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조남진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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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을 여는 [북소리]를 고르기 위하여 나름 고심했습니다. 여행, 미술, 인물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가 후기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해 스페인의 코로도바를 갔을 때 그의 동상을 만났던 것도 인연이 되었고, 지금 우리사회가 도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년도 더 지난 지금과는 시대적 배경이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한 스토아 도덕철학에서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요약된 스토아철학의 핵심내용입니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3s0914b).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 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앞부분은 쉽게 이해되지만 뒷부분은 다소 거부감이 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정치가·연설가·비극작가로 활동하였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기억되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기원전 4년에 지금의 스페인 코로도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네카의 국적이 로마로 표기되는 것은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속주가 아니라 로마의 영토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 로마로 간 세네카는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와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적 성향을 추구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병에 걸린 세네카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가 기원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칼리굴라(재위 기원 37~41년), 클라우디우스(재위 기원 41~54년)와는 불편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41년에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네카는 거칠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49년에는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가 힘을 써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어서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돈많은 여자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근위대장이 된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과 막강한 교우관계를 맺었습니다. 훗날 황제가 되는 네로의 스승이 되었는데, 덕분에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반정부 음모사건에 연루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황제 네로의 명령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다음 백과 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1105b).

 

<세네카>는 서양고대사를 전공하신 조남진교수님이 세네카의 삶과 철학을 정리한 책입니다. 저자는 그리스에서 스토아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 “그리스 세계가 정치적 혼돈에 빠졌을 때 개인이 가야 할 길은 본분을 다하는 것과 세계법칙과 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이른 바 금욕적 삶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의무와 내면을 강조하는 스토아철학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네카와 같은 로마의 지배계층이 스토아철학의 윤리학에 매혹된 것은 당시 로마 지배계층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네카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행하는 금욕주의보다 훨씬 능가할 정도로 개인적인 욕구를 억제했다는데,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철학적 사유와 훈련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세네카>는 먼저 ‘세네카의 삶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루고, 이어서 세네카에 있어서 ‘미덕과 현자’의 의미, 세계국가사상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유, ‘영혼과 양심’의 의미, ‘죽음과 자살’의 의미를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네카의 작품 <행복한 삶>과 <도덕의 편지>를 토대로 한 노예관과 재산과 부를 논하고, 마지막으로는 스토아 철학과 세네카의 자연학과 범신론을 정리하여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명망 있는 현자와 도덕론다라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머리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세네카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극에서 극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책을 읽어가면서 가끔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키프로스 키티온 출신인 제논(기원전 333~262)이 에피쿠로스학파가 정한 쾌락의 윤리적 표준이 자연계의 재난과 위험을 초래한다고 생각하고, 쾌락보다는 이성의 표준에 기초한 도덕체계를 확립하면서 스토아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제논은 또한 폴리스적 의식이 완고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에 반대하여 특정한 폴리스나 지방제도에서 벗어나 세계를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적 윤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고유한 국법을 가진 개별국가의 규범에 따라 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동포이며 같은 시민이기 때문이다.(51쪽)”라는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토아철학의 이상세계인 세계국가는 로마의 지배계층에 의하여 성립되었지만, 과연 제논의 이상이 제대로 구현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스토아철학의 기본명제는 최고의 선인데, 이는 자제의 덕과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기본 사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열정이나 격정 또는 충동으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방해받지 않는 냉담과 무관심의 경지, 아파테이아(Aphatheia)에 이른 현자는 최고 선에 도달한 자이며 참 행복을 이룬 자로 신과 동등하다고 여겼다는 것을 보면, 깨달음을 얻는 모든 이가 부처가 된다고 한 불교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든 스토아철학은 지고한 하느님이 자신들을 신의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초기와 중기 스토아철학은 그리스시대를 배경으로 발전하였는데, 초기 스토아철학이 위선과 형식주의였다면 중기 스토아철학은 관대한 인간적인 포용력과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의무를 강조한 규범과 법칙의 확립을 현실의 삶에서 중시했다고 합니다. 로마로 건너간 스토아철학은 영국 역사가 기번이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한 네르바(재위 96~98년),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하드라야누스(재위 117~138년),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로 이어지는 철인(哲人) 5현제 시대의 주요 통치이념이 되었습니다. 후기 스토아철학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윤리학의 시대로 새로운 세계국가와 인류애 사상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도덕적 목적을 정치적 수단으로 쉽게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불행한 처지의 생활에서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생의 목적은 곧 미덕의 삶이며 진정한 선은 도덕적 선이며 도덕적 선만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욕망은 억제되어야 하고, 공포는 억눌러야 하며, 올바른 행위는 정렬되어야 하고, 부채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네 가지를 완전한 미덕으로 들었습니다. 행복한 인생은 이렇게 절제된 길을 따라감으로서 이루는 것이므로, 완전한 미덕을 갖춘 사람은 불운을 슬퍼하지도, 자신의 운명을 비탄하지도 않고, 오직 탁월함과 위대함을 보일 뿐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보이는 어둠 속의 빛과 같이 비치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필연적으로 미덕은 끊임없는 훈련과 교육, 그 실제적 적용을 기본으로 하며, 미덕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덕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만이 신적기원을 가지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덕이 교육의 후천적인 결과물이요, 통찰의 문제라고 한다면 악의 원천은 잘못된 판단, 즉 판단의 과오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네카는 “도대체 선은 무엇인가?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사실에 대한 인식의 결여이다.(92쪽)”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하지 못하고 왜곡하여 수용하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악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악의 원천을 사회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교육인 것 같습니다.

