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 살림지식총서 6
김진웅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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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는 살림지식총서를 통하여 미국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김진웅교수님의 <반미>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미주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요약서입니다. 물론 2003년에 정리한 내용이라서 벌써 10년이 훌쩍 지난 현시점에서 본다면 다른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미주의가 형성된 원인을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 분석하고 있어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세계적인 반미주의 확산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각 반미주의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한 후 미국의 패권주의 대의정책이 반미주의 대두의 가장 큰 원인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한국인이 바라보는 미국에 대한 인식과 범세계적인 반미주의의 대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의 대미인식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접근하여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힘을 겨루는 냉전시대를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변에는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이 일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이끌어오는 바람에 미국에 대한 세계인의 부정적인 시각이 확대되기에 이르렀고, 반미주의 움직임이 점점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국제주의와 개입주의로 흐르게 된 것은 “미국이 지배적인 힘을 갖는 대신 다른 나라들이 자신의 안보를 책임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야 악성 지역 갈등과 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14쪽)”라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다소 희석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미국이 세계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인식을 극명하게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92년 미국의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딕 체니의 발언입니다. “미국도 그 일부인 전세계적인 시장은 지역 분쟁과 불안정 그리고 침략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미국의 경제 번영과 안보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들이 계속 성장하는 안정된 세계질서에 달려 있다. 적대적이고 반민주적인 정권들은 침략이 결코 보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18쪽)”

 

즉 미국의 패권주의의 저변에는 미국의 중요한 무역 및 재정관계가 정치적 격변에 흔들리면 안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즉 미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지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 글로벌 패권을 지키기 위하여 부담하고 있는 엄청난 비용을 이제는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면서 상호방위조약 등을 통하여 역할을 분담하려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최근 튀고 있는 일본의 아베정권의 우경화현상 역시 미국의 이러한 전략과 맞물려있다고 하겠습니다.

 

