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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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서 특정 분야의 역사를 다룬 책은 몇 차례 소개한 적은 있습니다만, 정통 역사서를 다룬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딱딱한 내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하려면 일단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사서를 읽기 전에 역사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싶어 고른 책입니다. 조금 딱딱하다 싶은 책은 집중이 잘되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좋습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리트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분명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A. L.로즈박사에 이어서 1961년에 맡았던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발표하기 위하여 준비한 내용으로 보이며,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사실과의 관계, 사회와 개인과의 차이점, 역사와 과학 그리고 도덕 사이의 관계,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의 진보의 본질적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측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볼테르가 만든 역사철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란 사실들의 집합체로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철학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콜링우드가 정리한 역사 철학에 대한 견해 -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거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유(思惟)’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는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를 발전시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라는 함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흔히 간과하기 쉬운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리를 통찰한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 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책을 읽을 때는 항상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역사가가 말을 못하는 멍청이일 것이다.(40쪽)’라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혹자는 개인이 남긴 기록도 개인의 역사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이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이었을 것입니다. 사회 역시 그 구성원들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한 사람의 개인이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삼자적(三者的) 위치에서 사실을 들여다보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87쪽)”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 역시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라고 하였고, 역사가는 오늘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가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과학이라는 분야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다음백과사전에서는 역사과학을 “과거에 있었던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사실과 사상(事象)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빈델반트는 학문 방법상 자연 과학에 대립시켜 “인간에 관한 사물과 현상을 반복이 불가능하고 일회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 보고 연구, 기술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1)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리고 (5)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라는 이유로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역사가는 언어사용에서부터 과학자들처럼 일반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들에 간여하는 요소들을 단위로 분해하여 그들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방법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자, 역사가, 그리고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다만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사회과학자와 그의 자료 사이의,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이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역사와 사회과학의 남다른 특징으로 생각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과학자들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문제를 제기하고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추구해감으로서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사실의 원인들을 서로 연결하는 인과관계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한 것인가에 관한 논란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에서의 결정론; 혹은 헤겔의 간계(奸計)’라는 주제와 ‘역사에서의 우연;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플라톤으로부터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결정론을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사실 역사적 사건 역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고찰하는 관점에 따라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145쪽)’라는 한발 물러선 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는 반복된다’면서 역사가 보여준 인과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한 일반화과정을 적용한 산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연론은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계속이라는, 즉 우연의 일치에 의하여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우연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이론입니다. 기원전 3체기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연론은 특히 영국의 역사가 베리와 피셔 등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연적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역사에서의 원인은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역사에서의 해석은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현재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진보하려고’, 즉 어떤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위에 진보라는 가설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라는 것입니다.

 