 

세네카는 성 바울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서로 교감하고 있었다는 다양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인간은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행복 또한 그러한 것으로 믿었고, 행복에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행복을 신에게 요구하거나 호소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불행하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덕은 우리로 하여금 끈기 있게 고난을 이겨나가도록 하는 힘이기에, 고통을 단순히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인내인 것입니다. 현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생긴 성공과 실패를 자만하거나 좌절하지도 않는 용기의 미덕에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미덕의 가치가 이러했기 때문에 세네카는 죽음까지도 자유의사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한다면 자살은 장렬한 영웅적 행위이며 미덕의 삶의 일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없으며, 현자로서 택할 결정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자살을 예찬한 세네카 역시 “나는 고통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것은 패배이기 때문이다. … 고통 때문에 죽는 자는 나약하고 비겁하다. 그렇다고 아픔을 이기며 용감하게 산다고 뽐내는 자 또한 어리석은 자(211쪽)”라고 말했습니다. 세네카는 생명을 지킨 행위를 용기로 이해했고, 자살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책임감을 통찰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 종교, 이념의 차이로 국가가 분열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도 서로 섞여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요즈음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던 세계국가사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스토아철학이 내세우던 세계국가사상은 민족과 국가이성의 일반으로부터 보편적 인간의 문제, 혹은 인간상호문제를 천착했기 때문입니다.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호흡하고 사람들과 같이 사는 한 인간애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 누구에게 두려움이나 위협을 주지말자(129쪽)”라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그는 진정 평화주의를 지향한 전쟁비판론자였던 것입니다.

 