1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를 정리한 저자는 2부에서는 반미주의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반미주의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반미주의는 미국, 미국 정부, 미국의 국내 제도들, 미국의 대외정책, 미국의 주요 가치들, 미국의 문화, 미국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46쪽)” 한편 저자는 특정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대 내지는 비판을 반미주의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한 전체적인 거부를 의미하는 반미주의와는 달리 미국의 특정 정책에 대한 비판은 반미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체적인 거부를 의미하는 반미주의란 일종의 체계화되고 이데올로기화한 것으로 미국이란 무엇인가 내지는 미국이 무엇을 옹호하고 내세우는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반미주의가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내지 신념 체계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미주의는 반미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민주주의 가 꽃을 피우는 과정에서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역대 권위주의 정권을 지지해온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지위와 관련한 사항들이 한국인들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도 고려할 필요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반미주의 혹은 반미감정이 두 나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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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고 싶은 팀장 2 - 열정적인 팀을 만드는 11가지 방법 함께 일하고 싶은 팀장 2
댄 보빈스키 지음, 조천제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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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들은 나름대로의 핵심포인트가 있습니다. 리더십개발 전문가 덴 보빈스크의 <함께 일하고 싶은 팀장2>는 조직관리의 화두로 ‘열정’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 열정은 만들어 낼 수 없다. 2. 열정은 누군가에게 요구할 수 없다. 3. 열정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4. 열정은 거짓으로 있는 척할 수 없다.”라는 네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팀원 하나하나의 열정을 불러내서 시너지를 일으키도록 하는 방법 열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미세경영에서 벗어난다, 2. 내 팀원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3. 조정하지 않고 동기를 부여한다, 4. 휴게실 대화를 통해 팀원의 소속감을 높인다, 5. 위임으로 팀원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다, 6. 영양가 있는 회의를 한다, 7. 탁월한 경청자가 된다, 8. 긴장을 건전한 갈등으로 바꾼다, 9. 효과적인 교육을 실시한다, 10. 실패는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1. 모두가 서로의 성공을 축하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비결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실행에 옮기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조직관리에 관한 컨설팅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직장문화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탓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판촉전화를 해야 하는 외근직 영업사원 미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는 팀장 톰슨의 접근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판촉이라는 업무를 차선으로 보고 미셀의 동기를 타이어의 공기압에 비유하고 있는 점은 읽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팀을 관리하는 사람이 흔히 놓치기 쉬운 덕목이 바로 ‘경청’입니다. 일반적인 ‘듣는 것’이란 ‘귀에서 소리를 인지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하는데, ‘경청’은 ‘상대의 의견을 알아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형태의 듣기라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경청의 사례를 우리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 http://blog.joins.com/yang412/13436681>의 주인공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경청의 7가지 유형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걸러 듣기, 2. 멋대로 추측하기, 3. 에누리하여 듣기, 4. 자신과 연관 짓기, 5. 다음에 자기가 할 말만 생각하기, 6. 내용을 혼자서 앞서 가기, 7. 상대의 기분만 맞추려 하기, 등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제가 하는 버릇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본 자세다’라고 전제하면서 효과적인 경청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1단계는 상대방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제2단계는 당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라, 경청은 신뢰회복의 지름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최근에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룹과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요구만 내세워온 그룹입니다. 이번 회동에서 국면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자가 추천하는 관계회복을 위한 5단계를 적용해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상대방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두 번째 단계는 당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라, 세 번째 단계는 신뢰를 얻어라, 네 번째 단계는 조심스럽게 진실을 밝혀가라,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희망을 만들어라, 입니다. 저로서는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경청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신뢰를 회복하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읽어가다가 재미있는 삽화를 발견하였습니다. 313쪽에 나오는 삽화인데요. 두 사람에 톱을 마주 들고 커다란 박을 타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북을 치면서 추임새를 넣고 있는 그림입니다. 미국 작가가 쓴 책에서 어떻게 한국적인 삽화가 들어갔는지 궁금했는데,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서 한국 삽화가의 그림을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편집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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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 러시아 문화와 조우하다
김은희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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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제임스 엘킨스 교수는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당신은 그림 앞에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저는 당연히 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 울어본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만, 의외로 적지 않는 분들이 그림을 보다가 눈물을 쏟아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라치엘라 마게리니라고 하는 1979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흥분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우울증,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스탕달신드롬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정도를 넘어서 격한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탕달이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1918년)>에서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라고 적은데서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진단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스탕달 신드롬을 인용하는 것은 러시아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스탕달 신드롬’을 자주 경험한 바 있다고 하는 김은희 교수님의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한 러시아 명화들을 감상하면서 그 명화들이 들려주는 러시아 이야기들에 또 한 번 감동받았고 그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라는 것이 집필동기라고 합니다. 출판사에서는 ‘러시아 현대 미술사의 걸작을 통해 러시아의 자연, 풍속, 역사, 문학, 음악, 신앙, 민중 생활상 등을 해박한 지식으로 넘나들며 저 광활한 대지로 인도한다.’라고 간략한 소개에 그치고 있습니다.

 

김은희 교수님은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20세기 러시아 문학사를 전공하면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그림을 감상하면서 기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보다는 그림이 그려지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화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곁들여지면 더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마침 이 책에서는 저자가 그림을 설명하면서 당시 러시아 당대 일류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을 쉽게 이해되는 느낌입니다.

 

