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기억하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J. 페페(곽효정) 지음 / 현자의숲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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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뇌졸중으로 투병하시는 동안 형제들이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명절과 제사 때나 만나던 것을 보면 갑자기 몇 년이 지나간 셈입니다. 전혀 기억에 없는 오랜 옛날 일까지도 시시콜콜하게 기억하고 있는 셋째를 보면 놀라곤 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저도 한 기억한다고들 했는데, 그 기억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기억을 화두로 붙들고 있는 저로서도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J 페페님의 <마음이 기억하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이란 단어가 눈길을 끌어 읽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에세이를 써온 그녀는 “(이 책에) 일상의 장소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가 살던 집, 학교, 동네 수영장, 카페, 식당… 매일 지나던 길, 가족, 친구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8쪽)” 예민한 저자가 남들과 만나면서 느끼게 되는 자신과 남들의 마음에 생기는 상처와 그 치유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기억’에 관심이 많은 듯, ‘최초의 기억’을 내밀었습니다. 리뷰를 적는 이 순간 지나 온 저의 삶 가운데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쩌면 네 살 터울의 막내가 태어나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다음은 할머니와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던 생각들... 그리고 보니 저자와 최초의 기억을 이야기하던 분이 내놓은 최초의 기억과 같은 것인데, 아마도 동생이 태어난다는 사건은 그 나이에도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억의 바닥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하면 치매에 걸린 환자들을 ‘기억을 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치매환자들은 기억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즉 보고들은 것들을 기억의 창고에 들여보내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지 이미 기억의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은 여전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보고들은 것 가운데 느낌이 약한 것들부터 기억이 약해져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기억을 지키기 위하여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기록도 즉시성이 있어야 정확한 것이지 시간이 지나면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한 시간과 그 시간에서 얻은 느낌들을 정리해보려던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과 함께 했던 시간에서 얻은 느낌들은 빠뜨리지 않고 적어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새벽에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눈물이 북받쳤던 저자는 마음을 추슬러서 수영장에 나갔는데, 수영을 하는 동안 다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친지가 주셨다는 위로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울 수 있다는 건 건강한 거예요. 내 나이쯤 되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나와 오히려 힘들어요.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는 자꾸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살다 보면 진짜 울어야 할 때에도 눈물이 안 나와서 씁쓸해요.(2341쪽)” 어머니와 이별을 한지 불과 열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이야기를 하다가, 심지어는 혼자있을 대도 울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합니다만, 굳이 그런 모습을 남이 어떻게 볼까 걱정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보시는 분들도 이해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는 살만큼 살아온 셈이라서 타인의 삶이나 생각에 호기심을 가질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기억하는 한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저를 낳아주시고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두 분에 대한 기억이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분에 대한 기억들을 모아두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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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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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소천하신 어머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바람에 3년 가까이 [북소리]를 연재하면서 처음으로 원고마감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매주 [북소리]를 기다리시는 분들에게 저의 송구한 마음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네 아들과 며느리, 여섯 손자, 손자며느리와 손자사위 한 명 등, 참석할 수 없는 사연이 있는 두 손녀를 제외한 어머니의 자손들이 모두 모여 이승에서의 이별을 슬퍼하였습니다. 뇌경색으로 입원하셔서 다섯 달을 투병하시다가 뇌경색 재발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미 예고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재활치료로 많이 회복되시는 중이라서 어머니의 죽음은 생각하지 싫은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장례를 치르노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절차도 있습니다만, 어머니께서 생전에 마련하신 가족납골묘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 장례소식을 먼저 적은 이유는 우리 아이들이 저의 죽음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파피루스에도 ‘요즈음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방탕하다’라고 적혀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이 어머님 장례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나미 박사님의 <다음 인간>을 읽다보니 공연한 걱정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저자는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예견하고 있는데, 저자의 예견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이미 변화의 조짐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래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모순에 눈을 감게 만드는 태도나 반대로 극단적인 디스토피아를 제시하면서 결국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식의 가짜 예언자적 태도 모두를 지양한다.(15쪽)”라면서 중립적인 입장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남습니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는 욕망도 인간도 관계도 사라진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다섯 가지 유형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갖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무욕인간은, 극단적인 통제와 방임 속에서 결국 무욕인간 혹은 사이코패스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사이인간은, 기술의 발달로 국경이 ‘완전히’ 허물어진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아 정체성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오감만족을 삶의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으로 꼽는 오감만족 지향형 인간은 너무나 많은 자극에 노출된 나머지 감각기관은 훨씬 더 빨리 지치고 권태를 느낄 것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자아에 집착하던 것에서 벗어나 초월적 자기실현의 세계를 지향하는 탈자아형 인간은 물질주의, 외모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명상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봇에 의해 양육되고 로봇과 사랑하고 로봇에게 아픈 몸을 맡기는 R세대는 이들의 사고체계에 부족한 감정적인 면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떠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전작 <슬픔이 멈추는 시간; http://blog.joins.com/yang412/13388820>을 통해 처음 만난 이나미박사님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의학을 전공한 전문의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뉴욕의 융 연구원에서 분석심리학을 공부하고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융의 텔레올로지이론과 적극적 상상기법을 합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보도록 내담자들을 이끌어 치료하는 법을 세운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심리분석은 내담자의 과거에서 원인을 찾고 그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판단하는데, 모든 것을 심리적 외상으로 환원하는 것은 사람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 저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미래에 대한 적극적 상상은 일종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아프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다시 기운을 차려 움직이듯이 우리 한국인들 역시 미래에서 희망을 볼 때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14쪽)”