세네카는 육체와 영혼은 동반자이지만 영혼이 육체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이라고 보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만물이 주기적인 순환의 반복작용으로 영원히 사멸하지 않는 존재로 이어간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시대와 한 무리의 생명체가 가면 또 한 시대와 또 한 무리의 생명체의 시대가 순환하여 등장한다. 그래서 일체만상은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정신세계를 도야하고, 인간의 행위를 인도하며, 우이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준다. 어떻게 철학을 수학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떻게 그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249쪽)”라고 말하였듯이, 세네카는 인간의 삶에 신보다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철학은 대중을 사로잡기 위한 계략이나 보이기 위해 고안된 것도 아니라, 말이 아닌 사실에 대한 문제이며, 영혼을 맑게 하고 도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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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 용감하고 유쾌한 노부부가 세계여행을 통해 깨달은 삶의 기쁨
린 마틴 지음, 신승미 옮김 / 글담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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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다녀온 스페인여행 이야기를 인터넷신문, <메디칼 타임스; 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에서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이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독자들의 분위기를 전해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여행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어서 인지, 여행에 관한 글에 대한 관심들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여행경험을 블로그에 연재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반응이 좋은 경우에는 책으로 묶어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 블로그와 칼럼 혹은 책을 통해서 독자들과 만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70세가 된 노부부들이 해외여행을 통해서 얻는 경험을 블로그에 올린 것이 블로그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표지기사로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나온 책이 린 마틴이 쓴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입니다. 노부부들의 여행, 특히 살던 집을 처분하고 세계 곳곳을 누빈다는 독특한 설정이 흥미로워서 읽게 된 것입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에는 이들이 찾았던 순서대로, 멕시코, 아르헨티나, 대서양 유람선 횡단,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아일랜드, 모로코, 캘리포니아로 왔다가 포르투갈을 방문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유별난 것 같습니다. 2년여에 걸쳐 열렬하게 사랑했다가 헤어졌던 남녀가 각자 결혼해서 35년이란 세월이 흐른 다음에 다시 만났고, 3년 뒤에 여자의 남편이 죽은 다음에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만한 관계입니다.

 

결혼 후 몇 년 뒤에 갑자기 아내가 특별한 해외여행을 제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여행이란 ‘1~2주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해보는 여행’입니다. 사실 이런 형태의 여행은 저도 꿈꾸고 있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파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유있게 여행을 즐기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그곳 사람들도 사귀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런 여행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예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고 세계 각지를 떠도는 여행에 나선 것입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들이 이런 여행에 나선 배경에는 나이가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어치피 나이가 더 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는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때가 되면 편안히 쉴 시간이 차고 넘칠 터였다.(34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나이는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제로 3개월을 지낸 멕시코나 1개월을 지낸 파리 같은 곳에서는 현지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다른 지역에서는 단기여행자처럼 스치듯 지나간 곳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런 형태의 여행을 생각한 두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읽다보면 저자의 친정아버지가 퇴직을 하고서 집을 처분한 다음에 7년 동안 해외를 떠돌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친정아버지는 인터넷도 없을 때라서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누구와 나누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리스본의 타호강변에 세워진 대항해탑은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바스코 다가마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기념비라고 적고 있는 것은 옥의 티가 아닐까 싶습니다. 리스본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별 목적 없이 여기저기를 느긋하게 거닐면서 그 나라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328쪽)’이라고 적은 것처럼 두 사람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의 비중이 큰 것도 여행의 기획의도와는 크게 다른 점이라고 보여서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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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지중해지역원 인문총서
류정아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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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과 화산활동은 지각을 이루는 판들의 경계에서 활발하다고 합니다. 판이 엇갈려 밀려들어가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지구상에 명멸했던 문명들도 서로 접촉을 하면서 영향을 미쳤는데, 평화롭게 교류를 할 때도 있고, 전쟁이라는 충돌을 빚을 때도 있었습니다.

 

