocinte)가 현생 옥수수와 가장 가까운 기원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야생 옥수수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재배된 옥수수의 흔적은 6250년 전, 아마도 8700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메소아메리카의 농부들은 재배하던 옥수수 가운데 우수한 품종을 선택하여 개량하기를 꾸준해서 3500~3100년 전에는 다양한 품종을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이 품종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옥수수의 재배에는 비가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인지 높은 산의 꼭대기, 구름 가운데나 샘의 깊은 곳, 물이 솟는 곳에 사는 비를 관장하는 신, 뜰랄록(tlaloc)이 중요한 경배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비의 실을 부르는 의례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하는데, 옥수수의 풍요를 기리기 위함인지 옥수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마야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 가운데 천지의 창조를 새긴 이사빠의 비석에는 여러 신들이 모여 태고의 바다로부터 땅을 만들고, 사람과 동물들을 만들기 위해 의논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맨 아래쪽에는 물이 있고 물 위로는 네모진 땅이 있으며, 땅에서는 나무가 솟아올라 하늘을 받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있는 창조신들은 밭을 만들고 산을 세웠는데, 세계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물과 관계되는 사물이, 오른쪽에는 땅과 관계되는 피조물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뽀뽈부(popol vuh)라고 알려진 마야 문명의 신화입니다. 당연히 세계의 중심 나무는 옥수수인 것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옥수수는 주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옥수수를 어떻게 구하는지, 옥수수의 색깔은 어떻게 나왔는지, 자신들을 보살피는 신들과 옥수수가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재미나는 모험을 곁들여 듣는 사람을 흥미롭게 한다고 합니다. <옥수수 문명을 따라서>를 통하여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옥수수에 관한 메소아메리카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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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의 힘 - 아이의 학력, 인성, 재능을 키워주는
박찬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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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의 독일방문을 계기로 히든 챔피언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듣게 되었습니다(일간투데이 2014년 3월 28일자 기사. “외환은행, 강소기업 지원 ‘韓.-獨 히든 챔피언 컨퍼런스’ 개최”). 히든 챔피언이란 세계시장에서 높은 지배력을 가진 중소·중견기업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들 기업의 이야기를 담은 헤르만 지몬이 쓴 <히든 챔피언>이 2008년에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던 모양입니다. 발간 당시에는 일부 비즈니스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의 주목은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조명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강소기업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기업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자신의 회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켜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계실 것 입니다. 하지만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대기업은 자금동원이 비교적 쉽고, 상호 연관이 있는 사업부문을 연결하여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될 것 같고, 중소기업은 몸집이 작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빠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작고 강한 기업이 이처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처럼 작은 학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교육제도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모습이 떠오르고, [북소리]의 독자들 가운데 관심을 가질 분도 계실 것 같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미래, 작은 학교가 답이다”라는 카피를 단 <작은 학교의 힘>은 15년 동안 초등학교에 몸담고 계신 박찬영 선생님께서 쓰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심정을 담아서 ‘내 아이를 위한 좋은 학교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정리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형들에게 조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찬영 선생님은 충남 논산군에 있는 도산초등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으셨다고 하는데, 당시 이 학교는 전교생이 37명에 불과한 논산에서도 제일 작은 학교였다고 합니다. 부임 직후에 이 학교의 학생 4명이 창작 로켓 만들기 충청남도 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아 온 것을 보고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럴 수 있겠거니 했던 선생님은 이 작은 학교의 학생들이 과학이면 과학, 글짓기면 글짓기, 미술이면 미술, 운동이면 운동,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일구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작은 학교에 감추어진 힘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아이들 교육에 열정을 가진 선생님들의 뛰어난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도산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강한 자존감’이라는 특별한 힘이 더해져 있더라는 사실을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1960년에 입학한 초등학교는 지방 작은 도시에서도 한참 떨어진 들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앞으로 지나는 2차선 국도는 그때만 해도 포장되지 않아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르곤 했습니다. 