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뒷골목 수프가게
존 고든 지음, 김소정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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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조직관리에 관한 노하우를 전하는 책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집필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제목 같습니다. 저자의 생각이 완벽하게 담긴 원제목 <SOUP: A Recipe to Nourish Your Team and Culture>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하겠습니다. 자기계발로 되어 있는 책분류 역시 조직관리로 해두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뉴욕에 관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책을 고른 저 역시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줄로 정리해보면 맛있는 수프는 좋은 재료만으로 끓여지는 것이 아니라 끓이는 사람의 노하우, 우리말로 하면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팥죽을 끓여보신 경험이 있는 분은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좋은 팥과 잘 만든 새알심을 넣어서 팥죽을 끓이는데 중요한 것은 팥죽이 완성될 때까지 잘 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젓지 않으면 팥죽이 눌어붙기 마련입니다. 조직관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수프 끓이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좋은 인재들로 구성된 조직이라고 하더라도 조직원들 간의 사랑과 소통이 원활한, 에너지가 넘치는 조직문화가 없다면 결국은 와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계발서나 조직관리에 관한 책을 보면 저자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핵심요령을 간추려 제시하고 그 내용을 설명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입니다만, 이 책은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조연으로 나오는 컨설턴트가 꼬투리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핵심을 짚어주고 주인공이 이를 자신의 회사에 적용하여 성과를 보인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말은 될지 모릅니다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직관리의 기본원칙은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몇 평짜리 수프가게에서 얻은 팁을 흔들리고 있는 굴지의 수프제조회사, 느낌 같아서는 캠벨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를 살리는 묘방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선입견일까요?

 

