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의 다중성 - 교류와 갈등의 어울림 지중해지역원 인문총서
윤용수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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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물론 12박13일의 여정을 단 1시간으로 압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강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많은 자료를 읽어보려 노력해왔습니다. 부산외대의 지중해지역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 성과를 일반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여 발표하고 있는 책들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윤용수교수님을 비롯한 7분의 교수님들께서 나누어 쓰신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에서는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 삼개 대륙에서 피고 진 문명이 서로 부딪치고 스며들면서 만들어낸 결과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앎이 많이 부족한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갈등에서부터 가톨릭과 이슬람의 충돌, 그리고 레바논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갈등까지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시작한 이슬람이 어떤 경로로 스페인까지 흘러들었을까, 그리고 시대별로 등장하는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하여도 궁금했습니다. 윤용수교수님은 이슬람문명의 시작단계에서부터 갈등과 분화과정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정리하였습니다. 무함마드 사후에 칼리프시대를 거쳐 우마이야왕조, 압바시야왕조로 이행하면서 우마이야왕조에서 살아남은 왕족이 멀리 스페인까지 달아나 후우마이야왕조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단시간에 동으로는 인도에서 서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대한 영토를 차지한 이슬람왕국은 전체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행정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지역별로 중앙왕국과 연계된 지역왕국을 용인하는 체제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지역의 왕국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흥하고 망하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슬람이 차지한 광대한 영토 안에서는 다양한 문명이 명멸하면서 남겨둔 지적 유산이 풍부하게 존재하였는데, 유목을 기반으로 하는 아랍민족의 특성상 이들 문명을 탄압하기보다는 품어 안아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시키는 쪽으로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859년에 모로코의 페즈에 세계 최초의 대학 카이라완대학을 설립하였고, 970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 알 아즈하르 대학을 세웠던 것으로 알 수 있고, 곳곳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책자들을 수집하여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서 학문에 대한 이슬람의 갈증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변한 문명 혹은 문화랄 것이 없었던 중세 유럽에서는 관심을 두지 안았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새로운 해석한 결과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이슬람 문명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에 지중해에서 충돌했던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결이 로마가 아닌 카르타고의 승리로 끝났더라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하는 점을 모색하고 있는 최자영교수님의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패권 다툼에서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가 승리했더라면, 로마 대신 카르타고의 패권이 지중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카르타고가 가지고 있었던 소규모 도시국가, 시민이 갖는 자유의 원리가 여전히 획일적인 군국주의, 의무, 법, 질서를 대신하여 지중해 세계에 존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76쪽)”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역사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할까요?

 

임주인교수님의 ‘스페인 문학에 나타난 이단성’도 관심이 가는 글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이 부딪히거나 공존하면서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게 된 것은 앞서 윤용수교수님께서 정리를 해주셨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한 경로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대교와 이슬람은 그 뿌리가 아브라함에 닿고 있어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서로 개종을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슬람과 가톨릭 그리고 유대교가 함께 어우려져 살아가던 시기의 문화를 무데하리스모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차이 속에서 공존과 화해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민족간, 심지어는 같은 민족끼리도 지역적 차이로 인하여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해결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는 무엇이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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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4-12-19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축하드려요. ^^

처음처럼 2014-12-19 23: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꼼쥐님....
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네요...
요즘 한해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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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벌써 10년도 넘었습니다만, 짐 캐리가 주연으로 나오고 모건 프리먼이 하느님으로 나오는 톰 새디악감독 영화 <부르스 올마이티>는 코믹한 가운데 전지전능하신 힘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하느님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시대에 따라서 진화하는 것 같습니다.

 

개구쟁이처럼 생긴 신세대 유머작가 사이먼 리치는 하느님이 우주라는 기업을 일구는 CEO로 나오고 죽어서 천국에 오른 사람들이 이 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는 <천국 주식회사>를 그려냈습니다. 천국 주식회사의 직원들도 지구별에 있는 회사처럼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맡은 일에 충실한 일중독인 천사가 있는가 하면 CEO의 기분을 맞추는데 관심이 많은 천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 무엇인지 헷갈릴만도 합니다. 결국 그 기준이라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물수제비뜨기를 일곱 번 성공시킬 수 있는 남자, 다섯 번 성공시킬 수 있는 여자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착함보다는 객관적이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세상에나....