‘지평선의 확대’라는 마지막 강의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의 강연이 있을 무렵,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의 충격으로부터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위험스럽기까지 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들로부터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끝에 도래하리라고 예견되었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9쪽)” 그리하여 저자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를 표명하였던 것인데, 2판의 서문을 보면, 이후 찾아든 동서냉전구도는 저자가 품었던 희망과 만족감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핵멸망의 위협은 배가되었고, 뒤늦게 시작된 경제위기는 서구사회 역에 걸쳐 산업국가들을 황폐화시키고 실업을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든 1판의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의 파국을 예언하는 목소리들이 퍼지고 있어도 영국이 나아가 세계가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며 또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했고, 현재 세계는 저자의 예언대로 여전히 진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990년 소련의 해체를 저자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축이 서유럽을 떠나 북미대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의문을 달아놓았습니다. 저자는 러시아혁명의 본질을 이성의 확대로 보았습니다. 유럽이 이성의 확대를 외면하는 사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혁명이 확산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즉 인민대중이 사회인식과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고, 각자의 집단들을 과거와 미래가 있는 역사적 실재로 깨닫게 되었다는데 의미를 둔 것입니다. 저자는 1955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친 풀리블랭크교수가 “중국이 인류 역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223쪽).”라는 확신을 밝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점을 우려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제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낙관주의자임을 표명하는 저자가 영국이, 나아가 영어사용권 국가들이 전반적인 역사의 진보에서 뒤처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한 체념한 채로 어떤 향수 어린 침체상태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인데, 그의 불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1982년 타계하는 바람에 2판의 서문만 완성되었을 뿐이어서 1판에 더해질 저자의 새로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여전히 역사철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역사서를 읽을 때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편집자가 저자의 자료철에서 뽑은 ‘제2판을 위한 노트’가 덧붙여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1판의 내용을 상당부분 보완한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큰 것 같습니다. 저자가1판에서 무게를 두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실패한 혁명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힘과 운동이 도처에서 싹트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그러한 움직임을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내용을 정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 역시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볼세비키 혁명이] 그 첫 번째 단계였던 세계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몰락을 완성시킬 세계혁명은 제국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인민들의 저항이 되리라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269쪽)”라고 노트의 말미에 적은 카의 믿음은 개인적으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움직이고 진보한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놓치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는 빠르게 진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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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 - 나를 꿈꾸게 하는 세계의 절경 64
시호 지음, 김현희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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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킷리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9472741>가 소개된 뒤로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버킷리스트에는 대체적으로 가보고 싶은 곳을 적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소개합니다. 일본의 인터넷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는 시호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하여 소개한 여행사진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여행>입니다. 재미있는 회사인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페이스북을 만들고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는지 경쟁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세계의 절경이라는 페이스북을 열게 되었는데,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였기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이유’는 ‘바로 낯선 땅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그 미지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려 62만명의 팬들이 찾고 있고, 책으로도 만나고 싶다는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모두 64곳의 절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차 선정 기준은 저자의 페이스북을 찾은 방문자가 누른 ‘좋아요’가 기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2위에 오른 몰디브의 바두 섬이 제외되고, 105위에 오른 중국의 싼유둥 절벽 레스토랑이 포함된 것을 보면 결정적인 것은 아닌가 봅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한국은 남한이건 북한이건 한 곳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열 곳이나 선정되고 있어 더욱 아쉬운 것 같습니다. 공연한 애국심의 발로일까요? 홍하이탄의 풍경구는 순천만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라서 공연히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64곳 가운데 제가 가본 곳이라고는 톨레도 한곳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앞으로 가볼 곳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미국도 꽤나 돌아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선정된 여섯 곳은 모두 생소한 곳입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페이스북을 찾는 분들의 생각과 제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스페인과 모로코에서도 네 곳이 선정되었는데, 톨레도를 제외하고는 이번 여행의 코스에서 떨어진 곳이라서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여름철에 볼 수 있다는 안달루시아지방의 해바라기밭을 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여름 더위는 장난이 아니라고 해서 여름을 피한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점도 있습니다. 내년에는 남미를 여행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서 적어도 서너곳 정도는 방문이 여행일정에 포함될 수 있도록 계획을 짜보려 합니다.

 

