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답게 나이 드는 법 - 불멸의 고전 오디세이아에서 찾은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3
존 C.로빈슨 지음, 김정민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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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에 관심이 많다보니, 눈을 끌게 된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도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먹을 필요가 있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습니다. 임상심리학을 전공한 저자 존 로빈슨은 특히 중년 남성의 심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남성 심리 전문가라고 합니다. ‘나이 들어가는 남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있다고 하니, 나이 들어가는 남성의 입장에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으면서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난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그저 ‘흥미롭다’ 혹은 ‘신들은 너무해’ 정도로 밖에 읽어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존 로빈슨은 <오디세이아>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오디세이아>에서는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해석해보면 우리 시대 평범한 중년 남자들의 인생 이야기에 대응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하여 우리 시대의 중년 남자들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점들로 요약하여 <남자답게 나이 드는 법>에 담았습니다. 놀랍고 창조적인 책읽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소장님이 추천의 글에 적은 한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영웅적이고 성공적인 젊은 날의 시간만큼이나 늙어 가는 시간도 길다는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겪는 수많은 사건들만큼이나 늙어 가는 것도 그리 만만치 않음을 그는 강조한다.(7쪽)”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신화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거나 삶의 경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만, 심리학자들은 신화가 인간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담신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오디세이아>에 담긴 상징을 풀기 위해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트로이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갈 무렵 오디세우스의 나이는 45세에서 50세 사이 정도로 추정하였습니다. 젊음이 분출하는 시기를 지나 삶의 영광스러운 시기를 막 지나 이제는 나이 듦의 의미를 새겨보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트로이전쟁이 시작되고 마무리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일리아스>를 21세기로 옮겨보면, ‘직장이나 학교에서, 일상의 삶에서 누구나 매일매일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남자들은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과도한 경쟁을 하면서 끝도 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왕성하게 분비되는 남성호르몬의 영향인데, 중년에 접어들면서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면 경쟁이 피곤해지면서 안전하고 쾌적한 안식처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의 뒷이야기를 아십니까? 영웅 아킬레우스는 전쟁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전쟁의 단초가 되었던 아내 헬레네를 되찾아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귀국하자마자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디오메데스 역시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 사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부정한 아내를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10년에 걸친 오랜 고난 끝에 수많은 구혼자들의 유혹을 뿌리치며 일편단심 기다려준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다양한 군상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 역시 키르케와 칼립소라는 아름다운 여성과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유혹을 받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을 접지 못하는 것은 그의 예정된 운명을 강조하기 보다는 보편타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호메로스의 의도를 담은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오디세우스가 마법사 키르케를 만나는 과정을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일깨우는 과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남성적 반응을 조절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사실 젊음의 정점을 지나면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면서 여성 호르몬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아져 숨겨져 있던 영향이 드러나게 되는 생리적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남자답게 나이 드는 법은 결국은 여성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정리되는 셈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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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정리가 힘이다 - 불편한 관계를 비우고 행복한 관계를 채우는 하루 15분 관계 정리법