 

하느님도 지구별 사람들이 열심히 올리는 기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자신을 띄워주는 소리에만 관심이 있고, 카레이싱, 프로운동경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팀이 이기도록 조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실제로 천사들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죠. 컴퓨터에 의하여 조정되는 인간사에 개입하는 무수한 요인들을 조금씩 움직여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쉽지 않기 때문에 매달 기적을 많이 일으킨 천사를 포상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근무하던 부서에서 지구별 사람들이 보내는 엄청난 양의 기도를 분류하는 체계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이런 일을 하는 기적부에 새로 전입해온 천사 일라이자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하느님이 사람들의 기도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들어주지도 않을 기도를 분류하는데 힘을 쏟았는지 억울해서가 아니라 정작 간절한 기도를 들어는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도 지구를 운영하는 게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하느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시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하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여기 계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왜 일하러 나오시는 거죠? 계속 그러실 거면 왜 그냥 그만 두진 않으시나요?(72쪽)” 하느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을까요? 골프약속을 취소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신 하느님께서 천국주식회사 전 직원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여보게 사우들이여, 심사숙고 후 나는 천국 주식회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네. 그동안 무척 즐거운 경험을 했지. 하지만 그만둬야 하는 시점을 알아채는 것도 성공의 일부라네. (…) 지구는 한 달 후에 파괴될 것이네.(74쪽)”

 

정말 엉뚱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만든 세상을 운영하는데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파괴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하느님이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없이 다니는 것 같아 보여도 개중에는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을 벌인 일라이자는 물론이고 일라이자에게 은근 마음을 두고 있는 크레이그가 나서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하느님과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단 하나도 들어준 적이 없는 기도문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골라서 한달 안에 성공하게 되면 지구파괴의 결정을 번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를 들어주기 위하여 매일 10분씩 할애했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적을 이루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인데, 막상 하느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게임의 결과를 조작하는 일은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앞뒤가 맞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크레이그와 일라이자가 고른 기도문은 무엇이고 하느님과의 시합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까지 적으면 리뷰가 정말 재미없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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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과 현대문명 비판 논술.토론의 기초를 닦는 고전읽기 4
이종훈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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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박인철교수님이 정리한 <에드문트 후설; http://blog.joins.com/yang412/13364134>을 읽으면서, 어렵다는 후설의 철학을 비교적 쉽게 풀어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설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요? 후설의 철학이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이유에 대하여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문명비판>을 옮긴 이종훈교수님은 그가 남긴 방대한 원고의 전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해온 점과 그가 일정한 철학적 체계를 형성하기보다 부단한 사유실험으로 다양한 문제영역을 분석하면서 발전시켜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후설이 “이론과 실천, 가치를 포괄하는 보편적 이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 궁극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모든 학문의 타당한 이론과 인간성의 진정한 삶을 정초하려는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즉 선험적 자아(주관성)을 해명하려는 선험적 현상학의 이념을 일관되게 추구하였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후설 현상학의 참모습을 온전히 파악하는 길은 ‘그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바람직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저술이 방대하고 대부분 철학 전공자를 위한 강의나 전문지에 발표된 내용이라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이 책에 담은 「유럽 인간성의 위기에서 철학」과 「현상학」은 분량이 많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거나 백과사전에 명시적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처럼 후설 역시 수학자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학자 후설이 철학자로 방향을 바꾼 것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대학에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듣고, 철학도 수학처럼 하나의 엄밀한 학문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수학이 지니는 학문적 엄밀성과 정밀성의 영향을 받은 후설은 철학이 엄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편견이나 사심에 의해 이끌림 없이, 또한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이른바 ‘무전제성의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이 되어 온 객관주의에 물든 서양철학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철학의 진정한 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에 다름 아니다.’라고 한 브렌타노의 영향과 당시에 막 등장한 심리학에 눈을 뜬 후설은 수학적 개념을 심리적인 작용에 근거해 해명하려고 하였습니다. 1901년에 쓴 <논리연구 II>에서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기술적 심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1764년 람베르트의 저서에서 등장하는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가져온 후설은 현상학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현상학은 기술심리학이다. 따라서 인식비판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이거나 최소한 오직 심리학의 토대위에 구축되어야만 한다.(…) 일체의 이론적-심리학적인 관심을 떠나 인식체험을 단지 순수하게 기술하면서 탐구한 것을 경험적 해명과 발생을 지향하는 본래적인 심리학적인 탐구와 구분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체험에 대한 순수 기술적 탐구를 기술적 심리학 대신 현상학이라고 말하면 좋을 것이다.(박인철 지음, 에드문트 후설 19~20쪽, 살림출판사, 2013년)”

