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 1 - 13과 3/4살
수 타운센드 지음, 김한결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제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때가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열네 살 때였습니다. 영국 작가 수 타운센트의 성장소설 <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의 주인공이 비밀일기를 적기 시작할 무렵의 나이, 열세 살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없애버렸기 때문에 다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무렵 제가 일기에 적던 비밀스러운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이 사는 곳이 영국의 시골이고 시대적 배경 역시 1981년과 82년이기 때문에 제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1967년과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가족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에이드리언처럼 적나라하게 적을 용기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비밀일기라고는 하지만 만의 하나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은 이젠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였습니다만, 제 아이들이 저를 어떻게 보았을까 뒤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혹여는 부끄럽게 보였을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가슴이 뜨끔한 책읽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 첫 번째 이야기는 열세 살이 되던 해의 1월 1일부터 시작해서 겨울, 봄, 여름, 가을이 지나서 다시 이듬해 1월부터 3월까지의 겨울 이야기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또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책읽기와 시작이 취미생활이고, 집안일 역시 똑 소리 나게 하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애늙은이면서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그 나이도 저도 그랬을까 싶도록 조숙한 면도 있어 아이들을 잘 지켜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비밀일기에 적은 에이드리언의 독서목록입니다. 1.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2. 동물농장(조지 오웰), 3. 마담 보바리(플뢰베르), 4.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5.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조지 엘리엇), 6. 어려운 시절(찰스 디킨스), 7. 톰 아저씨의 오두막(마크 트웨인), 8. 섹스에 대한 진실(A.P.G. 헤이그), 9. 아동기로부터의 탈출(존 홀트), 10. 글렌코(존 프레볼), 11.진보, 공존, 지적인 자유(안드레이 사하로프), 12. 엘리스 같은 도시(네빌 슈트), 13. 죄와 벌(도스토엡스키), 14. 아이들은 왜 실패하는가(존 홀트) 등입니다. 열네 번째 책은 열네 살이 되던 해 겨울에 읽은 유일한 책입니다. 따라서 열세 살 때 모두 13권의 책을 읽었는데, 책의 제목만을 보아서도 그 나이에 쉽지 않은 독서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세 살짜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인데, 책을 읽은 느낌을 구체적으로 적은 경우는 드물지만 나름대로 판단해보면 핵심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 읽은 책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아이들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책들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럽사회에서 아이들 독서지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이드리언의 창작 시도 그렇지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수필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봄」이라는 제목의 수필입니다. “나무들은 싹을 틔우고, 그중 일부는 잎이 되었다. 나뭇가지는 술에 취한 허수아비처럼 하늘 높이 두 팔을 뻗는다. 몸통을 비틀고 꼬며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거대한 뿌리를 이룬다. 청명한 하늘은 결혼식장 문 앞에서 주저하는 신부처럼 불안하게 맴돈다. 새들은 술에 취한 허수아비처럼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솜뭉치 같은 구름 속으로 날아든다. 반투명한 시냇물이 그 여정의 끝을 향해 장엄하게 흐른다. ‘바다로!’라고 외친다. ‘바다로!’라고 끝없이 외친다.(…)(318쪽)”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작가는 소년의 시각으로 본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무게를 두었다고 합니다만, 먼 나라 한국의 나이 먹은 독자는 또래 아이의 웃자람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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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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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즐겨 쓰는 우스갯소리로 ‘물고기의 기억력은 3초’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다가 치도곤을 당한 물고기가 금방 돌아서서 다시 미끼를 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종류에 따라서 기억 정도가 다를 수도 있다는 실험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4년 7월 3일자 기사, “물고기 기억력은 3초? 최장 12일!”). 아무튼 물고기의 기억력과 비교해보면 분명 뛰어난 인간의 기억력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인간진화의 결과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주의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탈리 샤롯은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질 프라이스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위기에 빠지는 과정, 당뇨를 앓던 남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겪은 고통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초능력이 오히려 저주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기억을 선별하는 능력은 내 마음의 작용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라고 한 특별한 재능이 그녀에게 고통을 준 원인이었습니다.(질 프라이스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163쪽;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

 