1991년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시절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갈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유럽을 다녀오면서도 혹시 모스코바에서 환승이라도 하게 되면 쉬쉬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어제 같습니다. 아내는 지난 해 유럽 여행길에 잠시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학, 음악, 발레 등 수준 높은 러시아 예술작품의 이야기를 익히 듣고 있으면서도 저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러시아의 사계와 러시아 사람들, 특히 러시아 여성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자연을 만들고, 자연은 명화를 만든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이야기는 러시아의 사 계절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쿠스토디예프의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를 화폭에 담았는데, 여전히 눈에 파묻혀 있는 마을에서 두툼한 겨울옷으로 감싼 러시아사람들이 다양한 놀이를 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봄이 먼 듯한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겨울을 막 지나면서 봄을 생각하는 입춘(立春)을 두고 있는 것처럼, 사랑방 작은 봉창을 통해서 눈 덮인 마당가에 꽃을 피운 매화를 바라보면서 봄을 읽었던 우리네 조상과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저자의 독특한 인문학적 그림읽기는 문학작품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러시아의 민속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의 경우처럼 러시아의 여름 풍경을 그린 시슈킨의 <모스크바 근교의 정오>에서는 여름의 가장 큰 축제로 하지와 연관된 ‘이반 쿠팔라의 날(구력 6월 24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물과 불 그리고 풀과 관련된 의식과 풍습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풍습은 남녀의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 이반 쿠팔라 전야에 아가씨들은 삼색 오랑캐꽃이나 우엉 등 여러 가지 풀로 만든 화관에 촛불의 세워서 강물이나 호수에 띄운다고 합니다. 화관이 바로 가라앉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며, 오래 떠내려갈수록 행복해지고 사랑이 이루어지며, 촛불이 오래 타면 장수한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고백할 일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은 뛰어나다는 느낌은 들지만, 정작 작품을 그린 화가들의 이름 가운데 들어본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이 그림에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습니다. 다행한 일은 저 같은 독자를 위하여 글의 말미에 화가들이나 본문에서 인용하신 인물들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림을 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같이 읽어나가다가 드디어 저도 잘 아는 그림을 만났습니다. 러시아 여성들의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이야기에서 발견한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세련되고 감성적이지만, 무엇인가 편안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갸름한 얼굴선, 약간 거무스름한 피부, 벨벳처럼 부드럽고 숱이 많은 눈썹, 오만하게 약간 내리뜬, 하지만 고독과 슬픔이 묻어 있는 촉촉한 갈색 눈, 또렷한 콧대와 콧방울, 아담하고 생기 있는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 뒤로 가지런히 손질한 짙은 색의 머리, 다소곳하지만 꼿꼿한 앉음새. 어느 정도의 신분 또는 혈통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익숙해진 원만한 여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약간의 오만한 표정. 무엇보다도 그 표정은 한 번 본 사람들에게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79~80쪽)”

 

이 그림은 민음사에서 나온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http://blog.joins.com/yang412/13076051>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페테르부르그 철도역에서 브론스키가 안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다는 다음과 같은 인상과 흡사한 분위기일까요?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톨스토이 지음, 안타 카레니나 1, 138쪽, 민음사 펴냄)” 김은희 교수님 역시 크람스코이가 마치 안나의 초상화를 그려낸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만, 저 역시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에서 안나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안나 카레니나>에 끌려있는 것 같습니다. <미지의 여인> 말미에는 레핀의 그림 <경작하는 사람. 경작지의 레프 톨스토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3부에서는 키티와 결혼한 레빈이 영지인 포크로프스코로 가서 살면서 그곳의 농부들과 같이 농삿일을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화가가 그림으로 남길 정도로 톨스토이가 농사일을 즐겼던 모양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임신한 상태를 ‘흥미로운 상태에 있다’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닮은 아이를 기다리는 일은 분명 가슴이 뛰도록 아름다운 일이겠습니다만, 여기 소개된 그림과 이야기는 오히려 애처롭거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페도토프의 <어린 과부>는 파산한 남편이 빚만 남기고 자살하는 바람에 임신한 채로 홀로된 여동생 류빈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림에서는 잔혹한 운명에 맞서는 고양된 정신성과 나약한 육체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에 순응하여 녹아든 느낌이 강해서 정작 페도토프는 이 그림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농노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낸 폴레노프의 <나리의 권리>나 앞서 소개한 페도토프의 <소령의 구혼>,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 등은 당시 러시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작품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러시아 사람들의 음식, 교육 그리고 삶과 죽음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푸쉬긴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제목으로 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얼큰히 취한 남편이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이와 함께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마콥스키의 <못 들여보내요!>에서 오래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술을 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 하면 ‘보드카’가 떠오릅니다. 구 소련의 지식인들은 “그 당시 술은 유행이었다. 아마 유행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반체제 운동’이자 현실 극복의 독특한 시도”였다고 술회한다고 합니다. 즉 술은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탈출구였다는 것인데, 우리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슬플 것이라고 생각되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유족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198쪽).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오.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말고 우십시오……. 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은 위대한 어머니의 통곡을 계속할 것이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에게 조용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쓰라린 눈물은 사람을 죄악에서 구하는 연민과 정화의 눈물이 될 것이요. 그리고 나는 평온 속에 잠자는 그대의 어린아이를 기억할 것이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가 세 살배기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마부 아내에게 건넨 위로의 말을 저자는 인용하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세 살배기 아들 알료샤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때 암브로시 장로가 도스토옙스키에게 건넨 위로의 말을 작품에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크람스코이의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역시 두 아들을 잃은 화가의 아픔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화가는 슬픔에 젖은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에는 앉아있는 것으로, 두 번째는 바닥에 내려앉은 모습으로, 마지막에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입에 손수건을 문 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그림을 통하여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생명들의 힘과 의지를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수건을 입에 물고 슬픔을 참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영구대 밑에 놓인 화분 속 튤립의 붉은색이 생명력을 강하게 나타내며, 연약해 보이는 줄기도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 모습이 힘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유족들께서도 이제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힘차게 살아갈 준비를 하시면 어떨까싶습니다.