 

「유럽 인간성의 위기에서 철학」은 1935년 5월 7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 빈문화협회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입니다. 나치정권이 등장하면서 유럽문명에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인식한 후설은 이러한 위기가 유럽 학문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원은 자연주의에 의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선 물리학적 객관주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사실만 다루는 단순한 사실학은 있어야 할 당위의 규범을 다루지 못하는 단순한 사실인만 만들뿐이다”라고 하면서, 철학의 출발점인 그리스적 합리주의로 돌아가 인간의 보편적 기능이자 능력인 자율적 이성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 유럽 문명은 근대 들어서 빠르게 발전한 정밀하고 객관적인 과학이 수학적 언어를 통해 자연을 일관되게 기술하면서 일궈낸 혁명의 결과인데, 이 과정이 심화되면서 수학의 역할이 점차 배제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정신적 작업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자연과학의 결과해석과정이 생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일반적으로 모든 학문)은 정신적 작업수행, 즉 공동으로 연구하는 자연과학자들의 정신적 작업수행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작업수행은 정신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범주에 속하는데, ‘자연과학’이라는 역사적 산물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려드는 것은 실로 배리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신과학의 연구자들은 자연주의에 맹목적이 된 결과, 보편적이며 순수한 정신과학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뿐만 아니라, 정신성의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그 요소들과 법칙들에 따라 추구하는 본질학, 즉 정신을 순수하게 정신으로서 탐구할 본질학에 관해 묻는 일조차 철저히 소홀하게 방치해왔다.(32쪽)”라고 비판했습니다.

 

유럽 정신의 뿌리라고 할 그리스시대에서 사회 환경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태도’가 일어나 체계적으로 완결된 문화형태로 성장하여 새로운 정신적 형성물이 태어났는데, 이를 철학(Philosophi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의 근원적인 의미는 ‘보편적 학문’,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 즉 모든 존재자의 전체적 통일성에 관한 학문을 뜻하는 것인데, 인접한 문명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하여 더 풍요롭고 더 복잡하게 변화해나가는 힘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 학문인 철학은 어쨌든 그들에게만 특별히 부각된 것이 아니며, 그들과 더불어 비로소 세상에 출현하지도 않았다.’라는 반론이 나왔음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스스로도 현명한 이집트인과 비빌로니아인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실제로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47쪽)’라고 옹호합니다. 반면 오늘날 유럽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등을 그리스철학과 동등한 수준에 배치하여 동일한 하나의 문화가 추구하는 이념 속에 넣고 있지만 단순히 다른 역사적 행태로 파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후설은 세계 전체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실천적 태도와 대립되는 자연성을 변경시킬 수도 있는 이론적 태도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철학적 관조를 통하여 더 높은 단계의 실천을 지향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판단중지(Epoche)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후설이 말하는 판단중지는 세계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자연적 태도로 정립한 것의 타당성을 일시 중지해 경험의 영역을 새롭게 보려는 것을 말합니다. “근원적인 관조에서 즉 완전히 ‘무관심하게’ 모든 실천적 관심을 판단중지해 생긴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서 학문의 고유한 관조로 변경된 것을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주관적 의견(doxa)’와 ‘객관적 인식(episteme)’을 대조해봄으로써 매개된다(62쪽)”라고 했습니다.