지중해지역은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만나는 곳으로 지진과 화산활동이 활발한 곳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명들이 명멸하는 가운데 숱하게 부딪힌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중해지역원이 내놓은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은 머리말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다소 복합적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포함하는 내용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사뭇 광범위하다. 헬레니즘의 고대 그리스, 성경을 중심으로 한 헤브라이즘의 고대 근동, 남부 프랑스 골 지역의 언어에서 보이는 고대 그리스, 히브리, 로마, 게르만 인들 간의 문화적 교류와 전쟁의 영향, 중세 동지중해 비잔티움제국의 군사조직과 관료주의의 발달과정, 현대지중해의 한 모서리에서 일어나는 아랍세계의 갈등 등을 한 자리에 모았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전쟁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는 권력 추종자들 간의 게임, 부에 대한 유혹, 문화전파의 야욕등으로 보는 견해와 인간의 ‘맹목적인 자영충돌’, 즉 먹이나 암놈을 차지하기 위해서 또는 남성호르몬 때문이라는 견해를 소개합니다. 2장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나 역사서술에 등장하는 전쟁의 발발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와 중세 비잔티움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조직이 확대해간 과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역사>와 <노동과 나날>, 히브리인의 성경,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투키디데스의 <역사>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특히 투키디데스가 전쟁을 인간 삶의 과정이나 제국주의의 확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단념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음을 지적하고, 과도한 욕심이나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나친 힘의 결집과 그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전쟁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3장에서는 고대 및 중세 골지역 - 지금의 프랑스가 중심이 되는 지역입니다-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혼효현상(‘갈피를 잡을 수 없게 어지러이 뒤섞이는’현상)을 살펴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여러 민족 및 문화가 언어의 교류는 전쟁보다는 상업과 같은 평화적 교류에서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언어는 사용하는 종족의 세력에 따라서 우세하게 되거나 사라졌을 것입니다. 4장은 현대의 중동사태를 다루었습니다. 전쟁과 갈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이 고대에서 중세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면 다소 이질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지중해에 관한 책들을 내놓고 있는 지중해지역원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고 있는 ‘인문한국’사업 가운데 ‘해외지역학 연구’를 위하여 부산외국어대학교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외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이 분야의 연구를 하시는 분들을 집중 지원하는 사업이 일찍 시작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각 지역원에서 얻은 연구성과를 전문가들끼리만 공유하지 않고 일반인들을 위한 책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참 잘하고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고 리뷰를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기회가 생긴 것도 제게는 보람이 되겠습니다.

 

4장 ‘현대 아랍세계의 갈등과 전쟁’에서 다루고 있는 이슬람 사회에 내재된 분쟁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이슬람분쟁의 변인으로 이슬람원리주의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은 초기 이슬람의 순수한 유일신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으며, 초기 이슬람의 원리와 정신을 복원하고 이슬람사회의 정화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꾸란과 예언자의 순나, 그리고 초기 이슬람공동체의 생활상은 무슬림들에게 있어 열망으로 자리 잡고 있다.(288쪽)”라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이슬람사회가 서구문명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변질되면서 이슬람의 전통이 오염되었다고 보는데서 시작된 것으로 서구문명은 물론 변질된 이슬람사회에 대하여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분쟁의 단초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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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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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가 그림인 것 같습니다. 그림을 잘 아는 분의 설명을 들으면 아 그렇구나하면서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 아는 만큼은 작품의 배경에서부터 그림을 그린 기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 역시 공부를 많이 해야 그만큼 더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무서운 그림>은 제목이나 부제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인지 집어들었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무엇을 담고 있었습니다.

 