저자가 이곳들을 모두 방문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사진들 가운데는 헬리캠과 같은 특별한 장비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있고, 중간에 자신이 다녀온 여행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사진만 간단하게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그 곳까지 가는 경로와 함께 여행하면 좋은 장소라든가 그곳을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에 대한 정보라든가, 그곳을 여행할 때의 주의사항 등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나온 책에는 일본에서 가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겠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떠나는 것으로 보완한 것 같습니다. 그녀의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사진에 대한 설명이 일본어와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정보는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여행상품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곳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유여행이라야 가능할 것 같고, 여기 소개된 곳 하나만 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사진으로 보아도 이렇게 좋은데 현장에 가서 직접 보면서 얻는 느낌이 어쩔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를 가장 많이 얻었다는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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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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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도 묘한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계인들이 이 길을 주목하게 만든 <순례자; http://blog.joins.com/yang412/13056408>를 읽으면서 파울로 코엘료를 처음 만났지만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연금술사>까지 읽기를 더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모로코로 건너가기 위하여 따리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조형진 가이드가 바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우연히 반복되는 꿈을 따라서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 다녀오게 되는 소설인데, 전반부의 주요 무대가 되는 장소에 우리가 들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미 내용을 알고 계신 소설이라서 내용을 요약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저자가 책에 담고자 했던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을 보면 행복이란 가까운 곳에 있더라는 파랑새이야기의 스페인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은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구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자아(自我)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에 답을 정리한 줄리언 바지니의 <에고 트릭; http://blog.joins.com/yang412/12873764>이 떠오릅니다. 줄리언 바지니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과,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에서 자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진주 관점’의 허점들을 제시하면서 ‘묶음이론’이야말로 자아를 보는 올바른 관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인공이 산티아고인 것은 어쩌면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순례자의 무대가 된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고행을 예고하는 이름이기도 하지요. 운명을 믿는 우리의 정서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피라미드로 가기 위한 첫 기착지 탕헤르에서 전재산을 잃어버린 그에게 다시 여비를 마련할 기회를 준 크리스탈 상점 주인이 무심코 뱉은 마크툽(“종교적 의미로 쓰이는 아랍어로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있는 말이다’라는 의미로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 정도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고 옮긴이는 각주에 달았습니다.)이라는 말은 ‘운명이야’라는 말이 더 실감날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는 연금술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야기의 곳곳에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숨겨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자의 입을 빌어 전하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데 있도다.(62쪽)”라는 경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실험에서는 농구하는 사람들이 패스하는 숫자를 헤아리는 사이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등장해서 왔다갔다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더라는 것을 보면,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47쪽)”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 산티아고에게 전하는 위대한 진실입니다.

 

환상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사하라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정말 이럴까 싶은 생각과 함께 사막에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산티아고는 행렬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별 쪽을 바라보았다. 사막 위로 반짝이는 수백 개의 별들 때문에, 지평선이 조금 더 낮아진 듯 보였다.(144쪽)’ 사막에서는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을까 아주 궁금해집니다. 사막에서도 산티아고가 발견한 소라껍질을 만날 수 있을까요? “바다는 언제나 그 소라껍질 속에 있네. 그게 바로 그 소라껍질의 자아의 신화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바다는 소라껍질을 결코 떠나지 않을 걸세. 이 사막이 또다시 파도로 뒤덮일 때까지 말일세.(224쪽)”라고 연금술사가 말 한 것처럼 그 소라껍질에서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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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인생질문 20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4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박근재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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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535093>을 읽으면서 최고를 지향하는 교육방법을 논하는 듯한 느낌이 남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를 받아들면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기획이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와 심리학자 안토니아 마카로가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품어보았음직한 스무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각각 답하는 방식입니다. 줄리언 바지니는 ‘자아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한 <에고 트릭; http://blog.joins.com/yang412/12873764>을 통해서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 자아의 통일성은 심리적 속임수가 만든 결과물이다. 2.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다. 3. 속성 자체가 변하기에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세 가지 명제에 기초하여 자아의 본질을 설명하였습니다.

 