 

후설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정신적 공동체의 생활을 하는 인간은 여전히 객관적 세계의 질서 속에 배치되었지만, 인격, 즉 자아로서 인간은 목적과 목표를 지니며, 영원한 규범인 전통과 진리의 규범을 지니는 존재라고 하였고, 그와 같은 관념은 유럽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맥을 이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근대 이르러 발전한 수학적 자연과학은 능률성, 개연성, 정확성, 계산의 가능성을 지닌 귀납법을 완성해내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방법의 합리성은 철저하게 상대적인 하나의 학문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단지 ‘주관적인 것’인 직관적으로 주어진 환경세계가 학문의 주제로 되는 가운데 망각되었기 때문에 연구하는 주관 자체도 망각되었고, 과학자 자신도 주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후설이 관심을 가졌던 심리학에 대하여도, 실천적으로 매우 귀중한 경험적 규칙들을 많이 입증해냈지만 도덕의 통계학이 결코 도덕학이 될 수 없듯이, 참된 심리학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정신만 그 자체로 또 그 자체에 대해 스스로 존재하며 자립적이다. 그리고 오직 이 자립성에서만 정신은 참으로 합리적으로, 즉 참되며 그 근본에서 학문적으로 취급될 수 있다.(93쪽)”라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의미상 참된 자연은 자연을 탐구하는 정신의 산물이며, 따라서 정신에 관한 학문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신의 근본적 본질을 지향성 속에서 파악하고, 이것으로부터 무한히 일관되게 정신분석을 구축할 참된 방법을 형성하는 작업은 선험적 현상학으로 이끌어갔고, 선험적 현상학이 유일하게 자연주의적 객관주의와 모든 객관주의 일반을 극복했다(95쪽)”라고 했습니다.

 

정리하면, 유럽 학문의 위기는 합리주의 자체의 본질적 문제라기보다는 합리주의가 외면화된 것, 즉 합리주의가 ‘자연주의’와 ‘객관주의’에 매몰된 것에 있다고 후설은 보았고, 유럽의 현존재의 앞날은 본래의 이성적 삶의 의미에 대립해 소외된 채 유럽이 몰락하고 정신을 적대시해 야만성으로 전락하는 길과 자연주의를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이성의 영웅주의를 통한 철학의 정신에 기초해 유럽이 재생하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영백과사전」의 ‘형상학’ 항목은 1927년부터 후설과 제자 하이데거가 공동으로 집필하다가 견해차가 심해지면서 후설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후설은 글머리에서 현상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현상학’은 19세기말 철학에서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기술하는 방법과 이 방법에 입각해 등장한 아프리오리(apriori; 칸트 이후 ‘경험의 확실성과 필연성에 대한 근거형식’을 뜻한다)한 학문을 일컫는다. 이 학문의 목적은 엄밀한 학문적 철학을 위한 원리적 도구를 제공하고, 이것을 일관되게 실행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방법적으로 개혁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105쪽)” 그리고 철학적 현상학에 평행하는 현상학적 심리학이 생겼는데, 오직 이를 기초로 해야만 학문적으로 엄밀한 경험적 심리학이 정초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순수 심리학의 주도적 이념을 정초(定礎)하고 전개하기 위하여 첫째로 심리적인 것에 관한 순수 경험과 이의 반성을 통해 그때그때의 사태, 사고, 가치, 목적, 보조수단 등에 상응하는 주관적 체험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것들은 우리에게 ‘의식되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현상(Phänomen)’이라 부르며, 이것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적 특성은 ‘무엇에 관한 의식’, 즉 그때그때의 사물‘에 관한’, 사고‘에 관한’, 계획․결단․희망 등에 관한, [요컨대[‘무엇에 관한 나타남’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110쪽)” ‘무엇에 관한 나타남’인 존재의 그 근본적 성격을 철학적 용어로 설명한다면 ‘지향성’입니다.

 

“현상학자는 현상학적 반성을 수행함에 있어 반성되지 않은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객관적으로 정립한 것이 함께 수행되는 모든 것을 억제해야만 하며, 이와 동시에 자신에 대해 곧바로 ‘현존하고 있는’ 세계를 판단의 형식으로 끌어들이는 모든 것을 억제해야만 한다.(116쪽)” 즉 현상학자는 철저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현상학적 순수 심리학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기 위하여 다음 네 가지가 요구된다고 합니다. 1) 지향적 체험 일반의 본질에 속한 특이성을 기술하는 것, 2) 어떤 영혼 속에서 일반적으로 본질적 필연성으로 등장해야만 하거나 등장할 수 있는 지향적 체험의 개별적 형태를 탐구하는 것, 3) 어떤 영혼의 삶 일반의 형태 전체를 제시하고 본질을 기술하는 것, 4) ‘자아’라는 명칭은 그 자아에 속한 ‘습득성’의 본질적 형식들에 관해서 새로운 연구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 등 입니다.