 

그리고 레핀의 <볼가강의 인부들>입니다. 16~19세기 말까지 증기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많은 강과 운하에서는 물살을 거슬러 범선을 끌어올리는 인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순풍이라고 불편 돛을 올려 예인을 쉽게 할 수 있지만, 역풍이라도 불면 그만큼 힘이 더 들었다고 합니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한 번 더, 한 번 더...”라고 시작하는 러시아 민요 <볼가 강의 뱃노래>는 처음 배를 끌어내는 가장 힘든 순간에 인부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부르던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 장엄한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은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기도 한 야로센코의 <어디나 삶>입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낡은 열차의 죄수 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창밖에 모여드는 비둘기에게 흑빵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 그림은 작가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구성하는 열차, 비둘기 그리고 사람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읽기를 마치면 그때는 저자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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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좌파와 우파 살림지식총서 1
이주영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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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로 나왔던 책이니 벌써 11년이 지난 과거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나라 사회의 동향을 볼 때 충분히 공감이 가는 무엇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제목에서부터, 과연 미국에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미국의 역사에는 봉건주의 체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시민혁명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개인주의에 대한 신념을 기본 가치로 하여 세워진 나라라는 점입니다. 미국적 체제는 근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적인 것으로 정부는 각 개인이 자신을 실현할 방법을 찾는데 자유로울 수 있도록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인데, 1930녀대 대공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시행하면서 미국도 유럽 국가들처럼 정부개입 또는 국가통제 방식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자유방임주의적인 미국에서 1960년 싹트기 시작한 공동체주의 문화는 성혁명과 마약혁명 등 세속주의적 문화를 확산시키면서 청교도적 윤리가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움직임을 추진한 세력을 신좌파로 구분하고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문화를 전통문화를 대신하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뉴딜정책을 추진한 루스벨트는 종전의 개인주의적, 자유방임주의적 가치를 대신하는 공동체주의적, 사회주의적, 정부간섭주의적 가치를 강조하는 진보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념적 전환을 토대로 루스벨트는 1933년 공산국가인 소련을 승인할 수 있었던 것이고, 공화당이 보수적 가치를 지키는 가운데 민주당은 진보적 가치를 도입하여 색깔을 달리하게 된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을 공산주의와 같은 것으로 몰아붙이자, 진보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분명하게 선을 그었으며, 1950년 한반도에서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격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진보주의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간 신좌파의 뿌리는 1960년대에 이르는데, 당시 흑인의 민권운동, 혹은 흑인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분출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백인청년들에게 전승되었다고 합니다.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불투명해진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겹친 이들은 기존의 미국적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습니다. 이들이 내놓은 대안은 참여민주주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혁명을 통해서 억압과 불평등의 상징인 기성체계를 타도할 때 달성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들어보면 많이 익숙한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1970년 베트남전쟁이 끝나면서 신좌파 세력이 주도하던 혁명운동이 같이 가라앉게 되면서 이들은 정치혁명을 대신할 문화혁명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좌파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대학교수, 언론인, 문인, 예술가, 영화인이 된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주도하는 대항문화이론이 더욱 정교해지고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모든 움직임에는 반동적인 움직임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진보-좌파가 나타나 세력을 확대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신우파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진보-좌파가 사회적 엘리트들에 의하여 주도된 것에 반하여, 신우파 운동의 주도권은 중하층대중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민중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신우파는 자유방임의 원리를 강조하던 구 우파와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우파 