 

한편 저자가 신화와 오래된 역사를 인용하여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떤 집단의 원형적 심성이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사람들의 내면에 쌓여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저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마르스는 절름발이 대장장이 헤파이토스의 아내이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즉 비너스와 혼외관계를 가져 하모니아, 즉 조화의 신을 낳았다는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21세기에는 정형화된 여성성이나 남성성이 지배하던 과거보다 성 정체성에서 훨씬 자유로운 새로운 형태의 가정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미래예측을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서 해답은 무엇인데요?’하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해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일까요?

 

어렸을 적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동네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새끼를 꼬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커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몰려다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저는 퇴근하면 집으로 향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집에 들어와도 각자의 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곤 합니다. 선친께서는 대화효(對話孝)를 강조하곤 하셨습니다만, 대학에 다니던 어느 해인가 형제들은 집에 없고 부모님 두 분만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 모습을 보고서 시골집에 자주 내려가기로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녁에는 어머님과 소주잔을 나누면서, 다음날 아침에는 아버님과 바둑을 두면서 서울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습니다. 물론 얄팍해진 주머니 사정도 빠트리지 않아서 서울로 올라올 때는 주머니가 두둑해지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저처럼 스스로 느끼고 깨닫기를 기다리면 될까요?

 

아이들이 성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은 짝을 찾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가정을 꾸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아내를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혼자 사는 남자와 여자가 많아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예상을 읽다보니 저의 생각이 단순한 걱정을 넘어 심각한 우려 수준으로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도시 공동체는 기존의 핵가족 중심의 폐쇄적인 주거 형태가 아니라, 혼자 사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노인이 사는 집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젊은이가 동거하되 부엌은 따로 쓰는 등 사생활은 보장되지만 응급한 상황일 때는 언제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태입니다. 사실 가족도 불편해서 관계를 만들지 않은 사람들이 피도 섞이지 않은 타인과 공동체를 만들어 부딪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부다처제도 등장할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미 인류의 역사에서 검증되어 사라진 제도로 회귀할 수 있다는 논리적 타당성이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는 상대방에게 애착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요즘 확산되고 있는 ‘아이스 버킷’ 릴레이를 보듯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한 구석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서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이라서 일까요?

 

의학의 발달에 따른 인간소외를 다루면서 의사인 저자가 한국이 세계의학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을 내놓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팔이 안으로 굽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의료서비스의 불평등한 분배로 한국의료의 질이 낮아질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커다란 불안요인이 될 것이라고도 합니다. 한국의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의료비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는 의료소비자들의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같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료평등주의가 결국은 의료의 질을 하향평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을까요? 유전자조작으로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어낸다거나 뇌이식술을 통하여 생명을 연장한다거나 하는 지금의 생명윤리로는 허용되지 않은 기술이 개발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아마도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부정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나름대로 이해를 해보았습니다.