<최고가 아니면 실패한 삶일까>의 저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경과가 아니라 노력일 뿐이라고 전제합니다. 즉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자들은 결과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지면서 그렇지 못한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자기 향상을 위해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실패를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최고, 행복, 목표, 욕망, 자긍심, 자기기만, 사회적 지위, 책임감, 새로움, 선택, 감정표현, 자부심, 직관, 외모, 중도포기, 낙관주의, 후회, 삶의 의미, 영성, 통찰 등 모두 20개의 주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적고 있습니다. 주제에 따라서는 시각이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어 그 차이를 서로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획입니다. 두 저자가 각각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두 사람의 경력을 보면 두 분야에 대한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어 굳이 철학자의 시각은 이렇고 심리학자의 시각은 이렇다고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스무개의 질문 가운데 열 두 개의 질문에서 심리학자 마카로의 답변이 먼저 나오고 있지만, 누구의 답변이 먼저 나오느냐 하는 것도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책임의 범위를 살펴보면, 철학자는 일상생활에서 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유의지의 문제를 끌어들이면 상황은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감정이 개입되게 되면 더욱 복잡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각자의 느낌을 신뢰하지 말고 자신의 통제권 내에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실제로 책임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는 과도한 책임감도 책임회피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자만을 경계하고 겸손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만, 자만 혹은 자부심과 겸손에 대한 철학자의 설명은 다소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의 겸손한 태도를 보고서 그것이 거짓된 겸손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겸손이란 적당한 자부심을 의미한다고 이끌고 가는 과정이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반면 심리학자는 작은 일에도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선택’이라는 주제를 놓고서는 두 사람의 시각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는 ‘선택이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고, 심리학자 역시 ‘우리는 대부분 일관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를 읽게 되면 저자들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 겸 심리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저자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핵심 요소는 자신을 위해 사고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며, 누구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며, 그렇다고 그 선택에 대하여 지나친 책임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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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가우디다 - 스페인의 뜨거운 영혼, 가우디와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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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던 스페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아랍문명과 유럽문명이 첨예하게 충돌하던 곳입니다. 두 문명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남겨진 유적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이미 읽은 책 두 권을 더해서 모두 여덟 권의 책을 가방에 넣었습니다. 스페인에 관한 책은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 http://blog.joins.com/yang412/13205419>과 김희곤교수님의 <스페인은 건축이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81380>와 <스페인은 가우디다>입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는 역사, 건축은 물론 미술과 음악 그리고 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박식한 조형진 가이드를 만나는 행운을 얻어서 스페인, 모로코 그리고 포르투갈을 같이 여행하면서 앎의 지평을 광범위하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행은 준비하는 만큼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준비한 책입니다. 김희곤교수님의 <스페인은 가우디다>는 받아두고서도 여행을 준비하느라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고, 여행길에 읽는다면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읽기를 미루어둔 것도 있습니다.

 