학교 뒤편에 있는 운동장 끝으로는 멀리 야트막한 산자락이 보이는 널따란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학년에 두 학급이었는데, 학급의 학생 수는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습니다만 30명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간 지방도시에 있는 학교에서는 60명이 넘는 친구들과 같이 공부했던 것과 분명 비교되는 여유가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때는 분명 이런 분위기가 있었어’하는 추억이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학부모들은 흔히 대도시의 중심에 있는 큰 학교가 좋은 학교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가졌던 학부모였습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자녀들을 변두리의 작은 학교에 입학시키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큰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특성을 파악하고,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교육을 펼치기에 너무나 많은 숫자의 학생을 맡고 있는 것이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아주 뛰어나게 잘하거나 혹은 심각한 문제를 가진 학생들은 선생님의 눈에 띄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학급 전체의 분위기에 그냥 묻혀서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선생님은 외국의 유명한 외과의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느 선생님께서 “너는 손이 크고 힘이 세니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겠구나”라고 해주신 말씀이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저 같이 초등학교 때 가졌던 꿈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이처럼 초등학교 시절은 학생이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발전시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자신의 소질이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학생 개인에게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책을 통하여, ‘큰 학교가 좋은 학교’라는 학부모들의 인식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고, 왜 큰 학교 교육보다 작은 학교 교육이 아이들의 인성이나 학업 성취도, 자존감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선생님은 우선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학교의 속사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교 선생님으로서 감추고 싶었을 내용까지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친구들이 두려워 유령친구를 만들어내는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매튜 딕스의 판타지 소설 <이매지너리 프렌드; http://blog.joins.com/yang412/13322931>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맥스가 만들어낸 실재하지 않는 상상친구와는 달리, ‘유령친구’는 카카오스토리를 하는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로써 실재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즉, “카카오스토리 ID를 서로 공개하고 친구를 맺지만 댓글을 다는 등 친분을 쌓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친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저도 하고 있는 카카오스토리에서는 친구가 적으면 공연히 쪽팔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SNS상에 친구가 없어 보이는 게 싫은 청소년들이 이런 방식으로 친구 맺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별로 없는 아이’로 낙인찍히면 왕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부모들은 큰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이 더 열성적이고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을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저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큰 학교의 신입교사는 허드렛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일손이 부족한 작은 학교에서는 부임 첫 해부터 중요한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학교의 교사들은 선배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사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승진에 필요한 성과를 내기도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을 가진 선생님들은 도시의 큰 학교보다는 시골의 작은 학교를 선호하기 마련이고, 승진에 관심도 없고 자기계발을 위하여 노력할 생각도 없는 분들은 이들에게 밀려서 도시에 있는 큰 학교에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학교일수록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바로 잡기 위한 선생님의 노력이 거꾸로 학부모의 몰이해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 서로 의견을 나누는 기회가 많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상황일 것입니다.

 

최근 뉴스는 여선생님이 남학생들과 바람을 피운다고 음해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미국의 고교생에 대하여 학교가 정학처분을 내렸다고 합니다(연합뉴스 3월 20일자 기사, “‘女선생이 제자와 바람 펴’ 트윗도 美선 표현의 자유”). 이처럼 학생들이 교사를 음해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사례는 비단 미국의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교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미국의 사례에서는 시민단체가 나서서, 정학 처분은 미국 헌법에서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라며 징계 취소하고 학생부에서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교사 개인의 존엄보다 학생의 표현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인식은 크게 잘못 된 것 아닐까요?