 

제사문화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상중에 있는 필자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기제사에서 가족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거나 큰 재산을 물려주고도 제사 같은 귀찮은 일은 만들지 않은 부모를 세련되고 여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제사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부모제사를 잘 모셔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복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란 돌아가신 분의 자손들이 모여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그분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공유하면서 가족공동체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양보와 역할분담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관계가 공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멈추는 시간>에서 종교에 대한 저자의 열린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 책에서도 저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원불교, 힌두교, 기독교와 뉴에이지운동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 작은 반도에 있는 지정학적 특성상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여 알맞게 조화시키는 용광로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우리사회의 규범적 전통을 지켜온 유교에는 곁자리조차 내주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대안 공동체 운동을 제시하면서 가정이라는 전통적 사회단위를 깨트려야 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무너져가는 가정을 보완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는 길은 없을까요?

 

저자가 원시기독교나 불교 공동체 사회와 비슷한 모습의 대안공동체가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교적 재산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주거비용 및 기타 부대비용을 줄이고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즐기자는 취지로 만들어질 것이다. (…) 대부분의 가정이 해체된 뒤 비슷한 가치관, 종교관,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가정이자 종교 집단을 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214쪽)”라는 저자의 생각에 문제는 없을까요? 저자 역시 이들 집단에서 갈등은 없지 않겠지만 가족과 달리 언제나 탈퇴 가능하다는 점 특별한 공동체 활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들도 피해갈 수 없는 갈등요소들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을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죽음의 방식’도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고독사가 사회적 화두가 된지 오래입니다만 자살클럽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잉여살해를 돕는 비밀조직이 등장할 것이라는 저자의 예측이 차라리 틀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세 시대가 되면서 존엄하게 늙고 존엄하게 죽는 것이 많은 사람의 화두가 된지 오래이며, 가까운 미래에는 대책 없이 늘어나는 의료비에 대한 압력 때문에 선별적으로 안락사가 합법화 될 것(225쪽)”이라는 저자의 예측 역시 틀릴 것 같습니다. 이유는 ‘선별적’에 있습니다. 자신이 그 선별되는 그룹에 드는 것을 용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어머님 장례식 때 ‘부모나 형제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늘어간다.(232쪽)’라는 저자의 예견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힘든 현재를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단순히 화를 누르거나 자학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내 안의 잠재적인 힘을 찾아내는 것(234쪽)’이기 때문에 미래를 그려보는 일 역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가치가 미래에는 어떻게 기능할지 상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저자의 마무리 말씀을 통해서 <다음 인간>에 펼쳐놓은 저자가 예견하는 미래의 상황들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역설을 담고 있는 것 같다는 자의적 해석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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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의 계보 살림지식총서 37
안혁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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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른 책입니다. 그리고 보면 영화 <대부>를 비롯해서 마피아를 소재로 한 영화가 대중의 관심을 끈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영화에서 등장하는 총격장면들이 그저 영화적 장치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알 카포네가 시카고에서 붙잡히는 것으로 마피아가 암약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혁선생님의 <마피아의 계보>는 마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들을 많이 바꾸게 되는 기회사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먼저 ‘마피아’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고 있습니다. 1658년 시실리의 한 문헌을 보면 이교도 신앙을 믿는 어떤 여성을 묘사하면서 ‘큰 뜻을 품은, 포부를 가진, 자존심이 쎈’ 등의 뜻으로 마피아(Maffia)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랍 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대담한 사람, 용감하고 배짱있는 남자 또는 허풍선이’를 뜻하는 mabias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거나, 한때 팔레르모를 통치했던 Ma afir라는 사라센 부족의 이름, 시실리의 마르살라 지역에서 발견된 곳으로, 이교 신앙 등의 이유로 쫓기던 사라센들이 은신하던 mafie라는 이름의 동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날 범죄조직의 대명사로 쓰이기 이전에는 “뛰어난, 남자다운, 훌륭한”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단어라는 것입니다.