어떻든 식품업계의 우상이었던 수프 사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하는데, 마케팅도 문제가 없고 광고도 문제가 없는데 오로지 독성이 잔뜩 낀 공기에 점령당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회사경영의 경험이 전무한 마케팅팀장 낸시가 회사를 구하는 잔 다르크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설정도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전문지가 수프사의 잔 다르크가 어떤 완벽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성공 확률은 0에 가깝다는 전망을 내놓은 상황에서 낸시가 뒷골목 수프가게에서 얻어들은 처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랑으로 냄비젓기, 2. 희망으로 이끌기, 3. 비전 전파하기, 4. 신뢰감 쌓기, 5. 소통으로 관계의 공백 채우기, 6. 언제나 솔직하기, 7. 참여하는 관계 만들기, 8. 영감과 격려, 권한 분산, 지도 넣기, 9. 감사하기, 10. 열정으로 뜨겁게 하기, 11. 하나 되는 통합 창출하기. 사실 이런 처방들은 평상시 조직관리 기술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와해직전의 조직을 구하는 처방으로 사용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는 수프사의 이사들처럼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보아도, 저자가 제시하는 이런 방법들은 평상시 조직관리의 팁으로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뉴욕 뒷골목에 있다는 그 <엄마가 끓이는 수프>라는 가게는 진짜 있나요? 우리나라에서도 어머니의 손맛을 강조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어머니보다는 할머니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제조비법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잘 나가는 식당에서 수프 맛이 좋다면서 맛있는 수프를 만드는 비결을 알고 싶다는 손님을 선뜻 주방으로 모시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책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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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다 - 가톨릭 신부이자 선 마이스터, 위대한 영적 스승이 전하는 내 안의 신을 만나는 길
빌리기스 예거 지음, 양태자 옮김 / 이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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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종교와 과학의 논리가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과학의 논리에 마음이 더 기울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응용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의학을 전공한 탓도 있겠고 종교와는 거리를 두어온 때문일 것입니다. 광대한 우주의 시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생물 종의 존재를 진화라는 과학적 원리로 설명이 가능해지면서 창조론은 빛을 잃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쌓아올린 성 안에서 무한하게 확산되고 있는 과학과의 교류를 금하고 있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 종교는 입지가 좁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베네딕도회 빌리기스 예거 신부의 <파도가 바다다>를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래도 깨트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거신부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 관상에 몰두하고 있는데, 특히 일본의 가마쿠라 선방에서 선 수행을 경험하면서 동서양의 다양한 신비주의 전통에 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비주의적 전통을 현대적인 세계관과 결합하여 잠든 인간 의식을 깨우고 꽃피우자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신의 존재와 죽음의 의미 등을 지금까지 발전해온 과학적 성과와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파도가 바다다>는 예거 신부가 독일복음주의교회의 연구지도관이자 철학자, 그리고 유명한 출판사 헤더에서 스펙트럼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는 크리스토프 크바르흐와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원저를 우리말로 옮긴이가 붙여놓은 풍부한 주석은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창조자로서 본체적으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의 존재와 비존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관점에서 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과 세상, 정신과 물질, 존재와 비존재는 결코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20쪽)” 그리하여 저자는 신이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의 될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불교, 흰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종교 간의 화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복합적이고 생화학적인 세포구조와 조직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지성은 정신세계의 특정한 표명이고 뇌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물질적으로 응고되고 농축된 존재입니다.(75쪽)” 저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는 결국은 부처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체험을 형식 안에 끼워 넣어 제도화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신의 죽었다’라고 주장했던 니체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도달해야 할 ‘저쪽세계’는 사실 없습니다.(161쪽)”라는 그의 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시간을 배치해 설립한 신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살아 움직이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면서도 명상훈련을 통하여 영성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명상훈련에는 기도 뿐 만이 아니라 명상춤, 활쏘기, 태극권 등 수련법 나아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영성적 욕구를 성취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치유의 기적을 가져오는 기도의 영향력을 해석하는 것 역시 기도를 들은 신이나 성모 마리아, 혹은 천사가 하늘에서 즉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 영역을 일으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도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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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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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님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의 사진예술 부문을 이야기하면서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위대한 미술책, 382쪽)”라는 수전 손택의 암울한 진단을 인용하였습니다. 1839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라고 통탄했다고 합니다. 진동선님이 <사진예술의 풍경들; http://blog.joins.com/yang412/13251174>에서 폴 들라로슈의 한탄으로부터 1970년 테오도와 아도르노, 그리고 2000년 더글라스 크림프의 말까지를 종합하여, “결국 미술이라고 하는 불멸의 시각예술의 얼굴을 없앤 주인공은 사진이고, 미술을 하나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게 한 것도 사진이고, 미술을 옛 모습으로 자리할 수 없게 만든 것도 사진이다. 예술이 끝없이 그 모습을 바꾸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사진인 셈이다.(사진예술의 풍경들, 7쪽)”라고 사진예술을 자리매김하고 한 것과는 상당한 의미의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진예술의 발전과정을 잘 정리한 책들이 없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진숙님이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와 <타인의 고통>을 추천한 이유는 아마도 저자생각이 손택과 공명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면서 전진해온 자본주의 체제가 줄곧 사진의 무한한 이미지 생산 능력과 공존해 왔다(위대한 미술책, 384쪽)”라는 손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진은 풍요롭고, 낭비를 일삼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 사회의 본질적인 예술”이라고 단정하는데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택은 사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잘 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손택은 ‘사진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여행 중에 사진을 찍는 행동에 관해서도, ‘사진은 경험을 증명해주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경험을 거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26쪽)’라고 합니다. 여행 중 마주치는 것들은 앞뒤 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대는 것으로 자신의 경험을 확증하려고 할 뿐,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처로운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 스마트폰에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동생이 찍은 어머님 사진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진은 폰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저자가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야만적인 식민전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국 전쟁은 자유 진영이 소련과 중국에 맞서 벌이는 투쟁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특성을 감안할 때 무제한적으로 화력을 퍼붓는 미군의 잔인함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라고 여겨졌다.(41쪽)” 탱크를 앞세운 기습공격으로 국군을 괴멸시키면서 단숨에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이나, 변변한 무기도 쥐어주지 않고 전선으로 몰아넣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반인륜적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사진에 관하여>는 저자가 197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다이안 아버스의 회고전을 보고서 사진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로 생각하고서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타임스 서평」에 발표한 여섯 편의 에세이가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20세기의 주요 기록 매체인 사진의 본성에 관하여 그동안 제기된 적이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는 데서 찬사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리한다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또 다른 각도에서 확인시켜주기를 바라는 독자의 바람과는 달리 저자는 서로 상반된 주장, 인용, 자료들을 태연하게 병치하여 독자들을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불편하다는 비판으로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재원님의 번역으로 소개된 <사진에 관하여>도 번역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독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읽고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점이라든가, 이진숙님께서 <위대한 미술책>에서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꼽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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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물길을 거닐며 - 강은 넓고 깊고 오래고 길다
김주영 지음, 권태균 사진 / 김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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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을 주제로 한 한승원 작가님의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http://blog.joins.com/yang412/13502859>와 같은 기획으로 만든 책 같습니다. 김주영 작가님이 맡은 낙동강 편의 제목은 <고향 물길을 거닐며>입니다. 작가께서 모두에 적은 것처럼 낙동강은 520킬로미터나 되는 남한에서 제일 큰 강입니다. 유역면적만해도 2만 3천 제곱미터에 달해서 남한 전체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에 낙동강에 얽힌 이야기를 모으면 책 한 권으로는 어림없을 듯합니다. 한승원 작가님의 경우는 영산강의 시원에서부터 강이 흘러가는 쪽으로 따라가면서 이야기들을 정리해가는 방식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래서 김주영작가님은 낙동강 유역의 지형과 기후, 낙동강을 둘러싼 역사와 유래, 풍경과 자연경관, 낙동강 유역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 요즈음 유행인 걷기 좋은 길들과 거기 얽혀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낙동강에 사연을 묻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 등의 작은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역사서가 아닌 탓에 선사시대, 가야, 6,25동란, 그리고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페놀오염사건과 같이 작가 마음대로 고른 시대의 이야기를 정리하였습니다.