 

작은 학교가 가지는 힘에서는 교사와 학부모 간의 소통도 크게 한 몫을 한다고 합니다. 작은 학교의 경우 교사와 학부모가 한 동네에 사는 경우가 많아서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절대적인 신뢰관계를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 간의 왕따 문제도 작은 학교에서는 일어나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놀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친구와 코피를 흘리며 싸우더라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깨동무하고 집에 가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면서 아이싸움에 어른들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이들 싸움이 어른싸움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좋습니다만, 우리 아이가 귀한 만큼 다른 집 아이도 귀하다는 인식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학교들 가운데는 폐교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특별한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자가 처음 교편을 잡았다는 도산초등학교의 경우도 2009년 부임하신 교장선생님께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방과 후 수업으로 골프, 승마, 발레, 바이올린 같은 특별교육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육청에 건의하여 학구 제한을 풀었는데, 그 결과 인근 지역에서 전학 오는 학생들이 늘어서 2009년에 37명이던 학생 수가 불과 4년 만에 107명으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남한산성 안에 있는 공립학교 남한산초등학교 역시 강남에서 전학 오는 학생들이 늘고 있을 정도로 특화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입식교육을 배제하고 그룹별 토론과 발표로 80분간 수업을 하는 방식인데,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서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교사와 학부모들이 각종 모임과 회의, 공개 수업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연구하고 의논하여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결국 학부모와 학생들이 모두 참여해서 만들어지고 있어 학부모들 또한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는 효과를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업생들의 학습성취도를 추적하여 확인해본 결과 80% 이상이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즉 남한산초등학교의 실험적 교육방식이 입시 위주의 교육 체계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에 있는 금반초등학교 역시 폐교 위기를 지역적 특성을 살려 극복한 사례라고 합니다. 최근 아토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아토피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입니다. 교육시설을 낙엽송 나무 자재로 리모델링하고, 편백나무 목욕실, 전통음식 위주의 식단 구성, 텃밭 가꾸기, 점심 식사후 트래킹, 아토피 전문 의료진과의 협약을 통하여 운영되는 다양한 건강관리 프로그램으로 아토피로 고생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질병의 고통도 해소하고 더불어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직접 느끼면서 성장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거두게 되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기도 양평의 조현초등학교의 경우는 삶을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어 학생들의 사회성과 감수성 그리고 창의성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학생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체험학습을 통하여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맞벌이 부부와 결손 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야간 보육 프로그램을 특성화 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어 아이들이 부모들의 관심 밖에서 방치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어 학부모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학교 교육이 바람직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학부모, 교사, 그리고 교육행정가들이 같이 고민해야 할 점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사와 학부모가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맡기는 교육에서 참여하는 교육으로 학부모의 인식이 전환되어야 하며, 학구제의 제한을 풀어야 하는 행정적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그동안 이루어져온 작은 학교에서의 교육방식을 원용하여 큰 학교에도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고 계신 독자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어 소개드렸습니다. 교육은 우리 시대의 커다란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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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469
박문현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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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계획한 동양철학 개념 정리의 마지막 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꼭 필요한 사상일 것 같기도 합니다. <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쓰신 박문현교수님이 들어가는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묵자』「겸애중」편의 글 가운데 마지막 구절을 인용합니다. “세상의 재앙과 찬탈과 억울함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겸애(兼愛)를 찬미한다.(3쪽)” 그리고 보면 춘추전국시대에 백가쟁명이라고 했다던가요? 정말 대단하신 분들의 대단하신 사상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을 보면 영재들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영향을 미쳐 상승작용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묵자는 기원전 450년부터 390년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묵자는 공자와 맹자 사이에 활약한 사상가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묵자는 공자의 사상을 공부했지만 점차 유가의 학설에 동의할 수 없게 된 다음 스스로의 학설을 세워 체계화하여 묵가를 창시하게 되었는데, 그의 문도들은 대부분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묵자의 사상은 사회정치사상, 철학사상, 도덕관념 뿐만 아니라 과학이론과 기술방법 등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는 것입니다. 묵자를 사상가이자, 논리학자이면서도 군사전문가였다고 정의하는 것을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 묵가는 유가와 함께 중국을 이끄는 2대 학파로 활동하였지만, 200여년 간의 번영기를 거쳐서 중국의 사상사에서 자취를 감추는 미스터리한 행적을 보였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는 최근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야기되는 빈부격차와 민족갈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묵자의 겸애사상을 중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 묵가가 유가의 이념을 비판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를 망칠만한 4가지 정책으로는 첫째, 하늘과 귀신의 존재와 작용을 믿지 않는 것. 둘째, 장례를 후하게 하고, 상기(喪期)를 오래 하는 것. 셋째,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넷째,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 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가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이런 것들이 정도의 문제이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전혀 불필요한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묵자는 하늘을 공경하고 따르는 곳에 최고의 도덕이 있다고 하였고,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늘의 뜻(天志)에 따라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겸애는 천지에 바탕을 두면서도 인간의 사회적 요청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국가와 백성의 뜻에도 맞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묵자의 겸애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사랑으로 이(利)를 포함한다고 하였습니다. 