질 프라이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망각은 분명 신의 축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망각을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가까이는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로부터 멀리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 받은 36년을 기억하여,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 급진 우경화하고 있는 이웃 일본의 행보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태인으로 대표되는 인종말살정책을 강행했던 나치의 만행에 대하여 후세의 독일이 보여준 참회와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보면, 일본이 보여 온 망설임과 눈가림은 피해국들의 포용을 얻어내기에는 어림도 없는 행보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위권을 확대하는 등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의 축복을 너무 많아서 일까요?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지나치게 받아서 생긴 나라 안팎의 사건들을 보면서 독일의 동화작가 랄프 이자우의 판타지 소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화라는 수단을 통해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철학가’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동화작가 미하엘 엔데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랄프 이자우의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은 ‘기억’과 ‘망각’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 존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망각해버린 것들이 미래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은 독일인이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쌍둥이 주인공을 통하여 가족들과의 행복했던 기억과 사랑의 기억들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나브로 잊어버리는 것 중 하나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876쪽에 이르는 만만치 않는 분량과 장르문학의 특성을 고려하면 조심스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내놓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정도라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일곱 살난 쌍둥이 남매인 제시카와 올리버는 느닷없는 찾아온 경찰관들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고대 유물 크세사노 상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져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쌍둥이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기억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집안에 남겨있는 사진이나 물건들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통해 아버지가 원래 저명한 고고학자였으며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부활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 크세사노의 음모를 알고 이를 막기 위해 크세사노가 지배하고 있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나라인 크바시나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시카가 현실 세계에 남아서 바빌로니아의 전설을 파헤치고 크세사노의 계략을 막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동안에, 올리버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박물관 안의 바빌로니아 유적 ‘이슈타르의 문’을 통해 환상 세계 크바시나에 들어가게 됩니다.

 

제시카가 박물관의 연구원인 미리암의 도움으로 옛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출토된 점토판 조각의 쐐기 문자를 연구하며 암호를 풀어나가는 동안 크바시나에 들어간 올리버는 여러 가지 모험을 겪으면서 크세사노가 왕으로 군림한 이후 벌인 여러 가지 악행들과 온 세상을 장악하려는 크세사노의 야망을 분쇄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작가는 올리버와 제시카가 같은 목표를 찾아 애를 쓰는 과정을 엇갈려 서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쌍둥이 남매는 무의식과 꿈을 통해 서로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크세사노의 진짜 이름을 찾아내 그 이름을 세 번 부르면 그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바빌로니아 문명이 등장하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엉켜 있어 이야기의 줄기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독자도 있는 듯합니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아예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오히려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이야기를 지은 것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난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글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시카와 올리버의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운 책 이상이여야 했다. 이 책은 기억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어야 했고, 무관심과 관용의 부재를 질타하는 호소여야 했다.(1권 445쪽)” 그러기 위하여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또한 몇 가지는 평범하지 않거나, 전혀 새로운 관계로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 위해 ‘사실들’을 연결하는 일은 언론매체들도 완벽하게 해내지만, 지루하다는 느낌 밖에는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하기 위하여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을 아주 세밀하게 연결시켜서 분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상상 속의 산물인지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만, 진실과 상상의 산물을 구분해보려는 시도는 책읽기에 더한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자는 “내가 이 책으로 몇몇 독자들을 고고학의 세계로 유혹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싶다.(1권 448쪽)”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의 핵심은 성서에 나오는 반전설적인 바빌론의 존재를 증명한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 9. 10 ~ 1925. 2. 4)의 고고학적 성과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독일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콜데바이는 1899년 3월 26일부터 남부 이라크에 있는 바빌론의 유적지의 발굴을 시작해서 18년에 걸쳐 거의 중단 없이 발굴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발견물은 마르두크 신전 기단(基壇)이었는데, 이것은 지구라트라 불리는 계단 모양의 유구(遺構)로서 그 위에 천문관측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근처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설계된 우물이 딸린 아치형 구조물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 공중정원의 유허(遺墟)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밖에 이 도시의 거대한 성채, 유명한 이슈타르 대문의 증거 및 마르두크의 신전에 다다르는 대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출토된 이슈타르 대문은 현재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었던 것이 작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구분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앞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먼저 ‘기억은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동안만 변화한다(1권 191쪽)’는 니피(유리로 만든 벌새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의 설명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리버가 크바시나에서 활약하는 동안 도움을 주는 엘레우키데스는 자칭 소크라테스의 제자인데,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크바시나에 오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엘레우키데스 이외에 아리스티포스, 크세노폰, 안티스테네스, 알키비아데스 등 그가 소개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구굴검색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엘레우키데스는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이외의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인 듯합니다.