운동은 때로는 반정부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부개입과 복지국가에 대한 신우파의 반대는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거대 노동조합의 막강한 조직의 힘은 미국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고, 이들 노동조합을 움직이는 간부들은 노동귀족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미국사회를 통하여 등장하게 된 신좌파와 신우파의 움직임을 들여다 보면, 최근 우리 사회의 이념적 움직임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미국의 신좌파는 공산주의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의 진보-좌파는 북한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 같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항하여 신우파 세력이 탄생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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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의 신인류 예찬
미셸 세르 지음, 양영란 옮김, 송은주 / 갈라파고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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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젊은이들은 언제나 걱정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을 우려 섞인 시각으로 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끔은 젊은이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읽어내는 기성세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 미셀 세르 역시 보통이 아닌 기성세대가 틀림없습니다. 미셀 세르는 두 개의 엄지손가락만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데, 자신이 열 개의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을 보고 놀라 ‘엄지세대’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엄지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주역이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는 세르의 이러한 예언을 담은 예언서입니다. 엄지세대는 “세상이 너무 급격하게 바뀐 탓에 무든 것을 다시금 창조해야 하는 젊은 세대”이며, “이들은 함께 사는 방법이며 제도, 존재 방식, 인지 방식 등, 모든 것을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도록 재창조해야 한다.”라고 적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교육시키는 방식도 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지금까지의 방법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지식은 교단을 통하여 인쇄된 텍스트를 통하여 전수되어왔지만, 엄지세대는 인터넷상에 널려 있는 지식을 두 개의 엄지손가락만으로 기성세대보다 더 빠르게 지식을 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인터넷에 널려 있는 지식을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렇게 모은 지식들을 오류를 수정하고 꿰어 맞추는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모아들인 지식을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제 생각을 비웃듯이 저자는 “이렇게 유통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인지 기능이 학생들에게 부족하다는 식의 괜한 불평은 아예 입밖에 내지 않는 편이 좋다. 인지 기능 자체가 매체와 더불어, 매체로 인하여 변하기 때문이다.(52쪽)”라고 적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모은 지식을 읽다보면 저절로 정리가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사리를 판단하는 것도 오랜 훈련을 통하여 가능해지며 그러한 훈련은 독자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일찍 깨우친 선각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자는 개인을 인터넷 세상과 연결해주는 기기, 즉 또 다른 뇌를 손에 안고 사는 신세대를 프랑스의 드니 성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금하던 시절 파리지역의 기독교도들은 드니를 초대 주교로 모시고 있었는데, 로마군은 드니 주교를 체포하여 고문을 한 끝에 몽마르트 언덕에서 참수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게으름뱅이였던 형집행관은 언덕 중간쯤에서 드니 주교의 머리를 잘랐고, 주교의 머리는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이 잘린 드니주교가 몸을 일으키더니 잘려나간 머리를 양손으로 집어들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 기적으로 드니 주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신인류가 손에 넣게 된 새로운 뇌를 통하여 얻게 되는 지식은 누군가에 의하여 생산되는 것인데, 저자는 누구나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온갖 지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지식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소비하는 시간은 지식을 모으는 시간보다 더 많이 소요되면서도 신뢰할만한 결론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집단이 무언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웅얼거리는 무엇이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사분란한 분류의 틀 안에서 움직이던 지식 세계가 자유분방한 혼돈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올바른 지식을 가다듬어 내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방식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식체계는 알고리즘방식으로 성립되어왔던 것인데, 새롭게 등장하는 지식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방법론은 미래세대, 즉 엄지세대의 몫이 될 것이고, 인류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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