 

후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아프리오리한 학문들, 즉 선험적 소박함 속에 형성된 학문들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현상학적으로 정초해야만 그러한 학문들을 방법적으로 완전히 정당화되는 진정한 학문으로 별화시킬 수 있다.(148쪽)”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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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 김홍도의 제자가 되어 그림 여행을 떠나다
한해영 지음 / 시공아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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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제자가 되어 그림 여행을 떠나다’라는 독특한 부제도 그렇고,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이라는 제목도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 1806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단원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미술관에서 열린 ‘큐레이터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참여한 우리의 주인공이 전(傳)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작합니다. 안내를 맡은 큐레이터가 참가자들을 쥐락펴락하면서 그림으로 빠져들게 하고, 주인공은 그림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미술관으로부터 사라지게 됩니다. 프롤로그를 ‘그림으로 들어가며’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으로 한 것처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200여년을 거슬러 광화문통에 떨어진 주인공은 단원과 조우를 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단원이 이미 누군가 미래로부터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지 말게나. 자네가 온다는 연통은 미리 받았네.(29쪽)” 어떻게 가능했을까하는 궁금증을 저자는 외면하지 않고 뒤에서 설명하는 자세함까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최근에 읽은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50283>에서처럼 타임슬립을 매개로 하여 단원 김홍도를 만나 그의 작품세계를 들어본다는 내용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민준이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처럼 우리 주인공은 단원이 이끄는대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면서 단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http://blog.joins.com/yang412/=13488647>을 읽으면서 한국화를 감상하는 법에 눈을 뜨기는 했습니다만,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은 전체로서의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부벽루연회>를 설명하는 것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서 당시 사회상을 추론하기도 합니다만, <씨름>을 설명하면서 제시하는 속화(俗畵)의 놀라운 의미를 짚기도 합니다. 즉 단원은 <씨름>에서 평민이 양반을 제압하는 순간을 그려냈는데, 그 이유는 실력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씨름을 통하여 양반과 평민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이고, “보는 이와 그리는 이의 마음이 합쳐야 비로소 그림이 진가를 발휘하는 법(35쪽)”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웃음을 방편으로 한 속화를 그리게 된 것은 양반은 체면 때문에, 백성들은 끼니 때문에 웃을 새가 없어 긴장감이 팽팽한 웃음 없는 조선사회에 그림을 통하여 웃음을 찾아주려 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나아가 ‘속화를 통하여 서민의 일상에서 익살과 해학을 잡아낸 것인데, (백성의) 고단한 삶을 고단하게 그려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보다는 웃음을 일으켜 삶에 새로운 시작을 제시했다(66쪽)’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페르소나라는 용어나, 단원이 언급하는 코쟁이들이 쓰는 말이라거나 하는 내용을 조금 앞서가는 것 아닌가 싶어 아슬아슬하다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씨름>에서 시작한 단원으로부터 직접(?) 듣는 작품해설은 <무동>, <서당>, <타작>, <빨래터>, <군선도>, <성하부전도>에 이르기까지 주로 속화를 중심으로 하여 저잣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군선도>에서 암시한 신선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마포에서 쪽배를 타고 금강에 이르는 일이 가능할까요? 어떻거나 금강으로 가는 길에 <선상관매도>, <도담삼봉>, <범급전산도>, <묵죽도>, <총석정도>, <소림명월도>, <주부자시의도>, <협접도> 등을 살펴봅니다. <명경대>, <창명낭화도>를 통하여 금강에 가는 방법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바로 선계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곳에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단원은 이미 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선인은 지혜와 사랑과 의지를 두루 갖춘 존재이며, 깨달음을 얻어 우주의 일부가 된 이들로, 선인이 지상에 인간의 몸을 가지고 내려와 선계의 법을 전하고 돌아간다.(136쪽)’라는 선교(仙敎)의 사상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제 저자는 <영원암>, <송하선인취생도>, <진주담>, <표훈사>, <은선대십이폭>, <효운동>, <구룡연>, <만물초> 등, 정조임금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으로 가서 선화를 그리게 된 배경과 ‘천하절경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형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화그리는 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단원은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진다는 평범한 진리대로 말년이 그리 호사스럽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세상에 남겨진 선화가 너희의 진화를 도울 것이다!(249”라는 속내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저자께서 지나치게 앞서간 것은 아닐 듯 싶기도 합니다.

