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성의 소리영어 Plus - 영어를 우리말처럼 선명하게 듣는 가장 확실한 방법
윤재성 지음 / 스토리3.0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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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중앙일보에서 영유아 영어교육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찬반이 팽팽하지만, 주입식교육보다는 문화로 놀이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데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해왔지만 지금도 제대로 말하거나 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기에 앞서 영어 말하기와 듣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처음 학원의 초급 회화반에 등록하였을 때 자기 소개도 제대로 못해 쩔쩔 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창피할 지경입니다.

 

제 사정이 그러면서 초등학교 입학하는 큰 아이는 따로 영어공부를 시키지 않고 데려가서 입학을 시켰습니다. 학교 수업 이외에 ESL반 수업을 병행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눈치였지만, 몇 달 만에 ESL수업을 마칠 정도 빠르게 적응했던 것 같습니다. 발음도 미국 아이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빠의 콩글리시를 은근히 낮추어보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을 나서서 해결해야 했으니 저도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윤재성의 소리영어>는 저처럼 나이 들어 영어로 듣고 말해야 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입니다. 저도 미국행을 앞두고 미국 영화 빌어다보고 매일 밤 <투나잇쇼>를 시청하기도 했지만, 들리는 것은 더디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방법은 같았지만 반복해서 들어야 빨리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차를 운전할 때는 영어방송을 주로 듣습니다. 영어듣기도 결국은 아는 만큼 들리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자는 듣는 원리를 깨치게 되면 알지 못하는 내용까지도 잘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인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해야 할 말은 미리 준비하기 때문에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상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으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더라는 것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말하는 것은 문법이 조금 틀려도 강약고저를 제대로 붙여 말하면 잘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커피마시는 곳에서 만난 친구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코리아에서 왔다고 말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다가 스펠을 붙여주었더니 “아하, 코.리아?”라고 ‘리’에 강세를 두고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코’에다 강세를 두고 밋밋하게 이어 발음하니 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독(不如一讀)’입니다. <윤재성의 소리영어>는 장황한 듯 하지만,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다녀오면서 느꼈던 영어로 듣고 말하기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의 핵심을 짚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인 영어실력이 1만 시간을 투자해도 안되는 이유’로부터, ‘영어를 익히는 유일한 방법은 선명한 영어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과, ‘모국어를 습득하듯 글이 아닌 소리로 영어를 익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훈련을 해서 영어를 잘 듣게 된 사람들의 체험담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30개의 문장을 가지고 하는 실전 트레이닝으로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영어조기교육에 대한 기사를 소개드렸습니다만, 저자는 영어로 말하기를 배우는데 적기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필요할 때 배우면 된다는 것인데, 필요한 만큼 집중이 잘되어 학습효과가 높다는 것입니다. 해외연수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만,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려 우리말로 대화를 하다보면 영어가 늘 리가 없습니다. 저 역시 근무하던 곳에서도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미국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영어가 늘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영어로 듣고 말하기’의 핵심이 되는 3단계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는 영어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똑같이 흉내내라, 2단계는 뉴스, 드라마, 영화의 소리를 듣고 최대한 흡수하라, 3단계는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크게 소리 내어 영어로 말하라. 저의 경험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훈련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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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밤
세사르 비달 지음, 정창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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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밤>을 읽게 된 배경은 스페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과 세익스피어의 유언장에 담긴 비밀을 다루고 있다는 해설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스페인에서 전개되지 않을까 싶었지지만, 전적으로 영국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저자 세사르 비달은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여 법학을 전공한 다음, 역사학, 철학, 신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며, 역사분야의 학술서와 역사적 사실과 자료에 기반을 둔 장르소설을 발표해왔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저작이 많은데도 2008년에 우리말로 옮긴 <폭풍의 밤>이 유일하게 국내에서 소개되어 있는 듯합니다.