저자는 전작 <스페인은 건축이다>에 이어 <스페인은 가우디다>를 통하여 현대 스페인 건축에 우뚝 서 있는 가우디를 따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 한 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돌아본 람블라스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 그리고 성가족성당과 구엘공원이 가우디예술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이튿날 방문한 몬세라트수도원은 가우디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곳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스페인은 가우디다>에서 가우디의 삶의 족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19세기 스페인 건축에 새로운 지평을 연 가우디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기억되는 것은 그의 건축철학이 요즈음의 사조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우디 이전의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건축을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양식의 틀로 재단했다. 하지만 가우디는 홀로 보이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자연과 유적과 전통을 사유하면서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건물을 지었다.(5쪽)”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바르셀로나 서쪽 작은 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장간을 하던 친가와 외증조부가 목수일을 하던 외가 모두 수공업과 관련 있는 기술자 집안이었던 것은 그가 천부적인 공간감각을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가우디가 태어난 레우스 그리고 가까이 있는 타라고나는 로마시대에 100만의 인구가 살던 전진기지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이 지역을 잠시 점령한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가우디는 이곳에서 구축물 자체의 구조체를 강조하는 로마건축물과 빛과 조각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기하학의 비례와 장식효과를 강조하는 이슬람 건축물에 주목하고, 이로부터 가장 스페인적이고, 가장 카탈루냐적이며 가장 가우디적인 건축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행 두 번째 날 몬세라트를 찾으면서 저자의 다음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 건축의 뿌리는 자연주의, 민족주의, 기독교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자연주의 사상은 로마, 이슬람, 중세로 이어지는 문화유산과 자연의 교감에서 얻은 것이다. 민족주의는 마드리드 중심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카탈루냐 민족문화를 정착시켰으며, 그의 지역적인 기독교 사상은 몬세라트에 뿌리를 두고 있다.(25쪽)” 로마네스크 양식의 검은 성모상을 기념하기 위하여 12세기에 세워진 몬세라트수도원이 있는 몬세라트산은 영적인 기운이 서려있는 영산으로 카탈루냐 민중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도원 뒤로 우뚝 서있는 몬세라트산은 언뜻 보면 주상절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화강암인 주상절리가 각진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퇴적암으로 되어 있는 이곳은 흙의 질에 따라 차별적으로 풍화되어 완만하면서도 기묘한 형상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곰 한마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듯하면서도 달리 보면, 역시 곰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서 하늘을 품으려 드는 모습이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미국 콜로라도의 브라이스 캐년에 서있는 부두(boodoo)와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몬세라트산과 가우디의 건축과의 관계까지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가우디 건축은 몬세라트의 작은 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몬세라트의 육감적인 암석기둥은 성가족대성당의 첨탑으로 부활했고, 천사들의 얼굴을 두르고 있는 몬세라트의 암벽은 카사밀라의 외벽과 지붕으로 변주되었다. 구엘 성지의 지하제실의 원시적인 화강석 기둥은 거친 몬세라트의 암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25쪽)”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하늘 아래 독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새로운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가우디의 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르셀로나 엘 프라트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입니다. 김희곤교수님은 “람블라스 거리를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바르셀로나의 낭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며, 세상 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다.(78쪽)”라고 단언하였지만, 이곳에서 저자의 말대로 ‘도시의 모퉁이에서 정신적 위기를 내장처럼 드러내고 살아가는 도시의 영혼들이 다른 영혼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고뇌를 청소’하기에는 겨우 20여분 주어진 자유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게다가 람블라스 거리는 관광객의 소지품을 노리는 불청객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주영은 가이드의 경고 때문에 마주 오는 유럽 관광객들의 여유마저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떨결에 버스를 내리면서 미처 지도를 챙기지 못한 까닭에 람블라스 거리 끝에 있는 레이알 광장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서있다는 가우디의 초기작품인 가로등의 원형을 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지금도 건축이 진행되고 있으며 완공일이 정해지지 않은 성가족 대성당을 짓는 일이 약관 31세의 가우디에게 넘겨진 것은 1891년 3월이라고 합니다. 이날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 요셉 영성회 소속 회원들 앞에선 가우디의 손에는 달랑 한 장의 스케치가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스케치에는 고작해야 버섯모양의 탑들이 하늘을 향하여 삐죽삐죽 솟아 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투박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스케치에는 기하학적 질서가 한눈에 드러나 있었고,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가우디의 설명은 요셉영성회 회원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십자형으로 다섯 개의 복도와 바실리카 양식의 큰 회랑 세 개를 만들 것입니다. 마요르카 거리에 면한 남쪽 정면에는 세 개의 정문을 통과하여 다섯 개의 회랑과 연결되는 다섯 개의 입구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동, 서측면의 입구에는 다섯 개의 회랑과 연결되는 세 개의 입구를 만들 것입니다. 북쪽 후원 주위에는 입구를 설치하지 않고 제단을 둘러싼 외벽은 지하제실의 외벽과 이어질 것입니다.(94쪽)” 현대 건축물이 방대한 양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지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성가족 대성당처럼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변변한 설계도 없이 짓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싶습니다.

 