 

‘그림에서 나오며’라는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나무꾼이 산속에서 선인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돌아와보니 도끼자루가 썩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더라는 고사에서 힌트를 얻어 ‘그림 속 세상’을 구경할 생각이 들었음을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꿈은 세상을 넓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꿈이 널리 세상에 펼쳐지기를 같이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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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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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는 우산을 챙겨 출근했습니다. 가끔은 맞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겨울철에 운전을 하다가 생명이 오갈 정도의 사고를 두 차례나 당하고서는 눈이 내린다고 하면 외출을 삼가는 편입니다. 그런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된 것입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 읽기 딱 좋겠다싶었습니다. 윤대녕의 <대설주의보>는 7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소설집입니다. 표제작은 ‘대설주의보’는 최승호시인의 시집 <대설주의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제설차 한 대 올리 없는 산골에 소낙눈이 쏟아지는 정경을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이라고 표현하면서도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고 마무리하는 것으로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담아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 윤수와 해란이 차량통행마저 끊긴 백담사로 향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해란은 백담사에 먼저 도착했지만, 조금 늦게 버스를 탄 윤수는 원통에서 그만 발이 묶입니다. 원통에서 길을 모색하면서 해란과의 만남을 돌아보게 됩니다. 취재차 찼았다는 일본 돗토리현의 사구에서 윤수가 목격한 일본인들의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사구 끝에서 일군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목격했어. 저마다 삿갓에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노인들이었지. 그들은 그림자처럼 묵묵히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어. 저마다 얼굴을 감춘 채 말이야. (…) 옛날 일본인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대개 여행을 떠났다고 해. 그중 한 부류는 벚꽃이 필 때 남쪽에서부터 열도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거야. 벚꽃을 따라 벚꽃이 질 때까지 말이야. (…) 또 한 부류는 베옷을 입고 죽음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까지 무작정 걷는 거야. (…) 마치 죽음에 입문하듯이 말이야.(89쪽)”

 

그 여행을 마치고 공황 상태에 빠진 윤수를 위하여 친구가 미팅을 주선했고, 두 쌍은 식당을 거쳐 노래방까지 갔다고 헤어지면서 다시 연락을 해도 좋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만난 해란을 자기 집으로 데러가 재우고 해장국까지 끓여주면서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만나다가 처음 만날 때 자리를 같이 했던 해란의 친구가 끼어들면서 오해가 생겨 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진 해란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해란을 이날 백담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연이 담백하게 그려지게 되고, 여관을 잡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윤수는 기억의 흐름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11시경에 여관문을 나서 백담사로 향합니다. 웃돈을 얹어주면서 백담사까지 가자고 사정을 해서 말입니다. 2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걸려 백담사입구에 도착한 윤수는 눈덮인 산길 6킬로를 걸어서 올라갈 차비를 합니다. 어떤 절박함이 윤수를 이렇게 몰고 가는지... 그리고 해란 역시 스님을 졸라 차를 몰고 산을 내려오다 중간에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작가께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실려 있는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랑이 개입되어 엮여지는 관계임에도 때로는 이들의 관계가 적절한가?하는 의문에,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까지 생기게 됩니다. 하긴 교과서적인 평범한 삶이었다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보리’의 주인공 수경은 남자친구가 소개한 유부남과 일종의 계약 같은 사랑을 하다가 암을 얻으면서 관계를 정리하게 되고, ‘풀밭 위의 점심’은 대학시절 만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교차하는 사랑이야기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모티프로 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역시 삼촌과 조카가 한 여자와 나누는 엇갈린 사랑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생의 불가항력에 직면한 인물들을 통해 생의 불가항력에 시달린 삶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삶은 끝내 숭고한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불가항력적인 사랑이었다는 등장인물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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