 

영국, 아니 세계적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은 많이 읽었고 무대에 올려진 작품들도 여러 편 감상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작업에도 참여한 적이 있지만, 그의 삶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폭풍의 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템페스트>에서 따온 제목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유언장을 토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분석하여 셰익스피어의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졌음직한 이야기로 꾸며냈습니다. 놀라운 작가적 상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햄릿>에서 등장하는 실존하지 않은 인물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 알게 된 셰익스피어의 유언장 내용은 누가 보아도 의문을 품을 것 같습니다. 1564년 4월 26일일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18세가 되던 해에 26세인 앤 해서웨이와 혼인했고, 1583년 5월 23일에 딸 수잔나(Susanna)가 그리고 1585년에는 쌍둥이인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가 태어났는데, 셰익스피어는 곧장 고향을 떠났고 행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1590년경에야 런던에 나타났고 이때부터 배우, 극작가, 극장 주주로 활동하다가 1616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햄닛은 어려서 죽었고, 유족으로는 아내 헤서웨이와 수잔나 그리고 주디스 그리고 큰 사위인 내과의사 존 홀과 포도주(葡萄酒) 제조업자인 작은 사위 토마스 퀸네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셰익스피어의 유언장에는 셰익스피어가 소유했던 대부분의 유산을 큰 딸 수잔나에게 상속하면서 그녀가 낳을 첫 아들에게 상속시키라고 되어 있었지만, 당시 법으로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던 아내에게는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만을 물려준다고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폭풍의 밤>의 작가 세사르 비달은 그저 의문을 품은데 그치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죽은 뒤 열흘 째가 되는 1616년 4월 25일 평생토록 해왔던 남편에 대하여 치를 떠는 앤 헤서웨이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유언장이 공개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 장소에는 아내 헤서웨이, 큰 딸 부부, 작은 딸 부부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여동생, 그리고 검은색 상복을 입은 남자가 셋, 그리고 푸른색 옷차림에 붉은 깃털로 장식한 노랑 모자를 쓴 복부가 비대한 사내가 모여있습니다. 푸른색 옷차림의 사내는 독특한 모습이지요? 그 사람이 지나칠 때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는 수잔나의 생각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유언장의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저주를 들으면서 수잔나 역시 차갑고 오싹한 땀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이 어두컴컴한 지옥에서 겪는 무시무시한 형벌 같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유언장 낭독이 끝나고 나서 모두가 함께 돌아서는 길에는 무거운 침묵뿐이었다.(33쪽)”라고 분위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수잔나는 바로 푸른옷을 입은 남자의 방문을 받고 그날 밤에 자신을 찾아와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유언장이 그렇게 작성될 수밖에 없었던 놀라운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푸른 옷일 입은 사내의 설명을 듣다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내용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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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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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상품을 고르던 중에 페루를 소개하는 내용에서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발견했습니다.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을까?’ ‘그곳에 가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막상 책을 받아들고 보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표제작으로 모두 열여섯 편의 단편을 묶은 단편소설집입니다. 이야기의 길이는 다양해서 가장 긴 ‘어떤 휴머니스트’가 32쪽에 달하지만,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나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는 각각 10쪽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모든 작품들이 기승전결이 잘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반전은 뒷통수를 때리는 듯합니다.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를 예로 들면, 마르세유 부근에 작은 도시 투샤그에 서 있다는 위대한 탐험가 알베르 메지그의 동상에 관한 이야기는 반전도 모자라서 반전을 업그레이드시키기까지 합니다. 투샤그의 이발사 알베르 메지그는 사랑하는 피송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세계 여행을 떠나고, 가는 곳마다에서 고향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피송양 앞으로 엽서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의 경쟁자였던 이발사 피샤르동에게는 “콩고에서 안부를 묻네. 이곳엔 보아 뱀들이 우글거리네. 자네 생각을 하며.(220쪽)”라는 엽서를 보냈는데, 피샤르동은 경쟁자인 메즈그의 동상을 세우는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길을 잃었어. 모래 위에 당신 이름을 쓰지. 난 사막이 좋아. 당신 이름을 쓸 자리가 많으니까. 목이 마르지만, 우리는 기운을 잃지 않고 있어.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온다는 걸 여행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거든. 습도가 높아서 당신 어머님이 고생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221쪽)”라고 적힌 엽서를 받게 되면 어떤 여인이라도 애닯은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들지 않겠습니까? 