윤선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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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친구를 널리 사귀기보다는 깊이 사귀는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인지 친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딱히 관계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도모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생소한 정리컨설팅 전문가 윤선현대표의 <관계 정리가 힘이다>를 받아들고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가운데 읽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정리하다’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는 복잡하고 어지럽게 엮인 것들을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버릴 것은 버리며, 눈에 띄지 않던 쓸모있는 것들을 제자리에 둔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정리’란, “비우고, 나누고 채우는 것을 통해 행복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술(10쪽)”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몇 차례 긴밀한 관계를 정리한 경험이 있어, 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도 이유가 뚜렷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관계들이 꼭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면 세상이 즐겁고 행복한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1.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2. 당신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가?, 3. 당신에게 잘 어울리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인간관계 방법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우선 1부 ‘관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에서는 관계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을 깨우쳐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오래된 친구는 반드시 좋은 친구다. 고교시절 친구만이 진짜 친구다. 자주 연락을 할수록 친하다. 인맥은 많을수록 좋다. 친구를 정리하다니 말도 안돼.’라는 통설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2부 ‘관계의 현재를 점검하는 시간’에서는 나도 상대도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규칙을 가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3부 ‘낡은 관계를 비우고 설레는 관계를 채운다’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는 ‘관계를 버리는 것’이 정리가 아니라 새로운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역시 관계를 정리하는 일에 속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당연히 힘들게 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디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며, 설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선은 공통점을 찾아보고, ‘준비된 만남’이라는 욕심을 버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도 좋은 인연을 찾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꾸준하게 좋은 관계를 찾아보는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4부 ‘관계를 위한 하루 15분’은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관계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주소록을 살펴서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들, 예를 들면 약속을 미루지 않는다거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소소한 선물을 준다거나 감동을 주는 이벤트는 관계를 강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부록에 있는 관계 매뉴얼과 관계 선언문, 그리고 관계 정리 100일 프로젝트는 실전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엷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인데, 잘하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통하여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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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위대한 생각 시리즈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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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 공부하는 과정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의 일러두기를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산문 가운데 그의 예술론이 잘 나타나 있는 것들을 옮긴이가 골라 번역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여덟 편의 산문 가운데 두 편은 러스킨의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 서문으로 적은 것이고, 나머지 여섯 편은 샤르댕, 렘브란트, 와토, 귀스타브 모로, 모네, 로세티 등 당대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프루스트의 관점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러스킨이나 화가들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어 이들에 대한 프루스트의 생각을 알게 되면 책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실은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러스킨에 관한 산문에 중점을 두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러스킨에 대한 두 편의 산문은 역자의 서문치고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든 <참깨와 백합>의 서문으로 쓴 ‘독서에 관하여’에서 프루스트의 책읽기의 유래로부터 책읽기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3년에 천권의 책을 읽다보면 손에 잡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일찍부터 다양한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프루스트가 어렸을 적에 얼마나 책읽기에 빠져있었는가를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방에서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공원에 가야만 했다. (…) 아직 다시는 손대면 안된다고 명령받은 내 책과 함께 풀밭 위에 놓였다.(20쪽)” 프루스트는 병약했다고 했습니다. 병약한 아이가 책에 빠져 지내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한 어른들이 일부러 책읽기를 금하였던 모양입니다. 책읽기도 어렸을 적부터 이 정도는 해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겠지요?