 

장르소설을 읽는 맛은 작가가 예고하는 힌트를 놓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에서 중요한 힌트는 비교적 초기에 볼 수 있습니다. 제시카와 함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인물목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미리암은 기원전 3세기에 수메르왕의 호칭은 ‘동서남북의 왕’이란 의미를 담은 ‘루갈-안-업-다-림무-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들은 제시카는 아버지의 일기에서 읽은 글 가운데 있는 크세사노의 황금상 밑에 적혀 있다는 ‘세상의 왕’이라는 호칭을 기억해냅니다. 이 이름은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됩니다.

 

올리버가 크바시나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니피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서 크바시나를 방문한 인간인 올리버와 아버지를 고엘름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고엘름이 크바시나에 나타나서 크세사노의 폭압으로부터 기억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소문이 수천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엘름 올리버는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배의 폰 오라니엔 선장이 생전에 저지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올리버는 처음에 희생자였던 선장이 나중에는 죄를 저지른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죄가 면해질 수는 없겠지만 억지로 죄값을 치르는 것보다는 가슴 깊이 반성하는 것이 더욱 값지고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세사노의 힘을 막을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선장님이 하신 행동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선장을 설득하게 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도 올리버가 특별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올리버는 그를 도와주는 많은 기억들과 함께 크세사노에게 억류되어 있을 아버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는 인간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고와 꿈들이 살고 있다는 모르굼의 진흙수렁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현인 레벤 니아가가 해준 “기억과 망각,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균형이 존재한다.(2권 188쪽)”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작가가 책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결정적 메시지가 아닐까요? 또한 제시카와 미리암이 사건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나치와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들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독재자에 관한 흔적을 지우려는 크세사노의 음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크세사노는 바로 ‘간절히 갖고자 하는 생각들을 모두 가져가리라’라는 자신의 예언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세상 크바시나와 기억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자리에 오르려는 것입니다. 올리버와 제시카는 크세사노의 야망을 어떻게 막아 인류를 구원하게 될까요?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선물 ‘기억’과 신의 축복 ‘망각’이 제대로 균형이 잡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새겨봅니다.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꼭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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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독해져라 - 흔들리는 당신을 위한 김진애 박사의 인생 10강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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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온 삶의 굴곡이 바로 ‘파랑새 증후군’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해준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김진애박사의 <한 번은 독해져라>입니다. ‘파랑새 증후군’이란 자신의 현재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미래의 행복만을 꿈꾸는 증상을 뜻한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한 직장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직장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자의에 의해서, 혹은 타의에 의해서 직장을 옮긴 것이 벌써 다섯 번째 이니, 제대로된 진단을 얻게 된 셈입니다. 진단이 나오면 치료법도 나오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파랑새 증후군을 치료할 묘방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결국은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저자는 네 가지 습관을 권하였습니다. 첫째, 나 자신을 관찰하는 습관, 둘째,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 셋째, ‘고백’이라는 아주 건강한 습관, 넷째, 괴로움의 패턴을 그려보는 습관 등입니다. 이를 통하여 일과 관련하여 생기는 괴로움을 찾아내 달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고른 열 가지의 일과 관련된 괴로움은, 하나, 도망가고 싶다. 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셋, 슬럼프에 빠졌다. 넷, 일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다섯,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여섯,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일곱, 인정받고 싶다. 여덟,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진다. 아홉, 외롭기만 하다. 열, 슬프다. 돌이켜 보면, 저자가 고른 열 가지 괴로움 가운데 공감이 가는 몇 가지는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른데 모두에게 꼭 들어맞는 이론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 번은 독해져라>는 자기계발서라고 합니다만, 오히려 자기관리에 관한 에세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책읽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자가진단을 하도록 유도하고, 스스로에게 맞는 해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두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주로 영화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책읽기란 긴 시간을 요하니 몰입이 쉽지 않고 흐름을 놓치기도 쉽다. 책이 지적 탐험의 성향이 강하다면 영화란 감성적 체험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74쪽)”라고 적은 구절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책읽기보다는 영화보기가 접근이 쉽다는 점도 매력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에 관하여 ‘달라이 라마의 어휘에는 스트레스가 없다’고 적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일상이 되고 있는 명상의 효과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스트레스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블로그 커뮤니티에서 ‘개인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을 묻는 이벤트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뭐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당연히(?) 이벤트에서 떨어졌습니다. 사실 스트레스가 외부로부터 받는 다양한 형태의 압박감이라고 정의한다면 저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야 하겠지요. 다만 그 압박감은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문제해결방안을 찾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밋밋한 세상은 재미가 없는 법이니까요.