도시에서는 메지그의 이런 엽서들을 묶어서 <알베르 메지그의 여행과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메지그의 여행은 훌륭한 탐험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고향 처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떠난 것이라고 알려졌는데, 문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는 점과 당시의 프랑스 신문 어디에도 그의 행적에 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투샤그 주민들은 그가 에베레스트에 오르다가 산소결핍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고 했는데, 정작 그의 행적은 묘한 곳에서 드러나고, 그가 죽음에 이른 원인이 밝혀집니다.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에서는 생텍쥐베리 등을 인용하여 일부러 죽음을 무릅씀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파하는 강연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신사가 그의 논리를 깨기 위하여 강연자를 상어잡이에 초대하고 가상으로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데, 그 상황에서 강연자는 “제아무리 영웅이라도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서는 삶의 항구적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경우 영웅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사실(235쪽)”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강연자는 다음 번 강연에서 어떤 결론을 내놓게 될까요? 작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훼방꾼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작품이 유일하게 반전의 충격이 작은 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작품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입니다. 코네티컷주 이스트 햄프턴 공항에서 열린 인류의 개척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환영대회의 장면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보이던 상황 스케치는 어느 순간 ‘방사선’이 나오고 ‘가속화된 진화’ 그리고 ‘돌연변이’와 같은 심상치않은 단어가 튀어나오더니 ‘난 파리가 먹고 싶어’라는 아이의 칭얼거림이 나옵니다. 결국 미국과 러시아가 백 메가톤급의 핵폭탄을 터트리면서 시작된 돌연변이는 놀랄 정도로 인류를 개별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통제받지 않는 핵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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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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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는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송사(訟事)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올린 글내용에 포함된 사진이 지적재산권을 침해했으니 송사로 번지기 전에 관련 이미지를 구매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피해정도를 입증할 자료와 적절한 배상규모를 제시해달라는 답변을 보냈는데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황입니다. 업무적으로는 신의료기술을 개발한 업체가 적절한 행정절차를 생략하고 판매한 진단기술에 대하여 심평원이 환수조처를 했는데, 해당 병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하거나 자문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두 법이 정한 기준을 위반해서 생긴 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준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과 기준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처벌을 부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폭증하고 있는 기준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항들은 자율에 맡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기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전파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고의성이 없다면 계도차원에서 처벌을 면제하기도 합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의료서비스가 적절하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심평원에서 일하다보니 관련기관에서 심평원을 오직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기관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게 되었고, 몇 가지 느낀 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9772557>와 <지식의 고고학;  http://blog.joins.com/yang412/12912054>으로 만나본 적이 있는 미셀 푸코는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년 전에 [북소리]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소개하면서 우리사회가 푸코의 사상에 대하여 오해를 해온 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흔히 좌파적 경향이 있다고 알려진 푸코는 오히려 진보주의적 정서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오로지 인간의 주체성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기획하신 분은 ‘역자 서문’을 먼저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마도 어려운 책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52쪽)”을 목표로 이 책을 썼다고 한 것을 두고, 이 책을 번역하신 오생근교수님은 “감옥, 죄수복, 쇠사슬, 처형장 등의 물질적인 형태뿐 아니라 범죄, 형벌, 재판, 법률 등의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감옥과 감시체제를 통한 권력의 정체와 전략을 파헤친 것(6쪽)”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있어 앙시앵 레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하던 잔인한 신체형이 강도를 낮추어가게 되는 과정과 처벌중심에서 훈육과 규범화된 규제로 대체하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시를 강화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근대들어 처벌의 중심이 되고 있는 감옥의 운영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글머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1757년 3월 2일에 있었던 다미엥의 처형장면은 앙시앵 레짐의 시대에 벌어지던 처벌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