 

또한 프루스트의 독서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러스킨은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주장한다.(29쪽)” 하지만 프루스트는 “독서는 대화와는 다르게 혼자인 상태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지적인 자극을 계속해서 즐기고 영혼이 활발히 활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의 지혜가 끝날 때 우리의 지혜가 시작됨을 느끼고, 작가가 우리에게 해답을 주기를 원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에게 욕구를 불어넣는 것이다.(33쪽)”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산문 ‘러스킨에 의한 아미앵의 노트르담’은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를 번역하면서 쓴 역자 서문입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독자에게, 러스킨을 기리는 여행의 순례자처럼 아미앵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자 한다.(61쪽)’라고 시작한 프루스트는 “그는 역에 당신을 마중나올 것이다. (…) 그는 당신에게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할 뿐 아니라, 당신의 시간적 여유에 따라 이 길이 더 좋은지, 저 길이 더 좋은지도 말해준다.(65쪽)”라고 사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의 독특한 서사구조가 떠오릅니다. 즉 보통이 찾아 나선 여행지를 과거에 그곳과 연관이 있는 안내자가 나서서 함께 여행을 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아미앵의 성서>가 그런가 봅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하여 설명하듯이 아미앵에 있는 성당에 이르는 길부터 밖에서 본 모습 그리고 성당의 내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안내자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역을 하신 유예진교수님은 여기에 더하여 산문에 나오는 건축물이나 그림의 도판을 말미에 더하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무려 85쪽에 달하는 역자해설을 더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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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체성 : 10가지 코드로 미국을 말한다 살림지식총서 2
김형인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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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작한 미국의 속살을 뒤집어 보는 공부입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을 조금 더 새겨보면 지기(知己)한 연후에 지피(知彼)함이 옳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정체성을 따지기 전에 나의 정체성은 제대로 파악하고는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든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미국과 미국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참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외국어대학교 사학과의 김형인교수님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열 가지의 코드를 가지고 ‘미국의 정체성’ 따지기에 나섰습니다.