모두 스무 점의 그림에 담긴 섬뜩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다른 그림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작품도 있지만, 처음 대하는 그림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림들 가운데는 틴토레토의 <수태고지>에 곁들이고 있는 프라 알젤리코의 <수태고지>, 고야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뒤즈 호의 뗏목>처럼 직접 보고 기억하는 작품도 있는가 하면, 그림이 걸려 있는 프라도 미술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지 못했거나 볼 시간이 없었던 그림도 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태고지의 경우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틴토레토의 수태고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고, 지금도 서울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운보의 성화전시에서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태고지를 그리는데 몇 가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로는 대천사 가브리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성모마리아는 붉은 색 옷을 입는 경우가 많으며, 비둘기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타고 마리아의 머리 혹은 가슴을 향하는데, 수태의 순간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태고지의 모습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천사의 방문에 놀라는 마리아, 수태하리라는 말을 듣고는 당혹스러워하는 마리아, 그리고 마침내는 이를 수긍한 순간의 마리아를 이어서 그린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수태고지 역시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운보의 수태고지 역시 한국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시간이 없어 챙겨보지 못한 산드로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한편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네 개의 패널로 그려진 연작의 그림은 단테의 신곡에 빗대어 인곡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던 소설집 <데카메론>에 나오는 다섯 번째 이야기가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신분이 높은 가문의 여인을 사랑한 남자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귀신들이 벌이는 복수극을 보고서 이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결혼승락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림입니다.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의 경우는 고야의 그림과 루벤스의 그림이 모두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데, 고야의 그림은 보았지만, 루벤스의 그림은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든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인데, 카오스에서 태어난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자신의 아들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교접하여 거신 크로노스를 낳았는데, 우라누스의 폭압에 분개한 가이아가 크로노스를 사주해서 우라노스를 거세해 죽이고 신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우라누스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너도 네 자식의 손에 죽을 것이야”라는 말이 거슬려서 누이동생이자 아내였던 레아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집어삼켜버렸다는 것입니다. 크로노스는 결국 제우스에게 살해를 당하고 마는데, 그때까지 크로노스가 삼켰던 제우스의 형제들을 뱉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야의 그림처럼 아이의 몸뚱이가 으스러지고 있다면 그나마 다시 살아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오리잡 넓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도 역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면 분명 무서운 그림 맞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을 혹시 볼 기회가 있다면 저자의 설명을 유념하여 감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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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죽음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왕록 옮김 / 책미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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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지난해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스페인 여행길에 투우장에 제일 가깝게 가본 것은 론다입니다. 론다의 느낌을 적는데 아무래도 투우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을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는데 여행작가 박정은씨가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론다를 소개하면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에세이집 <오후의 죽음>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허니문이나 애인과의 도주가 론다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파리에 가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낳다.”(박정은 지음, 스페인 소도시 여행, 151쪽; http://blog.joins.com/yang412/13552146)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여름방학을 바쳐서 헤밍웨이전집을 읽어내느라 더위를 잊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헤밍웨이가 투우에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사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투우를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투우장 구경을 할 수는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준비가 덜 된 여행이었던 탓에 론다에서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6유로를 내면 투우장과 투우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데, 우리의 가이드도 귀띔을 해주지 않아서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 투우를 구경하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해봅니다. 헤밍웨이는 “처음으로 투우 구경을 하러 갔을 때, 나는 몸서리를 치게 되리라고 또 아마도 구역질이 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9쪽)”라고 하는데, 저도 그럴까요? 그의 말대로 투우는 확실히 잔인한 구석이 많고, 스스로 구하는 것이건 예측하지 않은 것이건 간에 언제나 위험이 있으며 항상 죽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가 투우에 매료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죽음이 있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폭력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유혈이 낭자하게 펼쳐지는 투우장에서 피에 대한 욕구가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헤밍웨이 역시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사람들, 곧 거의 직업적으로 개나 그 밖의 짐승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쉽사리 동물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인간에 대하여 더 심한 잔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5쪽)”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오후의 죽음>을 ‘투우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우를 종합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투우에 관한 모든 것, 투우의 역사에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겁에 질린 투우사가 소에게 떠받쳐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상세하게 적으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까지 분석하기도 합니다. 가장 볼 만한 투우는 노비야다 투우이고, 그것을 보는데 가장 좋은 곳이 마드리드라는 것도 알려줍니다. 심지어는 투우를 구경하는 자리 가운데 으뜸이 투우사들이 망토를 걸쳐놓는 붉은 나무 울타리, 즉 바레라라는 것도 알려줍니다.

 

그런데 투우를 한번만 구경하려는 사람이라면 바로 론다가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혹은 누구와 함께 도망칠 때 꼭 갈만한 곳이다.’라고 하면서 ‘여기서도 신혼여행이나 사랑의 도피행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파리로 떠나거나 아마 각기 헤어져 새로운 배필을 구하는 것이 더 좋을 것(62쪽)’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보증수표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박정은 작가께서 헤밍웨이를 조금 오해하신 바가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오후의 죽음>을 읽고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본격적으로 투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는 생각은 분명한데, 투우 전문용어를 풀이한 100쪽은 그렇다고 쳐도 원본에 포함되어 있다는 100쪽에 달하는 사진과 설명을 통째로 빠트리는 바람에 투우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더하여 ‘한국 번역문학의 거장, 장왕록 서울대 교수의 번역’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번역 문투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지금 연재하고 있는 스페인 여행기(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에서는 읽어보실 것을 권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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