 

이와 같은 끔찍한 처벌은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는데, 신체적 형벌을 가하는데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형벌은 평가하고, 비교하고, 등급을 정할 수 있는, 어떤 분량의 고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둘째,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규칙이 수반된다. 셋째, 신체형은 일종의 의식을 구성한다. 그 의식에는 형벌의 희생자를 불명예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며, 만인에게 사법 측의 승리로 보여야 한다는 두 가지 요청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즉 처벌은 공정한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며, 그로 인하여 범죄자가 받는 끔찍한 고통이 일반인에게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억압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중대하고 잔혹한 사형을 내릴 만한 범죄를 본보기로 삼아 처벌하는 일이야말로 공공의 안전과 이익을 위한 것(79쪽)”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개적 형벌의 집행에 포함되는 과정으로는, 첫째, 죄인은 스스로 유죄임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자백을 반복하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자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셋째, 신체형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범죄당시의 상황을 재현토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공개적 형태의 신체형이 중단된 것은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처형장면을 보기 위하여 모여드는 군중은 양의적(兩意的) 역할을 가지는데, 처벌과정을 지켜보면서 두려움을 품도록 하는 목적으로 초대된 민중은 처벌을 보증하는 입회인이 되기도 했던 까닭에 어느 정도까지는 처벌행위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범죄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심지어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쳐 범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경우에 사람들은 사법당국에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민중의 의식이 깨어감에 따라 구경꾼으로 동원된 민중이 권력의 처벌을 거부하는 상황도 생겼다고 합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처형을 방해하고, 사형집행인의 손에서 사형수를 탈취하고, 폭력에 의존하여 죄인의 사면을 얻어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집행인을 공격하고, 재판관을 매도하고, 판결에 대해 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105쪽)”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형수가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에는 오히려 권력이 농락당하고 죄인이 영웅시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형벌을 완화시켜 범죄에 적합한 것으로 해야 한다. 사형은 살인범에게만 부과해야 한다. 인간성에 위배되는 신체형은 폐지해야 한다.”라는 입장이 나오게 된 것은, 처형의 폭력성이 권력의 정당한 행사를 넘어서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사회집단 전체를 통해 일반화될 수 있고,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처벌수단을 다음 여섯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마련하였습니다. 1. 분량의 최소화 법칙, 2. 관념성 충족의 법칙, 3. 측면적 효과의 법칙, 4. 완벽한 확실성의 법칙, 5. 보편적 진실의 법칙, 6. 최상의 특성화 법칙, 등입니다. 이 법칙들은 범죄로 인하여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이익을 상쇄할 수 있는 처벌효과로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죄행위에 대하여 징벌적 효과를 기대하던 사법체계가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규율을 학습함으로써 징벌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규율은 신체를 통제하여 권력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규율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개인을 분할하는 기술이 필요하였습니다. 규율은 통제하는 신체로부터 네 가지 성격이 구비된 개체성을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공간배분의 작용에 의해서) 독방 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는) 생성적이며, (여러 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263쪽)”라고 합니다. 규율이 적용되는 대표적 집단은 군대입니다. 그밖에도 수도원, 학교, 구빈원 등이 있는데, 병원 역시 규율이 적용되는 대상이라고 해서 열심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병원이 강력한 규율을 요구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병의 유행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환자격리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도시에 페스트가 발생하면 우선 엄격한 공간적 분할이라는 행정조치를 내려 그 도시와 지방의 봉쇄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나가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40일간의 검역기간이 끝날 때까지,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 작업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시키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며,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규율 중심적 장치의 충실한 모형을 만든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질서이고, 질서는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306쪽)”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일탈된 행동이 집단을 위기로 빠트릴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였기에 불편을 감수하였을 것입니다.

 