지중해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시실리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코끝에 올려진 듯한 섬으로 지중해의 요지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시실리섬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며, 적에 대하여 협심하여 대항하고, 일단 친구라 하면 그가 비록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절대로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고 합니다. 즉 마피아란 시실리인들의 성격과 삶의 철학,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와 그들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 그들의 기초 도덕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민족의 자주성이라 시실리의 독립 따위 보다는 자기와 자기 일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 역시 법에 호소하기 보다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실리 사람들이 미국의 암흑가를 주름잡게 되는 것은 서기 1900년을 전후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대이민의 시기에 시실리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되면서인데, 1886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베수비오화산이 분화를 시작하면서 흉년과 기아가 닥친 것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시실리안들은 먼저 자리 잡은 아일랜드계와 유대계 사람들과 세력을 다투게 되었지만, 단결력과 근면한 천성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는 것입니다. 마피아가 미국의 암흑가에 터를 잡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바로 1920년 미국 전역에 확대하여 실시한 금주법이라고 합니다. 금주법은 미국 전역에서 술의 제조와 술의 수입 수출, 유통, 판매 등 술에 관한 모든 것을 금한 법이었지만, 술꾼들에게 금주가 원천적으로 불가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법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실리 출신으로 암흑가에서 주도권을 처음 잡은 이는 뉴욕 마피아를 창설한 귀제페 마세리아라고 합니다. 당시 뉴욕에는 다섯 개 정도의 마피아 그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살바토레 마란자노의 주도로 귀제페가 제거되고 마피아 패밀리를 통괄하는 리더십을 선보였고, 시실리의 오랜 전통인 오메르타(침묵의 맹세)를 비롯한 다섯 가지 계율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 정보국은 본토해안을 지키기 위하여 마피아의 세력을 활용하기도 하였고,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하기 위하여 시실리에 거점을 마련할 때도 마피아의 힘을 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암흑가 세력이 권력에 밀착하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알 카포네가 미국 갱스터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합니다만, 알 카포네는 마피아가 아니라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아우트 피트라는 명칭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아우트 피트에는 비시실리 이탈리아 사람과 유대계, 러시아계, 영국계등 여러 인종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서 마피아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마피아가 형성될 무렵 주요 소득원이 되었던 밀주사업으로부터 노조 경영 사업, 호텔 카지노 사업, 상납금, 금융업을 거쳐 마약사업에 이르기까지 사회변화에 따른 재빠른 변신으로 비교적 근래까지 활발하게 활동해왔다고 합니다. 많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암흑세력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던 것처럼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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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명량>을 관람했습니다. 누군가는 ‘흥행하는 영화를 쫓는 레밍근성이 또 하나의 천만 영화를 만들어냈다.’라고 비꼬는 듯했다지만,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한 기억은 별로 없는 저로서는 이례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님 49제의 초제를 지내기 위해서 고향에 내려갔는데 스님과 약속한 시간에 착오가 생겼던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문화평론가 모씨가 “영화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죠. 흥행은 영화의 인기라기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로 해석해야할 듯”이라고 말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최근 읽은 조정우 작가의 <이순신 불멸의 신화; http://blog.joins.com/yang412/13475791>도 큰 몫을 한 셈입니다. <이순신 불멸의 신화>의 경우는 이순신장군이 치른 해전을 전술과 전략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영화 <불멸>은 그 중 하나인 명량해전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순신 불멸의 신화>를 읽으면서 다소 아쉬웠던 시청각효과를 느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먼저 어머님 상중에 오락영화를 관람한 것에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기간 동안 돌아가신 어머님의 위패를 모시고 다니던 이순신장군께서 명량싸움에 출정하기 전에 절을 올리는 장면을 보면서 모친에 대한 장군의 지극한 마음을 보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변명하고자 합니다. 모 평론가의 말씀대로 졸작이라고까지 할 수 없는 부분은 영화의 상당부분(나중에 듣자니 1시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을 차지하는 해상전투씬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장군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음인지 대장선 홀로 왜적의 대선단에 맞서 홀로 전투를 치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장군의 전술 전략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충분히 부하장졸들에게 각인이 되었을 터인데도 참전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대장선이 외롭게 전투에 나서 적선으로 둘러싸여 백병전을 치른다거나, 왜가 보낸 자객들이 이순신장군의 숙소를 침범하는 장면들이 사실일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영화적 요소로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강토에서 벌어진 전투였을 뿐 더러 당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장군께 자발적으로 적의 동태를 알려온 민초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이순신 불멸의 신화>에서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명량해전을 앞두고 수군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민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조금 남습니다.