 

저자는 ‘이 한 번은 독해져본다’라는 제목의 글로 책쓰기를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화두로 꼽은 열 가지 괴로움이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괴로움을 책으로 써내는 작업을 통해서 풀어낼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저자의 괴로움을 읽은 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저자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만들고 그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하다보면 해답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해답을 찾을 때까지 생각을 반복하려면 독해져야 하지 싶습니다만, 꼭 그래야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독해져야 한다’의 정의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라는 점은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즉, 책을 읽는 분들마다 나름의 독특한 해결방안을 찾아내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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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명, 어느 날
스티븐 에모트 지음, 박영록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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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구조사국이 추정한 2013년 전세계 인구는 71억 명이며, 2050년이 되면 90억 명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세계 인구 추이에 대하여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대니 돌링교수가 쓴 <100억명; http://blog.joins.com/yang412/13448550>을 읽었습니다.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이라는 부제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자 스스로가 자신을 현실적 개혁주의자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미래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산하의 계산과학 연구소장으로 있는 스티븐 에모트는 꼭 같이 전세계인구가 100억 명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의 시점을 지구 역사상 초유의 비상사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이 반쯤 채워진 물컵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물이 컵에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 혹은 ‘물이 컵에 반이나 남아있다.’라고 말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긍정적으로 보느냐 혹은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이겠습니다. 두 가지 시각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 이성주의자 혹은 현실적 개혁주의자들의 낙관적 견해와 비교해서 화가난 비관주의자에 속하는 에모트의 주장을 살펴보는 것도 분명 우리의 판단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2012년 영국의 런던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로열코트 극장 무대에 특별한 공연이 올려졌다고 합니다. 전문배우가 아닌 한 계산과학자가 무대에 올라 다가올 100억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망했다.”라는 외침으로 끝낸 70여 분간에 걸친 긴 독백을 담은 책이 바로<100억 명, 어느 날>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근무하는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산하 연구소에는 분자생물학, 면역학, 신경과학, 식물생물학, 기후학, 생물지구화학, 육지 및 해양 생태학, 보전생물학에서부터 합성생물학이나 인공광합성 같은 새로운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학제간 협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기후 체계와 생태계 같은 복합계를 비롯하여, 우리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인류가 71억명의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가 먹고 사용하는 식량, 물, 연료 등을 비롯하여 인류가 배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각종 폐기물이 지구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를 추적하여 인류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같은 데이터를 분석한 돌링교수와는 다른 결론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돌링교수와 에모트박사는 데이터를 설명하는 방식까지도 차이가 있습니다. 돌링교수는 데이터를 풀어서 설명하고 중요한 데이터만 요약하여 표나 그림으로 나타냈습니다만, 에모트박사는 주로 표와 사진을 이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설명은 축약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살펴보아도, 100억이 함께 사는 지구는 악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54쪽)”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인류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류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선 기술개발은 소위 이성적 낙관주의자들의 주장임을 전제로 하여, 녹색에너지, 원자력, 담수화, 지구공학, 제2의 녹색혁명 등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개발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저자가 보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나는 오늘날 드러난 근거에 비추어볼 때, 기술혁신을 통해 이 궁지를 벗어나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171쪽)”한다는 것이며, 최종적인 답은 ‘인류는 당장 모든 분야의 소비를 지금 수준보다 획기적으로 줄이는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대니 돌링교수가 예측하기를 전 세계인구가 2050년을 넘어가면서 90억명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번 세기말 세계인구는 100억명이 아니라 280억명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의 출생률이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경우라는 전제 아래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금까지의 소비행태를 개선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망했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 경우는 스티븐 에모트박사보다는 대니 돌링교수의 설명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보면, 낙관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돌링교수의 주장에 일방적으로 쏠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스티븐 에모트박사의 설명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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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예언자 1 오드 토머스 시리즈
딘 R. 쿤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북클럽에서 활동하게 되면 관심분야 이외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긴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년 1,700만 부 판매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 현실적인 공포를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 녹여내는 독특한 스타일의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딘 쿤츠가 창조한 죽음을 볼 수 있고, 살인을 예언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오드 토머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인 <살인예언자>를 읽게 된 것도 다산북클럽 나나흰 덕분이기도 합니다.