최근 페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위험한 전염병인 에볼라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하여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보건의료전문가가 보이는 행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에볼라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의료진이 매개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구호활동에 나선 의료인이 감염되면 본국으로 후송시켜 치료하게 되는데, 치료과정에서 환자와 접촉한 의료진이 새로 감염되기도 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에볼라환자와 접촉한 사람이 귀국한 다음 잠복기 동안 격리되지 않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를 전파하여서 발생한 것입니다(중앙일보 2014년 19월 25일자 기사. “뉴욕에도 에볼라 환자 … 접촉한 3명 격리 조치”; http://blog.joins.com/yang412/13534487).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의무격리가 인권을 침해한다면서 법적대응에 나선 의료인도 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4년 10월 28일자 기사, “의무격리 논란, 美 간호사 입원 3일 만에 집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536130) 멕시코에서 시작된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해열제를 먹고 공항검색을 빠져나왔다고 자랑하던 사람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자신 때문에 검역체계가 무너지면 참혹한 상황을 빚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하고 답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는 잠시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으로 다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의 사례에서 검역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에 대하여 저자는 ‘죽음을 초래하는 질병에 대해 권력은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으로 대처하였다’라고 비판하고, ‘중요한 것은 사회의 여러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이다(321쪽)’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급성 전염병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검역체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수준은 오히려 근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저자의 주장이 공허한 울림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페스트의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봉쇄적인 규율이 있는가 하면, 메카니즘으로서의 규율이 있다고 했습니다. 권력의 행사를 보다 신속하고 경쾌하게,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개선해나가는 하나의 기능적 장치이고, 미래의 사회를 위한 교묘한 강제권의 구상인 것입니다. 규율의 기능적인 전환을 통하여 규율구조를 확산시키고, 규율의 메커니즘의 국가관리를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것인데, 모두에서 말씀드린 심평원의 기능과 역할이 이러한 메커니즘에 따르는 사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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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세계사 1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피의 백작부인까지, 우아하고 잔혹한 유럽 역사 이야기 풍경이 있는 역사 1
이주은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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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선택과목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옛날에는 국사나 세계사도 대입시험에서 한몫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슨 공부이든 시험을 대비한 공부는 재미가 없기 마련입니다. 특히 연대표에 따라서 나열되는 정사의 경우는 사건이 어느 해에 일어났는가가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정사보다는 더 재미있는 야사에 빠져들곤 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이베리아반도를 여행하면서 조형진 가이드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왕국이 어떻게 명멸했는지 설명하는 것을 듣고는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유럽의 역사는 왕족끼리의 결혼에 의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심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캔들 세계사>는 블로그를 통해서 유럽의 역사를 딱딱하지 않게 정사와 야사를 섞어서 흥미롭게 적어온 이야기들을 묶어낸 그야말로 말랑말랑한 유럽의 옛날이야기 모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저자가 머리말에 적은 것처럼 “역사 교과서에는 수많은 왕조가 세워졌다 무너지고 종교가 뒤바뀌고 신대륙에 도착하는 등 굵직한 사건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전쟁과 협정, 동맹과 침략 등 거대한 사건들 속에서 개개인은 배경에 불과하기 일쑤입니다.(5쪽)” 저자는 역사적 사건에 파묻히는 개인의 사연이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나름대로 조명해보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자의 생각은 때로는 감정이 지나쳐 객관적이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 또한 역사를 해석하는 나름대로의 시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22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윌리엄1세와 마틸다 왕비, 런던탑에 동물원이 세워진 이야기, 에드워드5세의 행방불명에 관한 사연, 그 유명한 헨리8세와 그 왕비이야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정체에 관한 논란 등 지역적으로는 영국이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즈음 제가 이베리아 반도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포르투갈왕국의 페드루 1세와 이녜스 데 카스트루의 불멸의 사랑과 카스티야 왕국의 후아나 여왕의 상처뿐인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왕가의 결혼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결혼이 행복하지 못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포르투갈과 가까운 카스티야-레온 왕국 역시 혼인으로 동맹을 맺지만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었고, 포르투갈의 아폰수4세는 후계가인 페드루 왕자를 카스티야의 공주인 콘스탄세와 결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콘스탄세의 말동무로 따라온 사촌 이녜스 데 카스트루에게 페드루왕자의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폰수4세는 이녜스를 처형하기에 이르지만, 나중에 왕위에 오른 페드루는 죽은 이녜스의 시신을 치장시켜 같이 왕비로 즉위토록 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페드루의 정신상태를 감정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페드루는 결혼하지 않았고, 사후에 이녜스와 함께 알코바카 성당에 나란히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성경말씀대로 심판의 날에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는 불멸의 사랑, 영원한 러브스토리로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만, 글쎄요.....

 

스페인 중부에 있었던 카스티야왕국의 후아나 여왕의 불행한 삶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다루는 소재라고 합니다. 후아나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카스티아의 이사벨라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왕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군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던 후아나는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열여섯의 나이에 부르고뉴 공국의 펠리페공작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펠리페공작이 너무 잘 생겼고 바람둥이였는데, 후아나는 집착이 강하고 질투가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벨라여왕이 죽은 다음에 후아나가 카스티아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왕과 남편 펠리페공작이 카스티야를 차지하기 위하여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펠리페공작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펠리페공작의 시신을 그라나다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후아나가 시체와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후아나로 부터 왕국을 빼앗기 위해서 벌인 음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후아나로 부터 권력을 빼앗고 그녀를 성에 가두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후아나의 아들 카를로스가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섭정하면서 어머니를 풀어주지 않는 바람에 46년간 성에 유폐된 생활을 해야 했다고 하니, 세상에 남편은 물론이고, 부모나 자식도 믿을게 하나 없더라는 이야기가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닌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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