 

저자는 미국 문화의 핵심에 내재한 열 개의 코드를 추렸습니다. 개인주의, 자유의 예찬, 평등주의, 법치주의, 다문화주의, 퓨리턴 정신, 개척정신, 실용주의, 과학기술의 신뢰, 미래지향주의 등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왜 ‘개인주의’를 열 가지 코드 가운데 가장 먼저 이야기하게 되었을까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주의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식 개인주의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주의’하면 나만 생각하고 단체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얌체족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개인주의는 나의 주장도 물론 내세우지만 타인의 의견과 권리 역시 존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국의 개인주의를 논하면서 그 제목을 ‘다수의 횡포에 대한 견제’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개인주의 정신은 미국이 독립할 당시 13개주는 ‘연합헌장’이라고 하는 기본규약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묶여 있었는데, 중앙정부는 지휘력과 결속력이 없었고 각 주에 많은 권력을 위임하고 있다가 연방헌법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에서 연방파과 반연방파의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대 워싱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하던 해밀턴이 주도한 연방파는 경제, 군사, 외교 등의 분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연방정부에 집중시키는 강력한 정부를 꿈꾸었다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이 이익에 반하는 상황에서는 연방에 협조하지 않는 바람에 많은 고초를 겪었던 경험을 반영한 탓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방파의 움직임에 대하여 당시 가장 세력이 막강하던 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제퍼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정부는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대치하여, 종국에는 종교의 자유를 비롯하여 행복추구권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기본권을 명시한 10개조의 수정조항을 반영하는 조건으로 연방헌법의 비준에 동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저자가 논하는 미국의 정체성 코드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성립되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멜팅포트를 넘어 샐러드 보울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다문화주의’가 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뿌리 깊은 지역갈등이 영호남을 넘어 세분화되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이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 정착하고 있는 외국인들 역시 어느 시점이 되면 목소리를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분단국가가 통일을 이룬 다음에 드러나고 있다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미리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민국가라는 대명사처럼 미국은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유입된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종적 갈등을 일찍 경험하게 되었고, 당연히 해결방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세기 말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대안으로 환경주의적 논의가 제안되었다고 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대인 루이스 브랜다이스를 처음으로 대법관에 임명하고 여성각료를 임명하면서 다문화주의적 정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꼭 맞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와 비교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96O년대에 이르러서는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펼치면서 오히려 다수가 역차별을 받는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책읽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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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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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를 보면서 안전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짚어보려는 생각에서 송해룡, 김원제 교수님의 <한국사회 위험특성과 한국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 http://blog.joins.com/yang412/13425236>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사고의 원인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만, 화물과 차량들을 제대로 묶지 않은데다가 갑작스럽게 배의 진로를 바꾸는 바람에 화물들이 쏠리면서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우리사회의 문화어로 자리 잡은 ‘빨리빨리’가 불러온 인재(人災)였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뒷짐을 지고, 한껏 어깨를 뒤로 젖힌 채 느릿느릿 팔자걸음을 걸어야 체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숨넘어가듯 바쁘게 돌아가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일입니다. 해방에 이은 6.25동란을 계기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외래문물을 보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 이유라면 이유가 될까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온 서구의 발전과정을 압축해서 따라잡으려다 보니 그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빠르면서도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빠르다보면 뭔가 빠지는 것도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빠진 것이 있더라도 별 사고 없이 지나가는 일이 쌓이다 보니 결국은 대형 사고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작용 때문인지 숨넘어갈 듯 빠르게 움직이던 세계적 분위기에 딴죽을 거는 듯 ‘슬로우 시티 운동’이 힘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차와 과정에 대한 의논이 오가던 중에 모 보건의료신문에 제가 속한 심평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개하는 칼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인 보도자료나 안내에 머물던 것을 고객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답변도 드리는 쌍방향 소통 채널로 활용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획의도를 설명하는 글에서 대학시절 읽었던 독일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의 내용을 조금 인용하였는데 놀랍게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보다 조금 뒤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인기와 교훈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북소리]를 통하여 소개해보려 합니다. 빨리 움직이는 사회의 끔찍한 모습을 1973년에 예견하고 슬로우 시티 운동을 제안한 미하엘 엔데의 혜안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 1929.11.12. ~ 1995.08.28.)은 남부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에드가 엔데와 역시 화가인 루이제 바르톨로메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엔데는 부모의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아 글, 그림, 연극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재능을 떨쳤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극배우, 연극평론가, 연극기획자로 활동하다가 1960년에 발표한 <기관차 대여행>으로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모모(1970)>와 <끝없는 이야기(1979)>은 판타지적 요소를 가진 동화이면서도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끝 없는 이야기)와 소비중심의 문명(모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는, 그가 죽은 다음에 단순한 동화작가에 머물지 않고 ‘동화라는 수단을 통해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철학가’로 재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 철학자인 데이비드 로이와 린다 굿휴는 <모모, 도건, 시간의 일반화(2002)>라는 책에서, “이 책은 1973년에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간도둑의) 악몽이 현실이 되고 있다”라며 <모모>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소설 중의 하나로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1973년 발표된 <모모>는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차경아님의 번역으로 1977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청람문화사에서 나온 이 번역본에는 미하엘 엔데의 <한국 어린이에게 부치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76에는 1975년에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모모입니다. <모모>의 주인공은 여자아이인데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은 열세살 남자아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1978년 광주 전일방송의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김만준의 <모모>가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어 <모모는 철부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는 등, 모모의 열풍이 이어졌습니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 짓 하면 /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단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 우우우~”라는 가사말의 <모모>가 유행할 때는 몰랐는데, 이 노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의 영향도 조금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뒤늦게 밝혀진 것입니다만,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가 사용한 여러 필명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 결국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이미 수상한 바 있었던 로맹 가리는 한 사람에게 두 번 주어지지 않은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작가가 된 셈입니다.