겸애의 실천이 어렵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회지도층부터 솔선한다면 겸애를 실천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 없다고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묵자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일은 의롭지 못하고 이익이 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구는 국민개병제를 채택하여 노소의 남자와 20세 안팎의 여자들을 병역에 복무하게 하였는데, 여자들도 병역을 부담하게 한 것은 평등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제시한 상현론(尙賢論)은 현인에 의한 정치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고 있는데, 이는 현대의 조직관리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묵자의 경제사상 가운데 생산, 교역, 분배, 소비의 네 가지 분야가 고루 다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소비에 있어서 절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끊이지 않은 전쟁으로 어려운 경제상황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지도층의 사치와 낭비가 극에 이르러 사회의 조화가 무너질 지경임을 고려하여 나온 것이지, 인간의 욕구를 근본적으로 눌러야 한다는의미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생산을 증가시켜 부유하게 하는 것과 인구를 늘리는 것, 혼란스러움을 다스려 안정되게 하는 것, 세 가지는 국가와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삼리(三利)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가경영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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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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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문학은 무엇인가>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정명환교수께서 작품해설을 통하여, 이 책은 “이른바 문학의 사명이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참여>에 있다는 것을 원론적으로 주장하고, 그 이후로 사르트르라는 이름은 <참여문학A>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417쪽)”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독자의 리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철학을 내세운 사르트르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작가들 가운데 자신의 소신을 밝힌 분은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는 서문을 통하여 “비평가들이 문학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전혀 밝히지도 않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단죄한 이상, 그들에 대한 최상의 대답은 글쓰기의 예술을 편견 없이 검토해 보는 것(10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스스로에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적어간 본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르트르 시대의 불란서 문학계의 분위기를 정리하고 있는 자신이 글쓰기를 통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독자에게 강변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회화나 조각 그리고 음악과 같은 예술분야와는 달리 문학은 읽는 이의 감정을 이끌어 인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작가는 오막살이 한 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거기에서 사회적 부정의 상징을 보게 하고 독자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는 말이 없다. 화가는 다만 <하나의> 오막살이를 보여줄 따름이다.(15쪽)” 이점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써 생각을 전하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지만 글이라는 매체는 이런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르트르의 답변은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企圖)이다. 작가는 죽기에 앞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먼 훗날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판정이 내린다 해도 미리부터 과오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48쪽)” 이 점에 대해서는 글쓰기 전에 편향된 사고를 배제하고 자신의 판단이 타당한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예술을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술은 도피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정복의 수단인 것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술적 창조의 주된 동기의 하나는 분명히 세계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59쪽)”이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하여 창작에 나선 것이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려고 글을 쓰는 것인데,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독특한 독자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일 수도 있습니다. 읽기를 창조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기를 통하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창조해내는 적극적 행위로서의 읽기를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독자의 창조적 행위를 인정한다면 읽기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맺어진 고매성의 협약’이라는 전제를 둔 것은 지나치게 작가의 입장에 붙들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한다.(80쪽)”라는 작가의 생각은 읽는 이가 작가의 생각에 따라주기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읽는 이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서 작가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역시 각주를 통하여 창조의 의의와 읽기의 과정을 논하는데 있어 자유의 문제를 넘어 현실적 세계의 변혁과 결부된 자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작가의 생각이 꼬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결국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하는 문제는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고 정리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전 시대의 작가들과 독자들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당시 프랑스 문학계가 프롤레타리아 역시 독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 독자층인 부르주아지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19세기를 과오와 실추의 시대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시도한 분석이 매우 편파적이며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장치를 마련해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현실정치 참여가 어쩔 수밖에 없다는 점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여 1947년의 프랑스 작가들의 상황을 분석하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독자도 지적했습니다만, 옮긴이의 작품해설은 이 책을 읽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옮긴이는 사르트르의 현실정치 참여는 부르주아지의 억압적 체제를 거부해야 하는 동시에 스탈린의 노선에 맹종하는 공산당의 교조주의를 규탄하는 양비론적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사르트르가 문학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취한 담론적 전술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가 과연 그것에 충실했는지를 다른 텍스트와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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