 

역시 풍전등화 같은 운명의 나라를 지키고 왕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준 장군이지만 전투를 앞두고 고뇌하는 장면은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투가 두려워 탈영한 병사의 목을 치는 단호한 장군이었지만, 그 역시 패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장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 군대의 운명을 불문가지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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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꼬리를 무는 책읽기’는 책읽기의 잔재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내가 고른 이진숙님의 <위대한 미술책>을 읽고 있습니다. ‘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 세상을 바꾼 미술명저 62’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것처럼 미술에 관한 숱한 책들 가운데 저자가 고르고 고른 62권의 책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의 생각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62권의 책들 가운데 제가 읽어본 책은 오직 한권 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http://blog.joins.com/yang412/13157096>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술이나 음악에 관심은 있으나 접근방식을 잘 모르다보니 닥치는대로 책을 읽어왔습니다. 당연히 체계적이지 못한 지식이 뒤엉켜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위대한 미술책>은 미술에 관한 접근방법을 깨닫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고른 62권의 책 가운데 아내의 추천으로 몇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고 오주석 교수님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공무원교육원에서 가졌던 강연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라고 서문에 적은 것처럼 세계만방에 우리 문화의 우수함이 널리 알려지려면 먼저 우리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조상들이 이룩해낸 문화와 예술이 참으로 훌륭하고 격조 높은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저자가 희망한대로 월드컵이 끝나고서 거세진 한류의 열풍은 드라마를 거쳐 음악으로 옮겨갔으며, 드디어 외국인이 쓴 외국어로 된 한국관련 서적의 출판이 늘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마도 지금 볼 수 있는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다 보면 그 내면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우리 안에 숨어있는 한국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강연을 통하여 옛 그림 감상의 원칙과 옛 그림에 담긴 선인들의 마음, 그리고 옛 그림으로 살펴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청중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강연의 내용을 옮긴 까닭에 구어체로 되어 있어 읽어 내리다 보면 마치 저자가 마치 눈앞에 서서 어떤 때는 조곤조곤히 또 어떤 때는 강하게 강조하는 듯하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연자는 이렇게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옛 그림을 보여드리기 전에 우선 옛 그림 감상의 원칙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선인들의 그림을 잘 감상하려면 첫째,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둘째,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7쪽)”

 

옛 그림을 볼 수 있는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어떻게 접근하는가 하는 기본을 먼저 설명하고서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려 있는 「씨름」이라는 소품을 놓고 옛 그림 감상법을 꼼꼼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전체를 개괄하고 이어서 그림의 세부적 요소를 따로 들어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자는 그림의 미학적 요소 뿐 아니라 그림을 통하여 그 시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까지도 유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등장인물의 모습에서 씨름의 승패까지고 예견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VTR자료로 된 강연내용을 바탕으로 원고를 만드신 듯, 행간에 연자의 행동이나 청중의 반응까지도 적고 있습니다. 연자께서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니 실제로는 옛 그림을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싶지요?’라고 던진 질문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대부분의 우리가 지금까지 부끄러워하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만들어낸 정체성 이론이라는 근거없는 왜곡에 휘둘려왔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이 난 다음에도 280년을 더 이어온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왕이 강압적으로 통치한 나라가 아니라 덕으로 보살핀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은 문화와 도덕이 튼실했기에 오백년이 넘게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옛그림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정신을 배우는 좋은 안내서입니다. 이진숙님이 <위대한 미술책>으로 꼽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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