성가족 대성당의 건축이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성금에 의존하였기 때문인데, 최근 들어서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는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건축비를 충당할 수 있어 오히려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와 아내 역시 각각 25,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냈으니 성가족대성당의 건립에 일조를 한 셈입니다. 자유여행객은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단체여행을 고려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희곤교수님은 <스페인은 가우디다>의 앞부분에서 가우디가 성가족 대성당의 건축을 맡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끝부분에서 다시 성가족성당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우디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제목은 성가족 대성당의 건축이 여전히 진행 중인 점을 감안한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는 탄생의 파사드를 통해 성가족 대성당에 입장하여 성당 내부를 돌아보고, 수난의 파사드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입구에서 전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잘 못된 것이었습니다. 옥수수를 닮은 네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탄생의 파사드는 앞에 있는 공간을 최대한 물러서도 전체의 모습을 담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가우디 생전에 완성한 탄생의 파사드는 그의 예술세계만큼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어 길지 않은 시간에 모두 감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영은 가이드가 요약하는 설명으로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성가족 대성당의 건립이 세기를 건너오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는데, 오래 전에 올라간 부분의 화강석이 검게 변색된 것과는 달리 최근에 세워진 부분은 우윳빛 화강석으로 빛나고 있는 점을 비교해보는 것이 시간의 깊이를 감상하는 주요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김희곤교수님은 조언하기도 합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밖에서 보는 규모와는 달리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웅장한 내부 공간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김희곤교수님은 대성당의 내부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거대한 빛의 숲은 상상 속의 에덴동산을 돌로 빚은 것이다.(279쪽)” 동,서,남 각 정문에 세워진 12사도를 상징하는 4개의 탑은 내부의 예배공간을 보호하고 있고, 십자가 회랑의 교차점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중앙 첨탑이 4개의 첨탑의 호위를 받으면 교회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가족대성당을 구성하는 ‘영광의 파사드는 현실이자 부활을 상징하고, 탄생의 파사드는 과거를, 수난의 파사드는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광의 파사드에서 수난의 파사드로 이어지는 벽은 수많은 창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으로 대성당의 내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제단 앞에 걸린 화려한 천개 아래로 예수상이 매달려 있는데, 천개의 위에는 밀이 자라고 아래로는 포도넝쿨이 걸려 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포도주의 상징입니다. 서쪽 수난의 파사드로 대성당을 나서면 동쪽 탄생의 파사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와 성모, 천사, 12사제를 싣고 하늘로 떠나는 거대한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수난의 파사드 벽면의 조각은 가우디 사후에 조각가 수비라치가 조성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을 현대적 조각으로 빚어냈다는 것입니다.

 

성가족 대성당의 주출입구가 될 영광의 파사드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출입문에는 다양한 언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한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가족 대성당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가우디의 후예들이 열심히 공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가족 대성당을 보고서 구엘공원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카사바티에와 카사 밀라를 일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구엘공원은 1898년 미․서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이 좌절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 무렵에 착공한 건축물입니다. 당시 스페인 지성인들은 흩어 진 스페인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문화와 역사를 다시 고찰하여 상처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북소리]에서도 이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10144>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자연을 찾아내어 창조주와 협력하는 것뿐이다(173쪽)’라고 주장하던 가우디의 앞서가는 친환경건축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집단거주단지를 조성할 때 높은 곳은 깍아 내고 낮은 곳은 돋우는 건축방식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지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그대로 살려낸 가우디의 구엘공원을 김희곤교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뜻밖의 풍경을 품고 있는 구엘공원은 끊임없이 인간의 위치와 방향과 높이를 조정하며 시간 위로 흐르는 빛의 파편으로 자연을 조각하고 있다.(178쪽)” 구엘공원의 초입에 있는 카탈루냐 문장 속의 뱀머리나 도마뱀 모양의 퓨톤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다음 여행지가 되는 알람브라 궁전에서 보는 환상적인 수리시스템을 연상케 합니다. 가우디는 생전에 바르셀로나에 9개, 그 밖의 지역에 3개 등 모두 12개의 건축물을 남겼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건축물들 가운데 완성작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우디가 활동할 무렵 스페인에는 정형화된 산업생산에 반발하는 ‘모데르니스모’라는 문화적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가우디의 작품들을 포함하는 모데르니스모 건축물들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고, 모데르니스모 루트라는 하루 일정의 관광코스도 있다고 합니다. 반나절 동안 가우디의 작품을 중심으로 돌아본 바르셀로나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스페인 여행기를 통해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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