 

언젠가 지나는 길에 이름을 들어본 듯한 예천에 있다는 삼강나루의 주막 이야기 같이 자칫 잊혀질 수 있는 우리네 삶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륙의 운송수단이 취약했기 때문에 강과 바다를 이용한 해운이 맡은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규모에 걸맞게 하구에서부터 구포, 삼랑진, 현풍, 사문진, 왜관, 상주의 낙동과 신촌, 예천의 달지진과 마전, 안동의 영호진에 이르기까지 수운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류와 중류 그리고 상류의 지형에 맞는 나룻배가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강에서는 큰 나룻배가 있고, 작은 강에는 거룻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난 정부에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운하를 개발해서 한계에 이른 육상운송로를 대체해보겠다는 발상이 나왔을 때,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운하가 타당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세월호 침몰사고가 나면서 해상운송은 날씨와 지형 등 외적 요인들에 의하여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혀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작가는 낙동강 유역에 수없이 흩어져 있는 나루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공무도하가」와 서도잡가 「배따라기」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 나루와 관련된 문학작품이라고 이해하면 그만이겠으나, 기원전 3,4세기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공무도하가」는 출전 등의 문제로 중국노래라는 이견도 있다고 합니다만, 대동강 나루 등 우리의 고대강역의 어느 나루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우리 노래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노래의 전문은 2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채옹(蔡邕)의 〈금조 琴操〉에 실려 있으며, 우리나라 문헌에는 16세기말 또는 17세기 초의 저작으로 보이는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 五山說林草藁〉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봉화 청량산을 비롯하여, 도산서원, 안동 하회마을,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 등을 돌아본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낙동강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경북 상주시가 최근에 낙동강의 풍부한 자연유산과 아름다운 절경, 그리고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만든 13곳의 문화탐방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길(mountain road), 강길(river road), 그리고 들길(field road)로 조성했다 해서 MRF라는 영어로 된 약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만, 단순하게 풍경을 즐기며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새겨가면서 걷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영산강편을 리뷰하면서 빠트렸던 권태균작가님의 사진도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낙동강의 사계를 담은 아름다운 사진은 물론이고 역사적 장소를 담은 사진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책내용과 잘 어울려 읽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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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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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이다.”라는 카피를 보니, 여행기를 정리하려고 준비하면서 독서목록에 올렸던 책이었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보면,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은 쳐다보지도 않는 버릇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나서 소설이라는 이 책을 그저 에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요약한 책 소개를 보면, 정신과의사인 저자가 진료실에서 약물과 심리치료를 통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리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자진료를 통해서 정신질환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결국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찾아낸 행복을 여행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찾아가는 형식을 취한 것 같습니다.

 

대도시에서 성공한 정신과의사로 살아온 꾸뻬 씨가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자신과 자신이 진료하고 있는 환자 모두 때문입니다. 꾸뻬 씨의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진짜로 병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진짜 불행한 삶을 산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또 행복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환자들을 진료하는 꾸뻬 씨는 나날이 늘어만 가는 세금이 부담이 되고 자신이 사람들을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면서 자신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꾸뻬씨에게 환자로 오고 있는 이리나부인은 이렇게 권합니다. “당신에게는 여행이 필요해요. 그게 당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좋을 거예요.(21쪽)” 누가 의사고 누가 환자인지 헷갈리죠?

그래서 꾸뻬 씨는 자신을 특별한 의사로 만들어 줄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꾸뻬 씨의 연인 클라라는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여행에 동행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진정 사랑하는 것 맞아요?) 독특한 것은 꾸뻬 씨가 살고 있는 곳이나 꾸뻬 씨가 여행한 곳은 중국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익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꾸뻬 씨는 항공사의 배려로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게 되는 선물을 받게 되어 행복해집니다. 반면 옆 좌석에 앉은 비비엥씨는 별다른 느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복의 첫 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라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중국에서 친구 뱅쌍의 배려로 만나게 된 잉리를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우연히 산에 오르게 된 꾸뻬 씨는 츄린 사원에서 노승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라고 믿는 것”이 문제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중국으로 일하러 온 여성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쉬면서도 행복해하고 있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는 배움을 얻게 됩니다.

 

꾸뻬 씨는 이렇게 다양한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기록해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23개의 행복에 대한 배움을 찾아 정리하게 됩니다. 행복에 대한 배움을 마친 꾸뻬 씨는 약속대로 다시 노승을 찾아갑니다. 총정리를 하는 셈입니다. 노승은 행복을 목표라고 여기는 것이 왜 잘 못된 것인지 답변을 해줍니다. “삶에서는 목표는 많은 일들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행복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190쪽)”이라서,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스스로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란 진리를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제목으로 프롤로그를 썼던 박정효님의 <인생 디자인북; http://blog.joins.com/yang412/13309033>을 읽고 리뷰에서 인용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 L'Oiseau bleu>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살고 있는 곳 가까이 있더라고 마무리되는 것처럼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단순한 진리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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