 

본격적으로 <모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몇 천 년 전에 화려했던 커다란 옛 도시의 터에 자리 잡은 커다란 도시, 그 도시의 남쪽 끝머리에는 밭이 시작되고 갈수록 누추해져가는 오두막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이야기의 무대입니다. 마을 뒤 소나무 숲에는 무너진 작은 원형극장이 숨어 있는데, 이 극장은 그 옛날에도 화려하지 않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극장이었기 때문에 이웃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 원형극장 터에 조그만 여자아이가 스며들어왔습니다. 키가 작고 대단한 말라깽이에 다 낡아빠지고 헐렁한 남자 웃옷에 색색가지의 알록달록한 천을 이어 붙여 만든 치마를 입고 있는 아이는 여덟? 아니면 열두 살로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백 살 혹은 백두 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까만 맨발로 돌아다니는 모모는 놀랄 만큼 예쁘고 커다랗고 까만 눈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모모가 원형극장의 무대 밑에 무너진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돌보아주기로 합니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모모의 행운이었을까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의 행운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삼대가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만, 삼대까지 갈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모모의 놀라운 재능 덕분입니다. 그 놀라운 재능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습니다.

 

작가는 모모의 재능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듯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쪽)” 사람들이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라고 권하는 바람에, 이 말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상어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어떤 문제든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모모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은 바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원형극장은 모모의 재능이 꽃을 피우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모모는 밤이면 원형극장에 앉아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모모는 별들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거대한 귓바퀴 한 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던 것입니다. 독일 하노버에 있다는 조각상이 커다란 귀를 안고 있는 모모의 모습을 새긴 이유일 것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요? 모모와 함께 살고 있어 영원히 행복할 것 같던 이 마을에도 나쁜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나쁜 일은 시나브로 끼어들어 쌓이는 문제들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처럼 우리사회가 평소 조심해서 지키면 피할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간과하듯 말입니다. 이 마을에도 회색옷을 입은 신사가 등장한 것입니다. 납회색 서류가방을 들고 작은 회색시가를 뻐끔대는 회색신사는 잿빛 목소리로 자신이 시간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사람들마다 세상살이가 의미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회색신사들은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해서는 현란한 계산을 통해서 시간을 절약하면 나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지금 절약한 시간을 시간은행에 맡기면 이자를 쳐서 예순두 살이 되는 해에 엄청난 양의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꼬이는 것입니다.

 

계약이 성립되면 그 다음부터는 회색신사들은 계약자들이 단 1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도록 엄중하게 감시하면서 미리 짜인 시간표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겉으로 보기에는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나 피곤함, 또는 불만이 쌓여가고 상냥한 기미하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도시의 모습까지 변해갔는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살린 꼭 같은 집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맞추자면 각기 다른 집을 지어야 하겠지만, 꼭 같은 집을 지으면 돈이 훨씬 적게 들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절약하는 이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회색신사들과 시간저축을 계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모모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이번에는 모모가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결국은 회색신사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친구들이 모모를 만나느라 사용하는 시간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모모를 찾아온 회색신사는 얼결에 자신들의 정체와 속셈을 모모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역시 모모의 들어주는 재능 덕분입니다. “사람들이 아낀 시간은 그냥 사라져 버려.... 우리는 시간을 끌어모아... 저장하는거야....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우리는 시간을 갈망하지...” 즉 회색인간들은 사람들의 시간으로 연명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모모는 친구 베포와 기기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과 함께 회색인간들의 음모를 세상에 알리는 모임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회색신사들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회색신사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모모의 친구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모모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모를 잡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북이 카시오페아의 안내로 ‘언제나 없는 거리’에 있는 ‘아무데도 없는 집’에 사는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 박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박사의 이름이 독특하죠? 그렇습니다. 초, 분, 그리고 시간을 나타내는 라틴어 이름입니다. 모모는 시간의 근원지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거대한 지붕 밑에 있는 둥그런 연못으로 별의 추가 움직이는 대로 커다란 꽃봉오리가 떠오르고 스러지기를 반복하는 곳입니다.

 

호라박사는 저마다의 사람들에게 지정되어 있는 시간을 나누어 주는 관리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합니다. 회색신사들 역시 호라박사의 존재를 잘 알고 있고, 이곳을 봉쇄하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단숨에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을 속여서 조금씩 갈취한 시간으로 연명하는 것이 구차하고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병들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산다는 것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점점 커지면서 종국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해지고,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라는 병을 앓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색신사들이 호라박사의 집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붓자 모모의 아이디어로 반격을 시작합니다. 1 시간동안 시간을 멈추고 그 사이에 회색신사들이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저장해둔 사람들의 시간을 풀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윽고 시간이 정지되고 당황한 회색신사들을 뒤쫓아 시간저장창고로 찾아간 모모는 카시오페아의 도움으로 회색신사들과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데... 카시오페아는 30분 뒤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회색신사의 추적을 따돌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수퍼마켓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하에 있는 손바닥만한 곳이었지만 아이를 찾느라 한 시간 동안을 헤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열장 사이로 엇갈리다 보니 마주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았더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모모와 카시오페아의 활약 덕분에 회색신사들의 음모는 분쇄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색신사의 꼬임을 받고 있지 않으십니까? 우선은 달콤하게 들릴지 모릅니다만, 결국 당신의 감정을 병들게 하고 사건사고로 얼룩진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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