 

장르소설의 마니아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때는 몰입해서 읽은 적도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전개를 요약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추리소설의 경우는 소설보다도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예언자>의 경우는 주인공의 독특한 능력 때문인지 무언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죽을 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듣는 이의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게 할 만큼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멀리는 <식스센스>도 기억이 나구요.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주궁의 태양>에서도 죽음을 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주군의 태양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맡아 묻힐 뻔한 사건의 범인이 드러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에 일어날 살인 사건을 예언하는 능력을 주제로 한 영화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었습니다. 살인이 일어날 시간에 도착해서 범인을 미리 검거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살인예언자>는 죽음을 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추적하기도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살인사건을 미리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범인이 누구인지까지 알 수 있는 다양한 초능력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초능력자도 진화를 하는 셈입니다. 딘 쿤츠가 창조한 초능력자 오드를 주인공으로하는 <살인예언자>는 비밀스럽고 공포에 가까운 오드의 삶과 사건을 다루면서도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 희망, 사랑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공포나 반점뿐 아니라 슬픔과 아픔, 감동을 동시에 풀어놓게 될 이 연작 시리즈는 모두 7편으로 완결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귀신이 등장하고 살인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이야기의 분위기가 낭만적이면서도 으스스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열두 살의 외향적이고 생기발랄한 소녀, 페니 칼리스토가 자신의 죽음을 고하는 장면에서 도시에 있는 언덕에서 주워왔을 조가비를 귀에 대어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귀는 하나의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 ‘Mon oreille(내 귀는 소라 껍질)’이 연상됩니다만, 정작 우리의 주인공은 조개껍질에서 바닷소리는커녕 사막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야수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굶주린 야수의 울음소리, 욕망과 광기의 울부짖음을 듣고 살인자의 빗나간 욕망을 저주하는 듯합니다.

 

오드가 볼 수 있는 존재 가운데 미스터리한 것으로 바다흐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바다흐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꿀벌이 꿀을 찾아다니듯 그들은 죽음을 빨아먹는다. 마다흐들은 곧바로 죽음과 이어진다.’ 일종의 죽음을 예고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특히 살인을 저지를 인간의 주변이나 죽음을 맞을 사람에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바다흐의 숫자는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하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피코문도는 모하비 사막에 가까운 피코문도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미국의 남부지역은 여름철이면 더위가 장난이 아닙니다. 어느 해이던가 피닉스에서 묵었는데, 한 밤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잠이 들 수 없을 지경이었고, 한낮에 고속도로에서 정체를 만나게 되었는데, 에어컨을 돌리다 보니 엔진이 과열되어 화재가 발생할 지경이어서 에어컨을 끌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더위에 지치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피코문도의 여름은 자정이 되어서도 35도의 열기가 남아 있다는 곳이고 보면 여름을 지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살인예언자 1부>에서는 사이비종교에 빠진 범인들이 대량살인을 획책하는 사건을 저지하기 위한 오드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범인을 추정해가는 과정은 주로 오드의 초능력에 의지하는 점이 조금은 아쉽지만...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아주 간결하고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 쉽게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책의 부피는 만만치 않습니다만 제주출장을 다녀오면서 모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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